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엑스트라 왕자는 세계정복을 시작한다-15화 (15/214)

제15화. 투자는 쓰레기 더미 속에서 (4)

시장 거리 끝에서 인적 드문 골목길로 가다 보면 인력꾼들이 애용하는 주점들이 모여 있는 곳이 나왔다.

딱히 퇴폐적인 홍등가는 아니었고 인력꾼들의 주요 일터인 나루터와 가깝고 저렴한 싸구려 술을 팔아서 애용하는 곳이었다.

나는 소설에 나온 듯이 ‘술주정뱅이 사절’이란 간판의 허름한 주점을 보고 왼쪽 골목으로 꺾어 들어갔다.

“음, 이곳인가?”

나와 프레시아가 도착한 낡은 가게에는 간판 대신 나무판자에 해골 마크와 약병이 그려져 있었다.

“여기가 말씀하신 곳인가요?”

도저히 사람을 살리는 곳으로는 보이지 않는 건물을 보며 프레시아는 반신반의했다.

“아마도?”

반신반의한 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애초에 글의 내용만 보고 유추해서 찾아온 거라 확신할 수 없었다.

“안으로 들어가 보자.”

나는 삐걱거리는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내부는 겉과 마찬가지로 낡았지만 꾸준히 청소를 했는지 먼지가 쌓여 있거나 하진 않았다.

“뉘쇼?”

걸걸한 목소리가 들려오며 안에서 깡마른 노인이 나왔다.

짙은 눈썹과 왼쪽 눈 아래 사마귀, 턱과 목의 화상 자국, 퀭한 눈과 긁어 생긴 팔의 상처, 지팡이를 쥔 손이 덜덜 떨리는 것으로 보아하니 마약의 후유증.

아무래도 잘 찾아온 모양이었다.

“용한 약제사가 있다고 해서 찾아왔습니다.”

내 말에 포이즌 마스터 디벳은 코웃음 쳤다.

“하! 여기 용한 약제사는 없어. 잘못 찾아왔으니 썩 꺼져.”

괴팍한 그의 목소리에 나는 작게 웃었다.

“당신이 디비부 아닙니까?”

“내가 디비부 맞지만 다들 날 돌팔이라고 부르지. 어디서 누가 날 용한 약제사라고 소개하고 돈을 뜯은 모양인데 사기를 당한 모양이군.”

디벳은 비웃음을 흘리며 나가라고 손을 내젓고는 다시 안으로 들어가려 몸을 돌렸다.

가게를 열어놓고 전혀 장사를 할 생각이 없는 듯했다.

“하기야, 약제사 주제에 마약에 절어 있으니 다들 돌팔이라고 부를 수밖에요. 디벳 파비부.”

내가 그의 본명을 말하자 그는 뒤돌아서며 날 노려봤다.

그의 시선에 나는 장난기 가득한 표정으로 물었다.

“왜요? 본명이 마음에 안 듭니까? 그럼 포이즌 마스터라고 불러 드릴까요?”

포이즌 마스터란 말에 노인은 호랑이가 울듯이 으르렁거렸다.

“네놈은 누구냐! 누군데 내 정체를 아는 거지?! 설마…! 독원(毒源)에서 보낸 놈들이냐!”

디벳은 덜덜 떨리는 손으로 주머니에서 작은 구슬을 꺼냈다.

“프레시아! 막아!”

내 지시에 프레시아는 눈에 보이지 않을 속도로 움직여 디벳을 제압했다.

“으윽! 계집애가 무슨 힘이!”

젊었을 때 어지간한 기사보다 훨씬 강한 근력의 소유자였더라도 늙고 약에 찌든 몸으론 프레시아를 이길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나는 디벳의 꺾인 손에서 구슬을 빼앗았다.

이 구슬은 깨트리면 안에 있는 독가스가 터져 나와 주변 모두를 죽이는 무시무시한 무기였다.

당연히 독에 내성이 있는 디벳에게는 안 통할 물건이었다.

좋은 걸 얻었네.

나중에 쓸 일이 있을 것 같으니 안전하게 식자재 창고에 넣었다.

“이보세요, 영감님. 착각하신 것 같은데 전 독원 같은 쓰레기들이 보낸 사람이 아닙니다.”

“뭐?”

디벳은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로 날 올려다봤다.

자신들이 사람들의 목숨을 좌지우지할 수 있다는 선민사상에 찌든 독원이 스스로를 쓰레기라고 부를 리가 없었으니 당연했다.

“저기, 도련님. 독원이 뭡니까?”

프레시아의 물음에 나는 간단히 설명했다.

“좋은 질문이야. 독원은 의사와 약제사들이 지식을 공유하고, 독을 약으로써 사용할 방법을 연구하던 작은 모임이었어. 원래 이름도 독원이 아니었지.”

“어… 그럼 좋은 곳 아닌가요?”

프레시아의 의문에 디벳은 악을 썼다.

“그곳은 그렇게 선량한 곳이 아니야!”

디벳의 외침에 프레시아는 날 바라봤고, 나는 싸구려 술을 꺼내 목을 축이며 이어 말했다.

“독원의 설립 취지는 좋았지. 하지만 시간이 지나며 원래의 취지와 달리 자신들의 지식과 능력을 사리사욕에 이용하자는 파벌이 생겼고, 시간이 지나면서 그 파벌이 모임을 장악하기 시작했어.”

내 말에 디벳은 덜덜 떨었다.

그의 얼굴에는 후회의 감정이 가득했다.

“아마 그 파벌의 수장이 당신이었죠? 포이즌 마스터, 디벳 파비부.”

“그건…!”

나는 근처에서 술잔을 찾다가 설거지가 되어 있는 비커에 술을 따른 후 고개를 숙이는 디벳의 앞에 놓았다.

“디벳의 파벌이 장악한 독원은 약이 아니라 독을 팔아 부를 축적했고, 더 효과적인 독을 위해 인체실험까지 불사했지.”

“아, 아니야! 난…!”

“인체실험 같은 건 안 했다고요? 예, 당신은 안 했죠. 당신은.”

내 차가운 눈길을 받은 디벳은 수치심에 떨었다.

제아무리 사리사욕을 위해 움직이기로 했다지만 검증도 되지 않은, 그것도 살리기 위해서가 아닌 죽이기 위한 인체실험은 금기 중의 금기였다.

아무리 자신은 하지 않았다고는 하지만 독원을 그런 집단으로 만든 건 그 자신이었다.

“꼴에 본질은 의사이자 약제사였던 당신은 독원이 잘못되어 가는 걸 막으려다 축출당했고, 자신이 그토록 살리고 싶어서 악착같이 돈을 모았던 이유인 딸 부부는 독원에 의해 죽임을 당했죠.”

안타까운 일이었지만 자신이 저지른 일에 대한 결과니 인과응보라고 할 수밖에 없었다.

죄 없이 죽은 딸과 그 남편은 불쌍했지만 말이다.

“…뭐야. 넌 뭐길래! 내 과거를 알고 있는 거냐!”

“저는….”

내가 준비한 대답을 하려고 할 때 누군가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할아버지! 오늘 청소… 뭐야! 너희들은 누구야!”

활기찬 인사를 하며 들어오던 갈색 머리의 소년은 제압당한 디벳의 모습에 분개했다.

“당장 할아버지를 놔드리지 못해!”

갑자기 달려드는 소년을 보자 프레시아는 한 손으로 디벳의 팔을 잡고 있는 채로 검을 뽑으려 했다.

나는 손을 들어 프레시아를 말리며 외쳤다.

“나비야! 질식!”

-냥~!

나비가 모습을 드러내며 사전에 입력해둔 대로 소년의 얼굴 주변을 진공 상태로 만들었다.

“!”

소년은 갑작스럽게 숨이 안 쉬어지자 당황해서 목을 부여잡았다.

주변에 공기가 없어서 목소리가 안 들리는 건가 보네.

소년의 얼굴이 빨개지며 동공이 풀리자 나는 다시 진공 상태를 풀라고 지시했다.

“푸하!”

숨을 거칠게 들이쉬던 소년은 이내 기절해서 땅에 쓰러졌다.

“길!”

디벳이 소년을 걱정해서 외치자 나는 어깨를 으쓱였다.

“그냥 기절한 것뿐이니 걱정하지 마세요. 사람 살리는 곳에서 사람 죽일 정도로 못된 놈은 아니라서 말이죠.”

숨도 제대로 쉬는 모양이니 괜찮았다.

잠깐, 그런데 디벳이 저 녀석을 ‘길’이라고 했나? 설마 길버트?

에이, 설마. 소설 속에서 서로 아는 사이 같긴 했지만 이 괴팍한 늙은이랑 길버트가 벌써부터 알고 지냈을 것 같진 않았다.

나는 상큼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자~! 잠시 소란이 있었어요. 우리는 하던 비즈니스나 계속합시다.”

내 말에 디벳은 날 노려봤다.

“네놈은 누구냐! 독원이 아니라면 어디서 온 거지?”

디벳의 외침에 나는 어깨를 으쓱여 보였다.

“그런데 제가 누구라고 자기소개 하면 믿을 순 있으십니까? 전 이 나라의 왕자고 왕궁에서 왔습니다.”

내가 별거 아니라는 듯이 사실을 밝히자 프레시아는 깜짝 놀랐다.

하지만 디벳은 내가 자신을 놀리는 거라 생각했는지 이를 악물었다.

“네놈…!”

“그리고 뭔가 착각하고 계신가 본데 저는 당신의 적이 아닙니다. 그저 당신에게 독이 아닌 약을 지어달라고 의뢰하러 온 고객일 뿐이죠. 중요한 건, 서로가 서로에게 원하는 것을 내어 줄 수 있느냐, 아니냐 아니겠습니까?”

내 능글맞은 물음에 디벳은 이를 악물었다.

“내가 순순히 말을 믿을 것…!”

“헤어진 손녀분을 찾고 싶지 않으십니까?”

내가 말을 자르며 묻자 디벳의 눈이 커졌다.

“내, 내 손녀를 찾을 수 있다고…?”

“제가 당신에 대해 알고 조사한 것처럼 저는 보기보다 재주가 많은 사람입니다. 어떻습니까? 제가 지불할 게 마음에 들면 한잔하시죠.”

나는 친절한 미소를 지으며 프레시아에게 구속을 풀라고 손짓했다.

몸이 자유로워진 디벳은 망설이다가 이내 악마와 계약이라도 각오한 표정으로 눈앞의 술을 단숨에 들이켰다.

“만일 지껄인 게 거짓이라면 넌 내 손에 죽는다.”

나 참, 사람이 선의를 가지고 대하는데 너무하네.

* * *

프레시아는 내가 준 약재로 내가 부탁한 약을 제조하는 디벳을 보며 미심쩍은 듯 물었다.

“저분이 그렇게 대단한 사람인가요?”

“물론이지, 저 영감님보다 뛰어난 약제사는 이 세상에서 한 손으로 꼽을걸?”

물론 전성기 기준이다.

원래 의사로서도 손에 꼽을 실력이었지만 마약 부작용으로 생긴 수전증으로 의술은 거의 사용하지 못했다.

“영감님! 손녀한테 부끄럽지 않게 지금이라도 마약 끊고 치료하시죠?”

“시끄럽다!”

내 장난기 섞인 조언에 디벳은 신경질적으로 대답하며 약을 만드는 데 집중했다.

“그런데 도련님께서도 약학에 식견이 있으신 줄은 몰랐어요. 약을 만드는 데 쓸 재료까지 골라 주셨잖아요.”

프레시아의 감탄에 나는 피식 웃었다.

“뭐, 내가 책을 좋아하잖아.”

소설에서 제이드가 만든 약의 재료와 제조법을 그대로 알려줬을 뿐이었다.

“그런데 뭘 만드는 건가요?”

“마력 불균형 증후군과 절맥증 치료약.”

당연히 내가 먹을 게 아니라 길버트를 얻는 데 사용할 약이었다.

길버트의 동생은 선천적으로 극히 희귀한 병에 시달렸는지라 장기적인 치료가 필요했다.

약을 만들던 디벳은 신경질적인 시선으로 날 힐끔 보며 물었다.

“네놈, 이런 제조법은 어디서 배운 거지? 아니, 그 전에 이런 제조법을 알고 있다면 직접 만들면 되는 것 아닌가?”

말하는 어투로 보아 하니, 아직도 내가 독원에서 온 게 아닌가 의심을 하는 모양이었다.

“저보다는 영감님이 더 잘하잖아요. 약이나 독은 누가 만드느냐에 따라 성능이 천차만별이니까요. 이왕이면 효과가 더 좋은 게 좋지 않겠습니까?”

솔직히 내가 만들면 효과가 나올지 장담할 수 없었다.

“흠! 그건 그렇지.”

디벳은 의기양양해져서 거만하게 웃었다.

“그런데 너희 둘 다 이런 병과는 상관없어 보인다만, 누구에게 먹일 약이냐?”

“그 약은….”

디벳의 물음에 대답하려는데 구석에 누워 있던 갈색 머리 소년이 벌떡 일어났다.

“할아버지! 헉! 헉! 꾸, 꿈인가?”

디벳이 아직 정신을 못 차린 소년의 뒤통수를 후려쳤다.

“꿈 아니니까 정신 차려라 이놈아!”

“아욱!”

얻어맞은 머리를 부여잡던 소년은 나와 프레시아를 발견하고는 다급하게 근처에 있는 쇠 국자를 쥐어 들며 외쳤다.

“할아버지! 피하세요! 여기는 제가, 아욱!”

디벳은 소년의 뒤통수를 한 대 더 때리고는 국자를 빼앗았다.

“피하긴 뭘 피해 이놈아! 할 일 없으면 ‘손놈’들한테 차나 내줘라.”

간절히 원하던 정보를 들고 온 사람한테 손놈이라니, 너무하네.

소년은 지금 상황이 이해가 안 되는지 얼떨떨한 표정을 짓다가 쭈뼛거리며 물을 끓이기 시작했다.

나는 갈색 머리를 보며 낄낄 웃었다.

“뭔가 착각하는 모양인데, 네가 목격한 상황은 우리가 저 괴팍한 영감님을 공격한 게 아니라 저 영감님이 우리를 공격하려는 걸 제압한 거야.”

물론 숨긴 정체를 냅다 까발린 건 나지만 말이다.

“어, 그런가요?”

“그런 거야. 그런데 넌 이름이 어떻게 되지?”

혹시 디벳이 들인 제자인가 싶어서 묻자 소년은 활기찬 목소리로 대답했다.

“길버트에요, 길버트 아산.”

소년의 이름을 들은 나는 눈을 크게 뜨며 길버트를 바라봤다.

“길버트? 혹시 동생이 있나? 병약한 여동생.”

“어? 어떻게 아셨어요?”

오늘 외출에 가장 큰 목적 중 하나를 이렇게 만나게 될 줄은 몰랐다.

그렇다면 이상하다.

길버트가 디벳과 알고 지내는 사이인데 디벳이 치료를 하지 못한다고?

길버트의 동생은 지금으로부터 약 3년 6개월 뒤에 죽는다.

사인은 절맥증으로 인한 마력 불균형의 심화로 마력 폭주.

제이드가 길버트의 동생과 만났을 때는 이미 손쓰기에 늦은 상태였다.

제이드가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몸이 갈가리 찢겨지는 고통을 없애주고, 유언을 남길 수 있도록 시간을 벌어주는 게 전부였다.

그것만으로도 길버트는 제이드에게 충성을 맹세했다.

하지만 지금은 아직 시간이 많이 남아 있었다.

물론 완치를 하기 위해선 값비싼 약초가 필요하긴 했지만 디벳의 실력이라면 생명 연장 정도는 충분할 터였다.

그런데 어째서 치료를 안 한 거지?

설마… 아니, 아니겠지.

하지만 가능성이 있다면 하나뿐이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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