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엑스트라 왕자는 세계정복을 시작한다-29화 (29/214)

제29화. 발 없는 말이 비수가 되어 꽂힐 때 (4)

나는 충성을 맹세하는 길버트를 보며 식자재 창고에서 고급스러운 길쭉한 상자와 붉은 휘장을 꺼냈다.

“원래라면 격식을 갖춰야 하지만 내 사정이 그리 좋지 못해서 서임식은 간단하게 하자.”

솔직히 말하자면 딱히 하지 않아도 괜찮았지만 그래도 길버트의 꿈이 이루어지는 순간이니 기념 정도는 해도 좋을 것 같았다.

원래 길버트가 가졌어야 할 시조의 유산을 내가 꿀꺽한 게 미안해서는 아니었다.

그럼그럼, 순전히 길버트를 위한 거였다. 아바스엘에게는 이런 거 없이 그냥 줬지만 뭐 어때.

프레시아가 내게서 휘장을 받아 길버트의 어깨에 두르고 왕가의 문양이 새겨진 브로치로 고정했다.

“길버트 아산은 무릎을 꿇고 왕명을 받들라.”

내 말에 길버트는 내 앞에 무릎을 꿇었다.

왕실 기사는 무조건 왕명에 의해 내려지는 것이기에 내가 왕명을 언급한 건 딱히 반역은 아니었다.

물론 반역이어도 여기서 신고할 사람은 없겠지만.

나는 상자에서 난쟁이가 만든 검을 꺼내며 물었다.

“그대는 충의와 신의로 왕실과 왕국을 위하겠는가?”

“예! 위하겠습니다!”

이어서 검집에서 검을 뽑으며 물었다.

“그대는 명예를 알고 불의에 맞서겠는가?”

“맞서겠습니다!”

뽑은 검을 길버트의 어깨 위에 놓으며 물었다.

“그대는 위대한 태양과 잔혹한 달 앞에서 주군에게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치겠노라 맹세하겠는가?”

“맹세합니다.”

그의 맹세에 나는 선언했다.

“나, 듀플리온의 적장자. 유안 델 아즈데미안 듀플리온은 모든 생명의 아버지인 태양과 모든 휴식의 어머니인 달 앞에 선언하오니, 경의 충심에 신의성실을 다하여 보답할 것이다.”

내 본명을 들은 길버트는 놀란 토끼 눈으로 날 바라봤다.

나는 검을 거두어 검집에 넣고는 길버트에게 검을 건넸다.

“나, 듀플리온의 적장자. 유안 델 아즈데미안 듀플리온이 듀플리온의 위대한 통치자 카시멜 델 쥬드메리안 듀플리온을 대리하여 길버트 아산에게 기사직을 서임하니, 경은 검을 받들어 세상의 정의를 바로 세워라.”

길버트는 긴장했는지 떨리는 손으로 검을 받아 들었다.

“앞으로 잘해 보자고. 기사 양반.”

내가 장난스럽게 말하자 그가 벌떡 일어나 경례를 했다.

“네! 충성을 다하겠습니다!”

딱딱하기는. 내가 긴장 풀라고 등을 때리며 웃자 지켜보던 디벳은 아직도 불신에 가득 찬 눈으로 날 바라봤다.

“너 진짜 왕자냐?”

“그런데요.”

“신분패도 진짜고, 저 브로치 문양도 진짜고, 검도 보통 검이 아닌 것 같긴 한데… 너도 진짜 왕자라고?”

저 검은 원래 왕후가 왕자에게 생일 선물로 주려고 한 거니까 보통 검이 아니긴 했다.

물론 내가 중간에 슬쩍했지만 말이다.

“그 검, 아공간 수납 마법이 있어서 이 팔찌랑 세트야.”

나는 상자 아래 숨겨져 있던 투박한 팔찌를 꺼내 길버트에게 건넸다.

아공간이라고 해봐야 검 한 자루 들어가면 꽉 차는 작은 크기였지만 누가 봐도 비싸 보이는 검을 들고 다닐 필요가 없다는 점은 메리트가 컸다.

길버트가 아공간에 검을 집어넣으며 신기해하자 나는 창고에서 잊혀진 군수품 중 검 한 자루를 꺼내 건넸다.

“오랫동안 안 써서 손질이 안 됐지만 보관 환경이 좋아서 기름 닦고 날만 세우면 쓸 만할 테니 평소엔 이걸 써.”

군수품이 보관된 비밀 공간은 무언가를 보관하기 좋게 습도와 환기를 위한 마법진이 설치되어 있었다.

아마 어음을 장기 보관하기 위해서였을 거다.

실제로 120년이나 지났는데도 어음은 세월에 겉만 조금 누레졌을 뿐 멀쩡했다.

“감사합니다. 왕자님!”

새로운 검이 두 자루나 생기니 기분이 좋아진 모양이었다.

“자, 그럼 내가 내리는 첫 번째 명령이다.”

“하명하십쇼!”

“지금부터 날 부르는 호칭은 도련님이다.”

“아…!”

길버트는 아쉬워하면서도 왜 그런 명령을 내렸는지 알 정도의 머리는 되는 듯했다.

“그리고 두 번째 명령은 내가 며칠 뒤 다시 올 때까지 일 나가지 말고 네 동생을 간병하며 함께 시간을 보내. 앞으로 나와 함께 움직이려면 당분간 동생 얼굴 보기 힘들어질 테니까. 이번이 마지막 휴가라고 생각해라.”

“예!”

길버트는 활기차게 대답했다.

길버트의 세상 물정 모르는 얼굴을 보니 내가 순진한 애 등쳐먹는 악덕 업주같이 느껴졌다.

하지만 당분간 동생 얼굴도 못 보는 건 사실인데 어쩌랴.

누가 칼 들고 나한테 몸을 저당 잡히라고 협박했냐?

아, 내가 동생 치료제로 유혹했었던가?

뭐 어때, 좋은 게 좋은 거지.

* * *

다음 일정은 당장이라도 손녀의 위치를 알려달라고 내 멱살을 붙잡고 싶어 하는 디벳을 데리고 디벳의 손녀를 만나러 가는 거였다.

“다시 한번 말하는데 영감님은 입도 뻥긋하지 마세요. 괜히 흥분해서 성급하게 달려들었다가 큐어드 마스터에게 교육 받은 대로 뒤도 안 보고 도망가면 저도 못 찾아요. 아니, 안 찾아 드릴 거예요.”

“크흠…!”

내 경고에 디벳은 불만인 듯 헛기침 소리를 내었다.

하지만 큐어드 마스터 또한 독원의 암살 리스트 상단에 매겨져 있어 몸을 사리는 것 정도는 그도 잘 알고 있었다.

나는 소설 속 묘사를 떠올리며 시장 거리를 가로질렀다.

묘사대로라면 멀리서 강을 가로지르는 대교(大橋)가 보이는 위치에서 시계방을 끼고 10미터쯤 들어가면 보이는 골목의 담배 가게가 큐어드 마스터가 운영하는 곳이었다.

수도를 가로지르는 강에는 총 다섯 개의 다리가 있었는데 동쪽에 있는 시장 거리에서 보이는 다리는 하나뿐이었다.

다리가 보이자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시계방을 찾았다.

수십 개의 시계가 전시되어 있는 시계방을 어렵지 않게 찾은 난 골목을 끼고 안으로 들어갔다.

“여깁니다.”

내가 녹슨 철판에 ‘담배’라고 적힌 작은 가게를 가리키자 디벳은 미간을 좁혔다.

“여긴 길 녀석한테 일을 주는 인력소 녀석들의 단골 가게인데.”

“어? 아세요?”

“그 땍땍거리는 인력소 놈들이 여기 담배 가게 아가씨가 새침데기라고… 그 새끼들 죽여 버리겠어!”

디벳이 갑자기 흥분해서 강변 쪽으로 달려가려는 걸 나와 프레시아가 붙잡았다.

“진정하세요! 영감님!”

뭔 마약 후유증에 골골거리는 노친네가 이렇게 힘이 세!

“지금 진정하게 생겼어!?”

“그 사람들도 영감님이 가족이란 거 모르고 한 농담 아닙니까!”

거친 일을 하는 아저씨들 입에서 나오는 농담이야 뻔할 테니 화내는 이유는 짐작이 갔다.

“모르면 해도 되냐?!”

“안 되긴 하지만! 그럼 그때 화내시지 왜 지금 와서 지랄이십니까!”

“아! 몰라!”

“안 되겠다! 프레시아! 이 영감님 좀 기절시켜!”

“예! 도련님!”

프레시아는 디벳의 목을 졸라 단숨에 기절시켰다.

“후우! 이 망할 영감탱이, 나중에 그 사람들 식사에 독 타는 거 아닌가 모르겠네.”

“설마 그럴까요?”

프레시아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기절한 디벳을 업었다.

“하긴, 그 사람들이 이 영감님 단골손님이기도 한데 설마 죽이겠어? 기껏해야 설사약 좀 타고 말겠지.”

디벳은 지금까지 상처에 잘 듣는 연고와 감기약을 주로 팔아 생계를 유지해왔다.

당연히 거친 일을 하는 인력소꾼들이 주요 고객일 수밖에 없었다.

디벳이 길버트와 알게 된 것도 아마 그 덕분이겠지.

그나저나 기절해서 그런지 더럽게 무겁네.

나와 프레시아가 웃으며 떠들자 담배 가게 안에서 미닫이문을 벌컥 열며 한 여자가 신경질적으로 소리쳤다.

“대낮부터 시끄럽게 누가 소란이야!”

우렁찬 목소리와 함께 기가 세 보이는 미인이 나오자 나는 싱긋 웃었다.

“아, 죄송합니다. 지금 영업하나요?”

“음… 손님이야?”

“예.”

“들어와.”

내가 고성방가 민폐범에서 고객으로 바뀌자 그녀는 태도를 누그러트렸다.

안으로 들어가자 나는 손님용 의자에 디벳을 던지듯이 눕혔다.

“아이고, 무거워라.”

그거 옮겼다고 땀이 나길래 소매로 대충 이마를 훔치며 내부를 살폈다.

작다 못해 비좁기까지 한 담배 가게에는 각종 담배 파이프와 다양한 품종의 말린 담뱃잎은 물론, 크기가 다른 궐련들도 시가 케이스에 담겨 줄지어 놓여 있었다.

이 정도로 전문적인 담배 가게는 처음 봤다.

“어느 담배를 찾아? 코로호산? 크리오요산? 외국 것도 있어, 산안드레아스나 수미트라산 담뱃잎도 잘나가지. 여성분이라면 파이프보다는 궐련을 추천해, 궐련은 향을 첨가하기 쉽거든. 아, 초심자라면 짧은 쁘띠 코로나가 좋겠네.”

네드리안은 시가 커터와 불붙은 양초를 꺼내며 말했다.

“처음 온 손님이니까 특별히 한 개비 정도는 시향하게 해줄게, 골라봐.”

“아니, 괜찮습니다.”

나는 술은 좋아하지만 담배는 좋아하지 않는다.

“담배 말고 다른 걸 사러 온 거거든요.”

“담배 말고? 담배 가게에서?”

내 말에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이 날 바라봤다.

“여기 담배 말고 약재도 팔지 않습니까?”

“아하, 약재. 확실히 여기가 처음엔 약재상이긴 했지. 그거 너무 안 팔려서 내가 담배 가게로 바꿨어. 이젠 안 팔아.”

소설 속에서는 담배와 약재 둘 다 파는 걸로 나왔었는데 이상하다.

“안 팔아요? 여기 주인 할머니가 되게 고집이 셀 텐데 바꾸게 해줬습니까?”

내가 의아해하자 네드리안은 움찔했다.

“어? 할머니를 알아?”

“잘 아는 건 아니고 약간.”

내 대답에 그녀는 뺨을 긁적이며 난처해했다.

“할머니가 알면 화내긴 한데, 그래도 어쩌겠어. 안 팔리다 못해 끼니 걱정을 할 판인데. 지금은 거의 2년 가까이 볼일 보시는 중이라 괜찮을 거야.”

과연, 네드리안이 멋대로 바꿨다는 말이군.

소설 속에선 큐어드 마스터가 돌아와서 다시 약재상으로 바꾸려 했지만 담배 가게는 이미 호황이라 바꿀 수도 없었고.

대충 그림이 그려졌다.

“주인 할머니는 출타 중이시라고요?”

“맞아. 굳이 그러실 것 없다고 내가… 아니, 내가 뭔 말을 하는 거지? 아하하하!”

그녀는 어색하게 웃으며 대충 넘겼다. 그렇군, 지금은 큐어드 마스터가 없단 말이지. 디벳을 기절시키길 잘했군.

“좀 묵은 약재라면 있긴 한데 사려면 싸게 줄 순 있어. 할머니한테 약재 다루는 법을 배워서 보관 상태도 좋고 말이야.”

나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큐어드 마스터 아라드리네가 가르쳤다면 괜찮겠네요.”

“맞아, 할…!”

네드리안은 놀란 눈으로 날 보더니 지체 없이 서랍에서 단검을 꺼내 내 목을 찌르려 했다.

굉장히 신속하고 과감했지만 프레시아를 뚫고 내게 위해를 가할 실력은 아니었다.

프레시아는 네드리안의 손목을 잡아챈 동시에 머리채를 잡고 보관 서랍 겸 테이블에 내리찍었다.

쾅!

그리고는 손목을 비틀어 단검을 빼앗은 뒤 팔을 뒤로 꺾고 목에 단검을 들이밀어 제압했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에 나는 감탄을 금치 못했다.

“와우, 구해준 건 고마운데 아프겠다. 살살해.”

“감히 도련님께 위해를 가하려고 한 자입니다. 아무리 영감님 손녀분이라 해도 용서할 수 없습니다.”

암살자 사건 이후로 보다 내 안위 문제에 더욱 날이 서 있는 느낌이었다. 나에겐 좋은 일인가?

“괜찮아. 네가 지켜줄 텐데 뭐. 아, 그렇다고 설득이 끝나기 전에 구속을 풀진 말아줘.”

도망치면 귀찮아진다.

“일단 가게 문부터 닫을까.”

손님이 왔을 때 지금 상황을 보면 강도로밖에 보이질 않을 것 같다.

내가 가게 문을 잠그려 몸을 돌린 순간 웬 할머니가 들어왔다.

“네드리안! 내가 없던 사이 담배라니 이게 무슨…!”

갑자기 들어온 할머니는 어딘가 귀족 집안의 귀부인같이 단아하고 정돈된 얼굴이었다.

그런데 방금 이 할머니가 네드리안의 이름을 불렀던가?

“너희 뭐야! 내 손녀에게서 떨어져!”

젠장! 망했다! 역시 큐어드 마스터잖아!

나는 큐어드 마스터가 움직이기 전에 외쳤다.

“움직이지 마! 손끝 하나라도 움직이는 순간 손녀 모가지 떨어진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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