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엑스트라 왕자는 세계정복을 시작한다-16화 (16/214)

제16화. 투자는 쓰레기 더미 속에서 (5)

분홍빛 머리의 소녀 아리사는 집중한 채 진열된 디저트를 고르는 니벨의 팔뚝을 때리며 발랄하게 외쳤다.

“니벨! 니벨! 저기 봐봐! 응? 저기 보라니까!”

아리사의 호들갑에 니벨은 대놓고 귀찮아하며 아리사를 흘겨봤다.

“전 지금 바쁩니다. 오늘 간식을 라즈베리 타르트로 할지, 블루베리 타르트로 할지 선택해야 하는 일생일대의 기로에 서 있단 말입니다.”

그녀는 마치 무엇을 먹느냐에 따라 세상이 멸망하느냐가 걸린 것처럼 진심으로 고민했다.

벌써 매대 앞에서 20분가량을 서서 고심하고 있었다.

그런 니벨의 모습에 아리사는 니벨의 옆구리를 걷어찼다.

“고민되면 그냥 둘 다 먹어! 이 멍청아!”

걷어차인 니벨은 화를 내기는커녕 아리사의 말에 마치 세기의 발견이라도 한 것처럼 경악했다.

“그렇게 좋은 방법이! 과연 아리사입니다! 평소 발정 난 괭이새끼 마냥 미쳐 있지만 덕분에 이런 발상의 전환을 하실 수 있는 거군요!”

“냐하하하하! 내가 한 위대함 하지! 찬양하라, 우민아!”

유쾌하게 웃던 아리사는 뭔가 이상함을 느꼈는지 니벨을 바라봤다.

“잠깐, 그런데 방금 내 욕 하지 않았어?”

니벨은 아리사의 물음을 무시하며 점원을 불렀다.

“저기요! 여기 있는 라즈베리 타르트랑 블루베리 타르트 스무 개씩 주세요.”

타르트가 담긴 봉투를 안아든 니벨은 세상을 다 가진 것처럼 미소 지었다.

“그래서 전 왜 부른 거였죠?”

고민을 해결해 줬으니 특별히 말 정도는 들어 주겠다는 태도에 아리사는 라즈베리 타르트를 뺏어 베어 물었다.

“앗! 개수 맞춰서 산 건데요!”

“하나쯤은 괜찮잖아! 그리고 내가 부른 건 이거! 이것 좀 봐봐!”

울상을 짓는 니벨을 뒤로하고 디저트 가게 구석에 붙어 있는 서커스 전단지를 가리켰다.

“슬라반 서커스? 아직도 애새끼처럼 이런 거나 보고 싶다는 말씀이신가요?”

니벨이 순수하게 진심을 담아 물어보자 아리사는 니벨의 발등을 구두 굽으로 내리찍었다.

“시끄러! 재미있어 보이잖아! 이미 오늘 구경 가기로 정했어! 같이 가자!”

“아야! 아프잖아요! 그리고 제가 왜!”

니벨이 감청색 머리칼을 쓸어 넘기며 항의하자 아리사는 콧방귀를 뀌었다.

“너 때문에 왕후가 화를 내서 왕궁에 못 들어가게 됐잖아! 아마도 왕궁에 빌의 비전서가 있을 텐데 왕궁에 못 들어가면 찾을 수가 없잖아! 다 너 때문이야! 그러니 시간 때우는 데 어울리라고!”

“아앗! 그렇게 대놓고 우리가 왕후와 손잡은 배후 지원 세력이라고 떠들어대면 어떡합니까!”

니벨의 말을 들은 아리사는 폭소를 터트렸다.

“냐하하하하! 우리 신분은 왕후와 거래하는 귀금속상이잖아! 내 말에는 큰 문제가 없고 네가 까발린 거라고! 냐하하하!”

아리사의 지적에 니벨은 놀라며 자신의 입을 틀어막았다.

“헉! 어떡하죠?!”

“어떡하기는, 죽은 자는 말이 없는 법이지. 역시 니벨이 있으면 사건이 끊임없이 터져서 재미있다니까. 냐하하하핫!”

아리사의 해결 방법에 니벨은 손뼉을 쳤다.

“아! 그렇군요! 그런데 아리사의 사령술은 생전의 제과 기술을 그대로 사용할 수 있죠?”

“아… 그건 고위 언데드로 만들어야 하는데. 뭐, 타르트는 맛있으니 오랜만에 힘 좀 써볼까?”

두 사람의 안광은 광기로 번들거리며 가게 안의 사람들을 훑었다.

* * *

“다 완성됐다.”

디벳은 솥단지에 냉각마법을 걸어 약을 식힌 뒤, 약을 병에 소분해서 담았다.

내가 약초를 많이 준비한 덕분에 그 양은 굉장히 많았다.

“이 약을 누구에게 쓸 건지 모르겠지만 애먼 짓은 하지 않았으니 걱정 마라. 물론 그걸 믿고 아니고는 자유겠지만 말이다.”

역시 괴팍한 영감답게 말하는 본새가 남달랐다.

“당연히 믿죠. 믿지 않았으면 일을 맡겼겠습니까?”

내 대답에 디벳은 코웃음 쳤다.

“내가 지난 수십 년 동안 수많은 사람을 봐왔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눈을 보면 그 성품을 알 수 있지. 네 눈은 그 누구도 믿지 않는 눈이야, 그게 설령 가장 가까운 사람이라도.”

역시 쌓아온 연륜은 무시할 수 없나보다.

솔직히 디벳을 믿고 내 육체 개조약을 의뢰하기에는 너무 위험이 컸다.

물론 소설 속에서는 자신이 한 짓을 후회하고 다른 건 몰라도 약에는 절대 장난을 치지 않는다고 했지만 소설을 믿기엔 이미 한번 데인 전적이 있어서 조심스러웠다.

나는 가슴 언저리를 어루만지다가 가볍게 웃었다.

“이야~! 너무하시네. 저같이 순수한 사람을 두고 인간 불신자로 매도하시다니요.”

“흥! 순수가 다 얼어 죽었나 보군.”

“얼어 죽은 건 영감님 의술 실력이 아니고요?”

내 말에 디벳은 매우 불쾌하다는 듯이 날 노려봤다.

하지만 내가 이렇게 말하는 건 이유가 있었다.

가장 큰 증거가 현 시점에서부터 길버트가 디벳과 알고 지내는 사이란 점이다.

내가 아는 디벳은 자신의 지인의 가족을, 그것도 손녀와 겹쳐 보이는 어린 여자아이를 죽게 만들 사람이 아니다.

그렇다는 건 지금 디벳이 길버트의 동생의 병을 오진했다고 볼 수밖에 없다.

“지금 뭐라고 했지?”

“얼어 죽은 건 영감님의 의술이 아니냐고 했습니다. 약제술이야 혼자서도 갈고닦을 수 있으시겠지만, 의술은 환자가 없으면 펼칠 수 없죠.”

나는 디벳이 만든 약병을 만지작거리며 물었다.

“최근, 아니 근 5년 동안에 환자를 몇 명이나 봤습니까?”

내 지적에 디벳은 입을 다물었다.

“그렇게 자신하시는 걸 보면 적어도 1년에 백 명은 치료했겠죠? 아니면 쉰 명?”

디벳의 대답은 뻔했다.

나와 프레시아가 들어오자마자 제대로 보지도 않고 꺼지라고 한 영감이다.

이 구석진 곳에 환자가 찾아와도 친절히 받아줄 리가 없었다.

“…이다.”

“뭐라고요?”

“한 명이라고 했다! 근 5년 동안 한 명!”

디벳은 역정 내듯 소리쳤다.

사람은 민감한 부분을 찔리면 화를 내기 마련이었다.

아마 5년이 아니라 10년 동안 돌본 환자 수를 물어봤어도 한 명이었을 터였다.

그 한 명이 누군지 뻔히 보였지만 나는 짐짓 모른 척했다.

“오호~! 괴팍하지만 실력 하나는 자신 있으신 영감님이니 그 환자는 지금쯤 건강해졌겠습니다?”

내 물음에 디벳은 벌레 씹은 표정을 지었다.

“…아직이다.”

“뭐라고 하시는지 안 들리는데요.”

“다 들리면서 의뭉 떨지 마라! 이 썩을 것!”

노인의 역정에 나는 낄낄거리며 웃었다.

“너무 화내지 마세요. 그나저나 영감님도 치료하지 못했다면 꽤 어려운 병인가 봅니다?”

내 말에 길버트의 표정이 시무룩해졌다.

“맞아요. 할아버지께서 치료해 주시는 게 제 동생인데 희귀한 병이래요.”

길버트의 말에 디벳은 작게 혀를 차며 내가 의뢰한 약을 손가락으로 건드렸다.

“인클루스어 병이다. 이런 희귀한 병의 치료약 제조법을 알고 있는 너라면 무슨 병인지 알겠지?”

당연히 모른다. 뭔 병이야 그게?

하지만 나는 속내와 달리 싱긋 웃으며 아는 척을 했다.

“기면증 증세에 팔다리 끝에서부터 근육이 굳고, 주기적인 심장통증, 발작 증세가 있나요?”

이건 길버트의 동생이 달고 있는 병증이었다. 내 말에 디벳은 고개를 끄덕였다.

“거기에 발열 증세와 가래 끓는 숨소리가 특징이지. 장기간 치료가 필요한 데다 반드시 나을 거란 확신도 없는 병이다.”

그 말에 나는 생각하는 척을 하며 물었다.

“음, 그거 마력파 촉진도 해보고 내린 결론입니까?”

내 물음에 디벳은 어디서 개가 짓는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앙? 마력파 촉진? 그런 마이너한 진료 방식은 안 해봤지. 마력파 촉진은 환자가 쇠약할 때 잘못 사용했다가 과민성 면역 반응이라도 일어날 수도 있다. 환자가 골로 가기 딱 좋아. 게다가 그건 술사의 감각에… 너무 의존….”

그는 설명을 하다 뭔가 생각에 빠졌다.

그리고는 자신의 덜덜 떨리는 손과 테이블에 놓인 약을 번갈아 바라봤다.

“네놈 설마…!”

디벳이 경악한 듯이 날 바라보자 나는 어깨를 으쓱였다.

“뭐, 증세는 같잖아요.”

“제길! 왜 그 생각을 못 했지! 어쩐지 차도가 없더라니!”

주먹으로 테이블을 내리친 그는 덜덜 떨리는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리며 중얼거리듯 말했다.

“인정하긴 싫지만 얼어 죽은 건 네 말대로 내 의술 실력이었나 보군.”

“절맥증은 훨씬 희귀한 병이잖습니까. 아닐 수도 있고요.”

내 위로에 디벳은 자조적으로 웃었다.

“허나 모르는 병은 아니었다. 몰랐으면 모를까 알고 있었으면서 모든 가능성을 살피지 않은 것만으로도 실격이다.”

그렇게 중얼거린 그를 보며 난 약병을 길버트에게 던졌다.

“받아.”

놀라서 약병을 받은 길버트는 이걸 왜 자신에게 주냐는 듯이 날 바라봤다.

“그거 절맥증 치료제니까 네 동생한테 써 봐.”

“네? 이, 이거 귀한 거 아니에요?”

길버트의 말에 나는 피식 웃었다.

“당연히 귀하지. 재료값이 4인 가족 2년 생활비 정도? 값도 값이지만 아마 저 영감님도 쉽게 구하지 못할걸?”

나도 왕실 의원을 통해서 구하지 않았으면 쉽사리 얻지 못했을 약초였다.

덕분에 왕이 준 돈의 절반가량은 재료값으로 나갔다.

왕은 그 돈으로 사교계에 데뷔해 미약하게나마 왕후를 견제하라는 의도였겠지만 내 계획에 당분간 사교계 데뷔는 없었기에 시원하게 써버렸다.

“이런 귀한 건 받을 수 없어요!”

착하다 못해 어리석은 행동에 나는 차갑게 바라봤다.

“네 동생이 발병한 게 언제쯤이지?”

내 갑작스러운 물음에 길버트는 당황했다.

“…2년 조금 안 됐어요.”

“그럼 절맥증이라면 길어야 3년이겠군.”

“네?”

내 말을 이해하지 못한 길버트를 보며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네 동생의 남은 수명 말이야. 길어야 3년이라고.”

“…!”

명확한 기대 수명을 들은 길버트는 놀라서 디벳을 바라봤다.

디벳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디벳이 부정하지 않자 길버트의 동공이 흔들리며 아래로 향했다.

자연스럽게 자신의 손에 쥐어진 약병을 바라보는 것도 당연했다.

“저, 저는….”

자신의 도덕과 동생의 생명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상황에서 길버트는 극심히 갈등했다.

나는 아무 말 없이 술을 홀짝이며 길버트의 선택을 기다렸다.

동생을 살리면서 동시에 길버트의 마음을 편하게 만들어주는 것쯤은 간단했다.

하지만 나는 굳이 나서지 않았다. 이건 내가 내리는 시험이다.

원래 길버트가 가져야 할 시조의 유산을 내가 가져 버렸으니 눈앞의 애송이의 운명은 이제 나도 알지 못한다.

그렇기에 길버트는 내게 가치를 증명해야 했다.

증명하지 못해도 동생의 목숨은 구하겠지만 본인은 기회를 얻지 못하고 평생 뒷골목에서 인생을 썩힐지도 몰랐다.

자신이 시험 당하는지도 모른 채 갈등하던 길버트는 고심 끝에 테이블 위에 약병을 내려놓았다.

그런가, 알량한 양심을 버리지 못하는 건가.

내 예상 중 가장 최악이다.

차라리 이 자리에서 약을 훔쳐 달아나는 게 더 마음에 들었을 거다.

내가 실망하고 속으로 길버트를 포기하려는데 갑자기 길버트가 내 앞에 무릎을 꿇었다.

“제 꿈은 기사가 되는 것입니다.”

알고 있다.

“기사가 되어서 이 세상을, 이 나라를, 그리고 저와 같이 어려운 이들을 구하는 게 소원입니다.”

훌륭한 소원이다. 그는 노력을 멈추지 않고 끝내 훌륭한 기사가 된다.

<겨울나무의 현자> 속에선 말이다.

“하지만 오늘로 그 꿈을 포기하고자 합니다.”

그렇게 말한 길버트는 이마에 피가 날 정도로 세게 바닥에 머리를 박았다.

“제게 약을 주십쇼! 비록 가진 것은 몸밖에 없는 비루한 삶이지만! 제 모든 걸 바치겠습니다! 몸이 망가지도록 혹사시키셔도 좋습니다! 죽으라면 죽겠습니다!”

나는 그런 길버트를 보며 물었다.

“그렇게 동생이 소중한가? 소중한 꿈을 버릴 만큼?”

“동생은 제게 마지막으로 남은 가족입니다. 동생이라면 분명 저와 다른 형태일지라도 꿈을 이룰 수 있을 겁니다.”

“자신의 꿈을 동생에게 떠넘기는 건가? 동생이 원치 않더라도?”

내 차가운 말에 길버트는 말없이 고개를 숙인 채였다.

나는 그 모습에 미소 지으며 말했다.

“고개를 들어. 이 약은 모두 네 거다.”

“그럼! 제 동생은…!”

“살겠지.”

내 말에 길버트는 눈물을 흘렸다.

“일어서.”

“네!”

길버트는 울먹거리면서도 빠릿하게 일어섰다.

나는 길버트에게 다가간 다음 그의 뺨을 힘껏 때렸다.

“자신의 꿈을 함부로 다른 사람에게 떠넘기지 마라! 민폐다! 소중한 거라면 오롯이 네가 다 짊어져!”

“하지만….”

머뭇거리는 길버트에게 일갈했다.

“정신 차려! 내게 모든 걸 바친 이상 넌 내 기사다! 얼타지 말고 당당하게 품위를 지켜라! 네 행동이 곧 나의 체면임을 잊지 마라!”

내 호통에 길버트는 어설픈 자세로 경례하며 힘차게 대답했다.

“…예!!”

눈물범벅이 된 그의 얼굴에는 참을 수 없는 미소가 번졌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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