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8화. 어리석은 현자와 현명한 광대 (2)
나는 목걸이에 달린 큼지막한 보석을 살짝 살짝 움직여주며 전문가 흉내를 냈다.
“감정서는 있습니까?”
“물론입니다.”
연두색 머리의 소년은 준비한 것처럼 감정서를 꺼냈다.
감정서는 5대 상회의 인증 도장과 감정한 보석 세공사의 이름이 적혀 있는 진품이었다.
“그런데 이게 전부입니까?”
내 물음에 율리안은 살짝 놀라며 대답했다.
“물론 아직 보이지 않은 것은 있습니다만… 선보인 것들보다 약간 품질이 떨어지는 것들입니다. 혹시 저희가 선보인 게 마음에 들지 않으십니까?”
나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아니요. 하나같이 주인님께서 기뻐하실 만한 품질입니다. 그저 주인님께서 선물용으로 따로 알아보라 하셔서 말입니다. 없다면 다른 곳을 알아보겠지만 있다면 한 번에 처리하는 것도 좋을 것 같군요.”
이왕 등쳐먹는 거 제대로 등쳐먹어야 보람 있는 법이다.
내가 별것 아니라는 듯이 말하자 율리안은 능숙하게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저희가 내보이지 않았던 것들은 고객님의 품격에 살짝 미치지 못해서일 뿐 다른 곳의 물건들과는 비교할 수 없는 귀한 것들입니다. 분명 다른 곳보다도 마음에 드실 겁니다.”
“그렇습니까. 한번 봐도 괜찮겠습니까?”
“물론입니다.”
율리안의 손짓에 정말로 온갖 물건들이 차례로 나왔다.
오늘 아주 호구 잡았다고 좋아하는 속내가 뻔히 보이는 것 같았다.
“마음에 드는군요. 여기 있는 것 전부 가져가겠습니다.”
내 말에 율리안은 순간 기쁨을 주체하지 못했는지 활짝 웃었다가 금세 표정 관리를 했다.
이게 전부 실적에 반영되니 기뻐할 만도 했다.
“그럼 평소처럼 저희가 배송해 드리면 되겠습니까?”
미처 억누르지 못한 감정이 드러난 목소리에 나는 아무렇지 않게 대답했다.
“아니요. 당신도 아시겠지만 지금은 ‘그 사건’으로 약간 소란스럽습니다. 때문에 평소보다 많이 사는 만큼 조심할 필요가 있습니다.”
내가 말한 그 사건이란 바로 내가 암살당할 뻔했던 일을 가리켰다.
눈치 빠른 소년은 금세 알아차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예, 그럼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분할 배송을….”
“그러실 필요는 없습니다.”
나는 그의 말을 자르며 말했다.
“아무래도 지금 시기에 외부인의 출입은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습니다. 때문에 제가 ‘직접’ 가져가기 위해 방문한 것이기도 합니다. 저는 주인님을 모신 지 꽤 오래되었으니 검문에 어느 정도 자유롭거든요.”
“아! 그렇군요! 그런데 양이 상당해서 부피가 큰데 괜찮겠습니까?”
나는 천천히 평소와 달리 직접 방문한 것에 대한 의심을 지워갔다.
“당신은 그냥 포장해서 눈에 띄지 않는 마차에 담아 주시기만 하면 됩니다. 나머지는 저희 측에서 준비한 루트를 통해 전달드릴 테니까요.”
율리안은 꽤나 흥분한 탓인지, 아니면 아직 나이가 어려서 그런 건지 내 말을 아무 의심 없이 받아들였다.
소설 속에서는 상당히 영악한 인물이었는데 살짝 실망이다.
하긴, 주인만 아는 표식으로 들어왔으니 의심하지 못하는 게 당연했다.
“당장 준비해 두겠습니다. 공간 확장 마법이 걸린 마법 가방에 담아 드릴 테니 마차 하나에 충분히 들어 갈 겁니다.”
율리안이 부하들에게 지시를 내렸고 부티크의 직원들은 바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아, 그러고 보면 예의 물건이 다 준비됐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내 물음에 그는 미소를 지으며 긍정했다.
“물론입니다!”
짝짝!
율리안이 박수를 치자 건장한 사내가 고급스러워 보이는 기다란 상자를 가져왔다.
내가 그 상자를 열어보니 그 안에는 문외한인 내가 봐도 감탄이 나오는 아름다운 검 한 자루와 검집이 들어 있었다.
왕후가 주문한 게 검이었나?
그러고 보면 왕후가 죽고 못 사는 아들인 2왕자는 공부와는 담을 쌓고 기사들과 어울려 다니며 검술에 심취해 있었다.
몇 달 뒤가 2왕자의 생일이니 아마 그 생일 선물인 듯싶었다.
“무려 난쟁이들이 만든 진품입니다. 시중에서 이만한 검은 어지간해서 찾을 수 없을 겁니다.”
“아주 멋지군요. 이건 제가 직접 챙겨 드려야겠습니다.”
아름다운 검이었지만 그래도 프레시아에게 준 칠성검에 비하면 뭔가 부족함이 느껴졌다.
나중에 길버트에게 주면 딱 좋겠군. 나는 상자를 닫고 상자에 줄을 달아 등 뒤에 매달았다.
“자, 그럼 챙길 건 다 챙긴 듯하니 원래 보기로 한 볼일을 보도록 합시다.”
내 말에 율리안은 무엇이든 다 들어줄 것 같은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편히 말씀하시지요.”
대량으로 구매하며 호감을 쌓았지만 원래 목표인 아바스엘과 접촉하기에는 조금 부족했다.
아바스엘의 존재는 부티크에 있어 황금알을 낳는 거위이자 가장 큰 비밀이다.
그럼 내 요구를 들어줄 수밖에 없도록 한 번 흔들어야지.
나는 비밀을 이야기하는 것처럼 율리안에게 속삭이듯 말했다.
“부티크에는 숨겨진 얼굴 없는 각인사가 있다고 들었습니다.”
각인사는 물건에 마법 술식을 새기는 전문 직종을 일컫는 말이었다.
보통은 마법사가 겸직으로 많이 하지만 마법을 사용할 수 없는 사람도 술식을 새기는 것 정도는 가능했다.
마법을 사용하지 못하는 아바스엘에게는 딱 맞는 직종이라 할 수 있었다.
얼굴 없는 각인사라는 말에 율리안의 표정이 살짝 굳어졌으나 그는 언제 그랬냐는 듯이 미소 지었다.
“글쎄요… 무슨 말씀이신지요?”
“다 알고 왔습니다. 몰락한 현자 후보 아바스엘이 이곳에 있다고 말입니다.”
아바스엘의 이름이 나오자 율리안은 더 이상 발뺌하는 건 무리라고 생각했는지 순순히 시인했다.
“아바스엘의 존재는 기밀입니다. 혹시 어떻게 아셨는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그렇게 물어주기를 기다렸다.
나는 일부러 불쾌감을 표현하며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지금 감히 제게 제 주인님의 정보를 팔라는 겁니까?”
내가 공격적으로 나오자 프레시아는 긴장하며 자세를 취했다.
프레시아는 순간 아차한 모양이었는데 율리안과 부티크의 직원들에게는 경고로 느껴진 모양이었다.
“아니요! 그럴 리 있겠습니까! 무례를 용서해 주십쇼!”
그들 입장에선 우리 둘을 제압하는 건 일도 아니라고 생각하겠지만 우리의 뒷배를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을 터였다.
나는 불쾌하다는 듯이 과장되게 한숨을 내쉬며 발걸음을 돌렸다.
“이런 무례는 참을 수 없습니다! 오늘 있었던 일은 제가 반드시 보고드리겠습니다. 아울러 물건들도 포장하실 필요 없을 듯하니 다들 멈추세요.”
내가 거침없이 발길을 돌리자 율리안은 당황해서 내 앞을 막았다.
“저, 정말 죄송합니다! 제가 드린 무례는 어떻게든 대가를 치를 테니 제발!”
앳된 얼굴로 허리를 숙이는 율리안을 보며 그만 실소를 터트릴 뻔했다.
소설 속에서 그 능글맞고 속 모르겠던 율리안도 어릴 때는 별수 없었나 보다.
왕후의 눈 밖에 난다는 건 부티크로서도 치명적인 일이었으니 당연했다.
나는 고민하듯 가면 위를 쓸어 만지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그렇게까지 나온다면 어쩔 수 없군요. 그간 맺어온 좋은 관계를 생각해서 이번만은 넘어가 드리죠. 저희도 꽤 급한 일이 있으니까요.”
“가, 감사합니다!”
“하지만 더 이상 실망할 일이 없었으면 좋겠습니다.”
반쯤 협박성 발언에 주변이 얼음장처럼 서늘해졌다.
“물론입니다. 그런데 아바스엘은 왜….”
내가 노려보자 소년은 자연스럽게 말을 바꿨다.
“…찾으시는지는 저희가 알 필요 없겠죠. 그렇고말고요.”
율리안은 바짝 긴장하며 내 말을 기다렸다.
나는 약간 뜸을 들이고는 내 용건을 말했다.
“지금 당장 아바스엘과 비밀스럽게 이야기를 하고 싶군요. 일에 대한 이야기는 그 다음입니다.”
내 요구에 율리안의 동공이 흔들렸다.
부티크에서 감추고 있는 황금알을 낳는 거위를 외부인에게 드러내는 것과 왕후라는 초 거물 고객의 신뢰를 잃는 것 중 어느 게 더 치명적인지 고민하는 듯했다.
그의 고민은 그리 길지 않았다.
“알겠습니다.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당연한 선택이었다. 거위가 낳은 황금알도 팔 곳이 있어야 가치를 지니는 법이다.
왕후를 적으로 돌리는 순간 부티크가 입을 손해는 고작 거위가 낳을 황금알 따위와 비교할 수조차 없다.
율리안은 부하들에게 포장을 서두르라고 지시하고 나와 프레시아를 위로 안내했다.
아바스엘이 있는 곳은 성당의 꼭대기에 위치한 작은 다락방이었다.
다락방 문 앞에 멈춰 선 율리안은 내 눈치를 보며 말했다.
“아바스엘은 꽤나 성격이 더러워서 그런데 제가….”
“괜찮습니다, 원래 천재는 오만한 법이죠. 아바스엘과의 대화는 저와 이 친구만 있으면 충분합니다.”
내가 말을 자르자 율리안은 다시 한 번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래도 혹시 그가 뭣도 모르고 폭력적으로 나올 수도 있습니다.”
“저와 함께 온 친구는 ‘사내 중의 사내’라 허약한 마법사 정도는 한 손으로 제압 가능하니 걱정 마시죠.”
온 몸을 허름한 외투로 가린 프레시아의 성별을 율리안이 알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알겠습니다. 혹시 무슨 일이 생긴다면 소리쳐 주시기 바랍니다.”
율리안은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우리가 다락방으로 들어가자 초췌한 아바스엘이 다리에 쇠사슬 족쇄를 차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아바스엘은 부티크에 의해 감금된 상태로 각인사 일을 하고 있던 것이다.
“아바스엘 님, 저희 귀한 고객님께서 아바스엘 님과 은밀히 하시고 싶은 말씀이 있다고 하시는군요. 저는 나가 있을 테니 혹여 무례한 행동은 자제해 주시기 바랍니다.”
말의 내용은 경고였지만 아바스엘을 대하는 율리안의 언행은 꽤나 반듯하고 예의 발랐다.
얼핏 보기에도 그의 건강 상태는 꽤 나쁘지 않아 보이는 걸로 보아, 감금만 해뒀을 뿐 나름의 대접은 해주는 모양이었다.
하기야, 술식 각인은 꽤나 고된 일이라고 하니 함부로 대할 수도 없긴 하겠다.
율리안이 나가자 아바스엘은 빈정거리는 말투로 말했다.
“흥! 꼭꼭 감춰둔 날 선보일 정도로 귀한 손님인가 본데, 할 말 있으면 빨리 지껄이고 꺼져.”
과연, 율리안의 말대로 성격이 더러웠다.
뭐, 성격이 더럽고 치사하게 구는 편이 나도 대하기 편했다.
“나비야.”
-냐옹~!
내가 작은 목소리로 나비를 부르자 나비가 울며 주변에 공기 막을 만들어 외부로 소리가 나가지 않게 했다.
“마법? 아니, 조금 달라. 이건… 정령인가? 정령술사였나 보군.”
역시 최연소 프라임 메이지답게 알아보는 눈이 뛰어났다.
“이걸로 밖에선 소리가 들리지 않을 거야. 아, 혹시 도청 마법이라도 설치되어 있나?”
내 물음에 아바스엘은 쓰게 웃었다.
“아니, 내가 그런 게 필요한 처지가 아니라서 말이야.”
“그거 다행이군.”
“할 말이 있으면 빨리 하고 꺼져. 각인하는 술식을 비밀로 하고 싶은 거라면 재료 수급부터 네가 이용하는 개새끼들이 하니까 나 말고 다른 놈 찾아가라고.”
그렇게 말하는 아바스엘의 눈에는 공허함만이 가득했다.
마치 인생을 다 산 듯한 썩은 눈깔에 나는 약간의 유쾌함마저 느껴졌다.
“내가 거래하고자 하는 건 각인 따위가 아니니까 걱정하지 마.”
“그럼 각인사를 찾아와서 원하는 게 뭔데?”
날 미친놈 보듯 바라보는 그를 보며 나는 유쾌하게 웃었다.
“내가 원하는 건 바로 너다. 내 사람이 돼라. 그럼 네게 자유와 가장 원하는 걸 주마!”
역시 투자는 쓰레기 더미에서 해야지 이익이 큰 법이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