제30화. 발 없는 말이 비수가 되어 꽂힐 때 (5)
내 척수반사같이 튀어나온 협박에 아라드리네는 멈칫했다.
“할머니! 도망쳐요! 이놈들 할머니를 알아요!”
네드리안이 외치자 아라드리네의 표정이 험악하게 일그러졌다.
큐어드 마스터를 본 순간 역시 이렇게 될 줄 알았다.
저 할머니도 디벳과 마찬가지로 온갖 독극물을 사용할 줄 아는 괴물이었다.
심지어 디벳은 딸 부부와 손녀를 잃었다는 죄책감에 마약을 해서 약해졌지만 아라드리네는 아니었다.
전성기 그대로의, 아니 어쩌면 무력적 측면에서는 지금이 전성기일지도 몰랐다.
젊었을 때는 그저 호신술 정도였지만 지금은 생존을 위한 기술을 많이 개발했을 테니까.
아라드리네가 손가락을 살짝 움직이자 나는 바로 외쳤다.
“움직이지 말랬지!”
내 외침과 동시에 프레시아는 단검을 네드리안의 목에 더 가까이 가져다 댔다.
“아, 알았다! 움직이지 않으마!”
제길, 아라드리네가 없을 때 설득을 끝내고 큐어드 마스터를 끌어들일 생각이었는데 일이 꼬였다.
“움직이지 말고 잘 들으세요. 저흰 독원과 관계없는 사람입니다.”
내 말에 아라드리네는 미간을 좁히며 물었다.
“그 말을 믿으라고?”
당연히 믿을 리가 없었다. 나 같아도 안 믿는다.
“뭐, 지금 상황에서 믿기 힘든 건 알지만 먼저 저희를 공격한 건 손녀분이라서요. 어쩔 수 없이 제압한 것뿐입니다.”
내 말에 아라드리네는 말 같지 않은 소리 하지 말라는 듯이 바라보며 말했다.
“그럼 내 손녀를 풀어줘라.”
그녀의 요구에 나는 난감해했다.
“당신이 이 타이밍에 오지 않았다면 금방 풀어 줬겠지만 지금은 안 됩니다.”
내 대답에 아라드리네는 콧방귀를 뀌었다.
“흥! 그러시겠지.”
“믿지 않는 것도 당연하죠. 하지만 풀어주는 순간 이야기는 듣지도 않고 저희를 죽이려 들 게 뻔한데 어떻게 인질을 안 잡습니까?”
“흥…!”
여전히 내 말은 귓등으로도 안 듣고 있었다. 나는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믿지 않으실지 모르겠지만 저는 포이즌 마스터 디벳 파비부의 의뢰로 손녀분을 찾기 위해 왔습니다.”
내 입에서 디벳의 이름이 나오자 한층 경계가 심해졌다.
“디벳이 너희만 보냈을 리가 없다! 그의 성격이면 자기가 직접 찾아오지!”
“예, 그래서 같이 왔습니다.”
“뭐?”
나는 얼빠진 표정을 짓는 아라드리네를 경계하며 의자에 누워 있는 디벳을 툭툭 건드렸다.
“영감님! 영감님! 일어나 봐요.”
깨워보려 계속 건드렸지만 미동도 없었다.
“이봐요! 야! 야! 야, 이 망할 영감탱이야! 당장 안 일어나!? 빨리 일어나서 댁 동문 좀 설득해 봐!”
나는 디벳의 멱살을 붙잡고 흔들다가 바닥에 질질 끌며 디벳의 얼굴을 아라드리네가 볼 수 있게 했다.
“자, 보세요! 이 영감님이 포이즌 마스터 디벳 파비부입니다!”
디벳의 얼굴을 본 아라드리네는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이 날 바라봤다.
“지금 이 비쩍 곯은 노인을 디벳이라고 하는 거냐?! 디벳은 선풍도골(仙風道骨)의 선이 굵은 미남이다!”
아라드리네는 디벳을 알아보지 못했다.
하기야, 재활 치료를 한 시점인 소설 속에서도 한눈에 알아보지 못했는데 한창 후유증에 시달리고 있는 중인 디벳을 알아볼 리가 없었다.
“이 영감님이 마약에 손을 대서 그래요. 할머니도 생각해 보세요, 자기 탓에 딸 부부가 죽고 하나뿐인 손녀가 실종됐는데 정신이 멀쩡하겠습니까? 당연히 피골이 상접했죠!”
“디벳이 마약에 손을 대다니!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라! 그는 그런 거에 손대는 신념 없는 녀석이 아니야! 그를 모욕하지 마라!”
아라드리네의 헛소리에 나는 이마를 짚었다.
“아니, 이 괴팍한 영감탱이가 할머니 첫사랑인 건 아는데 너무 미화가 심한 거 아닙니까?”
“처, 첫사랑이라니! 누, 누, 누가 그런 헛소리를 하던가!”
내 말에 아라드리네는 얼굴을 붉히며 항의했다. 나는 그런 그녀를 보며 한심하게 쳐다봤다.
“지금 본인이 온몸으로 말씀하고 계시네요.”
“아니다! 그런 돈에 환장한 미친놈이 뭐가 좋다고!”
그녀의 외침에 나는 무심코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그렇죠. 돈에 눈멀어서 자기가 몸담고 있는 조직도 타락시켰지, 사람 살리는 의사 주제에 사람 죽이는 독을 제일 잘 다루지, 성격은 괴팍하다 못해 쓰레기지, 좋아할 만한 점이 없긴 하네요.”
내가 동의하자 아라드리네는 오히려 당황하며 항변을 했다.
“아, 아니. 그 정도까진 아니다. 돈은 딸이 걸린 병을 치료하기 위해 모으기 시작한 거고, 독은 사람에 따라 약이 되기도 하잖나. 성격은… 성격은… 괴팍하기는 해도 쓰레기까지는….”
어려서부터 같이 자란 동문이자 첫사랑도 성격은 차마 옹호하지 못했다.
“영감님! 영감님! 일어나세요!”
내가 뺨을 때리자 아라드리네는 날 말렸다.
“이보게! 아무리 마음에 안 들어도 그렇지 딱 봐도 마력으로 제압된 사람이 그렇게 해서 깨어나겠나?”
아하, 프레시아가 기절시킬 때 마력을 불어넣어서 이렇게 안 일어나는 거였구나.
어쩐지 목을 조른 것치고 너무 빠르게 기절하더니만.
“내가 깨워주겠네.”
“움직이지 말라고 했잖습니까!”
아라드리네가 움직이려 하자 나는 기겁하며 외쳤다.
내 외침에 프레시아는 제압당한 네드리안을 일으켜 세우며 위협적으로 단검을 목에 대었다.
“도련님의 지시에 따르세요!”
“아, 알겠다! 움직이지 않을 테니까!”
반쯤 울상이 된 아라드리네는 어이가 없어 물었다.
“그런데 자네들 손녀를 찾으러 온 것 아닌가? 그런데 이렇게 인질로 잡고 위협을 하니 이해가 안 된다만.”
그녀의 물음에 프레시아가 단호하게 대답했다.
“당신의 손녀는 감히 도련님을 죽이려 했습니다. 이는 즉결 처형당해 저잣거리에 효수돼도 할 말이 없는 중죄입니다. 당장 죽이지 않는 것만으로도 감사해 하십쇼.”
뭐, 왕족 시해 미수가 그 정도 중죄기는 하지.
“물론 죽일 생각은 없습니다. 디벳 영감님한테 무슨 소리를 듣겠다고 죽이겠습니까. 이 영감탱이가 성격은 그래도 약제술 실력 하나는 끝내 주잖아요. 프레시아, 이 영감님 어떻게 깨워?”
“마력이 담긴 주먹으로 때리면 깨어납니다.”
“그냥 강하게 때리면 된다는 소리군.”
“맞습니다.”
프레시아의 긍정에 나는 식자재 창고에서 술병을 꺼내 디벳의 머리를 후려치려 했다.
“잠깐! 정말 그렇게 무식한 방법으로 깨우려고?”
“예, 이 영감님이 아무리 마약에 절었다고 해도 포이즌 마스터씩이나 되는 사람이니 이 정도로는 안 죽을 겁니다.”
무의식이 마력을 움직여 자연스럽게 막을 테니 걱정은 없었다.
내 대답에 아라드리네는 다급하게 외쳤다.
“그건 알지만! 잠깐! 내가 깨우는 방법을 알려주마!”
나는 그녀의 말에 술병을 내리며 대답했다.
“말로만 설명하세요. 움직이면 손녀분을 죽이지는 않겠지만 험한 꼴은 면치 못할 겁니다.”
내가 못 믿겠다는 투로 말하자 아라드리네는 속이 답답한지 얼굴이 울그락불그락해졌다.
“후우-! 알았다. 상태를 보아하니 검지에 마력을 모으고 목젖에서 오른쪽으로 1센티미터, 위로 3센티미터 위치를 찌른 다음 뒤에서 복부를 압박하듯 당기면 일어날 거야.”
“음, 이렇게요?”
내가 손가락에 마력을 모으자 아라드리네는 한심하다는 듯이 혀를 찼다.
“더 모아야 한다.”
“하압!”
최대한 마력을 모으자 아라드리네는 불만족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더럽게 힘든데요.”
“재운 사람이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마력이 강해서 최소한 그 정도는 필요해.”
나는 한숨을 내쉬며 손가락의 마력을 풀었다. 그러고는 창고에서 밧줄을 꺼내 디벳을 묶기 시작했다.
“그는 왜 묶는 거냐?”
“왜긴요? 상처 없이 멀쩡히 깨어났을 때 저 꼴을 보면 난리칠 게 뻔하지 않습니까.”
내가 프레시아와 네드리안 쪽으로 고갯짓하자 아라드리네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자가 디벳이라면 확실히 그렇겠구나.”
아직도 이 영감탱이가 디벳이란 걸 믿지 못하는 건지, 아니면 믿고 싶지 않은지 애매한 태도를 보였다.
디벳의 손과 발을 단단히 묶은 나는 아라드리네가 시킨 대로 디벳을 깨우려 했다.
“잠깐.”
아라드리네가 날 멈춰 세우자 나는 그녀를 바라봤다.
“왜 그러십니까?”
“내가 알려준 방법을 그대로 믿고 실행한다고? 그자가 위험할 거라고 생각하지 않느냐?”
아라드리네의 물음에 나는 피식 웃었다.
“당신이 디벳 영감님에게 해가 될 방법을 알려주진 않았을 테니 믿습니다. 그래도 죽는다면 이 영감님은 기꺼이 죽어야죠. 자기 목숨처럼 생각하던 손녀분을 구해준 사람인데.”
내 대답에 아라드리네는 놀랐는지 동그래진 눈으로 날 바라봤다.
나는 그런 큐어드 마스터를 보며 웃음기를 지웠다.
“그래도 디벳 영감이 죽는다면 전 당신을 죽일 겁니다. 이 영감님은 지금 제게 필요한 사람이니까요. 저희가 인질을 잡았다고 당신을 죽일 힘이 없다고 착각하지 마십쇼. 저희가 인질을 잡은 건 어디까지나 주변의 무고한 사람들이 피해를 입지 않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내 시선에 아라드리네는 흠칫하며 몸을 잘게 떨었다.
나는 다시 그녀에게 싱긋 웃어 보이고는 바로 디벳을 깨웠다.
“흐읍! 허억! 허억! 뭐지? 여긴 어디지?”
디벳은 여기가 어딘지 기억을 못 하고 있었다.
갑자기 기절해 버린 탓인가?
하긴, 사람은 잠들기 전 4~5분 정도는 기억하지 못한다는 연구 결과도 있으니 당연했다.
양방향성 기억상실증(Mesograde Amnesia)에 걸린 디벳은 날 보며 물었다.
“너, 내 손녀가 있는 곳에 데려다준다고 했잖아. 여긴 어디지? 그리고 왜 난 묶여 있는 거지?”
“영감님을 묶은 건 저고, 일단 저분을 보시죠.”
디벳은 내가 가리킨 방향을 봤다. 아라드리네를 본 디벳은 순간 늙은 그녀를 알아보지 못했지만 이내 누군지 알아차렸다.
“리, 리네?! 아, 내 손녀를 구해준 게 아라드리네라고 했었지. 그럼 이곳이 네드리안이 있는 곳이냐! 손녀는! 내 손녀는 어디 있어?!”
나는 슬쩍 몸을 피해 가리고 있던 광경을 보여줬다.
“설마, 지금 네 호위 기사가 제압하고 있는 사람이…?”
“짜잔! 영감님 손녀입니다.”
내 발랄한 대답에 디벳은 발작하듯 화를 냈다.
“이 새끼가! 지금 누구한테 칼로 위협하는 거야!! 으윽! 이거 왜 안 풀려!”
“그야 쉽게 풀지 못하게 팔을 비틀어 고정한 다음 여러 겹으로 묶었으니까요.”
당연하다는 대답에 디벳은 버둥거렸다.
“당장 안 풀어!”
“일단 진정하시라고 묶은 겁니다.”
“안 푸냐고!”
“진정하시라고요.”
“당장 이거 풀…!”
쾅!
나는 내려뒀던 술병으로 디벳의 머리를 내리쳤다.
그러자 이 공간에 있는 모두가 경악한 눈으로 날 바라봤다.
“어억…!”
“이제 진정이 좀 됩니까? 설명을 들을 준비가 안 됐으면 또 지랄해 보세요. 진정제 한 방 더 놔드릴 테니까.”
내가 술병을 들며 친절한 미소를 짓자 디벳은 이마에서 피 한 방울을 흘리며 날 미친놈 보듯 올려봤다.
“…넌 노인 공경도 모르냐?”
“그게 뭡니까? 먹는 겁니까? 노인 공격은 아는데요.”
괜히 내가 유교 브레이커 안유안이라고 불린 게 아니다.
“그리고 혹시라도 엄살 부릴 생각은 하지 마십쇼. 그냥 살갗 조금 찢어진 게 다인 거 압니다.”
내 경고에 디벳은 한숨을 내쉬었다.
“진정했으니까 설명해 봐라.”
정말로 진정된 것 같았다.
“원래는 영감님 손녀분이랑 시간을 들여 천천히 친해진 다음 영감님의 정체가 디벳이란 걸 조금씩 흘려서 저쪽에서 접근해 오도록 하려 했습니다. 큐어드 마스터도 오랫동안 당신을 찾고 있었거든요.”
“그런데?”
“그런데 마침 큐어드 마스터가 장기간 자리를 비웠다고 하더군요. 손녀분 혼자라면 그렇게 시간을 질질 끌 필요 없이 제압한 다음에 영감님이 할아버지란 부정할 수 없는 증거들을 내밀어 설득하는 게 더 빠르고 편하잖습니까. 영감님의 성급한 성격을 생각해도 그편이 징징거리는 걸 듣지 않아서 더 좋고요.”
내 말에 디벳은 불만 가득한 눈으로 날 바라봤다.
“…인정하기 싫다만 인정하마. 그래서?”
“그래서 딱 손녀분을 제압한 순간 큐어드 마스터가 장기간 외출을 마치고 돌아왔지 뭡니까.”
내가 생각해도 참 재수가 없었다.
“일단 큐어드 마스터와 대화란 걸 하려면 영감님 손녀분을 인질로 잡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아니었으면 독을 뿌리고 손녀분을 데리고 도망쳤을 테니까요.”
나는 그렇게 말하며 아라드리네를 흘끔 바라봤다.
급격히 변한 디벳을 보며 아직도 반신반의하는 모양이었다.
그래도 이제는 인질이 없어도 대화는 충분히 할 수 있어 보였다.
“프레시아, 이제 손녀분을 풀어줘.”
“…알겠습니다.”
프레시아가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네드리안을 풀어주자 네드리안은 아라드리네의 뒤로 재빠르게 도망쳤다.
“손녀분의 왕족 시해 미수는 없던 일로 하겠습니다.”
“왕족?”
네드리안과 아라드리네는 당황해서 날 바라봤다. 나는 장난스레 웃으며 날 가리켰다.
“예, 저 왕족이거든요. 영감님, 이 정도 상황을 만들어 드렸으면 대화로 풀어 가실 수 있으시죠?”
내 물음에 디벳은 살짝 겁먹은 표정을 지었다.
“가는 거냐?”
막상 손녀와 다시 대면하려니 걱정이 되는 모양이었다.
심지어 자신이 축출한 아라드리네까지 있으니 원망을 들을까 봐 더더욱 두려운 모양이었다.
“제가 있으면 못 할 이야기도 있을 거 아닙니까. 그리고 저 바쁩니다.”
나는 힘내라고 윙크를 하고는 프레시아를 데리고 밖으로 나갔다.
의도한 상황은 아니었지만 나쁘진 않았다.
이제는 후회하는 노인이 과거를 딛고 용기를 낼 시간이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