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7화. 발 없는 말이 비수가 되어 꽂힐 때 (2)
나는 의무대 침대에 누운 채 찢어진 입술에 흐르는 피를 닦으며 웃었다.
“큭큭큭! 쓰읍, 아프네.”
최대한 요령 있게 충격을 완화했는데도 공부는 안 하고 검만 휘두르는 놈답게 손이 매웠다.
2왕자 유바하는 머리가 잘 돌아가는 시종이 어르고 달래며 호위 기사와 함께 자신의 거처로 돌려보냈다.
시종은 가기 전에 호레이즌에게 방금 있었던 일에 대해 함구령을 내려줄 것을 간절하게 부탁하고 따라갔다.
나는 일단 프레시아와 호레이즌의 부축을 받으며 의무대로 와 진료를 받았다.
“왕자님께선 생각보다 재능이 있을지도 모르겠군요.”
호레이즌이 의외라는 듯이 말하자 프레시아는 흥분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스승님이 인정하는 건 드물어요! 역시 검을 배우는 건 어떠세요? 옛날과 달리 살살 할게요.”
그 설득력 없는 말에 나는 슬며시 시선을 피했다.
“지금은 운동만으로도 벅차니 거절할게.”
내 거절에 기대하던 프레시아는 아쉬움을 감추지 못했다.
나는 의무관이 주는 연고를 상처에 바르며 고개를 돌렸다.
의무관의 처치가 끝나자 호레이즌은 의무관을 내보내고는 내게 물었다.
“그런데 함구령을 내리지 말라는 게 전하의 뜻이라는 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그의 물음에 나는 찬장에서 거즈와 고정 테이프를 찾으며 대답했다.
“말 그대로의 의미입니다. 자세한 이야기는 아바마마께 직접 듣는 것이 좋을 겁니다.”
“전하께 말입니까?”
나는 일부러 상처가 잘 보이도록 뺨에 거즈를 비껴 붙이며 긍정했다.
“제가 말하면 의미가 곡해될 수도 있으니 확실하게 하는 편이 경에게 좋지 않겠습니까.”
호레이즌 정도 되면 언제든 왕과 접견을 가지는 게 가능했다.
물론 말도 없이 바로 들이닥치는 건 불가능했지만 말이다.
“그건 그렇습니다만.”
호레이즌은 함구령을 내리지 않은 탓에 소란이 벌어지지 않을까 걱정하는 표정으로 날 바라봤다.
그런 그를 보며 나는 피식 웃었다.
“아, 그리고 아바마마께는 앞으로 드시는 건 물 한 잔도 주의하라 전해 주세요.”
왕은 몇 년 후 독에 당해 살지도, 죽지도 못한 상태가 된다.
왕의 건강 따위는 내 알 바 아니지만 왕은 계속 살면서 왕후와 정계에 숨어든 내 적들을 견제해 줘야 했다.
“그건 또 무슨 의미십니까?”
갑작스러운 내 말에 호레이즌의 표정이 험악하게 변했다.
마치 내가 왕의 식사에 독이라도 탈 것같이 쳐다봤다.
왕에게 충성하는 그에겐 협박처럼 들릴 수 있는 말이라 민감히 반응할 수밖에 없을 터였다.
나는 어깨를 으쓱였다.
“말 그대로의 의미입니다. 아바마마께선 누구보다도 중요한 분이니 사레라도 들리면 큰일 아닙니까?”
내 너스레에 그는 따끔한 무언가를 내뿜으며 날 압박했다. 그러자 프레시아는 호레이즌의 앞을 막아서며 검에 손을 가져다 댔다.
“호레이즌 경이라 해도 왕자님께 그런 기세를 보내는 건 용납할 수 없습니다.”
“…한번 해보자는 건가?”
두 사람의 시선이 부딪치며 허공에 스파크가 일었다.
아니, 비유가 아니라 주변 공기가 일렁거리며 정말로 스파크가 일었다.
짝!
나는 큰 소리로 손뼉을 치며 험악한 분위기를 환기시켰다.
“프레시아, 물러나. 호레이즌 경의 반응은 이 나라의 기사로서 당연하다. 오히려 이렇게 나오질 않으면 곤란하지.”
내가 미소 짓자 호레이즌은 모르겠다는 얼굴로 날 바라봤다.
“경은 그저 제가 그렇게 전해달라 했다고 말해주시면 됩니다. 전달한 다음 제 처우는 아바마마께서 정하시면 될 일입니다. 안 그렇습니까?”
동의를 구하자 호레이즌은 미심쩍은 표정이 되었다.
“맞는 말씀이십니다. 하지만 왕자님께 불이익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의 경고에 나는 진지하게 대답했다.
“본디 충언은 목을 걸어야 하는 법이죠. 물론 기껏해야 유배되듯 쫓겨나는 것 정도겠지만요.”
“알겠습니다. 감정적으로 대응해 송구합니다.”
호레이즌의 사과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해합니다. 아니, 오히려 다행입니다. 경이 전하의 곁을 지킬 테니까요.”
소설 속에서 호레이즌은 왕이 사경을 헤매자 정치적 중립을 선언하며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는다.
그의 선택은 개인으로서는 현명한 태도지만 나라의 입장에서는 악재로 작용한다.
누가 적인지 알 수 없는 상황에서 왕국 최강의 전력이 봉쇄되자 숨어 있는 적들이 활개 치기 좋아지게 됐으니 말이다.
호레이즌은 내 말을 이해하지 못했는지 의아한 표정으로 날 바라볼 뿐이었다.
* * *
나는 일부러 부상을 입은 티를 내며 연무장에서 내 거처인 별궁까지 최대한 인파 많은 곳으로 돌아갔다.
내 얼굴을 보는 사람마다 놀랐고, 때때로 어쩌다 다쳤냐고 물어오는 사람도 있었다.
그때마다 나는 최대한 어색한 표정을 지어 보이며 얼버무렸다.
오는 동안 나와 마주친 이들은 2왕자의 폭행에 대한 소문이 돌기 시작하면 살을 붙여줄 터였다.
“오늘부터 당분간 왕궁 순회는 그만둘 거야. 연무장에 가는 것도 그만해야지.”
내 말에 프레시아는 물었다.
“운동까지요?”
“맞아. 그래야지 소문이 더욱 날카로워질 테니까.”
생각해보자. 매일같이 돌아다니며 인사를 하고 다니던 사람이 2왕자에게 구타를 당하고 칩거 생활을 한다?
누가 봐도 2왕자나 왕후가 무언가 수작을 부렸다고 볼 수밖에 없었다.
내가 이 몸에 들어오고 나서부터 날을 벼려온 소문은 날카로운 비수가 되어 왕후에게 꽂힐 거다.
원래 계획으로는 며칠 정도 더 뜸을 들이며 소문을 만들어낼 생각이었지만 멍청한 2왕자 덕분에 일정을 당길 수 있을 듯했다.
“물론 귀중한 시간을 놀릴 순 없으니 바깥 일정을 봐야지. 헤리온은 내가 방에 틀어박혀 누워 있는 걸로 꾸며줘.”
“저번에 외출하셨을 때처럼 말이죠?”
헤리온의 확인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몸살을 앓고 있다는 소문을 내도 괜찮겠네.”
왕후를 공격할 소문에 한 줄 더하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자, 그럼 밖으로 나가자.”
“예!”
프레시아는 활기찬 목소리로 대답하며 내 뒤를 따랐다.
* * *
왕궁 밖으로 몰래 나온 나와 프레시아는 곧장 디벳의 거처 겸 약방으로 향했다.
“계십니까? 저 왔습니다, 영감님.”
여전히 허름하고 외진 곳에 위치한 약방은 처음 왔을 때처럼 아무도 자리를 지키고 있질 않았다.
“영감님! 안 계십니까!”
“시끄러 이놈아! 귀 안 먹었다!”
내가 큰 소리로 부르자 안에서 디벳이 신경질적으로 대답했다.
나와 프레시아가 더 안으로 들어가자 디벳은 낡은 책을 읽고 있었고, 병상에는 귀여운 꼬마가 누워 있었다.
“흥! 전에 오고 사흘간 얼굴도 안 내밀길래 내뺀 줄 알았는데 안 도망쳤구나.”
“아하하, 아직 영감님께 의뢰할 약이 많은데 제가 어디로 갑니까?”
내 너스레에 디벳은 콧방귀를 뀌었다.
“에잉, 돈도 안 내는 놈이 의뢰는 무슨.”
“대신 다른 걸 제공하겠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이제 손님도 받기 시작한 모양입니다?”
내가 의외라는 듯이 묻자 디벳은 읽던 책을 덮으며 대답했다.
“이 아이는 길의 동생이다.”
“이 꼬마가요?”
길버트의 동생은 길버트보다 다섯 살 정도 더 어리다.
그런데 누워 있는 꼬마는 그보다 더 어려 보였다.
“어려서 병을 얻고 잘 먹지 못해서 못 큰 거다. 다행히 늦지 않았으니 지금부터 잘 먹이면 크겠지.”
디벳의 말에 나는 꼬마가 누워 있는 옆 침상에 걸터앉았다.
“약은 어떻습니까? 잘 듣습니까?”
“흥! 당연하지! 누가 만든 약인데, 눈에 띄게 호전 중이다.”
그렇게 말한 디벳은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자신의 덜덜 떠는 손을 내려다봤다.
“…결국 네놈 말이 맞았다는 거지. 난 의사 실격이다.”
평생에 걸쳐 쌓아온 프라이드를 잃어버린 노인은 왜소해 보였다.
나는 어설프게 위로하기보다는 화제를 돌리기로 했다.
“그러고 보면 길버트는 어디 있습니까?”
내 물음에 디벳은 젖은 수건으로 길버트의 동생의 이마에 맺힌 땀을 닦아주며 대답했다.
“일하러 갔다.”
“일? 제 기사가 됐는데도요?”
내가 못마땅해하자 디벳은 버럭 화를 냈다.
“그럼 애들 굶어 죽으라는 거냐!”
“아, 그렇군요. 제가 미처 그걸 생각 못 했습니다.”
여러모로 생각할 게 많아서 그만 간과해 버렸다.
나는 식자재 창고에서 금괴 하나와 은괴 다섯 개를 꺼냈다.
“아시는 암거래상 정도는 있으시겠죠? 앞으로는 이걸로 생활하세요. 애 약값에도 보태시고요.”
이 정도면 아껴 쓰지 않아도 10년 정도는 돈 걱정 없이 살 수 있을 거다.
내가 아무렇지 않게 금괴와 은괴를 꺼내자 디벳은 당황했다.
“너 진짜 정체가 뭐냐?”
“이 나라 왕자요.”
물론 이건 내가 왕자라서 얻은 게 아니라 120년 전에 잊힌 군자금을 빼돌린 거지만 말이다.
“또 그 말이냐? 이상한 농담하지 말고 말하기 싫으면 말아라.”
디벳은 내가 사실을 말해줘도 전혀 믿지 않았다.
“으으응…!”
식은땀을 흘리며 잠들어 있던 길버트의 동생이 신음 소리를 내며 깨어났다.
“하, 할아버지… 목말라요.”
“물 여기 있다.”
디벳은 손으로 소녀의 머리를 받쳐 들며 조금씩 물을 먹였다.
“생각보다 상태가 많이 안 좋아 보이는데요.”
내가 걱정스럽게 묻자 디벳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약의 효과로 체질이 바뀌면서 오는 면역 현상이다. 몇 번 고비가 있기는 했지만 넘겼고, 안정화되고 있으니 걱정하지 않아도 될 거야.”
“할아버지, 저, 저분은…?”
길버트의 동생이 날 보며 묻자 디벳은 땀을 닦아주며 대답했다.
“네 병을 알아보고 약을 준 사람이다. 오래 깨어 있지 못할 테니 지금 인사해 두거라.”
‘준’ 사람이라.
사실 줬다는 말은 어폐가 있었다. 약을 넘기는 것으로 길버트의 삶은 내게 저당 잡힌 것이나 마찬가지니까 말이다.
“아…! 오빠의… 주군?”
길버트가 이미 나에 대해 말한 모양이다.
“그래, 네 오빠의 충성을 받은 사람이 나야. 유안이라고 한다. 그리고 이쪽은 내 기사인 프레시아.”
내 소개에 프레시아는 미소 지으며 인사했다.
“안녕. 네가 길버트의 동생이구나.”
“안녕…하세요. 주군 오빠, 예쁜 언니. 쿨럭! 쿨럭! 하아…!”
길버트의 동생은 기침을 하며 거칠게 숨을 들이쉬었다.
“주, 주군 오빠. 고마워요. 만나면 이 말을 하고 싶었어요.”
갑자기 감사 인사를 듣자 나는 머쓱해졌다.
“아니, 약이라면 나보다는 네 오빠에게 고마워해. 네 오빠가….”
“아니요.”
길버트의 동생은 내 말을 자르며 고개를 저었다.
“오빠를, 오빠의 꿈을 이뤄줘서 고마워요. 비록 진짜 기사는 아니겠지만… 오빠를 기사로 삼아 주겠다고 말해주셔서 고마워요. 저 때문에 모든 걸 포기하려 한 바보지만… 그래도….”
아파서 그런지, 아니면 감정이 북받쳐 오르는지 횡설수설하고 울먹이는 목소리였지만 감정만큼은 전해졌다.
나는 왜소한 소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주머니에서 마법으로 음각이 된 신분패 하나를 꺼냈다.
“고맙다는 말은 내가 해야지. 그리고 네 오빠는 진짜 기사가 됐단다. 이게 네 오빠의 새로운 신분증이야.”
길버트의 동생은 신분증을 보고는 뭐라고 웅얼거렸는데 동공에 초점이 흐려지더니 다시 기절하듯 잠들었다.
신분증을 본 디벳은 놀라서 소리쳤다.
“너! 그거 진짜잖아! 왕궁에 들어갈 수 있는 신분패라 위조도 불가능할 텐데 어떻게 구한 거지?!”
원래 왕자는 열 명 미만이라면 자유롭게 기사를 임명해 개인 사병으로 삼을 권한이 있었다.
그 이상 기사를 임명하려면 왕의 허락이 필요했지만 1왕자의 기사는 지금까지 프레시아가 전부였기에 기사로 임명하는 데 그리 복잡한 절차는 필요 없었다.
이제는 아바스엘과 길버트도 포함이니 총 세 명인가.
“말했잖습니까. 저 왕자라고.”
내가 장난스럽게 웃어 보이자 디벳은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이 날 바라봤다.
나는 그런 디벳을 보며 깜박한 원래 이곳에 온 목적을 말했다.
“아, 그리고 영감님 손녀 찾았습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