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화. 보물사냥 (3)
나는 언제든 뽑힐 수 있는 검을 한 번 흘끗 봤다.
<겨울나무의 현자>의 여주인공 프레시아는 좌천당한 바스타유 산맥에서 완성되지만 그 이전이라고 실력이 없는 건 아니다.
아니, 정확히는 바스타유 산맥에서 완성된 건 정신적인 부분이지 실력적인 부분에선 이미 괴물이라 부르기에 부족함이 없다.
그렇지 않았으면 산맥에 발령 난 첫날 죽었을 거다.
나같이 허약해 빠진 녀석이라면 그녀가 검을 뽑는 것도 인지하지 못하고 죽을 게 분명했다.
“그 검은 뽑을 건가?”
내 담담한 목소리에 프레시아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날 죽일 거면 고통이 느껴지지 않게 단칼에 부탁하지.”
“왕자님!”
그녀가 언성을 높이자 나는 차분하게 검지를 입가에 가져다 댔다.
“쉿! 밤이 늦었어. 다른 사람들이 깨겠다.”
내가 평온한 목소리로 주의를 주자 프레시아는 당황했다.
그녀는 날 죽이지 못한다.
나는 그녀가 그토록 후회하던 지키지 못한 사람이니까.
설령 그것이 없는 일이 되었다고 해도 눈앞의 붉은 머리의 소녀가 변하는 건 아니다.
“왕자님… 대답해 주세요. 당신은 정말 제가 알고 있는 유안 왕자님이십니까?”
혼란스러운 목소리에 나는 그만 웃음을 참지 못했다.
“푸핫! 내가 유안 왕자냐고? 아니라고 하면 그 검을 뽑아 날 벨 건가? 그렇다면 지금 날 베라. 기회를 주지.”
내가 프레시아에게 다가가 그녀의 손과 함께 검 손잡이를 잡았다.
프레시아의 푸른 눈동자가 흔들리며 반걸음 물러났다.
스르릉-!
나는 그대로 검을 뽑아 그녀의 손에 쥐어진 채로 칼날을 내 목에 가져다 댔다.
그러자 프레시아는 깜짝 놀라 내 손을 뿌리치며 검을 등 뒤로 물렸다.
“왜 그러지? 날 죽이려고 검 손잡이에 손을 가져다 댄 거 아니었나?”
“아니, 저는!”
그녀의 혼란에 빠진 모습에 나는 미간을 좁혔다.
“실망이군.”
이 말은 진심이었다.
이런 우유부단한 모습은 내가 그녀에게 바라는 모습이 아니었다.
소설 속에선 그 누구보다 기개 있고 당찬 영웅이 그녀 아니었던가.
아무리 계기를 맞이하지 않았다고는 하지만 이런 모습을 보인다고?
어쩌면 내 죽음은 프레시아의 성장에 가장 중요한 부분이었을지도 모른다.
“이도 아니고 저도 아닌 모습이라니, 그런 모습으로 날 지킬 수 있을 거라 생각했나?”
이건 앞으로의 내 계획에 중대한 차질이 생길 수도 있는 중요한 부분이다.
“내가 적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으면 최소한 죽이진 않더라도 제압하고 심문했어야지! 네 행동은 자신뿐만 아니라 반드시 지켜야 할 사람까지 위험에 빠뜨리는 짓이다!”
고작 내 얼굴을 하고 있다고 망설이면 앞으로 어떻게 내 목숨을 맡기란 말인가.
순간 분노해서 언성이 높아질 뻔했지만 간신히 꾸중하는 정도로 끝냈다.
“와, 왕자님.”
갑자기 혼이 나자 프레시아는 겁에 질린 듯했다.
손가락 하나로도 죽일 수 있는 상대에게 겁을 먹는다니 이 무슨 추태란 말인가.
한숨이 절로 나왔다.
“…내가 네가 아는 왕자가 맞냐고 물었나? 네가 말하는 왕자는 누구지? 지나가는 개미 새끼 한 마리 못 죽이고, 매일 밤 어머니가 그리워 울면서 늙은 시종과 널 찾는 나약해 빠진 녀석을 말하는 건가? 그렇다면 네가 찾는 왕자는 암살자가 찾아온 그날 죽었다.”
나는 뒤돌아서 인적 없는 방향으로 걸어가며 말했다.
“날 계속 지키고 싶다면 따라와라. 그게 아니면 동이 트거든 짐을 챙겨 왕궁을 떠나. 내가 갈 길에 필요한 건 어떤 상황에서도 날 지켜줄 기사지, 우유부단한 겁쟁이가 아니니까.”
만일 그녀가 날 따라오지 않는다면 앞으로의 일이 급격히 어려워질 테지만 단지 그뿐이다.
그녀가 없는 상황 정도는 충분히 상정 안이다.
여주인공을 대체하는 건 힘든 일이지만 불가능하진 않았다.
그러나 내 걱정과 달리 프레시아는 금방 내 뒤를 따라왔다.
* * *
나는 사람이 없는 곳으로만 발걸음을 옮겼지만 달빛이 유독 밝은 밤이라 길을 찾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나는 거침없이 나아가면서 뒤따라오는 프레시아에게 말했다.
“프레시아, 넌 내가 왜 암살당할 뻔했는지 아나?”
“그건….”
그녀는 내 물음에 대답하지 못했다.
상식적으로 생각했을 때 내가 암살당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었다.
만약 내가 그저 장남이라 암살의 위협에 당하는 것뿐이라면 왕자 유안의 어머니가 죽고 얼마 지나지 않아 죽임을 당했어야 옳았다.
그 당시엔 프레시아도 없어 왕자 유안을 지켜 줄 사람은 늙은 시종 헤리온뿐이었으니 그리 어렵지 않았을 터였다.
왕자 유안이 죽는 이유는 단순히 왕위 계승 문제가 아니었다.
“모르겠지. 뭐, 당연한 거야. 날 죽이려는 놈의 생각 따위 어떻게 알겠어?”
사실은 알고 있다.
이 심약한 녀석이 암살당하는 건 왕자 유안에게 계승된 피의 봉인 탓이었다.
이 나라를 세운 시조는 여느 건국 왕이 그렇듯 위대한 영웅이었다.
시조는 세상을 구하기 위해 무언가를 봉인했고 그 봉인을 유지시키기 위해 자신의 후손에게 랜덤하게 계승시켰다.
그리고 이번 대에는 재수 없게 그 봉인이 내게 왔을 뿐이다.
내가 죽고 나면 다른 봉인을 계승한 다른 이가 태어나기 전까지는 그 봉인이 무방비 상태가 되는데 암살자의 배후는 그 공백을 노리고 날 죽이려 든 것이다.
“하지만 하나 알 수 있는 게 있지.”
“그게 무엇입니까?”
진지한 프레시아의 물음에 나는 악동처럼 웃었다.
“내가 약하기에 감히 암살 따위를 시도한다는 것.”
굳이 날 죽이지 않아도 봉인을 풀 방법은 충분히 있다.
그저 더럽게 복잡하고 어려워서 그렇지.
그들은 날 죽이는 게 편한 길이라 암살을 선택한 것에 불과했다.
날 죽이는 게 봉인을 푸는 것만큼 어렵다면 그들은 굳이 날 죽이려 시도하지 않을 터였다.
“그러니 내가 강해지면 되는 거야. 내 스스로가 강해지는 게 안 된다면 감히 날 얕잡아 볼 수 없도록 세력을 만들어야지.”
솔직히 처음에는 전자를 목표로 잡았었지만 내 몸뚱어리를 움직이면 움직일수록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자각했다.
아이고, 내 신세야.
내 대답을 들은 프레시아는 놀란 눈으로 날 바라봤다.
나는 그 모습에 귀엽다고 생각하면서 진지하게 물었다.
“다시 한번 묻지. 프레시아, 넌 날 지키고 싶은가?”
내 물음에 프레시아는 단 1초의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물론입니다!”
방금 전까지 가득했던 혼란과 불안은 그녀의 눈에서 찾아볼 수 없었다.
나는 얼굴에 웃음기를 없애며 단호하게 말했다.
“그렇다면 방금 전과 같은 일은 다신 있어선 안 될 거야. 의심된다면 베어라. 그게 설령 내 모습을 하고 있더라도.”
“예!”
프레시아는 힘차게 대답했다.
이거 그냥 잠깐 헤어졌다 다시 만나면 수상하다며 그냥 날 죽여 버리는 거 아니야?
내가 너무 단호하게 말했나?
왠지 불안하네.
그런 생각을 속으로 삼키며 도착한 제 3궁을 올려다봤다.
“혹시 순찰을 도는 병사들의 인기척을 느낄 수 있어?”
혹시나 하는 내 물음에 프레시아는 별것 아니라는 듯이 대답했다.
“있습니다. 여기서 800미터 정도 떨어진 곳에서 병사 둘이 천천히 이곳으로 다가오고 있습니다. 방향은 이곳이지만 대략적인 순찰 루트를 생각하면 이곳으로 바로 오는 건 아닌 것 같습니다.”
프레시아가 가리킨 방향은 외벽 때문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나는 인간의 범주를 벗어난 감각에 혀를 내두르며 물었다.
“그런데 혹시 나도 감시하고 있었어?”
내가 꺼림직한 표정을 짓자 프레시아는 당황하며 손사래를 쳤다.
“아, 아니, 그게. …왕자님의 안전을 위해서랄까….”
얼굴을 붉히며 목소리가 기어들어 가자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과연, 내가 뛰어내리자마자 바로 따라 뛰어내린 게 우연이 아니었구만.
“다음부턴 말하고 기척을 추적해. 화장실 가는 것까지 추적하면 부끄럽잖아.”
“화, 화장실은… 아니, 명심하겠습니다.”
프레시아는 얼굴을 붉히며 내 시선을 피했다.
그냥 농담이었는데 진짜로 화장실까지 추적한 건 아니겠지?
“그런데 이곳엔 왜 온 건가요?”
급하게 말을 돌리자 나는 실소를 흘리며 대답했다.
“이 안에 볼일이 있거든.”
“볼일이라면 낮에 방문하셨을 때 보시지 왜….”
“이 밤에 조용히 왔다는 건 당연히 남 몰래 할 일이 있어서지.”
나는 헤리온에게 말해 미리 챙겨둔 가방에서 갈고리 달린 밧줄을 꺼내며 가볍게 읭크를 했다.
“물론 프레시아는 남이 아니니까 같이 움직이는 거고.”
원래는 혼자 움직이려 했다는 건 넘어가기로 했다.
누가 하루 종일 내 기척을 예의 주시하고 있을 거라고는 생각 못 했거든.
“그런데 그걸로 어떻게 몰래 들어가시려는 건가요?”
그녀의 물음에 나는 밧줄을 회전시키며 말했다.
“바로 이렇게지. 나비야, 부탁해.”
-냐옹~!
내가 회전시키던 밧줄을 위로 던지자 나비가 갈고리를 채가 3층 환풍구에 걸었다.
갈고리의 기묘한 궤적에 프레시아는 한눈에 이상함을 알아차리고 날 바라봤다.
나는 다시 돌아온 나비의 목덜미를 쓸어 만지며 말했다.
“모습을 나타내도 괜찮아.”
내 말에 나비는 투명화를 풀고 자신의 모습을 드러냈다.
“꺅! 귀여워!”
프레시아는 손바닥만 한 작은 고양이를 보고 눈을 반짝이며 조심스럽게 만져보려 했다.
그러나 나비는 프레시아의 손길을 피해 내 어깨에 올라탔다.
“나비가 주인 외에는 낯을 가려서 그래. 익숙해지면 만지려 해도 도망가지 않을 거야.”
“그런가요.”
프레시아는 아쉬워하면서도 내게 설명을 해달라는 듯이 바라봤다.
“나비는 시조의 정실인 리즈벳 왕후가 후대에게 남긴 바람의 정령이야. 그걸 내가 계승했지.”
“리즈벳 왕후요?”
“그래. 전설적인 위대한 정령사가 남긴 정령치고는 큰 힘을 가지고 있진 않지만 보통 정령보다 바람을 잘 다루거든.”
소설 속에선 등장인물들이 워낙 괴물들이라 마스코트로서의 역할 외엔 한 적이 거의 없지만 계약하고 느껴진 힘은 보통이 아니었다.
나는 신기해하는 프레시아를 보며 가볍게 밧줄을 당겼다.
“나비와 만난 지 그리 오래되진 않았지만 암살자로부터 내 생명을 구해준 생명의 은인이기도 하고 말이야.”
“그럼….”
“나비가 구해준 거지.”
좋아, 튼튼하게 잘 걸렸군.
“나비야, 내 몸을 밑에서 받쳐줘.”
-냥!
나비가 짧게 울자 밑에서부터 강하게 바람이 불었다.
나는 바람의 힘에 의지해 밧줄로 벽을 타고 올랐다.
밑에서 밀어주는 바람 때문인지 오히려 몸을 최대한 땅과 수평을 이루도록 서야 올라가기 수월했다.
환풍구에 다다랐고, 안으로 들어가기 위해 버둥거린 끝에 무사히 진입할 수 있었다.
“후우, 힘들구만.”
고작 그거 올랐다고 팔이 저려왔다.
나는 내가 타고 올라온 밧줄을 던지며 프레시아에게 올라오라고 손짓했다.
프레시아는 밧줄을 보더니 잡지도 않고 가볍게 제자리에서 뛰어 환풍구에 올라왔다.
와오, 여기는 3층, 그것도 한 층의 층고가 4미터는 되는 곳인데 대단하네.
“이 안으로 들어가는 건가요?”
“맞아. 아, 밧줄 좀 챙겨주겠어?”
나는 프레시아가 회수해 준 밧줄을 가방에 다시 넣고 앞서서 기어갔다.
“저희는 여기서 뭘 하는 건가요?”
그녀의 물음에 나는 소곤거리는 목소리로 의기양양하게 대답했다.
“가보면 알아.”
아주 재미있는 걸 얻으러 가는 중이다.
다른 곳들 중 여길 처음 온 이유가 있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