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3화. 투자는 쓰레기 더미 속에서 (2)
“아이고, 전신이 뻐근하네.”
나는 골골거리며 샤워를 마치고 나왔다.
조금 과하게 움직였더니 내일도 근육통이 장난 아닐 듯했다.
아침 운동이 끝나고 확인한 내 손목의 숫자는 역시나 그리 크게 변하지 않았다.
역시 영약을 먹어야겠군.
“점심은 간단히 먹을 수 있는 샌드위치 종류로 부탁한다고 주방장에게 전해줘. 물론 고기 많이.”
샤워실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헤리온은 내 부탁에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그런데 오늘도 산책을 나가시는 겁니까?”
그 물음에 나는 주변에 돌아다니는 시종들을 흘끔 보고는 큰 목소리로 말했다.
“아니. 오늘은 조금 쉬려고. 듣기로는 휴식 또한 중요하다지?”
내 대답에 헤리온과 같이 기다리던 프레시아는 살짝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왜 그렇게 봐?”
내가 묻자 프레시아는 나와 헤리온에게만 들릴 정도로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니요, 또 뭔가를 하시려는 것 같아서요.”
프레시아의 대답에 나는 작게 휘파람을 불었다.
딱히 표정 관리를 하진 않았다지만 눈썰미가 보통이 아니었다.
이제 왕자 유안이 아닌 내게 익숙해진 듯했다.
“자세한 이야기는 내 방으로 돌아가서.”
내가 딱히 부정하지 않자 프레시아는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날 바라봤다.
“그럼 저는 주방장에게 지시하신 바를 전하고 밀린 업무를 보겠습니다.”
“그래, 오늘은 날 보필하지 않아도 되니까 수고해.”
헤리온은 왕이 올려준 예산으로 그동안 미뤄왔던 보수 관리를 하느라 꽤나 바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왕이 통 크게 기존 예산을 5배를 늘려주고 그동안 못 받았던 만큼 돈을 하사해 준 덕분이었다.
게다가 내 용돈도 꽤나 두둑이 챙겨줘서 예산을 건드리지 않아도 의원실을 통해 원하는 약초를 구할 수 있었다.
내 방에 도착하자 나는 식자재 창고에서 큼지막한 왕궁 내부 도면을 꺼내 책상 위에 펼쳤다.
왕궁 도면을 본 프레시아는 식겁했다.
“이, 이건 어떻게 얻으신 거예요?!”
왕궁 내부 도면은 특급 군사 기밀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기밀문서 중 하나였으니 경악하는 것도 이상하진 않았다.
“얻다니, 내가 이런 걸 어디서 얻어?”
“예? 그럼요?”
“당연히 내가 그렸지.”
이 왕궁 내부 도면은 <겨울나무의 현자>에 딸린 부록을 내가 따라 그린 모조품이었다.
당연히 왕궁을 무대로 적과의 치열한 전투를 다룬 에피소드를 설명하기 위해서니만큼 숨겨진 비밀 통로도 그려진 상세한 도면이었다.
“너무 걱정하지 마. 내가 돌아다닌 걸 바탕으로 대충 그린 거니까.”
내 변명에 프레시아는 혀를 내둘렀다.
“그래서 이 지도 때문에 지금까지 그렇게 돌아다니신 거였어요?”
“뭐, 이유 중 하나지. 나비가 고생했어.”
나는 나비의 목덜미를 쓰다듬었고 나비는 기분 좋은 울음소리를 냈다.
-냐야~!
내가 계속 왕궁 내부를 계속 돌아다닌 건 왕의 처소에 들어가기 위함이기도 했지만 실제로 나비를 통해 이 도면이 맞는지 확인하기 위해서기도 했다.
물론 나중을 위해서 평판 작업을 하며 왕후를 도발하기 위함도 있었지만 말이다.
내 대답에 프레시아는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이 지도를 만들었다는 걸 들키면 난 아마 반역에 준하는 죄로 죽거나 유폐당할 게 분명했으니 이해는 갔다.
하지만 이 지도는 내가 살기 위해서 만든 지도였다.
“그래서 이 지도는 왜 꺼내셨나요?”
프레시아의 물음에 나는 장난스럽게 웃었다.
“지금부터 우리는 아무도 몰래 왕궁을 빠져나갔다가 돌아올 거야.”
프레시아는 내 말을 이해하지 못한 듯 날 바라봤다.
“여길 잘 봐. 각 궁에는 유사시에 대피하기 위한 비밀 통로가 있어. 왕국 초기에는 왕과 각 궁의 주인에게 알려줬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혹시 반란에 이용될까 봐 왕에게만 전승되었지.”
내가 도면을 손으로 훑으며 우리가 있는 별궁의 비밀 통로를 가리켰다.
“전하께만 전승이 된다면, 왕자님은 어떻게 이 사실을 알고 계신 거죠?”
당연한 물음에 나는 별거 아니라며 대답했다.
“내가 책을 많이 읽어서…이기는 하지만 알게 된 계기는 이 성을 지은 난쟁이의 기록을 읽어서야.”
내가 창고에서 낡은 책 한 권을 꺼내자 프레시아는 고어로 적힌 책 표지를 바라봤다.
“그 책은 나흘 전 ‘밤 산책’ 때 왕실 대장간에서 가져온 책이네요.”
나는 왕과의 저녁 식사 이후 하루걸러 한 번 꼴로 프레시아를 대동하고 왕궁에 숨겨진 것들을 찾으러 돌아다녔다.
이제 내가 찾지 못한 것은 왕후의 궁에 숨겨진 리즈벳의 정령서와 성당 여신상에 숨겨진 성녀의 로사리오뿐이었다.
그중에 대장간에는 시조의 의뢰로 이 왕궁을 설계하고 지은 난쟁이의 망치와 일기가 잠들어 있었다.
참고로 이 일기에는 비밀 통로가 언급되어 있을 뿐 설명은 없었지만 그걸 굳이 설명할 필요는 없었다.
“그런데 굳이 몰래 나가시는 이유가 있으신가요? 왕자님의 안전을 위해서라도 나가는 걸 알리고 호위를 대동하는 게 좋지 않을까요?”
프레시아의 생각은 보편적으로 옳았다.
날 죽이려는 녀석들이 보통 놈들이라면 말이다.
사실 지금 걱정인 부분이 소설은 왕자 유안이 죽고 약 3년 뒤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된다는 점이다.
지금부터 3년간 무슨 사건이 벌어질지 알 수가 없었다.
“프레시아, 내가 몰래 나가는 건 두 가지 이유에서야. 하나는 혹시라도 날 죽이려고 암살자를 보낸 자들의 시선을 끌지 않기 위해서, 다른 하나는 내가 나가서 할 일들을 왕후가 알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
어쩌면 이미 수도에 왕후와 접선하는 연결책인 ‘아르카나 13’ 네크로맨서 아리사와 ‘아르카나 16’ 퍼펫마스터 니벨이 들어와 있을 수도 있다.
가능하다면 그 미치광이 아리사와는 절대 만나고 싶지 않았다.
내 대답에 프레시아의 표정이 진지해졌다.
그녀는 내 말이 시사하는 바를 모를 정도로 어리석지 않았다.
“왕궁 밖에서 하실 일이 밤 산책과 비슷한 일인가요?”
프레시아가 내 보물 사냥을 어떻게 이해했는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비델의 갑옷 등 내가 얻은 일부 보물의 정보를 알려줬기에 내게 해가 되는 일은 아니라고 생각할 터였다.
“맞아. 어쩌면 밤 산책보다 더 중요할 수도 있는 일이지.”
내 대답에 프레시아는 각오를 다진 듯 고개를 끄덕였다.
“저는 왕자님께서 가시는 곳이 어디든 따르겠습니다.”
“좋아, 그럼 옷부터 갈아입자.”
지금 나나 프레시아의 옷차림은 너무 눈에 띄었다.
* * *
소년은 생각했다.
이 세상은 너무나 잔혹하며 자신과 자신의 어린 동생을 동정하지 않는다고.
하지만 동시에 소년은 꿈을 꿨다.
어렸던 시절 읽었던 동화 속 용감한 기사님처럼 검을 들고 세상을 위협하는 악을 물리치겠노라고.
그리고 자신들을 동정하지 않는 세상을 대신해 구원이 필요한 이들에게 손을 내밀겠노라고.
소년의 꿈을 들은 주변 어른들은 소년의 꿈을 비웃으며 타일렀다.
동화는 동화일 뿐이며 너는 잘난 기사들처럼 될 수 없다고.
현실을 직시하라고.
어른들이 보기엔 소년은 기사가 되기에 반드시 필요한 것이 없었다.
기사가 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굴강한 육체도, 섬세한 검술도, 고귀한 기사도도 아니다.
진정한 기사가 되기 위해서는 막대한 돈이, 세상이 정한 고귀한 혈통이, 그도 아니면 든든한 뒷배가 필요했다.
그러나 소년에게는 아무것도 없었다.
동생에게 먹일 약초 한 줌 살 돈은커녕, 당장 배를 곪지 않을 빵 한 조각조차 없었다.
세상이 원망스러워 삐뚤어질 만하건만 오늘도 소년은 활기차게 웃으며 푼돈을 받는 심부름꾼 일을 자처했다.
“이봐, 길! 이것 좀 옮기라고!”
“예! 이것만 옮기고요!”
“길버트! 빨리!”
“예, 예! 갑니다!”
불행을 모르는 듯한 소년을 사람들은 이렇게 불렀다.
‘바보 길버트’라고.
* * *
나는 헤리온이 가져다 준 샌드위치를 먹으며 비탈길 아래로 보이는 수도 전경을 바라봤다.
도시를 가로지르는 거대한 강을 사이로 동쪽에는 시장 거리가 형성되어 있었고, 왕궁과 가까운 북쪽에는 고급스러운 주택가가 모여 있었다.
남쪽에는 강을 수원 삼아 농경지가 펼쳐져 있었는데 내가 가려는 곳이 잘 보이지 않았다.
“빈민가는 어디에 있지?”
내 물음에 프레시아는 수도 서쪽 부근을 가리켰다.
“빈민가는 저기 있습니다.”
프레시아의 손끝을 따라 자세히 보니 서쪽 성벽 끄트머리에 판자촌으로 보이는 곳을 확인할 수 있었다.
아무래도 판잣집은 작다 보니 건물들 사이에 가려서 잘 보이질 않았다.
“그런데 정말로 밖으로 나왔군요.”
프레시아는 도심을 바라보며 진심으로 놀랐다.
아무도 몰래 빠져나갈 거란 내 말에 반신반의했던 모양이었다.
“내가 말했잖아. 비밀 통로가 하수도와 연결되어 있어서 아무도 모르게 드나들 수 있다고. 물론 조금 냄새 나지만.”
나는 나비의 목덜미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나비야, 빛을 굴절시킬 수 있겠어?”
내 물음에 나비는 이해하지 못한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음, 이걸 뭐라고 설명해야 좋지?”
빛의 정령이었으면 단숨에 이해했을 텐데 바람의 정령이라 그런지 방법을 가르치기 쉽지 않았다.
나는 공기의 밀도를 바꿔 빛의 산란을 일으켜 다른 사람에게 보이는 머리카락 색을 바꾸는 방법을 열심히 설명했다.
하지만 가능한 것 이전에 나비를 이해시키는 것부터 실패했다.
“아니, 그냥 가발을 구할 수 있으면 사자.”
내 샛노란 금발은 그렇게까지 드물진 않지만 프레시아의 붉은 머리는 꽤 드물어서 눈에 띄었다.
그래도 특징을 감추는 게 급하지는 않았다.
왕궁을 나오기 전 만약을 대비해 헤리온에게 내가 공식적으로는 내 방을 나가지 않은 것을 증명해 달라고 부탁해둔 덕분이다.
왕자 유안의 얼굴이 잘 알려지지 않은 덕분에 인파 속을 거닐어도 날 알아볼 사람은 없겠지만 최악의 상황은 언제든 대비해 둬야 했다.
내가 포기하자 나비는 미안함을 담아 내 뺨에 자신의 얼굴을 비볐다.
나비는 귀여우니 잘못 없다.
어차피 변장 도구는 따로 구할 곳이 있었으니 괜찮았다.
나는 마지막 샌드위치를 먹고 손을 털며 말했다.
“자, 그럼 내려가자고. 해가 지기 전까지 돌아가려면 바쁘게 움직여야 하니까.”
“알겠습니다! 그럼 저희는 어디부터 갈까요?”
프레시아도 수도 구경은 드문 경험인지 얼굴이 상기되어 있었다.
어렸을 때는 호레이즌의 훈련 때문에 시간이 없었고, 기사가 된 이후에는 외톨이인 왕자 유안을 위해 주말도 반납하기 일쑤였으니 이런 경험은 극히 드물 터였다.
“역시 용돈이 있으니까 시장 구경부터 해야지 않겠어?”
지금 이 시점에 시장에 내가 원하는 물건들이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반드시 들러야 할 가게가 있었다.
“저도 모아둔 월급이 있어요! 왕자님께 귀한 검을 받았으니 제가 답례로 뭔가 사드릴게요!”
“하하하, 뭘 사줄지 기대되네. 그런데 우린 지금 몰래 나온 거니까 왕자님이란 호칭으로 부르지 마.”
내 지시에 프레시아는 아차하며 손으로 자신의 입을 막았다.
“그럼 뭐라고 불러야 할까요?”
그녀의 물음에 나는 장난기 가득한 얼굴로 대답했다.
“그냥 이름으로 불러. 자, 유안이라고 불러봐.”
“아, 아니, 제가 어떻게 감히.”
프레시아는 얼굴을 붉히며 안절부절못했다.
나는 킥킥 웃으며 앞장섰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