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4화. 투자는 쓰레기 더미 속에서 (3)
수도 동쪽에 위치한 시장 거리는 내 생각보다 훨씬 번화하고 북적거렸다.
이 나라는 무력적으로는 강성했지만 꽤나 변방에 위치한지라 크게 기대하진 않았는데 수도는 수도인 모양이었다.
나와 프레시아는 시장 거리를 돌아다니며 군것질을 하기도, 신기한 물건들을 사기도 했다.
“저기 좀 보세요, 사람들이 광장에 모여 있어요. …도련님.”
프레시아는 편하게 내 이름을 부르는 걸 완강히 거부하며 결국 도련님이란 호칭으로 타협했다.
솔직히 놀리는 게 재미있어서 호칭이 빨리 정해진 게 조금 아쉬웠다.
나는 프레시아가 이끄는 대로 사람들이 모여 있는 광장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거리 공연인가?”
시장 광장 중앙에는 네 명이 마치 서커스단처럼 분장을 하고 저글링을 하는 등 기예를 부리고 있었다.
“와! 저 사람 보세요! 카드를 공간이동 시켰어요! 공간이동은 위대한 대마법사도 하기 힘든 마법이라고 하던데 대단한 마법사일까요?”
순진무구한 프레시아는 간단한 카드 마술에도 신기해했다.
“그냥 눈속임이겠지. 설마 공간 마법을 자유자재로 다루는 마법사가 이런 곳에서 구경거리가 되겠어?”
내 대답에 프레시아는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여전히 신기해했다.
“눈속임이면 어떤 걸까요?”
“대충 이런 식이겠지.”
나는 주먹 쥔 왼손에 동전을 안 보이게 집어넣고 프레시아에게 입김을 불어달라고 했다.
프레시아가 내 주먹에 입김을 불자 나는 간단한 주문을 외우며 오른손을 펼쳤다.
오른손에서 동전이 나오자 프레시아는 놀랐고 나는 이어서 주먹 쥔 왼손을 펼쳐 아무것도 없다는 걸 보여줬다.
“어?! 어떻게 하신 거예요?”
프레시아의 물음에 나는 왼쪽 소매에서 동전을 꺼내며 트릭을 가르쳐줬다.
“간단해. 내가 원래 가지고 있던 동전은 2개였고 다른 곳에 시선을 끄는 사이 숨긴 거지. 말했잖아, 눈속임이라고.”
탁 트인 곳에서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다면 심리트릭과 손동작 연습이 조금 필요하지만 그렇게 어려운 마술은 아니었다.
“저 사람이 주의를 끌지 않는 쪽 소매를 잘 봐봐. 트릭은 아마 거기일 테니까.”
내 말에 집중해서 거리 공연을 관찰하던 프레시아는 감탄사를 내뱉었다.
“와! 정말 말씀대로예요.”
정교한 마술 용품을 만들 수 있는 세계라면 모를까 전문 용품이 없다면 숨길 수 있는 곳은 소매나 모자 속 정도였다.
손이 눈보다 빠르면 알아도 보지 못하지만 극한까지 단련된 프레시아의 눈을 속일 순 없었다.
프레시아는 마술의 트릭을 알자 거리 공연에 금세 흥미를 잃은 듯했다.
마술 외에도 신기한 기예를 선보였지만 프레시아에게는 그리 어려운 것도 아니니 당연했다.
“오늘 저녁에 저희 서커스단에 오시면 보다 신기한 구경을 할 수 있으니 많은 방문 부탁드립니다!”
거리 공연은 호객을 위한 거였나.
나와 프레시아는 관심을 잃고 다시 시장 구경이나 하러 발길을 돌리는데 공연을 하던 마술사가 급하게 우리 방향으로 달려왔다.
“저기요!”
모르는 사람의 우리를 불러 세우며 접근하자 프레시아는 자연스럽게 코트 안에 숨겨둔 검을 뽑을 준비를 했다.
그 사실을 눈치챈 나는 프레시아의 어깨를 두드리고 앞에 나섰다.
“무슨 볼일이라도?”
내 물음에 마술사는 넉살 좋게 웃으며 허공에 손을 휘저었다.
그러자 없던 장미꽃 한 송이가 나타났다.
“아하하하. 너무 경계하지 말아줬으면 좋겠는데요.”
마술사는 프레시아에게 장미를 건넸지만 프레시아는 차가운 눈으로 노려보며 받질 않았다.
나는 마술사의 장미를 대신 받으며 말했다.
“추파를 보내려 한 거면 사양하지.”
아직 어려서 괜찮겠다고 생각했는데 프레시아가 너무 예쁜 것도 문제구만.
내가 대신 추파를 거절하자 마술사는 오해라며 손사래를 쳤다.
“아니요! 제가 관심 있는 건 이 아리따운 숙녀분이 아니라 당신이라서요. 당신의 연인께 추파 부리려던 건 아니었습니다.”
“여…!”
프레시아가 얼굴에 홍조를 띠며 부정하려 하길래 나는 그녀보다 앞서 말했다.
“그런 것치고는 능숙하던데?”
연인으로 오해한다면 굳이 부정하며 시간을 쓰는 것보다는 혹시 모를 귀찮은 날파리를 쫓아내는 데 오해를 이용하는 편이 생산적이다.
내 비아냥에 마술사는 바람둥이처럼 느끼한 얼굴값을 하는지 과장해서 어깨를 으쓱였다.
“그저 아름다운 여성을 보면 장미를 선물하는 습관이 있어서요.”
서커스의 마술사가 여자를 보면 장미를 선물해?
어딘가 기시감이 드는 녀석이었다.
“그렇다고 해두고, 그래서 내게는 무슨 볼일이지?”
내 물음에 마술사는 소매에서 트럼프 카드 클로버 에이스를 꺼내며 대답했다.
“혹시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방금 전 하던 동전 기예를 누구에게 배웠는지 알 수 있을까요?”
마술은 내가 이 몸에 들어오기 전, 죽은 친구에게 배운 거였다.
“그건 왜 묻지?”
순간 기분이 불쾌해져 노려보자 마술사는 싱긋 미소를 지었다.
“별건 아닙니다. 그저 저와 비슷한 기예를 익히셨기에 가르쳐준 분이 혹시 제가 아는 사람일까 해서요. 그동안 많은 곳을 돌아다녔지만 저와 비슷한 기예를 익히신 분은 처음인지라.”
마술사의 말에 순간 머리에 한 문장이 스쳐 지나갔다.
‘제가 찾는 건 둘도 없는 은인이자 원수입니다.’
<겨울나무의 현자>에서 그 말을 한 조연은 주인공 제이드와 초반에서 중반까지 함께 움직이는 조력자 ‘천 가지 기예의 광대, 야드 토슬’이었다.
야드는 어려서부터 서커스단에서 자란 마검사로 바람둥이같이 생겨서 항상 장난만 치는 행실과는 다르게 속은 꽤나 진지한 인물이다.
내가 아는 바로 야드와 제이드가 만나는 건 지금으로부터 약 3년 4개월 뒤, 북쪽 지방에서였다.
“네가 찾는 게 누구인지 모르겠지만, 내게 이런 손장난을 가르쳐준 건 내 또래 남자다.”
내 대답에 그는 실망한 듯했지만 금세 표정을 감추었다.
“그렇다면 아쉽게도 제가 아는 사람은 아닌 듯하네요.”
마술사는 손에 쥔 카드를 순식간에 티켓 2장으로 바꿨다.
“실례했습니다. 이건 두 분의 시간을 잡아먹은 사죄의 의미로 드리는 작은 선물입니다. 공연 시작 전에 찾아오신다면 특별히 제가 안내해 드릴 테니 꼭 와 주시겠습니까?”
티켓에 적힌 서커스단 이름은 ‘슬라반 서커스단’.
야드가 소속된 서커스단의 이름이었다.
이렇게 초대한 이유는 아마 나보다는 내가 말한 마술을 가르쳐준 사람에 관심이 가서일 터였다.
“간다면 누구 이름을 대야 하지?”
내 물음에 마술사는 가볍게 윙크를 하며 과장스럽게 허리 숙여 인사했다.
“제 이름은 야드 토슬. 제 친구들은 저를 천 가지 기예를 부리는 광대라고 부르지요.”
그의 인사에 나는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
“가급적 가도록 하지. 기대되는군.”
내 대답에 야드는 익살스럽게 웃었다.
“분명 실망하시지 않을 겁니다.”
야드가 익히고 있는 기예 중 탐나는 것이 있었는데, 그와 거래할 수 있는 정보는 머릿속에 차고 넘쳤다.
* * *
“이봐, 길. 늦었지만 식사나 하자고.”
나루터에서 배에 물건을 실은 길버트는 땀을 닦으며 대답했다.
“예! 이것만 마저 옮기고요!”
“그런다고 돈은 더 못 준다?”
“알고 있어요!”
화물선에 마지막 상자를 옮기는 길버트를 보며 덥수룩한 수염의 인력소장은 미소를 지었다.
자신도 썩 넉넉지 못한 형편이었기에 일당을 많이 주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어떻게든 일감이 생기면 길버트를 챙겨주려 노력했다.
길버트도 그걸 알고 있기에 더욱 열심히일 수밖에 없었다.
나이가 그리 많지 않은 자신에게 그나마 정기적으로 일거리를 주는 것은 인력소장뿐이었기 때문이었다.
물건을 다 옮긴 길버트는 낡은 옷에 땀을 닦으며 인력소장이 준비한 샌드위치를 들었다.
“잘 먹겠습니다.”
들어 있는 거라고는 죄다 풀떼기에 고기라고는 손톱만 한 크기의 염장한 햄 몇 조각이 전부였지만 이렇게 식사를 해결할 수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감사한 일이었다.
길버트가 평소처럼 동생에게 주려고 반을 나누려는 걸 인력소장이 말리며 신문지에 싸인 무언가를 건넸다.
“동생한테는 이걸 주고 그건 다 먹어. 괜히 못 먹어서 힘들다는 소리 하면 쫓아낸다?”
“아저씨…! 감사합니다!”
길버트는 감동한 듯 울먹거렸고 주변의 인부들은 웃으며 인력소장을 놀려댔다.
“아하하하! 역시 보모 영감님이라니까!”
“시끄러워 이것들아! 다 처먹었으면 빨리 일해!”
인력소장이 역성을 내자 인부들은 더욱 놀려댔다.
“아하하하! 부끄러워하기는!”
“맞아! 좋은 일 하고 부끄러워하는 게 꼭 담배 가게 새침데기 아가씨라니까?”
“썩 안 꺼져!”
인력소장이 인부들을 내쫓으며 헛기침을 했다.
“일 끝나면 또 그 약쟁이 영감에게 가는 거냐?”
그의 물음에 길버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디비부 할아버지네 청소를 해드리기로 했어요.”
“쯧, 또 무일푼으로 부려먹히는 거냐? 그 고약한 영감 때문에 네가 고생이 많구나.”
“아니에요, 그래도 동생 약값을 싸게 해 주시는걸요.”
길버트는 쓰게 웃었다.
자신이 돈이 있었으면 동생에게 더 맛있는 것을 먹여주고 아프지 않게 해 줄 수 있었을 텐데 아쉬웠다.
* * *
광장을 지나쳐 시장 거리를 둘러보던 나는 가게에서 하회탈과 비슷한 가면을 발견하고 크기를 보기 위해서 집어 들었다.
가면은 끈으로 묶는 형태가 아니라 검은 두건과 일체형으로 되어 있어 일부러 벗지 않는 한 벗겨지진 않을 것 같았다.
“아이고, 손님! 그 가면이 저 남쪽 지방에서 연극을 할 때 쓰는 가면인데 꽤 귀한 겁니다!”
잡다한 것들을 늘어놓은 가게의 주인은 가면을 팔아보려고 주저리주저리 떠들었지만 생김새가 조악한 게 그리 귀해 보이지는 않았다.
“얼마입니까?”
내 물음에 가게 주인은 얼씨구나 좋다고 가격표를 가리켰다.
“이 귀한 게 단돈 30듀플입니다!”
절반 가격도 안 되어 보이는데 바가지다.
“한번 써 봐도 됩니까?”
“어유! 물론입죠!”
가게 주인의 허락이 떨어지자 가면을 쓰고 가게에 달린 청동 거울로 내 모습을 비춰봤다.
크기가 좀 헐렁했는데 잘 보니 밑에 끈을 조일 수가 있었다.
“20듀플.”
“예? 하지만 그렇게 팔아선 제가 남는 게….”
“5개 살 테니 개당 20듀플, 아니면 다른 데서 사죠.”
“아이고! 물론 20듀플에 드려야지요!”
가게 주인은 상자에서 먼지가 쌓인 가면을 더 꺼냈다.
“도련님, 5개씩은 필요 없지 않겠어요?”
“필요할지 안 할지는 두고 봐야지. 아, 저거 가발인가요? 저건 얼마죠?”
그렇게 나는 프레시아가 쓸 만한 가발과 고정핀 등 변장 도구를 구매했다.
계속해서 시장 곳곳을 돌아다니다 보니 오전에 격하게 운동을 한 탓인지, 꽤 오랫동안 돌아다닌 탓인지 지쳐서 근처 작은 공원으로 향했다.
인적 드문 공원 벤치에 앉아 휴식을 취하는데 프레시아는 시장에서 산 것들이 담긴 바구니를 들추며 물었다.
“도련님. 이것들은 왜 사신 거예요?”
프레시아가 하나하나 꺼내는 물건들은 꽤 다양했다.
방금 전 산 가면부터 시작해서 사탕 꾸러미, 헐값에 산 허름한 후드 외투, 싸구려 물감과 붓, 철사와 못 꾸러미, 속이 빈 작은 공 몇 개, 그리고 대량의 약초들과 싸구려 술이 한가득이었다.
“아, 맞다. 술은 내가 먹으려고 산 거니까 지금 창고에 넣어둘게.”
최근 너무 고급스러운 술만 먹었더니 싸구려 술이 땡겼다.
물론 내가 마시는 것 외에도 용도가 있어서 산 거긴 하지만 말이다.
내가 술병을 챙기자 프레시아는 이해가 안 되는 듯이 날 바라봤다.
내가 왕궁에 숨겨진 것들을 얻는 것보다 중요한 일이라 했으니 그렇게 보는 것도 당연했다.
“이것들은 그냥 준비물이라고 생각하면 돼. 지금부터 방문할 곳들에 가져갈 선물이라고 해야 할까?”
뭐, 몇몇 곳에서는 그리 반기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말이다.
내가 기대된다는 듯이 웃자 프레시아는 왠지 걱정된다며 한숨을 내쉬었다.
“저희는 어디에 방문하는 건가요?”
“글쎄, 어디가 좋을까… 우선은 약쟁이 영감네 가야지.”
과거 포이즌 마스터로 악명을 떨쳤지만 지금은 마약에 찌든 영락한 노인, 디벳 파비부를 만나러 갈 생각이었다.
지금 시점에서는 디비부란 이름으로 지내고 있었던가?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