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3화. 어리석은 현자와 현명한 광대 (7)
서커스 공연장은 당연한 말이지만 티켓 가격에 따라 의자의 품질과 위치가 달랐다.
부단장이 초대한 손님인 우리는 자연스럽게 가장 앞줄의 좋은 의자에 앉았다.
“저희는 표 값도 안냈는데 이렇게 좋은 자리에 앉아도 괜찮은지 모르겠군요.”
아바스엘이 작은 목소리로 걱정하자 나는 피식 웃었다.
한때 잘나가던 마법사치고는 꽤나 궁상맞은 부분이 있었다.
“표 값은 내가 냈으니까 걱정하지 말고 봐.”
“어? 돈을 냈습니까?”
“당연하지. 나 그렇게 구두쇠 아니야.”
내가 야드에게 준 금괴면 표 값을 하다 못해 오늘 공연 전체 수익만큼은 될 터였다.
“맞습니다. 도련님께서는 그 누구보다 많이 베푸시는 분입니다.”
프레시아는 내 말에 동의하며 자랑스럽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아주니 고맙네. 아, 엘은 공연 잘 봐둬. 내가 알려준 목적지까지 가는 동안 함께 움직일 사람들이니 친해져야지.”
칭찬만큼 상대방과 친해지기 좋은 방법은 없는 법이다.
“저는 정말 저들과 함께 움직이는 거군요.”
아바스엘은 낮을 많이 가리는 성격인지 긴장하며 각오를 다졌다.
오랫동안 갇힌 채 사람과의 만남이 극도로 제한된 환경에서만 살았으니 갑자기 모르는 사람들과 부대끼게 되는 상황이 힘든 건 당연했다.
“그게 가장 빠르고 안전한 길이니까. 솔직히 넌 수도에 있는 것도 그렇게 안전하진 않잖아.”
“그건 그렇죠.”
나는 아바스엘의 어깨를 토닥이며 다독였다.
그때 프레시아는 뭔가 탐탁지 않은 표정을 지으며 주변을 두리번거리기 시작했다.
“왜 그래?”
내 물음에 그녀는 살짝 망설이더니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아니요…. 그냥 왠지 불길한 느낌이 났다고 해야 할까, 불쾌한 기분이 들어서요.”
프레시아의 말에 나도 주변을 두리번거려 봤지만 딱히 뭔가가 느껴지거나 하진 않았다.
내 표정을 본 프레시아는 어색하게 미소 지었다.
“그냥 제 착각인가 봅니다.”
그녀의 말에 나는 잠시 생각하다가 대답했다.
“그냥 착각이면 다행이겠지만 만약을 대비하는 건 나쁘지 않은 일이야. 난 널 믿거든.”
무엇보다 사건과 엮이기 쉬운 여자 주인공인 만큼 조심하는 편이 좋았다.
내 말에 프레시아는 감동한 듯 보였다.
“도련님…!”
“그러니까 언제든 날 데리고 도망칠 준비….”
느긋하게 대답하는데 입구에서 들어오는 관객 사이로 분홍색 머리카락이 보였다.
그 흔치 않은 머리카락 색에 나는 순간 철렁한 느낌이 들었다.
설마, 아니겠지. 아무리 내가 재수가 없어도 그렇지 여기서 마주친다고?
“도련님?”
프레시아가 날 부르자 나는 아바스엘의 얼굴에 가면을 씌우고 후드를 눌러쓰게 하며 말했다.
“프레시아는 언제든지 검을 뽑을 준비 하고, 아바스엘은 절대 얼굴을 드러내지 마. 목소리도 내지 마. 무슨 일이 있어도 가만히 있어. 이건 명령이야.”
내 진지한 목소리에 프레시아는 살짝 긴장하며 외투 안에 숨겨둔 검을 확인했다.
반면 아바스엘은 무슨 일인지 이해하지 못한 눈으로 날 바라봤다.
나는 내 얼굴을 만지며 가면이 잘 작동하는지 체크한 뒤 서커스단 내부를 확인했다.
하나뿐인 입구는 관객들이 들어오느라 나갈 방법이 없을뿐더러 인파가 몰려 조용히 다른 곳으로 움직이기도 쉽지 않아 보였다.
움직이는 건 최소한 관객들의 입장이 끝난 다음이다.
물론 당장 전투가 벌어져도 나 하나라면 지금의 프레시아라도 충분히 지킬 수 있을 거다.
하지만 아바스엘까지 보호하기는 힘들지도 몰랐다.
기껏 얻은 인재를 맥없이 잃는 건 사양이다.
“아바스엘, 명심해. 네가 입을 잘못 놀리는 순간 수백 명이 죽는 참사가 벌어지니까.”
내 경고에 아바스엘은 당황해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내가 한 말의 의미를 깨달았는지 경악했다.
“니벨…!”
관객들 사이에서 분홍 머리의 소녀와 함께 우리가 앉아 있는 관람석으로 다가오는 감청색 머리의 여자를 발견한 아바스엘은 이를 악물었다.
네크로맨서 아리사와 함께 움직이는 퍼펫 마스터 니벨은 10년 전 아바스엘에게 접근해 저주를 건 그림자 탑의 마법사였다.
즉, 아바스엘에게 있어서 니벨은 둘도 없는 원수였다.
당장이라도 니벨을 죽이고 싶겠지만 마법을 사용하지 못하는 아바스엘은 후드를 눌러쓰며 얼굴을 가렸다.
“으드득!”
이를 가는 아바스엘의 반응에 저들이 적이라는 사실을 직감한 프레시아가 기습을 하는 게 어떠냐는 듯이 날 바라봤다.
프레시아의 기습이라면 아무리 저들이라도 순식간에 목이 나가떨어질게 분명했다.
하지만 나는 그녀를 보며 고개를 저었다.
저 둘은 초일류 마법사다.
기습한다면 한 사람은 반드시 죽이겠지만 둘 다 죽일 수 있을지는 장담하지 못했다.
게다가 성공해도 문제였다.
공연장이 피투성이가 될 텐데 그런 소란을 일으킨다면 슬라반 서커스단에 아바스엘을 맡길 수 없게 된다.
두 사람을 여기서 죽여서 배후 조직에 경계를 사는 것보단 마법을 되찾은 아바스엘의 가치가 훨씬 높다.
“냐하하하! 니벨은 역시 바보라니까? 이렇게 가까이 있었는데 쓸데없이 얼마나 헤맨 거야?”
아리사의 말에 니벨은 부어오른 뺨을 매만지며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그렇다고 그렇게 세게 때릴 건 없었잖아요. 전 치료 마법은 잘 못한다고요.”
니벨이 투덜거리자 아리사는 가소롭다는 듯이 웃었다.
“냐하하하하! 그렇게 누가 막말을 하래? 뼈와 살을 분리시키지 않은 것만 해도 감사히 여기라고.”
“쳇, 전력을 다할 수 있었으면 당하는 건 당신이었어요.”
“나도 전력을 다하지 못한 건 알고 하는 말이야? 냐하하핫! 패배자의 추한 변명이네~!”
두 사람은 투닥거리면서 표에 적힌 좌석을 확인하고는 우리가 있는 곳으로 다가왔다.
“그래도 공연 보기 좋은 자리를 얻어서 다행이다. 그렇지?”
“예, 마침 암표상이 있어서 다행이었죠. 아니었으면 저 뒤에서 공연을 볼 뻔했어요.”
그렇게 말한 아리사와 니벨은 프레시아의 옆에 나란히 앉았다.
그 암표상이 누구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마 두 사람에게 살해당했겠군.
쯧쯧, 그러게 사람을 가려가며 되팔이 짓을 했어야지.
나는 이미 죽어서 아리사의 그림자 속에 파묻혔을 얼굴 모를 암표상을 동정했다.
공연이 기대된다는 듯이 웃던 아리사는 나와 프레시아를 발견하고는 이상한 소리로 웃었다.
“응? 냐하하핫! 너희 이상한 걸 얼굴에 쓰고 있네?”
마력에 민감한 사람이라면 눈치챈다고 했던 야드의 말대로 아리사는 금방 눈치챘다.
갑자기 말을 걸자 긴장하던 프레시아가 순간 검에 가져다 대려 했다.
나는 그 손을 내가 잡으며 대답했다.
“오, 알아보시는 걸 보니 꽤나 눈썰미가 있으신 분이군요. 마법사이신가요?”
내가 되묻자 아리사는 유쾌하게 웃으며 으스댔다.
“냐하하하핫! 아는 걸 보니 보는 눈이 있네! 마음에 들었어.”
겉으로 보기에는 귀여운 소녀의 활기찬 미소라 보기 좋았지만 그녀의 눈동자에 담긴 광기는 소름이 돋았다.
“그런데 얼굴에 쓴 건 어디서 났어? 좋아 보이는데 나한테 주면 안 돼?”
아리사는 아무렇지 않게 처음 보는 내게 천변가면을 내놓을 것을 요구했다.
난 그녀들의 암살 대상 중 하나였으니 당연히 벗어줄 순 없었다.
하지만 여기서 거절한다면 탐욕스러운 그녀는 날 죽이려 들지도 몰랐다.
마법이 능숙한 그녀라면 날 상처 없이 죽이고 소란이 일어나기 전에 내 시체를 그림자에 넣을 수 있을 거다.
물론 시도한다면 프레시아에게 막힐 테지만.
나는 속내를 숨기고 싱긋 웃으며 말했다.
“제가 쓰고 있는 건 그리 대단한 게 아니니 주는 건 상관없지만, 사람들이 많은 여기서 이걸 벗는 건 꺼려지는군요.”
“왜?”
얼핏 들으면 순진해 보이는 아리사의 표정에 나는 속으로 쓰게 웃었다.
“제가 조금 유명하거든요. 그리고 이런 곳에서 놀고 있다는 게 들키면 어르신께서 시킨 일도 하지 않고 뭐 하냐고 혼을 내셔서 말이죠.”
나는 능숙하게 거짓말을 하며 그럴듯한 위장 신분을 하나 만들었다.
“그래…?”
내 말에 아리사는 살짝 주춤했다.
내가 유명인에 신분이 높은 사람이라면 섣불리 날 죽일 수 없으니 죽여서 빼앗는 건 불가능했다.
내 정체를 모르고 죽였다가 곤란한 일이 생길지 알 수 없을 테니 말이다.
두 사람은 상당히 미쳐 있었지만 니벨은 앞뒤를 잘 재지 못하는 반면, 아리사는 상황 판단이 빨랐다.
그건 니벨은 귀한 집안에서 오냐오냐 자랐지만 아리사는 길거리에서 나고 자랐기 때문이다.
그래서 힘 자체는 니벨이 더 강해도 아리사가 훨씬 까다로운 적이었다.
“대신이라기는 뭐하지만 구할 수 있는 곳을 알고 있는데 알려 드릴까요?”
“정말? 여기서 안 멀어?”
아리사는 반색하며 가면을 얻을 수 있는 곳을 알려달라고 했다.
“그렇게 멀진 않습니다. 여기서 북동쪽으로 가면 시장 거리가 나오는데 거기 근처에 시계탑이 있는 광장이 있지 않습니까?”
“응, 응, 있지.”
“거기서 제과점을 끼고 골목으로 들어가다 보면 한쪽 날개가 부러진 천사 동상이 있는 작고 낡은 성당이 있습니다. 건물 사이로 시계탑이 보이는 곳이죠.”
내가 부티크의 특징을 말하자 아리사는 애매한 표정을 지었다.
“아… 거기.”
부티크는 아리사가 속한 조직의 최대 거래처이기도 하니 모르는 게 더 이상했다.
나는 그 사실을 뻔히 알면서도 모른 척했다.
“어? 거길 아십니까? 당신도 그곳의 고객이었나 보죠?”
“뭐, 그렇지.”
“저도 그곳의 단골입니다. 꽤 많이 팔아 줬지요.”
물론 돈은 내가 내진 않았지만 말이다.
“그곳에 의뢰를 해서 얻은 물건이니 그곳에서 구하면 될 것 같군요.”
“그래.”
그녀는 내 대답에 김이 샜는지 흥미를 잃은 듯 보였다.
아리사의 성격상 굳이 얼굴을 가리진 않으니 내 가면에 관심을 보였던 건 정말로 이 가면이 탐나서가 아니라 가면에 새겨진 마법에 관심이 가서였을 거다.
아바스엘의 각인은 뛰어났지만 이미 그녀도 몇 개는 가지고 있으니 굳이 더 연구할 필요를 느끼지 못한 거겠지.
그때 공연장의 불빛이 꺼지더니 화려한 형형색색의 조명이 어지러이 움직이며 북소리가 들려왔다.
“신사 숙녀 여러분! 오늘 저희 슬라반 서커스단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마법으로 메아리치는 음성과 함께 모든 조명이 공연장 한가운데로 모이더니 작은 연막탄이 터지며 광대 가면을 쓴 야드가 순간이동을 한 것처럼 나타났다.
“와아아~!”
갑자기 아무것도 없던 곳에서 나타나자 관객들은 놀라며 탄성을 내뱉었다.
야드는 그런 관객들에게 허리 숙여 인사를 했다.
“아리사! 어떻게 한 걸까요? 공간이동 마법?”
니벨이 아리사의 팔을 당기며 초롱초롱한 눈으로 묻자 아리사도 진지하게 바라봤다.
“아니, 마력의 이동은 없었으니까 마법은 아닐 거야. 이 슬라반 서커스단은 자반, 그 변태 노친네가 만든 서커스단이니까 그 변태가 종종 사용하던 눈속임이겠지.”
“아! 여기가 그 자반 경이 만든 곳이었나요? 어쩐지 계속 보러 오자고 하시더니 그래서였군요.”
아리사와 니벨은 자반을 아는지 야드가 하는 마술 트릭을 알아내기 위해 집중했다.
공연장 내부에 음악이 흐르며 차례차례로 서커스 단원들이 나와 기예를 선보이며 서로 합을 맞췄다.
그렇게 서커스 공연이 클라이맥스로 향해가는 도중, 아리사가 뭔가 걸리는 표정을 하며 고심하더니 날 보며 물었다.
“아참, 그런데 이런 사람 많은 곳에서 부티크를 언급하는 건 금기 아니었던가?”
아, 그랬었나?
그림자 안에서 마법 지팡이를 뽑아 들며 웃는 아리사의 눈에는 광기가 번들거렸다.
이거 X됐군.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