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0화. 어리석은 현자와 현명한 광대 (4)
“아바스엘! 당장 이 문 안 열어?!”
두 사람이 떠나고 아바스엘이 감금되어 있던 방에 홀로 남은 프레시아는 잠금 장치가 없는 문이 열리지 않도록 꽉 잡았다.
문밖에서 부티크 직원들은 쾅쾅거리며 문을 두들겼다.
“뭐야?! 이거 안에 잠금장치 없는 거 맞아? 왜 안 열려?”
“안 열리면 부숴!”
쾅! 쾅!
밖에서 온몸으로 문에 부딪치는지 문이 크게 흔들리자 프레시아는 문 전체에 마력을 주입해 보강했다.
그리고는 바닥에 새겨진 마법 각인을 확인하며 방금 전까지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 * *
“좋아, 그럼 이제 옷 좀 벗어봐.”
유안의 말에 아바스엘은 자신의 옷가지를 부여잡으며 당황했다.
“내, 아니 제 옷은 왜?”
숫총각 같은 그의 반응에 유안은 어이없다는 듯이 대답했다.
“당연히 탈출해야 하니까 옷 벗으라고. 그 옷 입고 탈출할 거야?”
“아….”
유안이 프레시아가 입은 옷과 같은 여벌의 옷과 가면을 식자재 창고에서 꺼내자 아바스엘은 납득했다.
프레시아가 검을 뽑아 족쇄를 끊어주자 그는 옷을 갈아입기 시작했다.
유안은 앙상한 몸의 아바스엘을 보며 프레시아에게 말했다.
“너도 그 외투 벗어서 아바스엘에게 줘. 혼자 벗어나는 것쯤은 간단하겠지?”
프레시아는 지시대로 외투를 벗어 아바스엘에게 건네며 자신 있게 대답했다.
“예, 가능합니다!”
그러나 대답 직후 아래쪽을 보더니 말을 정정했다.
“아, 하지만 아래에 꽤 강한 사람이 있습니다. 따돌리는 데 시간이 꽤 걸릴 것 같은데 괜찮을까요?”
프레시아의 말에 유안은 속이 시커매 보이는 미소를 지었다.
“그건 걱정하지 않아도 돼. 계책은 있으니까. 그나저나 역시 키는 아바스엘이 더 크네. 목 좀 움츠려 봐, 무릎도 티 안 날 정도로 굽히고.”
유안의 태연한 태도에 프레시아는 순간 역시나라고 생각하며 쓰게 웃었다.
암살 사건 이후 성격이 바뀐 모습에 점점 적응하고 있었다.
옷을 갈아입고 유안이 준비한 여분의 가면까지 쓴 아바스엘은 불안한 듯 물었다.
“이렇게 허술하게 속일 수 있는 겁니까?”
“괜찮아, 괜찮아. 어지간한 눈썰미로는 못 알아봐. 그리고 나랑 만나기 전에 겁 좀 주고 왔거든. 제까짓 놈들이 의심하면 어쩔 건데? 우리 뒷배는 왕후라고, 아~! 꼬우면 왕후한테 따지라고 하면 돼.”
유안의 너스레에 아바스엘은 머리가 아픈지 이마를 짚었다.
그 모습에 유안은 낄낄대며 창고에서 순도 높은 마석을 꺼냈다.
“어때? 이 정도면 꽤 크게 폭발시킬 수 있겠지?”
갑자기 모르는 마석을 꺼내자 프레시아는 직감적으로 밤 산책 때 얻은 것 중 하나임을 깨달았다.
동시에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자신의 주군에 대해 모르는 게 너무 많다는 사실을 자각했다.
순간 서운한 마음이 들었던 그녀는 자신의 생각에 놀라며 고개를 저었다.
그녀 자신이 생각하는 이상적인 기사는 어떤 일에도 주군을 믿고 따르는 기사다.
주군이 믿음에 배신하지도 않았는데 서운함 같은 감정을 가지는 건 기사답지 못한 마음가짐이라 생각하며 스스로를 다독였다.
유안이 마석을 건네자 아바스엘은 마석을 받으며 진지하게 대답했다.
“폭발 마법같이 위험한 마법을 각인시키는 거라면 시간이 많이 걸립니다. 적어도 30분은 있어야 할 텐데 그 정도 시간을 부티크가 허용할진….”
“뭔 소리야? 굳이 폭발 마법을 왜 각인해? 그냥 실패시켜.”
“아! 그런 방법이!”
아바스엘은 유안의 말에 감탄했다.
때때로 마법 각인의 실패는 거대한 폭발을 일으키기도 했다.
어려서부터 안전을 위해 마법을 사용할 때마다 실수하지 말 것을 강박적으로 주입받아 온 아바스엘은 떠올리기 힘든 방식이었다.
“그럼 1분도 안 걸립니다. 폭발 지연 시간은 어느 정도로 할까요?”
“15분.”
유안의 지시에 아바스엘은 마법 금속이 담겨 있는 각인펜을 바닥에 대충 휘갈겨 각인했다.
그리고는 각인 끝에 펜을 떼지 않고 바닥 가득히 지그재그로 선을 그었다.
“이 지그재그 선은 일종의 도화선입니다. 끝에 마석을 놓으면 선을 따라 마력이 흐르게 되고 각인에 도달했을 때 폭발이 일어나는 거죠.”
“그래? 잘했어.”
유안은 아바스엘의 설명을 한 귀로 흘리며 시장에서 산 작은 공에 구멍을 뚫고 녹슨 못을 집어넣었다.
그리고는 나비에게 무언가 지시를 내렸다.
“뭘 만드시는 건가요?”
프레시아의 질문에 유안은 그녀에게 작은 공 세 개를 건네주며 다시 한 번 악동처럼 웃었다.
“이거? 아주 재미있는 거.”
유안은 프레시아에게 어떤 식으로 시간을 벌지 일러주고는 당당히 아바스엘을 데리고 나갔다.
* * *
쾅! 쾅!
“당장 안 열어!? 이 문짝은 뭘로 만들었는데 이렇게 튼튼해?!”
“아바스엘! 문 열어! 그저 밑으로 내려가서 율리안 님께 고객님이 뭘 지시했는지만 말하면 된다고!”
밖에서 쾅쾅거리며 문 두드리는 소리에 프레시아는 회상에서 벗어났다.
성당 내부의 기척을 확인하니 대부분 성당 지하에 있었고 몇몇 사람들이 이곳으로 오고 있는 게 느껴졌다.
“이렇게 나오면 좋지 않을 거다! 또 굶고 싶은 모양이지?”
밖의 사람들도 슬슬 인내심이 다해가는지 협박하기 시작했다.
바닥에 빛을 내는 각인의 위치가 마법에 거의 다다른 걸 확인한 프레시아는 유안이 지시한 대로 작은 공에 마력을 불어넣고 문을 살짝 열었다.
그리고는 문 틈새로 던지고 바로 닫았다.
프레시아가 문에서 떨어지자마자 안으로 들어오는 걸 막기 위함이었다.
펑! 펑! 펑!
극한으로 압축된 공기가 프레시아의 마력에 반응해 팽창하며 공이 터져나갔다.
“으아아악!”
“크윽! 이게 뭐야! 아바스엘!!”
“사, 살려줘…!”
문 밖에서 비명 소리와 신음 소리가 들려오자 프레시아는 잡고 있던 손잡이를 놓고 바로 창문 밖으로 뛰어내렸다.
공 안에 들어 있는 못에 당한 이들은 문을 열고 들어올 생각도 못 한 채 도망치듯 계단을 내려갔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아바스엘의 마법 각인이 거대한 폭발을 일으켰고 성당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확실히 이 정도면 왕자님 말씀대로 쫓아올 생각은 하지도 못하겠네.”
그 모습을 성당 담벼락 밖에서 확인한 프레시아는 혀를 내두르며 유안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 * *
“다녀왔습니다.”
“어, 왔어?”
폭발이 일어난 지 1분도 되지 않아 도착한 프레시아는 내 옆자리에 앉았다.
“와, 크흠! 도련님께서 마차를 모신 건가요?”
왕자님이라고 말할 뻔한 프레시아는 급하게 도련님으로 정정하며 내게 물었고 나는 고삐를 프레시아에게 넘겼다.
“어우, 무서워서 마차는 못 몰겠더라. 돌아가면 말 타는 법부터 좀 배워야겠어.”
지금 시점에서 프레시아가 마차를 몰 줄 아는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말을 타는 기사니 나보다는 잘하겠지.
내 말에 프레시아는 마차를 움직이며 살짝 들뜬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럼 제가 스승님께 배운 말 다루는 요령을 전수해 드리겠습니다.”
“어…? 네가?”
프레시아는 가르치는 데 재능이 없는 걸로 알고 있는데 배워도 될까?
“제게 배우시는 게 불만이신가요?”
살짝 섭섭해하는 게 느껴지는 물음에 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아. 하. 하. 불만이라니, 그럴 리가.”
아직 가면을 쓰고 있어서 다행이다. 프레시아는 내게 엄하지 못하니까 괜찮겠지.
…괜찮겠지?
* * *
벌써 저녁노을이 산 어귀를 넘어가며 하늘이 어둑어둑해지기 시작했다.
우리는 인적 드문 곳에서 마차를 식자재 창고에 넣고 그 자리를 피했다.
“여기까지 왔으면 추적은 걱정하지 않아도 괜찮겠네.”
내 말에 아바스엘은 가면을 벗고 숨을 깊게 들이쉬었다.
“이게 자유인가….”
산등성이에 걸린 달과 서서히 선명해지는 별들을 보며 중년의 사내는 눈물을 흘렸다.
그가 갇힌 곳에도 작은 창문이 있었지만 어디까지나 통풍을 위해서지 탁 트인 하늘을 올려다볼 수 있는 환경은 아니었다.
작은 골방에 십 년이란 세월을 갇혀 지냈으니 감성적이 되는 것도 당연했다.
나도 가면을 벗으며 피식 웃었다.
“아직 감동하기는 일러. 진정한 자유는 마법을 찾고 나서부터지, 안 그래?”
내 말에 아바스엘은 소매로 눈물을 훔치며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합니다. 이 은혜를 갚기 위해서라도 마법을 되찾아야죠.”
그렇게 대답한 그는 내 얼굴을 뚫어져라 바라봤다.
“그런데 생각보다 …많이 어리셨군요.”
“그야 열일곱 살이니까. 이왕 같은 배를 타게 됐으니 제대로 통성명이나 하자고, 급하게 빠져나오느라 자기소개도 못 했잖아.”
내 제안에 아바스엘은 마탑의 예법대로 오른손을 심장에, 왼손을 등에 가져다 대며 허리 숙여 인사했다.
“마법을 잃은 마법사, 아바스엘 파인만이 제 지팡이의 주인께 인사를 드립니다.”
그 인사에 화답하듯 나도 궁중 예법대로 인사를 받았다.
“듀플리온 왕국의 적장자이자 마법을 잃은 지팡이의 주인, 1왕자 유안 델 아즈데미안 듀플리온이다. 잘 부탁한다.”
내 이름을 들은 아바스엘은 놀라서 날 바라봤다.
내가 인사를 하자 프레시아도 가면을 벗으며 탐스러운 붉은 머리칼을 쓸어 넘겼다.
“왕자님의 제1 기사, 프레시아 자밀레이온이라고 합니다.”
아바스엘은 간략한 기사 예법대로 인사를 하는 프레시아를 보며 물었다.
“정말로 와, 왕자님이시라고? 왕자면서 왕후를 사칭해 그 난리를 친 겁니까?”
더욱 경악하는 그를 보며 나는 장난스럽게 웃었다.
“현 왕후는 내 친모가 아니야. 그림자 탑의 마녀에게 당하기 전에도 내 이야기 정도는 들어봤을 텐데? 1왕자의 처지 같은 거 말이야.”
“그건… 들어본 적 있는 것 같군요. 분명 몇 달 차이로 장자 출산이 늦어서 왕후가 눈엣가시처럼 여기는 왕자가 있다는 소문이었죠.”
아바스엘의 말에 나는 스스로를 가리켰다.
“그 소문의 왕자가 나야. 참고로 얼마 전 왕후가 날 죽이려고 암살자까지 보냈지.”
정확히는 협력이었지만 솔직히 거기서 거기였다.
내 말에 프레시아에게서 살짝 따끔따끔한 무언가가 느껴졌다.
“왕자님께 암살자를 보낸 자가 왕후였습니까? 감히…!”
“프레시아, 진정해. 당장 손에 넣은 물증도 없을뿐더러 설령 물증이 있다고 해도 내 힘이 아직 미약해.”
내가 다독이자 프레시아에게서 뿜어져 나오던 무언가가 차츰 사그라졌다.
“죄송합니다. 흥분해서 그만.”
고개를 떨구며 사과하자 나는 활짝 웃었다.
“괜찮아, 오히려 화를 내주니까 든든하네. 하지만 왕궁에서는 조심해.”
“명심하겠습니다.”
프레시아는 결연한 표정을 지었다.
“그럼 이제 어떻게 움직입니까? 저도 왕궁으로 함께 들어가는 겁니까?”
아바스엘의 물음에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왕후는 내 적이자 그림자 탑을 하부 조직으로 두고 있는 배후, ‘아르카나’와 협력 관계야. 그런 상황에서 네가 왕궁에 들어가는 건 위험할뿐더러 하루라도 빨리 마법을 되찾아야 하는 네 행동반경을 좁힐 뿐이지.”
“확실히 그렇군요. 왕궁에 드나드는 궁중 마법사들 중에는 제 얼굴을 알고 있는 녀석들도 있을 테니 말입니다.”
폭발로 아바스엘은 죽은 걸로 처리됐을 테지만 소문이 나면 아바스엘뿐만 아니라 나도 위험해진다.
“마음 같아선 나도 같이 움직이며 네 마법을 되찾는 걸 도와주고 싶지만 난 아직 왕궁에서 할 일이 있어.”
아직 손에 넣지 못한 중요한 물건이 두 개나 된다.
왕궁을 떠나는 건 그 두 개를 손에 넣고 난 다음이었다.
“네 저주를 풀 수 있는 물건이 숨겨진 장소와 찾는 방법을 알려 줄 테니 내가 붙여줄 사람들과 함께 움직이도록 해.”
“사람을 붙여 주신다고요?”
그게 누구냐는 아바스엘과 프레시아의 표정에 나는 창고에서 서커스 공연표를 꺼냈다.
“꽤나 믿음직한 사람이지.”
아, 근데 사람이 셋이 됐는데 표 두 장으로 들여보내 주려나?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