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화. 보물사냥 (6)
왕의 거처에 발을 들이자 나를 반긴 건 왕의 비서실장 상선(尙膳)이었다.
“어서 오십시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유안 저하.”
상선의 인사에 나는 싱긋 웃으며 형식상의 가식적인 대답을 했다.
“이리 다시 만나니 좋군요. 아바마마께선 기체일후만강하십니까?”
“전하께선 언제나 강건하시지요. 안으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상선을 따라 안으로 들어가려는데 근위 기사로 보이는 사람이 우리를 막아섰다.
“저하, 송구하옵니다만 이곳부터는 정해진 인원을 제외하고는 무장을 할 수 없습니다.”
근위 기사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프레시아, 무장을 그에게 건네라.”
“…예, 알겠습니다.”
프레시아는 자신의 분신과 같은 검을 몸에서 떼어내는 데 꺼림직함을 느끼는지 어색한 표정을 지었다.
“그럼 지나가도 괜찮겠나?”
내 물음에 근위기사는 잠시 프레시아를 훑어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실례가 많았습니다. 지나가셔도 괜찮습니다.”
원래는 안으로 들어가는 몸수색을 하는 등 과정이 더 복잡했는데 이번에는 왕의 초대라 그런지 간략하게 끝났다.
기사들의 태도를 보아 하니 왕이 내게 꽤나 호의를 가지고 있는 듯했다.
물론 뒤돌아서면 잊혀질 보잘것없는 호의였지만 내가 이 성을 나갈 때까지 이용해먹긴 충분했다.
상선의 안내로 향한 곳은 심궁 안에 설치된 실내 정원이었다.
정원 안에는 큼지막한 테이블과 흰머리가 나기 시작한 중년의 사내가 서 있었다.
나는 프레시아와 헤리온을 손짓으로 멈춰 세우고 그 사내에게로 발걸음을 향했다.
그리고는 정중하게 허리 숙여 인사했다.
“소자가 오랜만에 늦은 문안 인사를 드립니다. 그간 찾아뵙지 못한 불효를 넓은 아량으로 용서해 주시옵소서.”
사실 내가 왕을 만나고 싶다고 만날 수 있는 것도 아니었기에 사과하는 게 이상했지만 이 나라의 왕실의 예법이 그러니 어쩔 수 없었다.
꽤나 근엄한 표정의 왕은 내 절도 있는 인사에 의외라는 듯이 날 바라보고는 미소를 지었다.
“짐이야말로 바쁜 탓에 가까이 있는 아들을 자주 찾질 못했으니 어찌 왕자만을 탓할까.”
관심 없어서 찾지 않은 주제에 말은 번지르르했다.
왕은 가식적이게도 인자한 표정을 지었지만 애초에 날 포함해서 모든 자식들에게 큰 관심이 없었다.
아니, 정확히는 정치적 역학 관계로서만 관심을 두고 있었다.
“자, 그럼 식사를 하며 오랜만의 회포를 풀어보자꾸나.”
왕자 유안이 들었으면 더할 나위 없이 기뻐했을 이야기였지만 이제 그는 존재하지 않았다.
나는 가식적으로 활짝 웃으며 대답했다.
“소자 고대하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나와 왕은 자리에 앉았고 음식들이 차례대로 나왔다.
왕은 영양가 없는 말들을 하며 내 생활에 대해 물었고, 나도 마찬가지로 영양가 없는 말들로 대답하며 나중을 위해 은근슬쩍 예산과 내탕금에 대해 흘렸다.
왕이 날 이 자리에 부른 것도 너무 강해지는 왕후와 그 정치 기반을 견제하기 위함이었다.
그런 만큼 그냥 흘려듣지는 않을 터였다.
“그러고 보면 근래에 너와 왕후에 대해 불미스러운 소문이 돌던데 말이다.”
왕의 말에 나는 내심 놀랐다. 내가 일부러 흘린 소문이라지만 이렇게 직접적으로 소문에 대해 묻는다는 것은 소문에 쐐기를 박기 위함으로 해석할 수 있었다.
왕후의 세력이 강해지는 것은 알았지만 이 시점에서 왕이 이렇게 나올 정도로 벌써 비대해진 건가?
눈앞의 왕이 훗날 왕후의 계략으로 인해 반신불수가 되지만 벌써부터 그 정도였을 줄은 몰랐다.
지금 왕후와 그 지지 기반이 강해진 데는 당연히 날 죽이려 드는 배후 조직과 깊은 연관이 있었다.
나도 주의해야겠군.
왕의 직설적인 물음에 나는 겉으로 슬픈 표정을 지었다가 애써 웃음으로 둘러대듯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그, 그분의… 교육 방식인 것이겠죠….”
나는 떨리는 목소리에 더해 손을 일부러 떨어서 쥐고 있던 스푼을 떨어트렸다.
평범하게 왕과의 독대였다면 입이 무거운 소수만 대동했겠지만 이 정원에는 많은 시종들과 궁녀들이 있었다.
이는 왕이 소문을 더욱 확산시키기 위해서라는 게 뻔히 보였다.
능구렁이 같은 새끼, 마음에 들었다.
이렇게 나와야지 등쳐먹는 데 마음이 편하지.
“아…! 죄, 죄송합니다.”
내가 어리숙한 표정으로 사과하자 상선이 직접 새로운 스푼을 꺼내줬다.
“아니다. 그럴 수도 있지.”
인자한 미소를 짓고 있었지만 왕의 눈빛은 냉철했다.
나와 왕은 계속해서 식사를 이어가며 시답지 않은 말들을 주고받았다.
마치 자주 보진 않지만 서로를 위하는 부자 관계를 연기했다.
“아, 그러고 보니 네가 충격이 컸을 텐데도 이 나라를 위해 용감히 왕실의 건재함을 알렸다지?”
내가 이 식사 자리에 초대된 근본적인 이유였음에도 왕은 별것 아니라는 것처럼 지나가듯 말했다.
나는 어리숙한 왕자를 연기하며 대답했다.
“대단한 일은 아닙니다. 그저 아바마마의 아들로서, 이 나라의 왕자로서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내 대답에 왕은 근엄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그렇지 않다. 비록 작은 행동이었을지라도 나라와 왕실을 위하는 마음은 더할 나위 없이 거대하다. 그러니 자신을 가지고 떳떳이 다니거라.”
암살을 당할 뻔한 아들에게 더욱 싸돌아다닐 것을 권하다니, 역시 이 능구렁이는 사람 새끼가 아니다.
“명심하겠습니다.”
“그래, 말로만 칭찬하는 것은 윗사람의 미덕이 아니지. 혹시 소원이 있다면 말해 보거라. 생일 선물로 내가 들어줄 수 있는 건 들어주마.”
그 말을 기다렸다!
왕의 선언에 나는 진심으로 웃을 뻔한 걸 간신히 참으며 난감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제가 어찌 감히….”
한 번에 승낙하면 오히려 반감을 살 수 있으니 한 번 튕겨줬다.
왕은 괜찮다며 날 다독였다.
“그렇다면… 떠오르는 소원이 두 가지가 있사온데, 말씀드려도 괜찮겠습니까?”
“오호, 두 가지라? 왕자가 보기보다 욕심쟁이였구나! 아하하하!”
왕의 가식적인 너스레에 나는 가식적으로 응대했다.
“죄송합니다.”
“아니다. 소원의 개수는 정하지 않았으니 편히 말해 보거라.”
허락이 떨어지자 나는 거리낌 없이 말했다.
“아바마마께서 그리 말씀하시니 감히 청하건대, 5만 듀플인 별궁의 관리 예산을 늘려 주십사 합니다. 그간 제 전속 시종인 헤리온이 최대한 절약하고 있었으나 별궁을 관리하는 모두가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5만? 그렇게 적다고? 어허, 왕궁 살림은 왕후의 영역이긴 하나 그건 너무했군. 알겠다. 직접 올려주마.”
왕의 확답에 표정 관리를 잘하는 헤리온도 차마 기쁨을 감추지 못하고 입꼬리가 올라갔다.
그나저나 예산이 5만 듀플이라는 말에는 왕도 가식이 아니라 진심으로 놀란 듯했다.
겸사겸사 내탕금도 올려주면 좋겠지만 일단 관리 예산이 더 명분이 좋았으니 어쩔 수 없었다.
“다른 소원은 무엇이냐?”
“저번 주 불미스러운 일이 있을 때 제 생명을 구해준 호위기사 프레시아에게 큰 상을 내리고 싶사옵니다. 허나 제가 가진 바가 넉넉지 못하여 그 공에 비해 내릴 수 있는 것이 없으니, 감히 청하옵건대 제가 왕실 보물고에서 검 한 자루를 골라 가질 수 있는 권리를 바라옵니다.”
내 부탁에 왕은 살짝 놀라며 물었다.
“네가 부탁한 소원 두 가지 모두 널 위한 소원이 아니구나?”
그 물음에 나는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별궁의 사람들도, 제 호위기사도 저를 위해 움직이는 사람들이온데 그들을 위한 소원이 어찌 저를 위한 소원이 아니겠습니까. 또한 아바마마께서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말로만 칭찬하는 것은 윗사람의 미덕이 아니라고. 자식은 곧 부모의 거울이니 저 또한 아바마마를 보고 배웠을 뿐입니다.”
내가 혓바닥이 길게 놀리는 이유는 간단했다.
왕이 지 입으로 한 말이니 책임을 지고 약속을 지킬 수밖에 없게 만들기 위함이었다.
내 말을 들은 왕은 호탕하게 웃었다.
“으하하하하! 그리 말하니 당할 수가 없구나! 좋다! 식사가 끝나거든 보물고에서 원하는 검 한 자루 가져가거라!”
“감사합니다.”
드디어 비델의 갑옷이 잠들어 있는 곳으로 들어갈 수 있겠다.
* * *
1왕자 유안과 식사를 마친 왕은 자신의 집무실로 돌아가 상선이 내리는 차를 마시며 하늘을 올려다봤다.
밤하늘에는 별이 가득했고 보름달에서 조금 찌그러진 달이 세상을 환하게 비추고 있었다.
“자네가 보기에는 어땠는가?”
왕의 물음에 상선은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예. 전하의 바람대로 소문이 더욱 크게 돌 것 같습니다.”
상선의 대답에 왕은 자신이 잘못 물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아니, 그 일 말고 1왕자 말일세.”
“왕자 저하 말씀이시옵니까? …소신이 어찌 감히 왕족을 평하겠나이까.”
상선의 약간 긴 침묵에는 왕자에 대한 모든 평가가 담겨 있었다.
아무리 꾸며봤자 그리 좋은 평가는 되지 못하리라.
그의 대답을 들은 왕은 작게 실소했다.
“자네 정도의 안목을 지닌 사람도 읽어내지 못했는가?”
“…송구하오나, 무슨 말씀이시온지요?”
상선이 되묻자 왕은 찻잔을 책상에 내려놓으며 웃었다.
“우후후후, 무슨 말인지 모른다면 그걸로 되었네. 그보다 왕후와 손잡은 것으로 보이는 암중세력에 대한 조사는 어떻게 되고 있지?”
왕의 물음에 상선은 담담히 대답했다.
“송구하오나 아직 큰 진전이 없사옵니다. 왕후의 경계가 극심한지라 조사가 완료되기에는 시일이 더 걸릴 듯합니다.”
“그런가. 그대가 좀 더 고생해 주게. 조사가 끝나면 내가 줄 수 있는 한 가장 큰 상을 내리지. 그래, 말로만 하는 칭찬은 윗사람의 미덕이 아니니까.”
왕은 흥미롭다는 듯이 보물고 방향으로 눈을 흘기다 업무를 보기 위해 자리에 앉았다.
* * *
나는 휘황찬란한 보석들과 번쩍번쩍거리는 무구(武具)들로 가득한 보물고를 보며 감탄을 감추지 못했다.
“저는 밖에서 대기하고 있겠습니다. 편히 관찰하시기 바랍니다.”
시종의 말에 나는 홀로 보물고 안에 남았다.
헤리온과 프레시아를 동반할 수 없는 이유는 아마도 그들의 안목으로 너무 귀한 검을 고를까 봐 그럴 터다.
쪼잔한 관리인 놈 같으니라고.
분하게도 관리인의 생각대로 난 검을 알아보는 안목 따위는 없다.
하지만 그런 안목을 가진 사내가 보물고에서 포상으로 검을 골라 하사받은 소설 속 내용은 알고 있었다.
북방의 대장군 데미웨이 디 블란츠바그, 최강의 무인을 꼽을 때 반드시 거론되는 천하십검(天下十劍)의 한 사람인 ‘검귀(劍鬼)’이자 인세의 지옥이라 불리는 바스타유 산맥으로부터 이 나라를 지키는 최강의 기사.
내가 검을 보는 눈은 쓰레기지만 그의 안목은 믿음직했다.
“‘칠성검(七星劍)’이면 나중에 성검을 얻기 전까지는 충분히 쓸 만하겠지.”
데미웨이는 칠성검과 귀도(鬼刀) 사이에서 고민하다 결국 귀도를 고르지만 프레시아는 검을 사용하니 칠성검이 더 나을 것 같았다.
마음 같아서는 식자재 창고에 모두 쓸어 담고 싶었지만 관리인이 보물들의 위치와 수량을 기록하니 마음대로 빼돌릴 순 없었다.
“다음은 고대하던 비델의 갑옷인가.”
나는 비델의 갑옷이라 적힌 풀 플레이트 아머 앞에 섰다.
눈앞의 중장갑은 왕국 역사상 최고의 기사라 칭송받는 비델이 사용하던 갑옷이었다.
갑옷은 비델의 명성만큼 화려하고 튼튼해 보였지만 이건 그저 겉껍데기에 불과했다.
비델의 갑옷은 이 풀 플레이트 아머 안에 숨겨져 있었다.
나는 갑옷의 팔꿈치 이음새를 풀고 팔 안으로 손을 넣었다. 그리고 안감을 더듬으며 손에 걸리는 걸 찾았다.
“이건가?”
손에 걸린 무언가를 살살 긁어내듯 끌어 올리자 작은 팔찌가 딸려 나왔다.
“찾았다! 비델의 갑옷!”
나는 바로 착용하고 마력을 불어넣었다.
그러자 팔찌에서 검은 막이 뿜어져 나오더니 내 전신을 뒤덮었다.
검은 막이 손은 장갑의 형태로, 몸은 일체형 옷으로 변하며 마치 특촬물의 라이더처럼 전신을 감쌌다.
이거야말로 비델을 왕국 역사상 최고의 기사라 불리게 해준 비델의 갑옷의 본모습이었다.
“으하하! 으하하하하! 이걸로 어디 가서 칼 맞고 죽을 일은 거의 없어졌구만!”
이 갑옷을 유지하려면 계속 마력을 소비해야 했지만 마력이 떨어지기 전에 프레시아가 어떻게든 해주겠지 뭐.
나는 베델의 갑옷을 창고에 집어넣고 프레시아에게 줄 칠성검을 챙겨서 보물고를 나섰다.
검을 받은 프레시아가 좋아할 것을 생각하니 미소가 절로 나왔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