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1화. 어리석은 현자와 현명한 광대 (5)
현재 슬라반 서커스는 강변 터에 거대한 천막을 설치하고 거점으로 삼고 있었다.
야드를 만나러 가는 도중 주운 전단지에 따르면 서커스 공연은 오늘로 벌써 사흘째로 앞으로 적어도 일주일은 더 진행하는 모양이었다.
“이게 말로만 듣던 서커스군요. 직접 보는 건 처음이에요.”
프레시아가 감탄하며 서커스 천막을 보자 아바스엘도 마찬가지로 신기해했다.
“서커스는 나도 처음이군.”
“아바스엘 씨도요?”
프레시아의 물음에 아바스엘은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어려서부터 공부만 했으니까. 학창시절 위즐 녀석이 가자고 꼬드길 때 한 번쯤 가볼 걸 그랬어.”
원래 학교 다닐 때 공부만 한 사람들이 흔히 갖는 미련이었다.
나는 두 사람의 등을 가볍게 치며 말했다.
“들어가자고.”
내가 앞장서서 안으로 들어가자 두 사람도 따라 들어왔다.
천막 안으로 들어가자 어둑해진 밖과 달리 마법 조명으로 굉장히 밝았다.
서커스단은 공연 전 무대 장치를 확인하는 중으로 보였다.
아바스엘은 서커스 단원 중 오거의 어깨에 앉아서 채찍을 휘두르는 꼬마를 보고는 감탄했다.
“세상에, 저 흉폭한 오거를 길들이다니 대단하군. 저렇게 어린데도 몬스터 테이머인가?”
“몬스터 테이머는 어리면 못 하나요?”
프레시아의 질문에 아바스엘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 가능은 하지. 다만 자질도 자질이지만 담력과 오랜 훈련이 필요해서 어린 나이에 몬스터 테이머가 되는 건 굉장히 드문 편이다.”
슬라반 서커스의 몬스터 테이머라면 작중 서른두 살이었으니 지금은 스물아홉 살이었다.
몸이 자라지 않는 희귀병을 앓고 있다고 했었나?
나는 서커스 단원 중 야드를 찾으며 대충 대답했다.
“보기보다 나이가 많나 보지.”
그때 날이 선 단검에 기름칠을 하던 마른 청년이 우릴 발견하고는 외쳤다.
“아직 공연 시작 시간이 안 됐어요! 여기 들어오시면 안 됩니다!”
그의 말에 무대를 점검하고 있던 단원들의 이목이 우리에게로 쏠렸다.
관객석으로 마련된 공간에 서서 단원들을 지켜보던 거구의 사내가 우리에게로 다가오며 친절한 목소리로 말했다.
“하하하! 저희 공연이 기대해 주시는 건 감사하지만 방금 들었던 대로 아직 공연 시간이 아닙니다. 죄송하지만 조금 있다가 방문해 주시겠습니까?”
2미터는 넘어 보이는 거구라, 이 사람이 슬라반 서커스의 단장 대리인가?
야드가 가장 신뢰하는 사람이었으니 나에 대해 말했을 거다.
나는 단장 대리의 정중한 요청에 소매에서 숨겨둔 티켓을 꺼내며 말했다.
“그렇습니까? 저희는 야드 토슬이라는 분이 저녁 공연 전에 찾아오면 구경을 시켜 주겠다고 하셔서 왔습니다만.”
내 손에 갑자기 없던 티켓이 나타나자 단장 대리는 눈을 크게 뜨며 놀랐다.
“아! 부단장이 말씀하신 손님이셨군요.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단장 대리의 환영에 서커스 단원들은 호기심 가득한 얼굴로 우리를 바라봤다.
“그런데 손님은 두 분이라고 들었습니다만….”
“부단장님과 만났을 때는 다른 곳에 있었습니다. 표를 한 장 더 사야 합니까?”
내 물음에 단장 대리는 사람 좋아 보이는 미소를 지었다.
“하하하하! 그럴 리가요. 부단장이 직접 초대한 손님께 돈을 받을 순 없지요. 공연 준비하는 걸 보시겠습니까? 아니면 부단장을 먼저 만나시겠습니까?”
두 가지 선택지 중 나는 후자를 선택했다.
“초대에 응했으면 초대해 주신 분께 인사를 먼저 드려야죠.”
“그렇군요. 아, 데리고 온 말은 저희가 잠시 돌봐도 괜찮겠습니까?”
단장 대리가 말을 보며 묻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예, 돌봐 주신다면 오히려 고맙죠.”
“엠마!”
단장 대리의 호명에 오거 어깨 위에 앉아 있던 작은 여자는 오거 위에서 뛰어내리고 우리에게 다가왔다.
“오, 내 몸에 밴 오거 냄새에도 날뛰지 않다니 교육 잘 받은 말이네. 착하지, 따라오렴.”
엠마라고 불린 몬스터 테이머가 말목을 쓰다듬자 말은 긴장이 풀린 듯 얌전히 그녀를 따라갔다.
“엠마는 몬스터뿐만 아니라 동물도 잘 다루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부단장은 뒤편에 있으니 따라오시죠.”
우리는 단장 대리의 안내를 따라 안으로 들어갔다.
* * *
아리사는 갓 구운 호두파이를 베어 물며 퉁명스럽게 말했다.
“수도에서 오래 살아서 길 잘 안다면서! 서커스가 있는 곳에는 언제 도착하는 건데!”
아리사의 투정에 니벨은 우물쭈물하며 대답했다.
“전단지에 적힌 곳이면 분명 이 근처일 텐데… 이상하네요.”
니벨이 불안한 얼굴로 두리번거리자 아리사는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이지! 니벨을 믿은 내 잘못이지! 어떻게 수도에서 십여 년을 살아놓고 길 하나 찾질 못하는 거야!?”
아리사가 힐난하자 니벨은 억울하다며 항변했다.
“그치만! 제가 수도에 살았을 적에는 마법 학교를 다니며 마탑에서 인턴 생활을 하느라 바빴다고요! 전 당신처럼 근본 없이 마법을 익히지 않아서 시간이 널널하지 않았어요!”
니벨의 외침에 아리사는 니벨의 멱살을 붙잡았다.
“지금 내가 근본 없다고 했냐? 냐하하하! 내 영원한 종이 되고 싶으면 진작 말하지 그랬어? 당장 그 살을 발라 스켈레톤 메이지로 만들어 줄 테니까!”
“흐, 흥! 누가 무서울 줄 알고요? 당신이야말로 제 인형 컬렉션이 되고 싶은 모양이죠!”
두 사람은 바로 근처에 위치한 서커스 천막도 보지 못하고 서로 마법 지팡이를 들며 신경전을 벌였다.
* * *
“왜 그래?”
나는 갑자기 흠칫하며 뒤를 돌아보는 프레시아를 보며 물었다.
프레시아는 미간을 좁히더니 이내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순간 불길한 마력의 파장이 느껴진 것 같아서요.”
프레시아의 말에 나는 아바스엘을 바라봤다. 아바스엘은 내 시선에 난감하다는 듯이 웃었다.
“아하하, 전 모르겠는데요.”
아바스엘의 대답에 프레시아는 머쓱하게 웃었다.
“그냥 제 착각일 수도 있어요.”
프레시아는 그렇게 말했지만 다른 사람도 아니고 야생동물 수준의 감각을 지닌 그녀가 감지한 거면 무시하기 힘들었다.
한 순간의 방심이 커다란 X됨을 야기하는 법이다.
“아니, 혹시 모르니까 두 사람 다 경계해 둬. 언제든 날 데리고 잽싸게 튄다는 마음가짐으로 있어.”
내 지시에 프레시아는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고 아바스엘은 어이없다는 듯이 날 바라봤다.
나는 가볍게 웃어 보이고는 단장 대리의 뒤를 바짝 쫓았다.
단장 대리는 천막 뒤편에 정차된 투박하면서도 커다란 마차에 다가가 문을 두드렸다.
“부단장! 네가 말한 손님이 찾아왔다!”
단장 대리의 외침에 마차 안에서 야드가 나왔다.
“방문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서커스단 구경은 하셨습니까?”
야드의 질문에 단장 대리가 대답했다.
“손님께서 초대해 준 사람에게 먼저 인사를 하는 게 도리라고 하셔서 모셔왔다.”
“아! 그렇군요. 그럼 제가 직접 서커스를 소개해 드릴까요?”
그의 물음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부탁드리죠.”
앞으로 아바스엘과 함께 움직여야 할 사람들이니 살펴보는 게 좋았다.
“일단 제 소개부터 드려야겠군요. 전 슬라반 서커스단의 부단장을 맡고 있는 야드 토슬입니다.”
야드의 자기소개에 단장 대리도 자기소개를 했다.
“전 서커스단의 단장 대리, 아서 존 자멧슨입니다.”
그들의 인사에 나는 싱긋 웃으며 나와 두 사람을 소개했다.
“전 유안이라고 하고, 여기 둘은 제 친구인 프레시아와 엘이라고 합니다. 이렇게 초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바스엘이 마법계를 떠난 지 십 년 정도 지났지만 한때 명성이 자자한 마법사였기에 본명을 밝히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아니요, 저야말로 갑작스러운 초대에 응해 주신 게 감사할 따름이죠.”
통성명이 끝나자 단장 대리는 내게 살짝 고개를 숙여 보이고는 말했다.
“그럼 저는 아직 공연 준비가 한창이라 돌아가 보겠습니다. 그리 큰 서커스단은 아니지만 즐거운 시간되시기 바랍니다.”
단장 대리가 떠나자 야드는 습관처럼 트럼프 카드를 꺼냈다.
“따라오시죠.”
야드는 우리를 서커스 천막 대기 공간으로 데려갔다.
대기 공간은 공연장보다는 좁았지만 대기를 하며 몸을 풀 수 있도록 꽤나 넓었다.
“다들 몸은 풀었습니까? 부상자는 없죠?”
야드의 물음에 서커스 단원들은 당연하다는 듯이 웃었다.
“물론이지 부단장! 그런데 뒤에는 누구?”
얇은 몸에 탄탄한 근육질의 청년이 묻자 야드는 우리를 소개하며 양해를 구했다.
“이분들은 제가 개인적으로 초대한 손님들입니다. 그래서 말인데 죄송하지만 여러분이 몸 푸는 걸 보여 드려도 괜찮겠습니까?”
서커스 단원들은 우리에게 관심을 보였다.
“부단장 손님이라면 몸 푸는 것만 보여줘서야 우리 체면이 안 서지!”
“그럼, 그럼! 각자 장기 하나씩 보여줘서 부단장 기 좀 살려주자고!”
그들은 오히려 나서며 각자의 기술을 선보이기 시작했다.
“선발은 나, 불을 토하는 광대! 루파스!”
가장 먼저 나선 건 우리가 누구냐고 물었던 청년이었다.
그는 횃불을 하나 챙기더니 기름으로 보이는 액체를 머금고 횃불 위에 뿜었다.
그러자 허공에 큼지막한 불길이 솟아올랐다.
“오오!”
우리가 신기해하며 박수를 치자 다음 사람이 나왔다.
“다음은 나! 난 고무 인간! 아스빌!”
고무 인간이라 소개한 사람은 뒤로 엎어지듯 브릿지를 하더니 상체를 180도 비틀어 땅을 짚었다.
아스빌은 기괴하게 엎드린 채로 손과 발을 움직여 엉금엉금 걸었다.
그 신기한 모습에 나는 진심으로 감탄했다.
“나는 하늘을 걷는 곡예사! 에일!”
곡예사라는 여자는 위에 연결된 줄을 타고 빠르게 올라가더니 반동을 줘서 멀리 떨어져 있는 다른 줄로 뛰어다니는 기예를 펼쳤다.
그저 예의상 저글링같이 보편적인 정도만 보여줘도 충분할 텐데 서로 앞다투며 연달아 각자의 기예를 선보이는 모습에 이들에게 있어서 야드가 어떤 존재인지 알 수 있었다.
계속해서 이어지는 기예에 프레시아와 아바스엘은 연달아 박수를 치며 푹 빠졌다.
나는 슬쩍 뒤로 빠져 야드에게 말을 걸었다.
“잠깐 괜찮나?”
내가 밖으로 나가자고 고갯짓하자 야드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혹시 저희들의 기예가 마음에 안 드십니까?”
야드의 걱정에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기예는 충분히 놀랍고 재미있어. 하지만 날 초대한 게 단순히 구경이나 시켜주기 위해선 아닐 텐데?”
내가 장난스럽게 웃어 보이자 야드의 표정이 살짝 굳었다.
“…그건 그렇습니다. 그럼 사람 많은 곳에서 할 이야기는 아니니 제 개인 대기실로 가시죠.”
야드의 권유에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프레시아에게 속삭였다.
“잠시 부단장과 대화 좀 하고 있을 테니 여기서 구경 좀 하고 있어.”
“아, 저도 따라 가겠습니다.”
“아니, 다른 사람이 있으면 저쪽이 불편할 테니까 그냥 여기 있어. 여차할 땐 나비도 있으니까.”
내 명령에 프레시아는 살짝 풀이 죽은 듯했다.
나는 어깨를 가볍게 토닥이고는 야드와 함께 대기 공간을 나갔다.
“동료분이 따라오셔도 전 괜찮습니다만.”
야드가 능글맞은 표정으로 말하자 나는 피식 웃었다.
“자반 단장에 대한 일은 그렇게 가벼운 이야기가 아닐 텐데?”
내 말에 야드의 표정이 급격히 굳었다.
“당신…!”
“밖은 추우니 안에 들어가서 마저 이야기하자고.”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