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엑스트라 왕자는 세계정복을 시작한다-12화 (12/214)

제12화. 투자는 쓰레기 더미 속에서 (1)

왕과의 저녁 식사를 하고 닷새가 지났다.

“허억! 허억! 허억!”

나는 지금 거친 숨을 몰아쉬며 반쯤 걷듯이 왕궁 안에 있는 연무장을 뛰고 있었다.

이 연무장에는 벌써 닷새간 출석하듯 와서 운동을 하고 있었다.

“너무 힘드시면 그만하셔도 됩니다, 왕자님.”

프레시아는 닷새 동안 같은 말을 하며 날 걱정했다.

내 옆을 같이 뛰는 그녀는 지치기는커녕 땀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있었다.

“이십, 바퀴…! 말 걸지 마!”

목표했던 연무장 20바퀴를 다 뛰기 전에 포기하지 않겠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숨이 차올라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솔직히 이 허약한 육신은 4바퀴째부터 한계에 도달했고 지금은 9바퀴째 달리고 있었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며 나보고 돌았냐고 소리치는 것 같았지만 나는 무시하고 뛰었다.

제길, 이 허약한 몸은 매일 뛰어도 한계치가 전혀 올라가지 않는 느낌이었다.

나는 한겨울임에도 옷을 풀어헤치고 계속해서 달렸다.

그리 빠른 속도는 아니었지만 내가 포기하지 않자 오전 훈련 중이던 기사들이 환호하며 박수를 쳤다.

“힘내십쇼!”

“멋집니다!”

왕궁 살림을 왕후가 한다고 왕궁의 모두가 왕후 편인 건 아니었다.

특히 대부분의 기사들은 왕의 직속이거나 군부 소속이라 대부분 나에게 아무런 적의도, 호감도 없었다.

그러니 내 노력하는 모습에 순수하게 응원을 보내는 것이리라.

“이…십! 허억! 허억!”

나는 기어코 목표했던 20바퀴를 다 채우고 나서야 땅에 쓰러지듯 누웠다.

“자, 잠깐만 쉬자. 후우~! 하아~!”

내가 누워 있자 헤리온은 미리 준비해 두었던 물병과 수건을 가져왔다.

“누워서 드시면 사레가 들리니 물은 앉아서 드시기 바랍니다.”

“알았, 흐어어.”

나는 부들거리는 팔로 몸을 일으켜 세우고 물병을 받아 들이켰다.

내가 물을 마시는 동안 프레시아가 걱정하며 수건으로 내 땀을 닦아줬다.

“왕자님께서 갑자기 너무 무리하시는 게 아닌가 걱정입니다. 조금 더 낮은 강도에서 시작해도 시간을 들이면 충분히….”

“아니, 그건 아니지.”

잔소리에 가까운 프레시아의 말을 자른 건 이 연무장을 사용하던 황금 사자 기사단의 문장이 그려진 옷을 입은 사내였다.

기사들을 관리 감독했던 걸 보면 꽤 높은 지위의 기사인 듯했다.

“육체 단련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목표 설정과 반드시 그 목표를 이루는 것. 그러나 목표를 그저 몸에 부담이 가지 않는 선으로만 잡는다면 그 육신은 강해지지 못하지. 그건 어린 여성의 몸으로 기사가 된 경이 더 잘 알고 있지 않은가. 왕자님께선 잘하고 계십니다.”

“그, 그건 그렇지만 왕자님께선 기사가 아니신데….”

“아니.”

이번에는 내가 프레시아의 말을 잘랐다.

“경의 말이 옳아. 사람의 몸은 한계를 넘어서 움직여야 단련이 돼. 한계를 넘지 않는다면 잘해야 제자리걸음에 불과하지.”

물론 건강을 생각하면 너무 과한 운동은 금물이었다.

특히 이 허약한 몸뚱어리로는 말이다.

내 말에 프레시아와 안면이 있는 것처럼 보인 황금 사자 기사단의 기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왕자님께선 잘 알고 계시군요! 더 강한 운동! 더 고된 시련만이 기사를 강하게 만들죠!”

대단히 정열적이고 마초적인 사람이구만.

“아하하, 멋진 지론이군. 그나저나 내가 방해가 되었을 텐데 이렇게 연무장 한 켠을 내어줘서 고맙네. 어… 음, 이제 와서 묻는 것도 미안하지만 이름이 어떻게 되는지?”

내가 기사의 이름을 묻자 중년의 기사는 호쾌하게 웃으며 내게 경례했다.

“저야말로 인사가 늦었군요. 저는 황금 사자 기사단 부단장 호레이즌 디 그레인이라고 합니다.”

“호레이즌? 천하십검(天下十劍)의 검호(劍豪)? 왕국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든다는 그 ‘붉은 이빨’?”

내가 놀라서 되묻자 중년의 사내는 쑥스럽다는 듯이 웃으며 대답했다.

“하하핫! 과장된 허명일 뿐입니다.”

그는 그렇게 말했지만 그의 무력은 북방의 대장군 데미웨이와 쌍벽을 이뤘다.

그도 그럴 것이 호레이즌은 최강의 무인을 꼽을 때 반드시 거론되는 천하십검 중 한 명인 ‘검호’였다.

그의 무력과 이룩한 업적은 그저 가진 게 왕자 신분밖에 없는 내가 하대할 만한 사람이 아니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사과했다.

“이런, 제가 실례했습니다. 프레시아에게 말은 많이 들었습니다. 경이 이 친구의 스승이라지요?”

무엇보다 호레이즌은 프레시아의 스승이기도 했다.

그리고 언젠가 프레시아를 통해 한번 접촉해 보려고 한 사람 중 하나였다.

어쩐지 운동할 만한 곳을 찾는 내게 이곳을 추천하더니 자신의 스승이 있어서였구만.

프레시아를 아끼는 호레이즌이라면 기꺼이 연무장을 내어줄 만했다.

“아하하하, 사제 관계라기보다는 딸에 가깝죠. 그래서 하는 말인데 사실 전 프레시아가 기사가 되는 걸 반대했었습니다.”

알고 있다. 호레이즌은 기사가 되고 싶어 하는 프레시아를 말리기 위해 어려서부터 어린아이가 견딜 수 없을 시련을 부여했었다.

그러나 프레시아는 그 모든 시련을 뚫고 어린 나이에 기사가 되었다.

물론 차별 때문에 나같이 지지기반이 없고 나약한 왕자의 호위 기사가 되어 버리기는 했지만 말이다.

생각해 보면 호레이즌의 반대는 타당했다.

무력을 신봉하는 극단적인 남초 집단인 기사들 사이에서 제대로 된 인정을 받을 수 있을 리도 없지만, 왕궁은 정치적인 이유로 목이 달아날 수 있는 위험한 곳이다.

특히 <겨울나무의 현자> 속에서 프레시아는 왕자 유안이 암살당하자 호위하지 못했다는 죄목으로 그 극한의 땅으로 좌천당하지 않았던가.

“그렇다면 제가 그리 마음에 들지는 않겠군요. 저는 힘없고 나약한 왕자니까.”

내 장난기 섞인 말에 호레이즌은 움찔했다.

정곡이 찔린 모양이다.

“하지만 저는 경에게 감사하고 있습니다. 제가 바라마지 않는 최고의 기사를 길러내 주었으니 말입니다.”

내 말에 호레이즌은 순간 불쾌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다가 내 눈을 똑바로 보고는 놀란 표정으로 바뀌었다.

“그 말씀, 진심이십니까?”

내가 비꼬거나 다른 귀족들처럼 여기사를 장신구처럼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을 읽어낸 듯 했다.

“물론 진심이지요. 프레시아는 아무리 붉은 이빨이라 칭송받는 경이라 해도 쉽지 않은 상대일 테니까요.”

내 말에 프레시아는 얼굴을 붉히며 손사래를 쳤다.

“아니에요! 제가 어떻게 감히 호레이즌 경과 비견되겠어요.”

아마 지금으로선 프레시아가 호레이즌에게 질 가능성이 높았다.

하지만 그것도 오래 남지 않았다.

프레시아는 이제부터 더 강해질 테니까.

“자신을 가져. 내가 다른 건 몰라도 사람 보는 눈 하나는 끝내주거든.”

내 말에 호레이즌은 재미있겠다는 듯이 호탕하게 웃었다.

“으하하하하! 참 마음에 드시는 말씀을 하십니다! 왕자님. 확실히, 왕자님께선 보는 눈이 좋으셨죠.”

호레이즌이 프레시아의 허리춤에 매달린 칠성검을 보며 웃었다.

그러자 프레시아는 그의 시선으로부터 칠성검을 숨기듯 등 뒤로 감췄다.

그 모습이 마치 보물을 빼앗기지 않게 숨기는 아이 같아 보였다.

대부분 내가 왕의 허락을 받고 보물고에서 검 한 자루를 가져왔다는 사실에 별 볼 일 없는 검을 가져왔을 거라 생각했다.

보물고에 있는 검은 검으로서 가치가 있다기보단 치장용인 보석이 가치 있는 전부인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검 한번 쥐어 본 적 없는 내가 명검을 알아보는 안목이 있을 리가 없을 테니 당연한 짐작이었다.

하지만 붉은 이빨의 눈썰미를 피해 갈 순 없는 듯했다.

“그럼 오랜만에 한번 붙어보는 것도 재미있겠습니다.”

왠지 호레이즌 방향에서 뜨거운 불길을 쬐는 것처럼 따끔거리는 느낌이 들었다.

“호레이즌 경! 왕자님 앞입니다! 투기를 줄이세요!”

프레시아의 외침에 호레이즌은 아차 하며 뒤통수를 긁적였다.

“아하하하, 내가 실수했군. 죄송합니다 왕자님.”

그의 사과와 동시에 차츰 따끔거리는 느낌이 사라져갔다.

과연, 소설 속에서 투기만으로 사람을 죽인다는 묘사가 이런 느낌이었구만.

나 같은 약골은 진짜로 죽어버릴 수도 있겠다.

“프레시아는 지금 제 호위기사입니다, 호레이즌 경. 호승심도 좋지만 업무 중에 공과 사는 구분해야지요.”

내 지적에 호레이즌은 순순히 인정하며 그녀에게 사과했다.

“내가 실례가 많았네, 프레시아 경. 용서하게.”

“아니요, 저는 괜찮습니다.”

프레시아는 자신의 스승에게 한 사람의 기사로서 인정받아 기분이 좋은 듯했다.

“자, 그럼 충분히 쉬었으니 다시 운동을 하자고.”

내가 가볍게 스트레칭을 하자 호레이즌은 웃으며 내게 말했다.

“왕자님께서 괜찮으시다면 제가 왕자님의 훈련을 봐드려도 괜찮겠습니까?”

그의 권유에 연무장의 모든 기사들이 놀랐다.

‘붉은 이빨’의 가르침은 아무에게나 주어지는 기회가 아니니 더욱 그럴 만했다. 하지만…

“미안하지만 사양하겠습니다.”

나는 단칼에 거절했다.

그러자 주변 기사들이 놀라며 분개하는 게 눈에 보였다.

황금 같은 기회를 발로 차버리는 내가 괘씸하고 바보처럼 느껴지겠지.

“제가 누구를 가르치는 건 흔히 있는 일이 아닙니다만?”

호레이즌이 제차 권유하자 나는 손가락 두 개를 펴며 말했다.

“거절하는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제가 경의 가르침을 제대로 소화할 수 없을 것 같아서, 다른 하나는 경의 권유가 너무나 귀하기 때문입니다.”

호레이즌은 내 말을 이해하지 못한 듯 날 바라봤다.

“전자는 몰라도 후자라면 더더욱 제가 훈련을 봐드려야 하는 것 아닙니까?”

그의 말에 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렇지 않습니다. 귀하기에 더욱 제가 받아선 안 되는 기회지요. 당장 이 자리에 있는 젊은 기사들 중에서는 경의 가르침을 갈망하고 충분히 소화할 수 있는, 재능으로 가득한 이들이 많습니다.”

내 말에 기사들은 방금 전의 불쾌함을 잊은 듯 웃고 있었다.

얼씨구, 좋단다. 이 단세포들.

“그런데 제가 경의 시간을 차지해 버린다면 경의 가르침을 더욱 값지게 만들 수 있는 기사의 기회를 빼앗아 버리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그건 이 나라에 있어서 크나큰 손해입니다.”

내 말에 기사들은 감동한 듯 보였다.

하지만 사실은 저 붉은 이빨의 손에 잘못 걸리면 내가 죽을지도 몰라서 거절하는 거였다.

소설에서 읽은 호레이즌의 훈련은 지옥 그 자체였다.

그런 훈련은 나와 아무런 관련이 없을 때나 재미있게 보는 거지 당사자가 되면 상상도 하기 싫은 끔찍한 경험이다.

내 말을 들은 호레이즌은 잠시 눈을 감더니 갑자기 내게 고개 숙여 사과하기 시작했다.

“죄송합니다, 왕자님. 제가 감히 왕자님을 만나 뵙지도 않고 오해했던 모양입니다.”

그의 사과에 나는 속으로 쓰게 웃었다.

아마 그 오해는 오해가 아니었을 거다.

하지만 이 나라에서 손꼽히는 괴물이 날 좋게 인식한다면 그것만큼 좋은 일이 없었다.

사과하지 않아도 될 일을 굳이 사과하는 것만 봐도 호레이즌의 성품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충분히 그럴 수 있고 이해합니다. 경이 사과할 일이 아니니 고개를 드세요.”

나는 사람 좋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이번 일을 빌미로 내가 그의 충성을 얻기에는 붉은 이빨의 이름과 위업이 너무 거대했다.

아쉽지만 상대를 얻기 위한 투자를 하기에는 지금 내가 가진 것이 너무 보잘 것 없으니, 지금으로서는 호레이즌의 호의를 얻은 것만으로도 만족했다.

나는 지금 내가 가진 것들로 투자할 수 있는 인생 밑바닥 중의 밑바닥으로 눈을 돌릴 생각이었다.

투자는 쓰레기 더미 속에서.

그게 내 지론이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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