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9화. 어리석은 현자와 현명한 광대 (3)
내 권유에 아바스엘은 어처구니없다는 듯이 실소를 터트렸다.
“하! 말도 안 되는 소리군! 내게 자유와 가장 원하는 걸 줘? 내가 가장 원하는 게 뭔지 알고 하는 소리냐!”
역정을 내는 그를 보며 나는 별것 아니라는 듯이 대답했다.
“마법을 잃은 마법사가 원하는 게 뭐겠어? 당연히 마법을 되찾는 거지.”
“그걸 알면서도 내가 원하는 걸 주겠다고 하는 건가?”
마치 귀가 썩을 것 같다는 표정을 지으며 날 비웃었다.
그런 그를 보며 나는 그에게로 다가가 책상에 걸터앉았다.
“그래. 알고 있으니까 제안하는 거야. 네가 걸린 저주 ‘거꾸로 자라는 겨우살이’를 풀 방법을 알고 있다.”
내 말에 죽어 있던 공허한 눈이 강렬한 분노로 불타오르기 시작했다.
“그런 게 있을 리가 없어! 만약 있다면! …있다면 내가 이런 꼴이 되지도 않았을 거야.”
하지만 순간의 불꽃은 스쳐가듯 사그라지며 깊은 절망에 잠식되었다.
일단 저 무기력증부터 해결해야겠군.
“잘 들어. 네 저주는 신화 속 일화를 본뜬 지독한 저주야. 신화적인 현상의 일부를 강제하고 온몸을 침식하지. 하지만 신화 속 일화를 본떴다는 건 그 신화 속 일화에 해주의 실마리가 있다는 의미기도 하지.”
솔직히 소설 속에서 제이드가 한 말이라 정확하게 무슨 의미인지 모르겠지만 일단 그대로 말했다.
천재라 칭송받던 아바스엘이라면 아는 게 있을 거다.
내 예상대로 내 말에 뭔가 떠오르는 게 있는지 아바스엘은 눈을 크게 뜨며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렸다.
“신화 속 일화에 그 실마리가 있다…. 그래, 그런 거였나!”
혼자 뭘 이해했는지는 모르겠지만, 혼자 흥분하던 그는 혼자 알아서 차분해졌다.
“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겠다. 제길, 그 사실을 진작 알았다면 최소한 객사를 했을지언정 이런 곳에 처박혀 있지 않았을 텐데.”
나는 지독한 자기혐오에 빠진 아바스엘의 어깨를 토닥였다.
“자책할 필요는 없어. 어차피 그 마녀가 네게 저주를 건 것도 부티크의 협력 덕분이라 저주에 걸린 순간부터 넌 여기 갇힐 운명이었으니까.”
내 위로 아닌 위로에 아바스엘은 벌떡 일어났다.
“뭐라고!? 부티크가 그년이랑 붙어먹었다고?!”
아바스엘이 마법을 잃고 부티크에게 감금당해 각인사로 일하게 된 이유는 생각보다 어처구니없었다.
이 순진한 멍청이는 자신에게 일부러 접근하는 마녀를 몰라보고 간이고 쓸개고 다 빼주려다 함정에 빠져서 저주에 걸렸다.
당연히 마법을 잃게 만든 장본인인 마녀는 볼일을 다 봤으니 그의 곁을 떠났고, 모든 걸 잃고 방황하던 아바스엘에게 부티크가 접근했다.
그들은 아바스엘에게 먹고살게 도와주고 마법을 되찾을 방법도 같이 찾아주겠다고 꼬드겼다.
그 입발림 소리에 넘어간 아바스엘이 얻은 것은 술식 각인이라는 매일 같은 중노동과 삼시 세끼가 전부였다.
“이상하다고 생각 안 했어? 모든 걸 잃은 사람에게 그렇게 시의적절하게 도움을 주겠다고 손 내미는 단체가 있을 리가 없잖아?”
내 지적에 그는 허탈한 웃음소리를 내었다.
“하, 하하하. 그럴 수가. 그저 몰락한 날 이용해 먹으려고 접근한 게 아니었던 건가? 그 마녀랑 손잡고! 내게 그런 저주를 걸어놓고! 그 저주를 같이 풀어보자며 손을 내밀었단 말이야!”
마법사라면 누구나 꿈꾸는 지위인 현자가 될 것이라 칭송받던 젊은 마법사는 실로 세상 물정 모르고 어리석었다.
그의 꺼져버린 마음의 심지에는 분노와 증오라는 불꽃이 불타오르기 시작했다.
그리 좋은 마음가짐은 아니었지만 적어도 아무것도 하지 않는 무기력한 상태보다는 훨씬 나았다.
아바스엘은 강렬한 의지가 생기자 방금 전까지의 아무래도 좋다는 태도를 버리고 똑똑한 머리를 쓰기 시작했다.
“넌 그 사실을 어떻게 알았지? 아니, 그 전에 그 사실을 내게 알려주는 이유가 뭐냐?”
드디어 마법사다워졌군.
아주 마음에 든다.
“내가 아는 이유는 간단해. 이곳, 부티크는 날 죽이려 드는 놈들의 반쯤 하수인이거든. 정확히는 내 적이 부티크의 최대 고객쯤 되지.”
내 말에 프레시아는 놀라서 날 바라봤다.
이 이야기는 프레시아에게도 하는 말이기도 했다.
“나는 오랫동안 날 죽이려드는 내 적들을 조사해왔다. 어느 날 내 정보망에 부티크의 존재가 걸렸고, 어느 정도 부티크에 대한 파악을 끝냈지. 네 존재와 네가 걸린 저주의 정보는… 솔직히 조사를 하다가 우연히 얻어 걸린 것에 불과했다.”
당연히 거짓말이다.
이 몸뚱어리에 들어온 지 한 달도 안 됐는데 그런 정보망을 구축할 수 있을 리가 없지 않은가.
그래도 부티크가 자신의 존재를 외부에 숨기고 있다는 사실 정도는 알고 있을 테니 처음부터 알고 조사를 했다는 말보다는 사실감이 느껴질 터였다.
내 생각대로 우연이라는 말에 묘한 설득력을 느꼈는지 적대적이던 아바스엘의 표정이 바뀌었다.
“그렇군. 그럼 한 가지 더 의문이 있다. 율리안, 그 애송이는 널 귀한 고객이라 말했다. 부티크가 네 적이라면 어떻게 고객으로서 나와 만나게 된 거지?”
그의 물음에 나는 잠시 고민하다 대답했다.
“그 대답은 곤란하군. 네가 내 사람이 되지 않는다면 부티크에 알려줄 수도 있으니 안 된다.”
내가 대답을 거절하자 아바스엘은 미간을 좁혔다.
“내가 부티크의 편이 될 거란 말인가?”
“아니. 네가 당한 걸 생각하면 부티크의 편은 안 되겠지.”
“그럼 왜?”
아바스엘의 물음에 나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너무 오랫동안 머리를 안 쓴 모양이군. 네가 고문을 당한다면 토설하지 않을 자신이 있나? 그 정도로 자신의 인내력을 자신하는 건가?”
“그건…!”
그 스스로도 자신이 없는지 살짝 시선을 내렸다.
그의 모습에 나는 속으로 웃었다.
역시 사람은 몇 년 동안 단순 노동을 반복하면 두뇌 회전이 느려지나보다.
총명했던 전성기의 그라면 내가 어떤 방식을 사용했든 다시 사용할 수 있을 만큼 부티크가 만만한 곳이 아니라는 걸 쉽게 눈치챘을 거다.
나는 일부러 한숨을 내쉬며 선심 쓰듯 말했다.
“그래, 사람의 신용을 얻기 위해서는 리스크를 감수해야지. 내가 이곳에 들어온 방식을 알려주겠다.”
아바스엘은 생각지도 못했는지 눈을 크게 뜨며 놀랐다.
“나는 부티크 이용 고객의 하수인을 사칭해서 들어왔다. 참고로 사칭한 고객은 이 나라의 왕후다.”
내 말에 아바스엘과 프레시아는 경악했다.
아, 그러고 보니 프레시아에게는 말 안 해뒀었지.
“미친…! 미친 게 분명해! 어떻게 사칭할 게 없어서 왕후를 사칭해!”
그의 외침에 나는 혼을 내듯 타일렀다.
“정신 차려! 나와 네 적은 그 정도는 하지 않으면 상대할 수 없을 만큼 강대하다! 네게 저주를 건 마녀가 어디 소속인 줄 아나? 바로 그림자 탑이다!”
내가 다시 한 번 충격적인 정보를 알려주자 아바스엘의 얼굴은 새하얗게 질렸다.
“그, 그림자 탑이라고?”
그림자 탑은 마탑의 마법사 중에서도 아는 사람만) 아는 비밀로, 마탑 안에 숨어 있는 비밀 조직 중 하나였다.
그림자 탑의 마법사들은 하나같이 마법의 발전을 위해서라면 법과 도덕을 버려야 한다고 믿는 미치광이들이었다.
그림자 탑에 속하려면 굳이 마탑 소속이 아니어도 실력만 있다면 충분히 들어갈 수 있었다.
“그래. 넌 인지하지 못한 모양이지만 그림자 탑은 네 재능을 높이 사서 포섭하려 했다. 하지만 상식인이었던 넌 그림자 탑에 부정적이었고, 그 미치광이들은 순순히 널 포기하려 했지. 포섭하려는 과정에서 실수로 네게 그림자 탑의 흔적을 흘리지만 않았다면 말이야.”
내 설명에 아바스엘은 충격받은 표정으로 이마를 짚었다.
“고작 그런 이유로 날?”
보아하니 짐작 가는 게 있는 듯했다.
“그림자 탑의 악명을 생각하면 그들 입장에선 조직이 와해될 수 있는 중대한 문제였겠지. 특히 넌 당시 위즐가의 소가주와 절친하면서, 차기 현자 후보로 손꼽혔으니까.”
아바스엘은 덜덜 떨면서 눈물을 흘렸다.
그의 눈에는 깊은 증오가 서려 있었다.
“…네 적은 나와 마찬가지로 그림자 탑인가?”
그의 물음에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더 위다. 그림자 탑은 그저 내 적의 하부 조직에 불과해. 물론 내 적을 상대하다 보면 반드시 마주치게 되겠지.”
아바스엘은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날 바라봤다.
하지만 이내 마른세수를 하며 고민하더니 진지한 얼굴로 내게 물었다.
“넌 내게 자유와 마법을 되찾아주겠다고 했어. 그렇다면 방법이 있는 거겠지?”
“물론. 이제 결심은 서셨나?”
내 장난스러운 물음에 그는 결의에 찬 얼굴로 내 앞에 천천히 한쪽 무릎을 꿇었다.
“당신이 어떤 사람이든, 어떤 적과 싸우든 상관없습니다. 당신이 약속을 지킨다면 지금 이 시간부로 내 마법과 지팡이는 당신의 것입니다.”
그의 맹세에 나는 흡족하게 웃으며 그의 어깨를 토닥였다.
“좋아, 그럼 이제 옷 좀 벗어 봐.”
내 말에 아바스엘은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순간 그의 얼굴에 또 사기당한 건 아닌가 하는 불안감이 스쳐 지나갔지만 이미 늦었다.
낙장불입, 우리는 눈뜨고 코 베이고, 잘못하면 손모가지 날아가는 세상을 살고 있지 않은가.
* * *
“볼일은 마치셨습니까?”
율리안의 물음에 나는 천연덕스럽게 대답했다.
“예, 덕분에요. 그런데 과거 천재라고 불렸다고는 하지만 예상보다 과하게 뻗대더군요. 의욕도 없고 말입니다.”
내가 불평하자 율리안은 이해해 달라며 고개를 숙였다.
“그래서 제가 대신 용무를 전달드리려 했던 건데… 저희 각인사가 실례가 많았습니다.”
“뭐, 괜찮습니다. 좋은 물건도 많이 얻었고 급한 볼일도 마쳤으니 이제 돌아가야죠.”
내 말에 율리안은 미소 지으며 우리를 뒤뜰로 안내했다.
“볼일을 보시는 사이 물건들은 모두 마차에 실어 놨습니다.”
그의 말대로 뒤뜰에는 낡고 작은 마차 하나가 서 있었다.
겉으로 보기에는 특이한 점은 없었는데 마차 안이 보이지 않도록 창문에 커튼이 쳐져 있었다.
“출발하기 전에 한번 안을 봐도 괜찮겠습니까?”
“예, 편히 보시죠.”
나는 마차 안으로 들어가 내부를 확인했다.
마차 안에는 큼지막한 가방이 가득 들어 있었는데 모두 값비싼 공간 확장 가방이었다.
바로 식자재 창고에 가방을 넣으려 했지만 공간 마법끼리 충돌하는지 작은 스파크가 일며 창고 안으로 들어가지 않았다.
“쳇, 별수 없나.”
나는 반지를 손가락에서 빼고 안에 수납된 줄을 꺼내 반지를 고리 삼아 커다란 원을 만들었다.
그리고는 가방을 들어 원 안에 쏟아 부었다.
“끄응, 더럽게 무겁네. 이거 공간 확장만 되는 건가?”
줄이 아공간 입구가 되어서 밑 빠진 독처럼 물건들이 쏟아져 들어갔다.
역시 식자재 창고가 최고다.
위대한 달랑타 만세!
그렇게 모든 물건을 창고 안에 넣고 가방에는 나비를 시켜 공기를 채워 넣었다.
나는 마차에서 내리며 말했다.
“모두 잘 있군요. 자네는 안에 들어가서 물건들을 지켜. 운전은 내가 하지.”
내 지시에 내 동행인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마차 안으로 들어갔다.
나는 마부석에 앉으며 율리안에게 작별 인사를 했다.
“그럼 수고 많았습니다. 다음에 기회가 된다면 또 보도록 하죠.”
“예, 다음에도 방문해 주신다면 성대히 대접해 드리겠습니다.”
아마 그럴 일은 없을 거다.
그때는 이미 난 수도를 떠나고 율리안은 좌천된 상태일 테니까.
그런데 마차는 어떻게 모는 거지? 마차는커녕 말도 타본 적이 없는데.
뭐, 대충 하면 되겠지.
나는 채찍으로 살살 말의 엉덩이를 때렸다.
어어어어! 가, 간다!
말은 천천히 앞으로 가기 시작했고 나는 고민했다.
그런데 이거 어떻게 멈추는 거지?
마차의 속도는 느렸지만 왠지 모를 공포감이 들었다.
쓰벌, 괜히 내가 마차를 몬다고 했나?
마차는 그대로 대로변을 따라 직진했다. 어떻게 말을 몰아야 할지 몰라 굳은 채로 가만히 있는데 5분쯤 지나자 저 멀리서 폭발음이 들려왔다.
콰앙-!
방금 전까지 우리가 있던 성당에서 큰 폭발이 일어난 탓에 거리의 마차를 끌던 말들이 일제히 울며 제자리에 멈춰 섰다.
날뛸 줄 알았는데 훈련받은 말이라서 그런 건가?
나는 오히려 말이 멈춘 것에 안도하며 말했다.
“봐, 탈출 참 쉽다니까? 안 그래? 아바스엘.”
마차 안에 있는 아바스엘은 가면을 벗으며 떨떠름하게 대답했다.
“그렇…군요.”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