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2화. 어리석은 현자와 현명한 광대 (6)
야드의 개인 대기실로 사용하는 마차는 마치 컨테이너 박스로 만든 가건물 같았다.
“유랑 시에는 짐을 싣고 다니는 마차지만 공연 중에는 제 개인실로 사용하는 마차입니다.”
이런 마차를 말이 끌 수 있나 싶었지만 서커스단에는 몬스터 테이머가 있으니 문제는 없겠다 싶었다.
야드는 낚시용 의자 같은 접이식 의자를 펼치며 앉을 것을 권하며 마법으로 물을 끓였다.
“그리 좋은 품질의 차는 아니지만 이 근방에선 구하기 쉽지 않은 찹니다.”
“고맙군, 잘 마시지.”
내가 독특한 향기의 차를 입으로 식혀가며 마시자 야드는 복잡한 표정으로 날 바라봤다.
“단장에 대해 어떻게 아시는 겁니까? 단장은 어디 있죠? 역시 당신이 익힌 기예는…!”
“쉿!”
나는 그의 말을 자르며 말했다.
“궁금한 게 많은 건 알겠지만 하나하나 풀어가자고.”
“죄송합니다. 제가 너무 흥분했군요.”
그의 사과에 나는 싱긋 미소 지으며 말했다.
“괜찮아, 사람이 흥분할 수도 있지. 그런데 그거 아나? 정보란 때로는 돈으로도 구하기 힘든 법이라는 걸.”
내 말에 야드의 미간이 좁혀졌다.
“그건… 돈을 달라는 겁니까?”
그의 추측에 나는 바로 부정했다.
“아니, 아니. 돈은 필요 없어. 그저 서로가 원하는 바를 가능한 들어주자는 거야. 그쪽이 내게 원하는 게 정보이듯, 나도 그쪽에게 바라는 게 있다는 말이지.”
내 거래 제안에 그는 심각한 얼굴로 고민했다.
“서커스에 해가 되는 부탁이라면 들어드릴 순 없습니다.”
“알아. 나도 서커스에 해가 되는 부탁은 하지 않아. 이건 개인 간의 거래야. 물론 네게도 해가 되는 부탁은 안 할 생각이야.”
내 대답에 야드는 결심을 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그 거래, 받아들이겠습니다.”
그의 결단에 나는 만족스럽게 웃었다.
“좋아, 나도 시간이 넘쳐나는 건 아니니까 이렇게 하자. 네 질문 세 번에 내 부탁 하나를 들어주는 거야. 어때? 네가 알고 싶은 건 그 정도 값을 치를 만하지 않아?”
“…알겠습니다. 앞서 말했듯이 무리한 부탁이라면 거절할 겁니다.”
“나도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은 그냥 넘길 거니까 마음대로 해.”
야드는 머리가 복잡한지 손으로 트럼프 카드를 만지작거렸다.
“첫 질문입니다. 당신은 제게 먼저 단장의 이름을 언급했습니다. 제가 자반 단장과 관계가 있다는 건 어떻게 아셨습니까?”
첫 질문부터 꽤나 날카로웠다.
나는 쓸데없는 말을 하지 않기 위해 신중히 답을 골랐다.
“나는 어떤 조직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고 있다. 그 조직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던 중에 자반이라는 사람이 슬라반 서커스를 만들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당신이 부단장이라면 당연히 단장과 관계되었겠지.”
“당신이 정보를 수집하고 있는 조직의 정체는 뭐죠?”
그의 질문에 나는 턱을 쓸어 만졌다.
“너무 포괄적인 질문이군. 질문 하나에 여러 대답을 얻고 싶은 건 알겠지만 난 그렇게 여유롭지 않으니 네가 알고 싶은 것만 대답하지. 그 조직은 자반이 속한 조직이다.”
내 대답에 야드의 눈이 커졌다.
순간적으로 드러난 표정으로 보아하니 자반이 서커스단 외에도 어딘가와 연락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던 듯했다.
“당신은 왜 그 조직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는 겁니까?”
“점점 단장이 아니라 내 개인 사정에 대해 질문하는 것 같은데?”
내가 흘겨보자 야드는 어색하게 웃었다.
“죄송합니다. 대답하기 곤란하시다면 다른 질문을 하겠습니다.”
“아니, 대답 못 할 것도 없나. 그 조직은 내 적이다. 정확히는 난 아무 잘못 하지 않았는데도 일방적으로 그쪽에서 날 죽이려 들지.”
“…!”
내 대답이 생각지도 못한 대답이었는지 다소 충격받은 모양이었다.
하기야 서커스단의 단장인 유밀 자반은 죽어가는 고아였던 야드를 거둬준 양부기도 했으니 그럴 만했다.
“자, 세 번 답했으니 내가 부탁 하나를 할 차례인가.”
“…말씀하시죠.”
야드는 살짝 긴장했다.
“어려운 부탁은 아니야. 나와 함께 온 중년의 남자, 엘을 안전하게 목적지까지 데려다줬으면 해.”
“호위를 해달라는 겁니까?”
“말하자면 그렇지. 엘이 먹고 자며 소비하는 비용은 물론 보수까지 넉넉하게 지불할 테니 걱정하지 마.”
나는 주머니에서 손바닥만 한 1kg 금괴 하나를 꺼내 테이블 위에 올려놨다.
내가 얻은 숨겨진 군자금의 일부였다.
“안전만 보장한다면 가는 도중에 서커스단의 일정을 보느라 조금 돌아가는 것쯤은 봐줄게. 엘은 그래 보여도 머리깨나 쓰니까 행정 일을 맡겨도 좋을 거야.”
금괴가 진짜라는 걸 확인한 야드는 마른침을 삼키며 물었다.
“절 어떻게 믿고 동료분을 맡기시는 거죠?”
“그것도 질문인가?”
내가 장난스럽게 묻자 그는 당황해했다.
“하하하! 농담이야. 이건 질문으로 치지 않을 테니 걱정하지 마. 당신한테는 미안한 일이지만 슬라반 서커스단에 대해서도 조사했어. 아무래도 자반이 만든 서커스단이니까.”
슬라반 서커스단은 자반이 여러 시선을 신경 쓰지 않고 이곳저곳을 돌아다니기 위한 위장 목적으로 만들어졌다.
상단이 아닌 서커스단인 이유는 자반의 취미도 겸하기 때문이었다.
“조사 결과 널 믿어도 괜찮다고 판단했다. 언제든 강도로 돌변할 수도 있는, 돈으로 움직이는 용병들보다는 훨씬 신뢰할 수 있지.”
“어째서죠? 전 자반 단장의 제자입니다. 단장이 당신의 적이라면 이상하지 않나요?”
야드의 의문에 나는 진지하게 대답했다.
“자반에게 소중한 사람을 잃은 너라면 적어도 내 적이 되진 않을 거라 생각했거든.”
“그걸 어떻게…!”
서커스단의 단장 자반은 버려진 고아인 야드를 키워준 양부였지만, 동시에 결혼을 약속한 연인인 자스민 라일라를 살해한 원수기도 했다.
슬라반 서커스단의 이름도 ‘야드 토슬’, ‘자스민 라일라’, ‘유밀 자반’의 이름에서 따왔을 정도로 세 사람의 사이는 돈독했었다.
그 사이에 금이 가기 시작한 건 자반이 조직에서 복귀를 명받은 이후부터였다.
“지금부터는 다시 질문으로 치겠어.”
내 선언에 야드는 다시 신중해졌다.
“아직 당신의 말을 전부 신뢰할 순 없습니다. 당신이 익힌 기예는 저나 자반 단장의 것과 흡사합니다. 당신이 어떻게 그 기예를 익히고 있는 거죠?”
그 질문에 나는 뭐라고 대답할지 고민했다.
“믿지 않아도 상관없지만 내가 익힌 ‘기예’는 정말로 내 친구에게 배운 거야. 그 친구는 자반과 아무런 연관이 없어. 그건 보증하지.”
내가 이 몸에 들어오기 전 일이니 관련 있을 리가 없었다.
“혹시 실례가 안 된다면 그 친구분과 만나 뵐 수 있겠습니까?”
“아니… 그건 안 되겠군. 그 친구는 이미 죽었으니까.”
지금 내가 무슨 표정을 짓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야드는 내게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제가 실례를 했군요.”
“괜찮아. 술이 조금 고프군.”
“무슨 마음인지 알고 있습니다.”
그는 복잡한 표정으로 마른세수를 했다.
“이게 마지막 질문이었으면 좋겠습니다만… 지금 자반이 있는 곳을 알고 계십니까?”
야드의 눈에는 원망과 살의(殺意)가 번들거렸다.
명백한 적대 의지에 나는 손으로 턱을 괴며 웃는 입가를 가렸다.
눈앞의 광대는 현명하게도 자신이 해야 할 일에 망설임이 없었다.
어설픈 온정과 망설임은 자신만이 아니라 주변까지 다치게 만드는 법이다.
완전히 용서할 게 아니라면 철저하게 적을 규탄하고 벌해야 마땅했다.
“아쉽게도 지금 그가 어디 있는지는 몰라. 그렇게 쉽게 꼬리를 내보이는 조직이 아니거든.”
내 대답에 야드는 아쉬움을 감추지 못했다.
“하지만 찾을 단서는 가지고 있지.”
“그게 뭐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묻는 그에게 나는 장난스럽게 말했다.
“그 전에 대답에 대한 정산으로 내 부탁을 하나 더 들어줘야겠지?”
난 아직 이 문답 거래로 얻어낼 것이 많이 남았다.
* * *
“말씀은 다 나누셨나요?”
프레시아의 물음에 나는 후련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만족할 만한 거래였어. 안 그래?”
나는 기가 다 빨린 것처럼 해쓱해진 야드를 보며 킥킥 웃었다.
그는 피곤한 듯 눈가를 양손으로 비비며 대답했다.
“다시는 당신과 거래 같은 건 하고 싶지 않습니다. 실시간으로 속 뒤집히도록 계속해서 새로운 의문을 만들고 그걸 빌미로 뜯어먹는 사람은 처음 봤습니다. 심지어 제 의문은 대부분 해소가 안 되었잖습니까!”
“그래도 서로 원하는 건 모두 얻었잖아?”
내가 동의를 구하자 야드는 차마 동의를 하고 싶지 않은지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그건… 그렇죠… 인정하고 싶진 않지만 맞는 말입니다.”
야드는 몇 년간 찾아 헤매도 일말의 흔적조차 찾을 수 없던 원수의 행방을 찾을 실마리를 얻었다.
나는 아바스엘을 떠넘겼을 뿐만 아니라 야드가 제작한 각종 마법 변장 도구와 야드와 연락할 수 있는 수단을 얻었다.
“프레시아, 이건 선물.”
나는 야드가 만든 마법 변장 도구인 머리끈을 건넸다.
“머리카락과 눈동자 색을 바꿀 수 있는 마도구라고 하니까 한번 해봐.”
“감사합니다.”
내게 머리끈을 받은 프레시아는 한 갈래로 땋은 머리 위로 머리끈을 묶었다.
그러자 붉은 머리카락이 서서히 갈색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머리카락 색만 바뀌었을 뿐이었는데도 인상이 확 변했다.
“그리고 이건 천변가면(千變假面). 얼굴을 바꿔주는 마도구라니까 한번 써봐.”
나는 끈이 달려 있지 않은 얇고 하얀 가면을 건넸다.
프레시아가 가면을 쓰자 점점 투명해지더니 눈매와 눈썹 모양, 콧대가 변하며 닮은 듯 다른 사람이 되었다.
야드는 프레시아에게 손거울을 건네며 부가적인 설명을 했다.
“착용자의 생각대로 주근깨를 더하거나 눈매를 바꿀 수 있습니다. 물론 극단적으로 다른 사람 얼굴은 되지 못하지만요.”
프레시아는 야드의 설명대로 눈매를 조금씩 바꿔봤다.
그 모습을 본 아바스엘은 감탄했다.
“이건 환형술의 일종인가! 누가 만든 건지는 몰라도 대단하군. 마법 각인이 조금만 엇나가도 굉장히 어색해질 텐데 이 정도로 정밀하면서도 자연스럽다니.”
아바스엘의 칭찬에 야드는 쑥스러워했다.
“아하하하, 그렇게 칭찬을 받으니 몸 둘 바를 모르겠군요. 원래는 얼굴을 바꾸는 게 아니라 가면 문양을 바꾸는 겁니다만 요청이 있으셔서 조금 손을 봤습니다.”
이 변장 가면도 문답 거래로 얻은 것 중 하나였다.
“이걸 자네가 만든 건가?”
아바스엘은 눈을 반짝이며 물었고 야드는 별것 아니라는 듯이 대답했다.
“예, 그래도 마력에 민감한 사람한테는 금방 들키는 물건이라 잘 사용하지는 않습니다. 공연 도중에 들키면 누가 되니까요.”
프레시아는 가면을 벗으며 내게 다시 건넸다.
“이건 저보단 도련님이 사용하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아, 내 것도 있으니까 그냥 가져. 엘도 이거 받아.”
내가 하얀 가면을 쓰고 살짝 얼굴을 바꾸며 아바스엘에게 가면을 건네자 그는 넙죽 받아 관찰했다.
“전 마력을 쓰지 못해서 못 사용하겠지만 연구용으로는 좋군요. 감사합니다.”
프레시아도 다시 가면을 썼다.
“이제 곧 공연이 시작하니 괜찮다면 객석에서 구경하시죠. 본 공연은 대기실에서 봤던 것보다 다채롭고 신기한 기예들로 가득합니다.”
야드의 권유에 나는 프레시아와 아바스엘을 끌고 객석으로 향했다.
그러고 보니 왕궁에 내가 없는 건 잘 속여주고 있는지 모르겠네.
뭐, 헤리온이 알아서 잘해주겠지.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