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8화. 발 없는 말이 비수가 되어 꽂힐 때 (3)
내 말에 디벳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내게 달려들 기세로 다가왔다.
“뭐라고! 네드리안을 찾았다고! 어디냐! 잘 살고 있어!? 혹시 무서운 일을 당하지는 않았겠지?!”
내 어깨를 잡은 덜덜 떨리는 영감의 손은 수전증을 앓고 있는 것치고 꽤나 악력이 강했다.
“진정하시죠. 아직 진짜 손녀분인지는 확인 안 됐습니다.”
“확인도 안 하고 찾았다고 한 거냐!”
버럭 소리치는 디벳을 보며 나는 어깨를 으쓱였다.
“영감님 손녀인 걸 확인하려면 가슴 밑의 문양과 등 뒤의 흉터를 봐야 하는데 갑자기 찾아가서 옷 좀 벗어달라고 할 순 없지 않습니까. 그래도 거의 확실합니다.”
“그, 그건 그렇다만… 잠깐, 네가 그걸 어떻게 아는 거냐? 난 말해 준 적이 없다만.”
디벳은 흥분을 가라앉히며 날 노려봤다. 영감의 반응에 나는 피식 웃었다.
“영감님 정체는 영감님이 말해줘서 알았습니까? 찾아 드리겠다고 했으니까 여러모로 조사를 한 거죠.”
“으음…!”
그는 내 대답에 못마땅하다는 듯이 날 바라봤지만 곧 어쩔 수 없다는 듯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서 네드리안은 어디에, 어떻게 지내고 있더냐? 무사는 한 거지?”
초조함을 숨길 수 없는 목소리에 나는 웃었다.
“제가 찾은 사람이 맞다면 나름 잘 지내고 있더군요. 독원에서 당신을 축출하기로 결정한 날 큐어드 마스터(Cured master) 아라드리네가 당신의 가족을 구하기 위해 움직였습니다.”
“…리네가?”
디벳은 아라드리네의 이름을 듣자 현기증이 나는지 이마를 짚었다.
그의 표정은 죄책감과 후회로 가득 차 있었다.
큐어드 마스터 아라드리네는 과거 독원의 일원으로서 포이즌 마스터 디벳과 쌍벽을 이루는 약제사로 마취술의 달인이었다.
그리고 디벳이 독원을 이익을 좇는 집단으로 바꿔나갈 때 반대 파벌에서 디벳에게 대항해 끝까지 싸웠지만 결국 축출당한 인물이기도 했다.
“당신의 딸 부부는 미처 살리지 못했지만 아직 어린아이였던 손녀분은 간신히 구출해낸 모양이더군요.”
“그렇구나. 리네가….”
디벳은 아라드리네의 애칭을 부르며 착잡한 표정을 지었다.
어린 시절 같은 스승의 밑에서 동문수학한 사이니 더더욱 면목 없을 만했다.
“영감님 손녀분을 손녀로 입양한 큐어드 마스터는 독원의 눈을 피해 이곳저곳을 방랑하다가 몇 년 전에 수도에 정착해 살고 있습니다.”
“뭐!? 네드리안이 수도에 있었다고?”
등잔 밑이 어두운 법이라고 디벳의 손녀는 가까운 곳에 있었다.
“어디냐! 네드리안이 있는 곳이!”
안절부절못하는 디벳을 보며 나는 공간 확장 가방에서 약초 꾸러미를 꺼냈다.
“일단 제가 먹을 약이나 제조해 주시죠.”
“지금 약이나 만들 때냐!”
그의 항의에 나는 장난스럽게 웃으며 대답했다.
“약제사가 의뢰를 받았으면 그때가 약을 만들 때지, 그럼 언제 만듭니까. 그리고 알려드리면 어쩌실 건데요?”
“그거야….”
“손녀분은 영감님 얼굴도 기억 못 할 텐데 느닷없이 찾아가서 험악한 얼굴로 달려들 듯이 ‘내가 네 할아버지다!’라고 밝히면 ‘아이고 그렇군요! 할아버지! 보고 싶었어요!’ 하고 감격의 재회를 하겠습니까? 독원의 추격을 받는 큐어드 마스터가 잘도 그렇게 가르쳤겠어요.”
“윽!”
디벳은 정곡이 찔렸는지 울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누워 있는 애는 어쩌고요? 최소한 돌봐줄 길버트라도 남겨둬야지 않겠습니까.”
“그건 네가….”
“제가 남아 있으라고요? 장난하세요? 저도 바쁜 사람입니다.”
나는 약초 꾸러미를 떠넘기듯 건네며 말했다.
“괜히 괴팍한 성격으로 손녀분한테 헛짓해서 경계나 사지 말고 약이나 만드세요.”
“그래, 알겠다.”
디벳은 시무룩해져서 내가 불러주는 제조법을 들었다.
제조법을 들은 디벳은 언제 기가 죽었냐는 듯이 흥미로워하며 개선 방향을 제시했다.
“허약한 몸뚱이를 사람 구실 하게 개조하려는 모양인데 네 몸 상태면 개밥바라기꽃 줄기보다는 달맞이초 뿌리가 훨씬 더 나아. 마침 가지고 있는 게 있으니 그 방향으로 제조하는 게 어떠냐?”
“추천해 주신 방법으로 하죠.”
솔직히 그렇게 말해줘도 난 잘 모른다. 개밥바라기꽃은 뭔 꽃이야?
난 <겨울나무의 현자>에서 나온 내용 외에는 아무것도 모른다.
* * *
이른 오후, 점심도 거른 왕후는 아침부터 각 궁에 지급할 예산 재분배를 위해 입출금 납부서와 씨름했다.
본래 왕궁 관리 예산은 왕과 재상을 비롯한 각료 회의를 통해 1년 예산을 정하고 지급한다.
왕후는 왕궁의 유지 보수 및 관리에 드는 비용을 분기마다 나눠 각 궁의 관리 책임자에게 재배분하고 통솔하는 역할을 맡았다.
“왕후마마, 제4 궁의 지붕이 낡아서 교체해야 합니다. 부디 다른 곳의 예산을 내려주시기 바랍니다.”
“왕후마마, 제7 궁은 은제(銀製) 가구가 많습니다. 예산을 줄이면 전용 관리 용품을 구입할 수가 없으니 부디 재고를 부탁드립니다.”
각 궁의 관리인들은 주판을 움직이는 왕후에게 자신들의 예산을 깎지 말아달라고 읍소했다.
모든 궁의 관리인들이 모인 그곳에서 왕의 거처인 심궁과 아쉬운 소리를 할 필요가 없는 별궁의 관리인은 오지 않았다.
예년 같았으면 이미 연말에 예산 계획이 완료되어 그대로 집행하기만 하면 되었기에 바쁠 것도 없었겠지만 올해는 예산 집행 일정이 대차게 꼬여버린 상황이었다.
예산 계획이 꼬여버린 이유는 간단했다.
왕이 직접 예산 계획에 태클을 걸어서였다.
“으드득! 마음에 안 들어! 이게 며칠째야!”
왕은 단순히 제1 왕자 유안이 있는 별궁에 예산을 더 지급하라는 것에서 멈추지 않고 지나치게 예산이 분배되지 않았던 것을 문제 삼았다.
그러면서 지난 10년간의 별궁의 예산 집행 기록을 토대로 그동안 지급하지 않은 돈을 지급하는 것과 동시에 지급하지 않았던 돈의 행방을 밝히라 명령했다.
왕후는 당연히 예산 계획이 틀어진다는 이유로 난색을 표했지만 기록을 토대로 내린 명령이었기에 반대할 명분이 없었다.
명분 없는 왕명 거부는 반역이었기에 왕후는 그동안 착복해 온 돈을 뱉어내야 했음은 물론이고, 예산 안에서 해결하지 못했기에 친가의 돈도 끌어와야만 했다.
게다가 당분간 왕궁 관리 예산을 왕의 직속인 상선의 관리하에 운영해야 하니 왕후의 공적 운용 자금이 동결된 거나 마찬가지였다.
별궁의 예산 문제는 단순히 불공정 예산 분배 문제가 아닌, 왕이 왕후의 정치 파벌에 제대로 피해를 입힌 일격이었다.
머리를 싸매던 왕후는 입출금 납부서를 내던지며 외쳤다.
“잠시 휴식! 모두 물러가!”
왕후의 명령에 방을 가득 메우던 각궁의 관리인들은 그녀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기 위해 재빠르게 방을 빠져나갔다.
관리인들과 자리를 바꾸듯이 왕후의 심복 중 하나인 상궁이 안으로 들어왔다.
“후~! 주방에 가서 달콤한….”
“왕후마마! 큰일 났습니다!”
상궁이 자신의 말을 끊자 왕후는 별일 아니면 가만두지 않겠다는 듯이 노려봤다.
하지만 상궁이 꺼낸 종이 한 장에 경악을 금치 못했다.
“이게 부티크에서 나한테 청구한 돈이라고?!”
상궁이 건넨 청구서에는 어지간한 고위 귀족들의 영지 몇 년 치 운영 자금에 달하는 천문학적인 금액이 적혀 있었다.
“나, 난 이딴 거 산 적 없어!”
왕후의 비명에 상궁은 쩔쩔맸다.
“저도 그리 말했는데 부티크는 전혀 들을 생각이 없습니다. 게다가 각인사에게 무슨 짓을 했냐고 알 수 없는 말을 하며 따지고 들고 있어서….”
당장 개인 비밀 자금은 물론 친가의 돈까지 한껏 끌어 쓴 왕후에게 날아든 재난이었다.
하지만 설상가상이라고 왕후의 고난은 그게 끝이 아니었다.
뒤이어서 급하게 안으로 들어온 다른 상궁이 급하게 외쳤다.
“왕후마마! 큰일 났습니다! 유바하 왕자님께서 유안 왕자를 공개적인 자리에서 폭행을 했다고 합니다! 온 왕궁이 그 이야기로 떠들썩합니다!”
자금적인 재난 뒤에 정치적인 재난이 연달아 터져버렸다.
* * *
나는 약병에 담긴 수백 병의 약을 보며 인상을 썼다.
아무리 몸에 좋은 약이 입에 쓰다고는 하지만 약에서 풍기는 냄새는 그냥 쓴 정도가 아니라 십 년 묵은 하수도 구정물같이 고약했다.
소설 속에서 몹시 쓰다고 하긴 했지만 이런 냄새가 난다는 묘사는 없었는데.
“왕자님, 그 약 꼭 드셔야 하나요? 저 노망난 노인네가 잘못 만든 게 아닐까요?”
프레시아는 걱정스러운 얼굴로 우려를 표했다. 프레시아의 독설에 디벳은 버럭 화를 냈다.
“먹기 싫으면 말아! 내가 손녀가 있는 곳도 못 들었는데 해가 될 걸 줄 것 같아?”
그 외침에 약에 대한 신뢰가 올라가긴 했다.
이딴 냄새가 나는 걸 먹을 수 있느냐는 별개의 이야기였지만.
“사탕… 사탕 있습니까?”
“그딴 거 없다.”
단호하게 대답하는 디벳은 내가 이 약을 먹은 뒤 보일 반응이 기대된다는 듯이 즐거운 얼굴이었다.
저거 손녀 위치 바로 안 알려줬다고 복수하는 거 아니야?
나는 의심을 지우지 못하며 프레시아에게 말했다.
“내가 만약 죽으면 저 망할 영감탱이도 같이 묻어줘.”
“얌마! 안 죽는다니까!”
“왕자님…! 죽으시면 안 돼요!”
“아니! 안 죽는다고!”
내가 프레시아의 손을 꽉 잡으며 각오를 다지는데 디벳이 계속 태클을 걸었다.
“쓰읍~! 후~!”
나는 투덜거리는 디벳을 무시하며 심호흡을 하고 단숨에 약을 들이켰다.
“우욱!”
메스꺼운 냄새가 식도를 타고 후각 세포를 자극했다.
당장이라도 토할 것 같은 어지럼증에 몸이 휘청거렸건만 이상하게도 구역질이 나질 않았다.
보통 같았으면 위장이 급격히 조여 오며 속을 게워내야 하는데 전혀 그런 반응이 없었다.
내가 구토를 하지 않자 디벳은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아하하하! 성공이다! 구토는 위의 급격한 수축으로 음식물이 역류하는 현상이지. 그렇다면 위의 움직임을 일시적으로 제약하면 토하지도 않는다는 거잖아? 뭐, 빠르면 10분 후에는 다시 위가 움직일 테니까 걱정 마라. 그때는 어느 정도 약효를 흡수한 다음일 테니까 토해도 괜찮을 거다.”
망할 영감탱이! 역시 일부러인 거 아니야?
나는 거친 숨을 몰아쉬며 몸의 중심을 잡았다.
약을 먹은 직후부터 묘하게 뜨거운 기운이 전신에 퍼져나가는 기분이었다.
슬쩍 팔목에 새겨진 시조의 유산을 보니 실시간으로 숫자가 변하고 있었다. 최종적으로 변한 퍼센트는 ‘0.157퍼센트’.
그렇게 죽어라 운동해도 하루에 0.0003퍼센트 오르면 많이 오르는 거였는데 약을 먹은 것만으로도 단숨에 0.1퍼센트가 넘게 올랐다.
내가 속에서 올라오는 냄새 때문에 몇 분간 말없이 숨만 몰아쉬자 프레시아는 검을 뽑으려 했다.
“당신 무슨 약을….”
나는 손을 들어 프레시아를 막으며 말했다.
“효과는 확실하네. 맛과 냄새는 최악이지만. 우욱!”
다시 위가 활동하며 순간 토할 뻔했다. 그래도 약을 완벽히 소화하기 위해서 강제로 참았다.
내가 참아내자 디벳은 혀를 내둘렀다.
“약을 제조한 내가 할 말은 아니다만, 그걸 버티다니 너도 참 독하다.”
“저도 목숨을 걸고 있어서 말이죠.”
내가 쓰게 웃자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토하지 않고 소화시키는 게 가장 좋긴 하지. 이 약의 제조법을 아는 네게 굳이 설명할 필요도 없겠지만 운동과 병행해야 효과가 극대화된다.”
약의 진정한 효능은 운동 효과를 극한까지 올려주는 거지 스테로이드처럼 즉각적인 개조를 해주는 게 아니었다.
비유하자면 효과가 미친 듯이 좋은 프로틴이라고 보면 됐다.
지금은 내 몸이 너무 허약해서 바로 효과가 나타나긴 했지만 말이다.
눈앞의 약병은 대충 봐도 3백 병이 넘어 보였다.
“아마 백 병 정도 먹을 즈음엔 어지간한 성인 남성 수준의 신체 능력은 될 거다. 보통은 아무리 허약해도 열 병이면 충분할 테지만 네 몸은….”
“끔찍할 정도로 허약한 몸뚱이죠, 알고 있습니다.”
이걸 다 먹을 생각에 한숨이 절로 나왔지만 당장 효과를 확인했으니 어쩔 수 없었다.
매일 먹기에는 고역스러워 며칠씩 텀을 주고 먹을 생각이었다.
나는 한숨을 내쉬며 육체 개조 물약을 식자재 창고에 넣었다.
하도 막 넣어서 그런지 아공간인 창고도 많이 채워졌다.
나중에 창고 정리도 좀 해야겠다고 생각하는 그때, 문에 달린 종이 울리며 길버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할아버지, 저 왔어요. 동생은 좀 어때요?”
허름한 외투를 벗으며 안으로 들어온 길버트는 날 보며 놀랐다.
“주, 주군! 오셨습니까!”
나는 당장이라도 무릎을 꿇을 것같이 구는 길버트에게 신분증을 던졌다.
“받아.”
“이게 뭡니까?”
길버트는 고풍스러운 마법 음각이 새겨진 신분증을 보며 신기해했다.
“네 새로운 신분증이야. 축하해, 이제 말단이지만 귀족이 되었군. 물론 단승 귀족이라 그렇게 높진 않지만.”
“예? 예?!”
길버트는 놀라서 자신의 신분증을 떨어트릴 뻔했다. 나는 그런 그를 보며 피식 웃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