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7화. 어리석은 현자와 현명한 광대 (1)
눈물을 닦는 길버트를 보며 디벳은 쓰게 웃었다.
“말은 번지르르하게 하는데 그냥 사병이랑 뭐가 다른 거냐?”
역시 괴팍한 영감답게 말하는 게 삐뚤어져 있었다.
“뭐, 크게 다른 점은 없죠. 기사 서임(敍任)을 받는다는 것 정도?”
애초에 기사는 병사를 통솔하는 지휘자거나 인간 병기들만 모아둔 특수 병과를 지칭하는 말이다.
“기사 서임을 줄 수 있다고?”
“보시는 바와 같이 제가 있는 집 자식이라 말이죠.”
내 대답에 디벳은 어이없다는 듯이 날 바라봤다.
“네 녀석처럼 개뼉다구같이 마른 놈을 잘도 있는 집 자식 같다고 생각하겠다.”
“거, 사실이라도 그렇지 말이 너무 심하시네.”
내가 불만을 표하자 프레시아는 당장이라도 이 무례한 노친네를 처리하고 싶은지 허락을 구하는 눈으로 날 바라봤다.
나는 살짝 고개를 저었고 프레시아는 별수 없다는 듯이 코트 안에 숨겨둔 검에서 손을 뗐다.
“그나저나 넌 의술을 누구에게 배웠지?”
디벳의 시선은 처음 봤을 때와 달리 적대적인 눈초리가 아니었다.
“네놈이 독원 소속이 아니란 건 잘 알겠다. 그곳은 이 귀한 걸 그저 선의로 포기할 녀석들은 아니니까.”
그의 물음에 나는 싱긋 웃으며 말했다.
“독학이라고 해둡시다. 사실 그렇게 많이 아는 것도 아니라서 말이죠.”
내 대답에 디벳은 퍽이나 그렇겠다며 코웃음을 쳤다.
“말하기 싫으면 관둬라.”
아니, 진짜인데.
“나는 저 애송이 동생을 다시 한번 진찰하러 갈 거다. 같이 갈 거냐?”
디벳의 물음에 나는 길버트와 프레시아를 한 번씩 보고는 대답했다.
“아니요, 아직 방문해야 할 곳이 있어서요. 오늘은 무리고 나중에 시간이 나면 그쪽으로 찾아가겠습니다.”
“아, 저는…!”
길버트가 날 따라나서려고 하자 나는 막으며 말했다.
“넌 네 동생이나 돌보고 있어. 가자, 프레시아.”
프레시아를 데리고 디벳의 거처에서 나온 나는 거리를 거닐며 하늘을 올려봤다.
한겨울이라 그런지 그리 늦지 않은 시간임에도 살짝 붉은빛이 감돌고 있었다.
“보아하니 뭔가 마음에 안 드는 것 같네.”
내가 장난스레 웃으며 프레시아를 바라보자 그녀는 새침데기 같은 표정을 지었다.
“도련님의 선택이니 반대는 하진 않겠습니다만, 검증도 안 된 자를 도련님의 곁에 두는 건 조금 걸립니다.”
“자기는 힘든 훈련을 견딘 끝에 기사가 되었는데 그 녀석은 쉽게 된 것 같아서가 아니고?”
내 농담 반 진담 반 섞인 지적에 프레시아는 정곡이 찔렸는지 움찔했다.
“윽…!”
나는 그런 프레시아의 모습에 가볍게 웃었다.
“너에 비하면 그리 고된 훈련은 아니겠지만 녀석도 녀석 나름의 노력을 해왔겠지. 그리고 쉽게 얻은 게 마냥 좋다고 볼 순 없어.”
내 말에 그녀는 이해가 가지 않는지 의문을 표했다.
“그건 어째서인가요?”
“쉽게 얻은 자리는 그만큼 잃기 쉽다. 당장 너조차 그리 좋게 보지 않고 있으니 길버트는 항상 자신의 가치를 증명해야 할 거야. 그건 결코 쉽지 않은 일이지.”
내 대답에 프레시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까 한번 잘 가르쳐봐. 싹수는 몰라도 끈기는 있는 모양이니까.”
“예! 최선을 다해 도련님께 누를 끼치지 못하게 만들겠습니다!”
떠올려보면 프레시아는 본인이 천재였던 만큼 가르치는 재능이 없었다.
열의를 가지고 투지를 불태우는 프레시아의 모습에 길버트의 앞날을 동정했다.
“아, 그런데 방문해야 할 곳이 있다고 하셨는데 어디인가요? 그 광대가 있는 서커스단이요?”
“거기도 가야지. 그런데 가기 전에 더 들러야 할 곳이 있어.”
나는 프레시아가 들고 있는 가방에서 가면을 꺼내며 웃었다.
* * *
야드 토슬은 의자에 앉아 습관적으로 카드를 만지작거리며 자신의 동료들이 서커스 공연 준비를 하는 걸 멍하니 바라봤다.
다들 부산히 움직이며 준비를 하는데 혼자 가만히 있다고 뭐라고 하는 사람은 없었다.
야드가 의자에 앉아 카드를 만지작거린다는 건 그가 무언가 중요한 고민 중이란 사실을 동료들은 잘 알고 있었다.
“부단장, 그렇게 오래 카드를 만지다니 별일이군.”
키가 2미터는 넘을 거대한 덩치의 사내가 야드의 옆에 앉으며 말을 걸자 야드는 무의식중에 카드를 바꾸던 행동을 멈췄다.
“아… 단장 대리 오셨습니까. 북쪽에서 호객하던 건 어떻습니까? 많이 올 것 같습니까?”
“아하하, 거긴 상류층이 많아서 그런지 잘 안 올 것 같아. 일단 어린애들을 많이 공략했는데 모를 일이지.”
단장 대리라 불린 사내의 너스레에 야드는 싱긋 웃었다.
“단장 대리의 기술이라면 아이들을 매료시키기엔 충분하죠.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고 하니 기대해 봐도 좋겠군요.”
“너무 기대해도 큰일인데. 그래서 무슨 일 있었어? 루파스 말로는 임자 있는 여자한테 치근덕거리다가 차였다고 하던데.”
가벼운 농담에 야드는 키득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루파스군요. 눈썰미가 무섭습니다.”
“아하하하! 루파스가 한 눈썰미 하긴 하지.”
같이 웃던 단장 대리는 씁쓸한 얼굴로 야드의 어깨를 두드렸다.
“뭐, 네가 하는 고민은 뻔하지. 자반 단장에 대해 생각하고 있던 거냐?”
그 물음에 야드는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예. 오늘 저랑 비슷한 기예를 부리는 사람을 봤어요.”
“뭐?!”
단장 대리가 놀라서 일어나자 야드는 진정하라고 손짓하며 말했다.
“이야기를 해보니 자반 단장과 아는 사이는 아닌 것 같더군요.”
“아니, 그래도 한 다리 건너든 연관되어 있는 거 아니야?”
단장 대리의 추측에 야드도 동의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그렇겠죠? 그래서 오늘 저녁 공연에 초대를 했습니다.”
야드는 손에 쥔 조커 카드를 카드 뭉치에 넣으며 중얼거렸다.
“단장에 대해 작은 힌트라도 얻을 수 있으면 좋겠네요.”
* * *
나와 프레시아는 가면을 쓰고 허름한 외투의 후드를 눌러썼다.
외투 자체는 흔했지만 가면을 쓰고 다니면 눈에 띄었으니 후드로 두 번 가렸다.
“어딜 가시는데 이렇게 가리는 건가요?”
프레시아의 물음에 나는 두리번거리며 주변 건물을 살폈다.
“내가 가려는 곳은 VIP들을 상대로 하는 흥신소야. 암시장과 연계되어 있어 암거래나 정보 거래는 물론 더러운 일까지 처리해 주는 곳이지.”
한쪽 날개가 부러진 천사 동상이 있는 작고 낡은 성당과 그 맞은편으로 보이는 광장 시계탑.
소설 속 묘사를 보면 여기가 맞는 것 같았다.
“그런 데는 왜 찾으시는 건가요? 아, 혹시 그 약쟁이 영감님의 손녀를 찾아달라고 의뢰하시려는 건가요?”
프레시아의 추측에 나는 손을 내저었다.
“설마, 그 영감님은 독원의 암살 리스트 0순위야. 여긴 독원과도 연관이 있어서 여길 통해서 영감님 손녀를 찾으면 영감님은 물론 손녀까지 암살당할걸?”
“아….”
“그래서야 찾지 않은 것만 못하지.”
내 대답에 프레시아는 그럼 왜 흥신소를 찾느냐는 듯이 바라봤다.
“여기 온 건 한 멍청이랑 거래하기 위해서야. 흥신소에서 다리를 놓아주지 않으면 접근조차 할 수 없거든.”
“멍청이요?”
“그래, 멍청이.”
내가 찾는 멍청이는 ‘어리석은 현자 아바스엘’이다.
아바스엘은 과거 마법학교의 유망주이자 마탑의 최연소 슈프림 메이지(Supreme Mage)에 선정될 정도로 유능한 마법사였다.
하지만 그 멍청이는 어떤 한 사건으로 마법을 사용하지 못하게 되고 나락으로 추락했다.
“아, 찾았다.”
나는 성당 담벼락에 난 개구멍에 손을 집어넣고 더듬거렸다.
그러자 작은 종이 뭉치가 만져졌다.
종이 뭉치를 당기자 가느다란 줄이 딸려왔는데 이 줄은 손님의 방문을 알리는 종과 연결되어 있었다.
“아까 산 물감하고 붓 좀 줘봐.”
프레시아에게서 물감과 붓을 받은 나는 붉은 물감을 바른 붓으로 종이에 고어로 무언가 적었다.
종이 뭉치를 다시 개구멍으로 넣으며 검지를 입가에 가져다 댔다.
“쉿, 지금부터는 내 허락 없이 말하지 말고 언제든 도망칠 준비를 해둬.”
내 당부에 프레시아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내 담장 너머에서 자갈 밟는 소리가 나며 인기척이 느껴졌다.
느긋하던 발걸음은 종이에 다다르고 나서야 분주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얼마 지나지 않아 성당 안에서 수녀복 차림의 여성이 밖으로 나왔다.
“안으로 들어오시죠.”
친절해 보이는 인상의 수녀는 낡은 성당 안으로 우리를 안내했다.
수녀는 나와 프레시아처럼 얼굴을 가린 손님이 처음이 아닌지 익숙하게 휴게실로 향했고, 휴게실 벽에 걸린 커다란 그림을 들어 올리자 지하로 통하는 입구가 드러났다.
“들어가시죠, 손님.”
수녀의 말에 내가 거리낌 없이 안으로 들어가자 프레시아는 살짝 긴장한 듯 따라 들어왔다.
수녀가 밖에서 그림을 내리자 순간 주변이 어두워지더니, 마법으로 만든 조명이 내부를 비췄다.
와오, 마법으로는 이런 걸 할 수 있군.
나도 아퀼라의 마도서로 공부 중이긴 하지만 아직 촛불 크기의 불 정도만 간신히 만들 수 있는 수준이었다.
계속해서 계단을 따라 내려가자 어딘가 살롱 같은 분위기의 공간이 나왔다.
“어서 오십시오, 저희 ‘부티크’에 방문하신 걸 환영합니다. 편히 앉으시죠.”
인상 좋아 보이는 연두색 머리의 소년이 권하자 나는 여유롭게 마련된 소파에 앉았고 프레시아는 대기하듯 내 뒤에 반걸음 떨어져 섰다.
흥신소 ‘부티크’의 연두색 머리 소년이라.
내가 모르는 연두색 머리가 또 있지 않다면 눈앞의 소년은 훗날 부티크를 지배하는 주인이 되는 ‘율리안 슐츠’일 터였다.
소년은 프레시아에게는 시선도 두지 않고 날 보며 말했다.
“그런데 붉은 표식이라니 처음이시군요, 평소처럼 푸른 표식을 남기실 줄 알았는데 놀랐답니다.”
율리안의 말에 나는 가볍게 웃으며 대답했다.
“주인님께서 급하게 일이 있으셨습니다.”
부티크는 VIP를 대상으로 영업을 했기에 기존 회원의 소개가 아니라면 접촉 자체가 불가능했다.
때문에 나는 내가 알고 있는 부티크 회원 중 한 명의 표식을 남겼다.
표식의 그 주인은 왕후, 정확히는 왕후의 오빠인 후작의 것이었다.
물론 수도와 멀리 떨어져 있는 후작보다 왕후가 훨씬 많이 이용하긴 했다.
참고로 표식은 총 두 가지가 있는데 내가 남긴 붉은 글자는 지금 당장 볼일이 있다는 의미였고, 파란 글자는 부티크의 출장 점원이 정해진 곳으로 오라는 의미였다.
“그러시군요! 마침 저번에 맡기신 물건도 구해둔 상태였답니다. 평소처럼 물건을 보여 드릴까요? 아니면 말씀하신 급한 일부터 처리할까요?”
오호~! 왕후가 뭘 준비했을까나?
그의 말에 나는 잠시 고민하는 척을 하고는 대답했다.
“급한 일이라도 오늘 안에 처리하면 되는 일이니 우선 물건부터 보도록 하겠습니다. 아, 물론 대금은 평소처럼 후불입니다.”
“예, 물론이죠. 대금은 고객님의 정기 지불일에 주시면 됩니다. 자! 그럼 물건들을 가져오세요.”
역시 VIP를 상대하니 이런 점에서 편했다.
율리안이 손뼉을 치자 벽 한쪽의 커튼이 쳐지며 각종 보석 장신구와 드레스, 값비싼 향신료, 마도구 등이 차례로 줄지어 들어왔다.
생전 처음 보는 휘황찬란한 사치품의 향연에 프레시아가 마른침을 삼키는 게 들렸다.
나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며 여유로운 목소리로 물었다.
“제 주인께서는 굉장히 엄격하신 분입니다. 품질에 문제는 없겠죠?”
“물론입니다! 여기 있는 모든 게 최고 품질임을 제 목을 걸고 자신합니다!”
내가 물건들에 다가가자 상품들을 가져온 수녀 복장의 여자가 고급스러운 받침대 위에 놓인 하얀 장갑을 가져와 권했다.
나는 능숙하게 하얀 장갑을 끼고 찬찬히 감정하는 시늉을 했다.
당연하게도 등쳐먹는 데 죄책감 따위는 전혀 없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