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화. 보물사냥 (5)
밤에는 주변이 어둡고 시간도 없어서 대충 쓸어 담았던지라, 정확하게 뭘 챙겼는지 몰랐다.
“어디 보자. 원래 창고 안에 들어 있던 식칼이 사이즈별로 2자루씩 총 48자루, 냄비 12개, 프라이팬 5개, 정형 망치 9개, 휴대용 마법 버너 4개, 도마, 국자, 집개, 뒤집개… 등등이 각각 3개씩. 더럽게도 많네.”
조리 도구들을 하나하나 꺼내보다 다시 집어넣고 다른 걸 확인했다.
“다음은 그 변태의 수집품인가?”
제4궁에는 대략 80년 전, 당시 3왕자의 비밀 수집품들이 잠들어 있었다.
대외적으로 알리기 힘든 수집품이 한가득 담긴 비밀방은 그 취향만큼이나 인적 드문 곳에 위치한 덕분에 숨어들기 쉬웠다.
당시 3왕자의 수집품은 전부 쓸어 담았지만 쓸모 있는 것들을 확인해 보자면.
연쇄 살인마 ‘톤톤즈의 나이프’. 사람 가죽으로 만든 어느 야만 부족의 ‘저주술 두루마리’.
‘인어의 미라’, 악마 소환에 쓰인 ‘어린양 두개골’, 사상 최악의 네크로맨서라 불리는 ‘빌리의 사령술 마도서’, 흑마술에 쓰면 좋을 ‘원혼이 담긴 마정석’이 있다.
나머지는 모양만 그럴듯한 가짜거나 아마도 쓸데없는 쓰레기였다.
원래 그 방의 물건들을 얻는 건 아르카나의 간부로 등장하는 미친 여자였지만 이제 내가 얻었으니 적이 강화되는 건 막았다.
꺼내놓기도 꺼림칙한 것들을 다시 집어넣고 다음으로 넘어갔다.
“어디 보자, 다음은 잊혀진 군자금이군.”
약 120년 전의 왕, 그러니까 왕자 유안의 고조부쯤 되는 왕이 전쟁이 터질지 모른다는 생각에 비밀리에 군자금과 군수품을 모아 제7궁에 숨겨뒀었다.
그 예상은 정확히 5년 뒤에 맞았지만, 중년의 왕은 불행하게도 전쟁이 터지기 2년 전 심장 마비로 사망한다.
전쟁이 터지고 군자금을 직접 모은 실무자들은 군자금의 존재를 알고 있었으나 숨긴 장소는 왕만 알고 있었기에 찾지 못하고 그대로 잊혀지게 된다.
내가 발견한 군자금은 금괴 20상자, 은괴 30상자, 마정석 250상자, 화살촉 50만 개, 철검 5천 자루, 밀 30만 톤과 바꿀 수 있는 5대 상단의 신용 어음, 말 천 필과 바꿀 수 있는 유명 마방(馬房)의 신용 어음이 있었다.
그러니까 돈과 시간을 들여 이것들을 모아놓고는 이거 없이 전쟁을 치른 셈이다.
잘도 이 나라가 안 망했다 싶었는데, 생각해 보니 그 전쟁은 달랑타가 징집된 전쟁이었다.
괜히 평민이었던 위즐 가문이 백작가가 된 게 아니다.
그나저나 프레시아는 밖에서 망을 보라고 해서 다행이지 봤으면 왕실에 뱉어내야 한다고 했겠지?
자신을 해치려 했던 적도 구해주려는 도덕적이고 고결한 기사니 쉽게 예상이 갔다.
“마지막은… 별거 없네.”
제8궁에서 얻은 건 창고에서 먼지 쌓이고 있던 곰 인형이다.
안고 자기 좋아 보이는 곰 인형은 20년 전 제국의 교회와 왕국의 교회가 교류했을 때 왕궁 내에 위치한 성당이 선물 받은 물건이었다.
성당의 당시 주교는 어린 공주에게 선물로 줬는데 공주가 나이를 먹으면서 곰 인형은 자연스럽게 창고에 처박히게 됐다.
효과는 악마를 쫓아내는 부적으로, 특히 몽마에 특효였다.
얼마나 특효냐면 준 공작급의 서큐버스가 주인공 제이드에게 자신의 분신을 보냈는데 이 곰 인형으로 물리쳤을 정도였다.
다른 악마였으면 아마 하급 악마나 간신히 내쫓는다고 하니 너무 편중된 능력이기는 했다.
“판타지 소설이 다 그렇지, 뭐. 상황에 알맞은 아이템을 얻는 편의주의적인 전개가 재미있긴 하니까.”
물론 내 몸으로 직접 겪은 바로는, 소설 속에서 묘사되지 않은 것들이 숨어 있을 수도 있었다.
망할 시조의 유산이나 전신에 불로 지지는 고통을 느끼게 해준 아퀼라의 마력회로처럼 말이다.
어쩌면 이 안에 내가 모르는 지뢰가 숨어 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가장 의심이 가는 건 제4궁에 숨겨져 있던 변태의 수집품이었지만 그렇기에 더더욱 모든 물건을 챙겼다.
원래 적이 얻는 물건들인 만큼 알지 못하는 리스크를 남겨둘 순 없었다.
“왕자님, 말씀하신 시간이 되었습니다.”
헤리온의 노크 소리에 나는 곰 인형을 창고에 넣고 기지개를 켰다.
아직 내가 살아남기엔 지금까지 얻은 것들로는 많이 부족했다.
앞으로 더 많은 것들을 선점할 필요가 있다.
그게 물건이 되었든, 인재가 되었든 말이다.
* * *
왕후 자밀 뷔에즈 디 브아레스 폰 듀플리온은 저녁 시간에 가까워진 지금, 갑자기 찾아온 손님 때문에 미간을 좁히며 접객실로 향하는 중이었다.
그녀의 기분이 좋지 않아 보이자 왕후의 시중을 드는 모든 궁녀들은 숨을 죽이며 눈에 띄지 않도록 조심했다.
평소에도 성격이 지랄 맞기로 유명한 왕후가 기분까지 좋지 않다면 그 성질은 궁궐 생활에 감정이 무뎌진 상궁들도 감당하기 어려웠다.
접객실에 도착한 왕후가 고급스러운 손님용 소파에 앉아 있는 분홍빛 머리의 소녀와 감청색 머리칼을 한 미부인을 발견했다.
왕후의 좁혀진 미간이 더욱 패었다.
“다들 나가봐.”
왕후의 나지막한 목소리에 접객실에서 다과와 차를 준비하던 궁녀들은 그것들을 재빠르게 테이블에 내려놓으며 나갈 준비를 했다.
나가라고 했다고 제대로 된 준비 없이 나가면 나중에 불호령이 떨어질 게 뻔했기에 궁녀들은 서둘렀다.
그렇게 접객실에 손님 둘과 왕후만이 남자, 분홍 머리카락의 소녀는 거만하게 다리를 꼬며 장난스럽게 말했다.
“이야! 너~무 무섭다. 우리 왕후님 포스가 장난 아닌데?”
그렇게 말하며 킥킥거리자 옆에 앉은 감청색 머리의 미부인은 포기했다는 듯이 작게 한숨을 내쉬며 차를 마셨다.
그런 두 사람을 보며 왕후는 주인 자리에 앉을 생각도 못 하고 소리쳤다.
“왜! 또 찾아온 거야! 난 부탁한 대로 해 줬잖아! 그 얼간이 하나 처리하지 못한 건 너희들이면서 왜 온 건데!”
왕후의 노성에 분홍 머리 소녀는 배를 부여잡으며 독특한 웃음소리를 냈다.
“냐하하하하! 우리 왕후님! 너~무 대장부시다. 당장 전쟁터에 나가셔도 되겠어~ 안 그래?”
소녀가 동의를 구하자 감청색 머리의 미부인은 가볍게 무시하며 왕후에게 말했다.
“그 일로 온 게 아니니 진정하시지요, 왕후마마. 저희는 딱히 왕후마마를 책망하고자 온 게 아닙니다.”
미부인의 말이 왕후의 신경을 긁었는지 왕후의 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책망? 너희가 감히! 이 나라의 왕후에게 그딴 소리를 지껄여!”
왕후와 그녀들의 배후, 아르카나와는 어디까지나 필요에 의한 협력 관계에 불과할 뿐 부하가 아니었다.
책망이라는 단어를 사용했다는 것 자체가 미부인의 인식을 엿볼 수 있었다.
왕후의 분노가 극에 달하자 소녀는 다시 한번 배를 잡고 소파 위를 굴렀다.
“냐하하하하! 니벨은 여전히 단어 선택이 최악이라니까! 냐하하하!”
“조용히 하세요 아리사! 죄송합니다. 저는 그저 전의 실패가 왕후마마의 잘못이 아니라고 말씀드리고 싶었던 건데, 그게, 그러니까….”
니벨이라 불린 미부인이 당황해서 횡설수설하자 아리사라 불린 소녀가 웃느라 고인 눈물을 닦아내며 말했다.
“하아~! 간만에 신나게 웃었다!”
“여기 오기 전에도 시장 거리 한복판에서 웃었잖아요!”
“아~! 그랬던가? 뭐, 그건 넘어가고. 우리 왕후님이 니벨의 말실수는 넓은 도량으로 용서해 주시죠. 얘가 아랫것만 부려봐서 상대에 대한 존중을 잘 못한다니까?”
아리사의 말에 왕후는 불쾌함을 내비치면서도 쓸데없는 실랑이는 원치 않는 시간과 감정 소모만 늘릴 뿐이란 사실을 알았기에 자신의 자리에 앉았다.
“그래서, 지난주 일이 아니라면 왜 찾아온 거지?”
왕후의 물음에 니벨이 대답했다.
“이번 실패로 왕의 심기가 날카로워졌으니 당분간 1왕자의 암살은 보류한다는 사실을 알려드리러 왔습니다. 더불어 왕이 1왕자를 내세워 왕후마마를 치워버릴….”
쾅!
“뭐야?! 다시 한 번 말해봐!”
왕후가 테이블을 내리치며 핏발 선 눈으로 니벨을 노려보자 아리사는 다시 한번 배를 잡고 웃었다.
“냐하하하하! 역시 니벨이야! 냐하하!”
“아! 아니, 저는 그게….”
당황해하는 니벨을 보며 아리사는 소파에 얼굴을 묻고 울듯이 웃었다.
“아리사!”
니벨의 간절한 눈빛에 아리사는 간신히 웃음을 참으며 대신 말했다.
“냐하하하! 끅! 끅! 후우~! 니벨의 말은 왕이 1왕자를 저녁 식사에 부른 걸 보아하니, 우리 왕후님을 견제하려는 속셈으로 보여서 혹시 도움을 원한다면 도와주겠다는 말이었어.”
아리사의 설명에도 왕후의 화는 식을 줄 몰랐다.
“그 정도 일에 너희들 도움 따위는 필요 없어! 당장 나가!!”
왕후의 분노에 아리사는 미친 듯이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냐하하하! 니벨 때문에 망쳤대요~! 망쳤대요~!”
“아리사! 도와주지는 못할망정!”
두 사람이 말싸움을 벌이려 하자 왕후의 목에 핏대가 세워졌다.
“당장 안 나가?! 그리고 다음에는 너희 말고 다른 년이 와!”
왕후의 분노는 정당했다.
그러나 그녀의 바람이 이루어지지는 않았다.
* * *
나는 약속된 시간에 맞춰 왕의 거처인 제1궁, 심궁(深宮)으로 발걸음을 옮기며 물었다.
“헤리온, 지금 내가 사용할 수 있는 자금이 얼마나 되지?”
숨겨진 군자금을 손에 넣긴 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왕실 소유의 돈이다.
모두의 기억 속에 사라진 돈이라고는 하지만 일종의 공금 유용에 해당하니 당당히 사용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내가 가지고 있는 돈을 넘어서 사용하는 즉시 날 눈엣가시로 여기는 왕후가 자금 추적에 들어갈 게 뻔했다.
“저하의 내탕금이 6만 듀플, 별궁의 상반기 예산이 5만 듀플 정도 남았습니다.”
내탕금은 내 용돈을 말했고, 별궁 예산은 별궁 유지보수 및 관리비용에 사용되는 돈이었다.
시종과 궁녀, 병사 등의 월급은 별도였다.
얼굴만 한 호밀빵 하나 값이 대략 3듀플이 이었으니 대략적인 물가 계산으로 보면 3듀플이 1000원 남짓, 사용할 수 있는 돈을 환산하면 용돈이 2000만 원, 별궁 관리비가 1660만 원 정도인가.
용돈이야 그렇다고 해도 관리비가 너무 적었다.
내가 사는 별궁이 아무리 다른 곳에 비해 작다고 해도 궁 하나를 관리하는 상반기 예산으로는 턱없이 적었다.
적어도 3배는 있어야 제대로 된 관리가 될 텐데 헤리온이 고생이 많군.
“잠깐. 딱히 돈을 쓴 기억이 없는데?”
왕자 유안의 기억에도 정원에서 놀고 책이나 읽었지 사치를 부린 기억은 없었다.
“1년에 내탕금으로 얼마나 받지?”
“7천 듀플입니다.”
“7천…!?”
아니, 이 망할 여자가!
왕족 품위 예산이 1년에 250만 원도 안 되면 어쩌자는 거야!
어쩐지 왕자치고 사교용 옷이 몇 벌 없더니만 그 여자 짓이었나.
귀족들의 사교 모임은 연달아 같은 옷을 입거나 몇 벌 없는 옷을 돌려 입는 게 알려지면 큰 창피를 당할 게 뻔했다.
즉, 왕후는 내 용돈을 극단적으로 줄이는 것으로 사교계 데뷔를 원천적으로 차단한 셈이었다.
가뜩이나 지지 기반이 부실한 왕자 유안이 귀족들이 모이는 사교계에 입문할 수도 없으니 그 노림수는 노골적이다.
“그런 쥐꼬리만 한 내탕금으로 용케도 6만씩이나 모았군.”
순수한 감탄에 헤리온은 쓰게 웃었다가 표정을 감췄다.
“왕자님께선 근검 성실하시니까요.”
“그래? 하지만 이젠 아니야.”
내가 장난기 가득한 미소를 짓자 프레시아와 헤리온은 놀란 듯 날 바라봤다.
“오늘 아바마마께 별궁 관리비에 대해 말씀드려 볼게. 그럼 당장 숨통이 트일 정도로는 예산이 지급될 거야.”
물론 당장 돈이 들어온다고 돈을 막 쓰는 건 안 된다.
왕이 예산을 올려준다고 해도 최종적으로 왕궁의 살림을 하는 건 왕후다.
왕후가 조금씩 시간을 들여 예산을 삭감하면 다시 원상 복구가 된다.
내 말에 헤리온은 놀라며 나를 말렸다.
“아닙니다. 저는 괜찮으니 전하께 청을 드릴 거면 왕자님을 위해 하셔야 합니다.”
그의 조언에 나는 피식 웃었다.
“착각하지 마. 이건 날 위해서이기도 하니까.”
아무리 생각해도 이 썩은 몸뚱어리를 개조하기 위해선 단순히 식단 조절과 운동만으론 안 된다.
소설에서 나온 영약을 주기적으로 제조해 먹어야 그나마 사람 구실을 할 것 같았다.
그런데 그러려면 혈관에 돈을 꽂아 넣듯이 펑펑 써야 했다.
“왕자님…!”
딱히 의도한 것은 아니었는데 헤리온과 프레시아는 물론, 멀찌감치 임시로 날 호위하는 기사들도 감동한 듯 날 바라봤다.
그런 눈으로들 바라보면 부끄러운데.
“그나저나 도착했네.”
나는 왕궁 내에서도 가장 거대한 건물을 보며 입맛을 다셨다.
자, 그럼 이제 본격적으로 뜯어내 볼까?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