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화. 보물사냥 (4)
나는 군대에서 배운 응용 포복으로 열심히 환풍 통로를 기어들어 갔다.
이 허약한 몸뚱이로 기어가려니 옆구리와 다리에 쥐가 날 것 같았지만 운동이라고 생각하고 견딜 수밖에 없었다.
환풍 통로가 아래로 꺾이는 지점에선 다시 갈고리 달린 밧줄을 꺼냈다.
“나비야, 밧줄 좀 잡아줘.”
“앗, 제가 잡아 드리겠습니다.”
“그래? 그럼 부탁할게.”
프레시아가 나서자 나는 밧줄을 그녀에게 건넸다.
“나비야, 넌 주변에 소리가 들리지 않게 공기를 고정시켜 줘.”
-냥!
나비가 주변 공기를 조작하자 프레시아는 신기한 듯 물었다.
“공기를 고정시키면 소리가 들리지 않나요?”
소리는 파동이니 공기가 매질의 역할을 못 하게 만들면 다른 사람들은 소리를 들을 수 없다.
그런 상식도 이곳에선 상식이 아니었다.
“뭐, 그렇지. 그래도 너무 큰 소리는 새어나갈 수 있으니 천천히 내려와.”
나는 팔을 부들부들 떨면서 한 층 아래로 내려갔고, 프레시아는 밧줄을 챙긴 후 양쪽 벽에 손과 발을 짚으며 평온한 표정으로 내려왔다.
다시 포복으로 기어간 끝에 도착한 곳은 제3궁의 주방이었다.
“나비야, 소리를 없앤 채로 이 철망 좀 떼어봐.”
-냥!
내 지시가 떨어지자마자 강한 바람이 불더니 철망이 떨어지다 못해 날아가 버렸다.
순간 심장이 철렁했지만 주방 바닥에 요란하게 떨어진 철망에서는 다행히 아무런 소리도 나지 않았다.
“잘했어 나비야.”
-냐앙~!
내가 미소 지으며 나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뒤에 있던 프레시아는 부러운 듯 나비를 바라보았다.
그 모습에 나는 피식 웃으며 물었다.
“너도 나비를 쓰다듬고 싶어?”
“네? 아, 아니… 아, 예! 맞습니다! 그렇죠!”
주인의 것을 탐했다는 게 부끄러웠는지 프레시아는 얼굴을 붉혔다.
확실히 나비가 귀엽기는 하지.
소설 속에서도 프레시아는 나비라면 죽고 못 살 정도로 좋아했으니까.
나는 환풍구에서 뛰어내려 바닥에 착지하려다 중심을 못 잡고 굴렀다.
“끄응, 체면이 말이 아니구만.”
몸을 일으켜 옷에 묻은 먼지를 털어내는데 프레시아는 가뿐하게 착지했다.
“여기서 어디로 가나요?”
프레시아의 물음에 나는 장난스럽게 웃으며 대답했다.
“여기가 목적지야.”
“여기가요?”
그녀는 두리번거리며 주변을 둘러봤다.
천장 근처의 작은 창문으로 새어 들어온 달빛으로 보건대 그냥 평범한 주방이었으니 의아해하는 것도 당연했다.
나는 가방에서 초와 부싯돌과 파이어스틸을 꺼내 불을 붙였다.
성냥이 있으면 좋았겠지만 아직 성냥이 개발되지 않았다.
화약은 국가에서 엄하게 통제하니 화약을 이용한 성냥이 개발되지 않은 것도 어쩔 수 없다.
마법이 꽤나 흔하기도 했고 말이다.
촛불에 주변이 밝아지자 평범한 주방의 모습이 드러났다.
나는 프레시아를 뒤로하고 식재료가 쌓여 있는 곳으로 움직였다.
“프레시아, 넌 달랑타에 대해서 얼마나 알지?”
내 갑작스러운 물음에 프레시아는 눈을 깜박이며 대답했다.
“달랑타라면, 115년 전의 전쟁 영웅이자 현자라 불린 대마법사 달랑타 위즐을 말씀하시는 건가요?”
“맞아.”
내가 식재료들을 치우며 긍정하자 그녀는 잠시 고민하더니 대답했다.
“글쎄요, 115년 전 제국과의 전쟁에서 큰 활약으로 백작 위라는 파격적인 봉작을 받았고, 마법사 양성 학교를 설립했다는 것 정도일까요? 아, 그의 가문인 위즐가의 현 가주는 현재 중앙 정계의 유명인이었죠. 꽤나 기행을 일삼는다고 들었는데….”
“난 위즐가의 현 가주가 아니라 달랑타에 대해서 물었어. 더 아는 건 없어?”
내가 더 묻자 프레시아는 죄송하다며 고개를 숙였다.
“아니, 모른다고 죄송할 건 없어. 위즐가 사람도 아닌데 모르는 게 당연하지. 음, 이건가?”
나는 식재료가 담긴 자루 중 감자가 가득 담긴 자루를 끌어냈다.
“달랑타 위즐은 원래 마법사가 아닌 요리사였어. 그것도 왕궁에서 일하는 수석 셰프가 달랑타의 아버지였던 만큼 요리사로서 재능이 뛰어났지.”
현재 마법사 가문으로 유명한 위즐 일가를 생각하면 아무도 믿지 못할 이야기였다.
“달랑타 위즐이 마법을 익히기 시작한 건 단순히 식자재 관리 문제 때문이었는데.”
나는 감자 포대 자루 입구를 조이는 끈을 풀어 포대와 분리시켰다.
“당시 주방 보조 중 한 명의 실수로 식자재가 상한 채로 조리가 되었고, 그 여파로 그 주방 보조는 목이 잘렸어. 주방 책임자였던 달랑타의 아버지도 책임을 져야 했지.”
끈에는 작게 마법 문자가 새겨져 있었고, 그 끝에는 끈을 조이는 작은 고리가 있었다.
“좌천당한 아버지를 본 달랑타는 언제든 식재료를 신선하게 보관할 방법을 찾았고, 이내 마법에 눈을 돌렸어.”
작고 얇은 금색 고리를 손가락에 끼우고 아퀼라의 마력회로로 강제로 각성된 마력을 불어넣었다. 그러자 줄이 빨려 들어가듯 어딘가로 사라졌다.
“달랑타는 마법을 배우려 했고, 그때 우연히 한 마법사가 달랑타의 재능을 알아본 덕분에 다행히 가르침을 받을 수 있었지.”
그 마법사는 ‘봄꽃의 현자’로 주인공 제이드처럼 사계의 현자 중 하나였다.
“달랑타는 전쟁이 터지기 전까지 이 주방에서 일을 했는데, 지금 내 손에 있는 게 바로 달랑타가 만든 아공간 아티팩트 ‘식자재 창고’야. 참고로 징병으로 끌려간 전쟁이 위즐 백작가가 탄생한 그 전쟁이지.”
“왕자님께선 어떻게 아세요?”
프레시아의 물음에 나는 피식 웃었다.
“책을 많이 읽었지.”
손가락에 끼워진 식자재 창고와 내 마력이 연결되자 자연스럽게 이 안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 어떻게 사용하는지 그 정보가 머릿속에 떠올랐다.
“음, 이렇게 하는 건가?”
내가 허공에 손짓하자 손 위에 마도식(魔道式)이 새겨진 식칼이 나타났다.
프레시아는 깜짝 놀라며 나와 식칼을 번갈아 쳐다봤다.
나는 손을 가볍게 흔들며 크기가 다른 식칼을 교환하듯 꺼냈다.
식칼은 손가락 크기의 감자 칼부터 내 키보다 훨씬 큰 초대형 동물 손질용 대도(大刀)까지 다양했다.
말이 식칼이지 칼에 새겨진 마법들만 보면 누구나 군침 흘릴 전설의 칼이나 마찬가지였다.
“이 칼들은 안 줄 거야. 요리사가 자신의 칼을 무기로 사용하면 슬퍼할 테니까.”
슬퍼하기 전에 만약 무기로 사용했다는 걸 안다면 죽이려 들지도 몰랐다.
달랑타는 마법사라기보다 요리사에 가까운 사람이었으니까.
무엇보다 프레시아에게는 이 칼들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좋은 검을 구해 줄 생각이었다.
“예. 알겠습니다.”
내 말에 프레시아는 섭섭한 기색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왜인지 모르겠지만 오히려 살짝 안도한 기색도 보였다.
“식칼 외에도 온갖 조리 도구가 있으니 편리하구만.”
나중에 여행을 떠나게 될 때는 이것만 한 게 없겠다.
식자재 창고에 뭔가를 넣고 빼려면 반지를 낀 손으로 만지거나 고리에 연결한 줄 원을 만들어서 통과시켜야 하는 건가.
넓이는 예상보다 넓은 것 같았다.
주방에서 평범한 감자 자루로 사용되던 이유는 단순히 안에 담겨 있던 마력이 다 닳아서 아무도 감지하지 못한 탓 같았다.
하기야, 마법사가 이런 주방 식자재 더미를 뒤질 일이 얼마나 있겠는가.
“이제 다시 별궁으로 돌아가는 건가요?”
“아니, 이곳에서 얻을 수 있는 건 다 얻고 가야지.”
나는 주방에 달린 술 보관 창고로 들어갔다.
제3궁은 내가 사는 별궁과 달리 규모가 커서 그런지 술 저장고도 클 뿐만 아니라 귀한 술도 가득했다.
이게 내가 식자재 창고를 가장 먼저 얻으려던 이유다.
* * *
“왕자님! 기침하셨습니까?”
헤리온의 목소리와 노크 소리에 잠이 깬 후에도 침대 위에서 뭉그적거렸다.
시간을 보아하니 벌써 아침 9시가 넘어가고 있었다.
어젯밤에는 제3궁에서 ‘식자재 창고’를 얻고 이어서 제4궁, 7궁, 8궁을 돌며 숨겨진 비밀들을 얻느라늦은 시간에 잠들어서 4시간 남짓 잔 것 같았다.
원래 계획대로였다면 제3궁을 털고 시간이 남으면 제4궁까지만 털 생각이었는데 프레시아가 따라온 덕분에 날 업은 그녀가 빠르게 달려서 제7궁과 8궁까지 돌 수 있었다.
이 나라 기준으로 당당한 성인 남성인 내가 연하의 미성년 여성에게 업힌다는 사실이 거부감이 들긴 했지만 효율을 생각하면 어쩔 수 없었다.
아마 오늘 밤에도 그녀의 신세를 져야 할 것 같다.
“그래, 크흠! 큼! 큼! 일어났어.”
나는 잠긴 목소리로 대답했다.
대답을 들은 헤리온은 문을 열고 트레이를 끌며 들어왔다.
“오늘은 평소보다 기상이 늦으셨군요.”
“어, 밤늦게까지 책을 읽어서.”
“책도 좋지만 취침이 늦는 건 건강에 좋지 않습니다.”
“하암~! 유념하도록 하지.”
내 건성건성한 대답에 헤리온은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미소 지으며 트레이 위에 놓인 덮개를 치웠다.
“오늘 아침은 엘론 티에 스크램블 에그 샌드위치, 고구마 수프, 유자드레싱을 뿌린 샐러드입니다.”
“내가 단백, 아니 고기를 많이 달라고 했잖아.”
달걀도 고구마도 좋지만 내가 해야 하는 건 살을 빼는 게 아니라 몸을 키우는 거다.
내 몸뚱어리는 단백질을 더 먹어야 했다.
그래도 낮이고 밤이고 돌아다녔더니 내 손목 아래 퍼센티지가 올랐다.
‘0.0417퍼센트’
개미 눈곱도 이것보다는 많이 차오르겠다 싶었지만 그래도 떨어지지 않고 오르는 게 어디냐.
긍정적으로 생각하기로 했다. 언젠가는 100퍼센트까지 오르겠거니 하며 넘겨야지 아니면 화병 나서 뒈지겠다.
“아침에도 말씀이십니까? 그럼 속이 부대끼지 않겠습니까?”
“그래도 몸 좀 키우려면 어쩔 수 없지. 그냥 아예… 아니, 아니다.”
아예 기사들이 먹듯이 달라고 말할까 하다가 기사들이 과학적으로 영양소 밸런스를 맞춰 먹진 않을 것 같아서 그만뒀다.
솔직히 이 몸으로 기사처럼 먹어댔다가는 체해서 제대로 움직이지도 못할 것 같다.
“내가 나중에 식단을 짜서 줄 테니까 가급적 비슷하게 만들어줘.”
전문가처럼 식단을 구성하지는 못하겠지만 그래도 영양학적 지식이 없는 이곳 사람들보다야 훨씬 잘 짜겠지.
내가 샌드위치를 베어 물자 헤리온은 차를 따라주며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주방장에게는 그렇게 전해 두겠습니다. 아, 그리고 아침 일찍 궁시부의 상전(尙傳)이 찾아왔었습니다.”
상전은 왕명을 전달하는 심부름꾼으로 궁시부에서 꽤 높은 직위에 속했다.
“그래? 어제 저녁에 상선이 찾아왔었는데 생각보다 빠르네. 그래서, 언제래?”
“오늘 저녁입니다.”
“오늘? 하기야, 이유가 생일 만찬 대신인데 늦어지는 것도 이상한가.”
나는 식사를 빠르게 마치고 식사와 함께 준비된 세안용 물과 수건으로 세수를 하며 말했다.
“한 시간 뒤에 어제처럼 산책을 나갈 테니까 기사들에게 준비하라고 전해줘.”
“오늘도 말씀이십니까?”
헤리온의 물음에 나는 악동처럼 웃었다.
“당연하지, 헤리온도 소문 들었을 거 아니야.”
애초에 왕이 나와 식사를 하자는 건 정치적인 이유에서였지만 치하의 의미도 있었다.
그러니 피곤하더라도 앞으로 일주일간은 싸돌아다닐 생각이었다.
물론 오늘은 컨디션과 준비할 시간을 생각해서 오전에만 돌아다닐 거다.
헤리온이 빈 그릇이 담긴 트레이를 끌고 나가자, 나는 식자재 창고에서 지난 밤 급하게 챙겼던 것들을 확인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