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5화. 어리석은 현자와 현명한 광대 (9)
“으음….”
아리사가 떨떠름한 표정을 짓자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앞선 일의 실패로 왕후의 심기가 여간 불편한 게 아닐 텐데 아무리 너와 네 페어가 왕후의 눈치를 안 본다지만 너무 과하면 수습하는 게 귀찮아진다고 하지 않았나?”
내 말에 아리사는 움찔하며 언데드들을 다시 그림자 안으로 집어넣기 시작했다.
“쳇! 정말로 같은 어르신을 모시는 사이 같네.”
내가 고갯짓을 하자 프레시아는 경계를 거두지 않으며 검을 검집에 넣었다.
“어르신을 따르는 사람끼리는 싸우더라도 전력을 다하지 않는다. 반드시 지켜야 하는 몇 없는 철칙이지.”
내 말에 아리사는 투덜거리며 봉합된 목을 쓸어 만졌다.
“난 정말로 죽을 뻔했단 말이야.”
“아하하하, 엄살도 심하군. 자네가 그 정도로 죽을 리가 없잖은가.”
오히려 죽지 않아 놀랐지만 말은 그렇게 하기로 했다.
내 말을 들은 아리사는 콧방귀를 뀌며 웃었다.
“냐하하하! 그렇지! 내가 고작 그 정도로 죽을 리는 없지!”
언제 싸웠냐는 듯 의기양양해진 그녀는 내게 따지듯 말했다.
“그래도 아픈 건 아픈 거야. 그 대가는 받겠어.”
아리사가 마법 지팡이에 마력을 모으며 프레시아를 노려보았다.
적어도 팔 정도는 잘라 가겠다는 의미였다.
나는 아리사의 앞을 막아서며 말했다.
“그건 내 부하가 실례했군. 나도 널 바로 알아본 게 아니라서 말이야. 하지만 이 친구는 내가 아끼는 부하니 다른 대가를 치르지.”
“도련님!”
나는 걱정하며 날 부르는 프레시아에게 괜찮다며 웃어 보였다.
내 말에 아리사는 가당치도 않다는 듯이 외쳤다.
“싫어! 난 저년이 빳빳한 고개를…!”
“사상 최악의 네크로맨서 빌리의 비전서를 찾고 있지 않았나?”
내가 말을 자르며 비전서에 대해 언급하자 아리사는 놀란 눈으로 날 바라봤다.
“어디 있는지 알고 있어?”
“100퍼센트 확실한 정보는 아니다. 다만 정보란 한번 누설되면 그 가치를 잃는 법이지. 어때, 듣겠는가?”
내 말에 아리사는 잠시 고민하더니 말했다.
“작은 힌트라도 말해봐.”
“욕심도 가득하군.”
나는 별수 없다는 듯이 말했다.
“마지막 소유주는 약 80년 전 비전서를 얻었다. 마법을 익히기 위해서가 아닌 단순히 취미로 인한 수집품이었지.”
내 말에 아리사는 확신을 했는지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저년은 마음에 안 들지만 그 정보를 대가로 받을게.”
“좋은 선택이다. 비전서의 마지막 소유주는 80년 전, 당시 3왕자였다. 그리고 3왕자는 타인을 절대 믿지 않았고 제4궁에서 한평생을 살았지. 이 정도 정보면 충분하다고 생각하는데?”
내 물음에 아리사는 함박웃음을 지었다.
“냐하하하핫! 충분해! 역시 왕궁에 있었구나! 음! 음! 좋아! 이번만큼은 특별히 용서해 줄게!”
나는 당장이라도 떠나려는 아리사에게 말했다.
“역시 이런 일로 이 정보를 넘겨주는 건 수지타산이 맞지 않는군. 그렇게 생각하지 않나?”
“냐하하하! 고작 부하 하나 좀 안 다치게 하려고 넘기기엔 고급 정보기는 하지. 하지만 그건 네 선택이잖아? 누군지 모를 동업자 씨?”
몇 년 동안 찾아 헤매던 정보를 얻어서인지 기분이 좋아 보였다.
나는 별 수 없다는 듯이 어깨를 으쓱였다.
“그러니 두 가지 부탁을 하지. 뭐, 들어주고 말고는 네 마음대로 해. 말했듯이 한번 누설된 정보는 그 가치를 잃는 법이니.”
아니, 그렇지 않다.
정보는 누군가에게 말하든 아니든 그 자체로 가치를 지닌다.
이런 식으로 교섭을 할 수도 있듯이 알려진 정보도 써먹기 나름이었다.
내 말에 아리사는 거들먹거리며 대답했다.
“냐하하하! 들어는 줘볼게, 들어는.”
“그럼 고맙게 말하지. 하나는 나와 만난 것에 대해선 비밀로 해줬으면 좋겠군.”
내 말에 아리사는 음흉하게 웃었다.
“아하, 시킨 일 안 하고 놀고 있던 게 들키면 혼난다고 했던가? 냐하하핫! 네가 누군지는 몰라도 이 시간에 제자리에 없었다는 정보라면 어르신께선 네가 누군지 어렵지 않게 아시겠지.”
“그 말대로다.”
역시 상황 파악이 빠르다.
내가 의도한 결론을 도출한 아리사는 선심 썼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내가 원하던 정보니까 거스름 값으로 그 정도는 충분히 해줄게.”
그녀의 대답에 나는 속으로 안도했다.
마법 주문은 일종의 자신과의 약속이자 자기 암시였다.
때문에 마법사는 피치 못할 사정이 아니라면 평소에도 약속을 지켰다.
안 그러면 마법에 대한 신뢰가 깨져 마법이 약해지거나 최악의 경우 마법을 사용하지 못하게 되는 경우도 있었다.
물론 절대적인 건 아니고, 원효대사의 해골 물 같은 거라 태연하게 약속을 깨는 마법사도 존재하기는 했다.
이걸로 최소한 수도에 있을 동안은 내가 사칭했다는 정보가 흘러 들어가지 않겠군.
괜히 사칭범이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귀찮아질 위험이 있다.
“다른 하나는?”
“내가 준 정보에 더 거스름이 남는다면 좀 쓸 만한 마도구 좀 줄 수 있나? 굳이 네 마법으로 만든 게 아니어도 좋다만.”
내 말에 아리사는 악동같이 미소 지었다.
“으흥~! 너 마법사였구나? 마법을 분석해서 약점이라도 잡아보게?”
“마음대로 생각해라.”
“냐하하하하! 좋아, 내가 몰래 니벨의 전투 인형을 슬쩍해 놓은 게 있지. 그걸 줄게.”
아리사는 소매 그림자에서 수정 속에 담긴 인형을 꺼내 내게 던졌다. 그녀라면 기꺼이 줄 거라 생각했다.
니벨과 아리사는 서로 원해서 같이 다닌다기보다, 위에서 시켜서 어쩔 수 없이 짝이 된 것뿐이었다.
길거리 출신인 그녀는 니벨 같은 엘리트를 약간 혐오했기에 니벨이 곤란해할 만한 장난을 치길 좋아했다.
“성능은 그렇게 높진 않아. 네임드 인형은 각별히 관리하더라고. 그래도 양산기체 중에서는 강한 녀석이야.”
내가 적이란 걸 알았다면 이렇게 넘겨주지는 않았을 거다.
어디까지나 곤란한 ‘장난’을 좋아하는 거지 아군에게 사보타주하는 걸 좋아하는 게 아니니까.
“고맙군. 그냥 간단한 지적 호기심을 채우려는 것에 불과하니까 걱정하지 마.”
이 인형은 차후 니벨의 아킬레스건이 되어줄 거다.
“그럼 다음에 보게 돼도 부디 모른 척해 주길 바라.”
“냐하하핫! 그건 그때 가봐서!”
아리사는 유쾌하게 웃으며 하늘을 날아 떠났다.
그녀가 확실히 사라지자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휴우, 살았군.”
내가 머리를 쓸어 넘기자 프레시아는 우물쭈물하며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엉? 뭐가?”
“빌리라면 그 사상 최악의 사령군주잖습니까. 괜히 제가 섣부르게 움직여서 귀한 정보를 적에게 넘겼으니….”
죽상을 하는 그녀를 보며 나는 배를 잡고 웃었다.
“푸하하핫! 고작 그런 거 때문에 표정이 안 좋았던 거야?”
“하, 하지만!”
나는 식자재 창고에서 책 한 권을 꺼냈다.
겉 표지가 악취미적으로 뼈로 조각된 마도서 구석에는 ‘빌리’라는 이름이 새겨져 있었다.
“제4 궁이라면 나랑 같이 갔던 곳이잖아. 당연히 챙겨왔지.”
“아! 그럼!”
“내가 적에게 이득이 될 만한 정보를 넘길 리 없잖아.”
안도의 한숨을 내쉰 프레시아의 표정이 다시 밝아졌다.
아리사는 다시 왕궁에 들어가면 바로 제4 궁을 뒤져볼 생각인 듯했지만 이미 내가 먼지 하나까지 탈탈 턴 다음이다.
소설 속처럼 결국 비밀 공간을 찾아낸다고 해도 그녀가 더 강해지는 일은 없다.
물론 아리사가 더 강해졌다고 해도 프레시아라면 충분히 이겼겠지만 말이다.
여기서 아리사를 죽이면 일이 어떻게 틀어질지 몰라 걱정했는데 어떻게든 넘어갔다.
“자, 그럼 돌아가자.”
내 말에 프레시아는 활기차게 대답했다.
“네!”
내가 본격적으로 움직이는 건 충분한 힘을 기른 다음이다.
* * *
“무슨 일이 있었던 겁니까? 갑자기 그렇게 살벌한 전투를 벌인 이유가 있을 것 아닙니까?”
내가 서커스 천막에 돌아오자 야드가 다짜고짜 물었다.
나는 그의 물음에 가볍게 웃었다.
“아바스엘이 말 안 해줬어?”
내 되물음에 야드는 한숨을 내쉬었다.
“아까부터 세상 다 산 사람처럼 침울해져서 말 걸 분위기가 아니었습니다.”
그렇게 말하며 자신의 개인실로 사용하는 마차를 흘겨봤다.
아바스엘은 저곳에 있는 모양이었다.
“우연히 서커스 공연을 보러 온 내 적과 재수 없게 마주쳤을 뿐이야. 그 적 중 하나가 엘의 삶을 제대로 망가트렸고.”
“그 말은….”
“네 원수와도 동료다.”
내 말에 항상 능글맞던 표정이 굳었다.
당장이라도 어디 있냐고 따져 물을 줄 알았지만 그는 냉정하게 물었다.
“죽였습니까?”
“아니, 소란이 커지면 적의 경계를 살 뿐이니까.”
“잘하셨습니다. 괜히 뱀이 숨어 있는 수풀을 건드릴 필요는 없죠.”
고개를 끄덕인 야드는 한 가지 더 물었다.
“오늘 교전한 그 여자를 쫓으면 단장과 만날 수 있겠습니까?”
그 물음에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많이 힘들 거다. 아예 관계가 없진 않지만 소속이 다르거든.”
“소속이 다르다고요? 다 같은 적이 아니었습니까?”
그의 의문에 나는 쓰게 웃었다.
“내 적은 음지에 숨어 있는 주제에 덩치가 거대하거든. 여러 조직에 뿌리를 내리고 있지. 오늘 방문한 녀석들은 개중에서도 미친 녀석들만 모인 곳 소속이다.”
“그렇군요. 그래도 걱정했는데 다치신 곳이 없는 것 같아 다행입니다.”
야드의 말에 나는 저 멀리서 공연장을 정리하는 서커스 단원들을 바라봤다.
“넌 날 걱정할 때가 아닐 텐데? 그 녀석들이 서커스에 관심을 보인 건 굉장히 위험해.”
공연 중에 나눴던 아리사와 니벨의 대화를 생각하면 그저 자반이 만든 서커스에 흥미가 있었던 것뿐 같지만 위험한 것도 사실이었다.
지금 이 시간대는 소설 속에서 그려지지 않은 시간대라 그 둘이 서커스단에 방문했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내가 소설에서처럼 암살당했다면 그 둘이 서커스단에 방문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았다.
왕족이 왕궁에서 암살당했으니 수도 전체에 비상 경계령이 떨어졌을 테고, 수도는 서커스 같은 걸 즐길 만한 분위기가 아니게 됐을 테니까.
돈도 못 버는 데다 동료를 끔찍이 아끼는 야드가 경비에 날이 서 있을 수도로 왔을 리가 없었다.
내 말을 들은 야드는 심각한 표정으로 고민하더니 결단을 내렸다.
“동이 트면 바로 수도에서 철수해야겠군요.”
“현명한 선택이야.”
지킬 것이 있는 사람은 신중해야 하는 법이다.
한순간의 방심에 모든 것을 잃게 될 테니까.
아니, 이미 모든 걸 잃어 본 사람이라 신중해지는 건가.
나는 마지막으로 아바스엘을 보기 위해 마차 안으로 들어갔다.
“아… 무사하셨군요. 다행입니다.”
내게 인사하는 아바스엘은 복잡한 표정에 얼이 빠져 있었다.
나는 그런 아바스엘의 등을 정신이 들도록 세게 쳤다.
“악!”
“정신 차려! 동이 트면 수도를 벗어날 테니 여행 떠날 준비 해야지!”
“그렇군요. 바로 떠나는 겁니까?”
아바스엘의 물음에 뒤따라 들어온 야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바스엘은 양손으로 자신의 뺨을 때리고는 결연한 얼굴을 했다.
“오늘 전, 제 원수를 보고도 이를 악물고 모른 척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저는 그런 제 자신이 너무나 싫고 혐오스럽습니다.”
“이해한다.”
“그리고 당신께는 제 평생을 다 바쳐도 갚지 못할 은혜를 입었습니다. 무슨 일이 있더라도 당신의 힘이 되고 싶습니다. 다음에….”
아바스엘은 눈물을 흘리며 맹세했다.
“…다음에 뵙게 될 때는 이런 한심하고 어리석은 패배자가 아닐 겁니다! 그러니… 당당히 당신의 옆에 설 때까지!”
“그래, 잠시 작별이다.”
나는 진심으로 그가 잃어버렸던 걸 되찾기를 바랐다.
나를 위해서, 그리고 아바스엘 그 자신을 위해서.
아, 맞다! 내 전속 기사 신분패 줘야 하는데 내 방에 놓고 왔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