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화. 보물사냥 (2)
기사는 하얗게 질리다 못해 푸른빛까지 도는 안색으로 당황해서 손사래 쳤다.
“아, 아닙니다! 저는….”
“아니다?!”
나는 과장된 몸짓으로 기사에게로 한 걸음 크게 다가가며 말을 잘랐다.
“콘레드 경! 경은 지금 자신이 충신이 아니라 항변하는 것인가! 이럴 수가! 기사의 가장 중요한 덕목인 충의를 버리겠다고 이야기하는 것인가!”
내가 경악을 금치 못하겠다며 이마를 짚고 비틀거리자 프레시아가 놀라서 날 부축했다.
“왕자님!”
“아아, 괜찮으니 너무 걱정하지 마.”
그저 연기에도 이렇게 과민 반응을 하니 뭘 하기가 부담스럽구만.
나는 스스로 중심을 잡고 바로 서며 기사에게 다가갔다.
“아, 아닙니다. 아니, 아닌 게 아니라, 제가 하고 싶은, 아니, 말씀드리고 싶은 말은 그, 그게….”
기사는 패닉에 빠져 횡설수설하기 시작했고 동료 기사들도 얼어붙어 입을 열질 못했다.
여기서 입 잘못 뻥긋하면 같이 엮여 목이 날아갈 판이니 당연했다.
이렇게 다루기 쉬워서야 원.
나는 기사의 어깨를 두어 번 두드려 주고는 이쪽을 보는 사람들 방향으로 크게 두 걸음 옮기며 말했다.
“알고 있다네. 경에게 그런 불순한 의도는 없다는 걸 말이야.”
이젠 내가 나긋나긋하게 말해도 이곳에 있는 모두가 내 말에 귀를 기울였다.
“순전히 그런! 일을 겪은 내 안위를 걱정해서 그러한 말을 꺼낸 것을 어찌 모르겠는가? 콘레드 경.”
내 물음에 기사는 구명줄이라도 발견한 사람처럼 다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 그렇습니다! 저는 그저 저하의 안위를 위하여…!”
“그렇지! 매우 안타까운 말이나, 한번 암살자가 왔다면 또다시 오지 않으리란 법이 없으니 아바마마께서 내게 보내주신 호위로서 안전을 생각할 수밖에 없었을 게야.”
“그, 그렇습니다!”
그렇기는 개뿔이. 그저 빨빨 돌아다니면 신경 쓸 부분이 많아 귀찮아서 그런 거면서 말이야.
나는 그런 속내와 달리 결연한 얼굴로 선언하듯 말했다.
“그러나! 나는 별궁 안에 숨어 지낼 수가 없네! 왜냐! 그건 한낱 저열한 암살자에게 패배하는 것과 다름없기 때문이다!”
이제는 기사들에게 말하는 게 아니라 연극 무대에서 독백하듯 멀리서 이곳을 지켜보는 이들을 둘러보며 외쳤다.
“아바마마께선 이번 사건을 듣자 명백히 왕권에 대한 도전이라 분노하셨다. 그 말의 의미는 무엇이냐. 왕자인 나는! 그저 아바마마의 아들이 아닌 이 나라, 이 왕국의 아들이고! 왕실의 권위를 위해 움직여야 하는 의무를 지고 있다는 거다!”
나는 가볍게 숨을 들이쉬고 말을 이었다.
“자, 경이 말해 보아라. 내가, 이 나라의 왕자가. 고작 일신의 안위를 위하여 한낱 무뢰배에 겁을 내고 숨어야 맞겠는가? 아니면 이리 나와서 내가 건재함을, 그리고 나아가 내가 속한 왕실이 건재함을 알려야 맞겠는가?”
내 물음에 기사는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왕실의… 건재함을 알려야 맞습니다.”
틀렸다. 나는 왕실을 대표할 수 없다.
왕의 아들이라고 그 뒤를 이을 수 있으리란 보장도 없고, 다른 이복형제에게는 나와 달리 튼튼한 뒷배가 있다.
따라서 내가 건재하든 아니든 왕실의 건재함은 알릴 수 없다.
하지만 지금 이 상황에서 감히 그런 걸 따지는 사람은 없었다.
그렇기에 나는 선언했다.
“그렇다! 그게 내가 이 왕궁을 돌아다니는 이유다!”
물론 거짓말이다.
이렇게 떠드는 지금도 어떻게 이 왕궁에 숨겨진 보물들을 낼름 꿀꺽 삼켜버릴 수 있을까 고민하고 있었다.
그러나 내 외침을 들은 이들은 감명받은 것처럼 탄성을 내뱉으며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좋아, 이제 어딜 돌아다니든 방해받는 일은 없겠군.
내 앞길을 막는다는 건 왕실에 도전하는 게 될 테니까.
사실 이렇게 돌아다니다 보면 언젠가 기사들이 불만을 터트릴 거라고 생각했지만 이렇게 일찍 터트릴 줄은 몰랐다.
터트린다고 해도 별궁 안에서 불만을 제기할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더 생각 없고 인내심이 없어서 다행이다.
하기야 불과 기사라는 것들은 100여 년 전만 해도 글자를 아는 것을 수치라고 말하는 이들이었으니 제대로 생각을 할 리가 없었다.
덕분에 예정보다 일찍 왕의 처소에 들어갈 수 있을 듯했다.
* * *
나는 식탁 위에 놓인 두툼한 스테이크와 잘 구워진 가니시를 보고는 자리에 앉으며 물었다.
“오늘 저녁은 스테이크인가?”
내 물음에 헤리온은 도수 낮은 식전주를 따르며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왕자님께서 명하신대로 가급적 육류 위주로 준비했다고 합니다.”
접시 위의 고깃덩어리는 1인분치고는 많았지만 그것도 내가 부탁한 바였다.
이 허약한 몸이 시조의 유산을 제대로 받아들일 몸이 되기 위해선 양질의 단백질이 중요했다.
나는 고기를 썰며 프레시아와 헤리온에게도 식사를 권했다.
“둘 다 같이 식사를 하지. 특히 프레시아, 넌 24시간 호위한다고 따로 먹을 시간도 없잖아.”
“그건 그렇지만….”
“다른 기사들도 돌아가며 식사 중이야. 같이 먹는 게 불만이면 따로 먹고 오든가.”
기사들은 별궁에 도착하고는 별궁을 지키는 병사들과 함께했기에 이곳엔 없었다.
내 말에 프레시아는 고민하다가 이내 자리에 앉았다.
아무래도 자신이 없던 사이 암살자의 공격을 받은 게 큰 충격이었던 모양이었다.
내가 여전히 서 있는 헤리온을 바라보자 그는 당연하다는 듯이 미소를 지으며 내 접시 위에 샐러드를 올려놓았다.
“저는 따로 식사를 하고 있으니 걱정 마십시오.”
호위기사인 프레시아와 달리 헤리온은 나와 하루 종일 붙어 있는 게 아니니 괜찮은 모양이다.
하기야, 시종과 기사가 같은 입장은 아니니 내 권유에 망설이다가 앉은 프레시아와 달리 그는 주인과 같은 식탁에 앉는 게 힘들긴 하겠다.
“믿음직하군, 프레시아도 배워. 식사도 제대로 하지 않고 날 제대로 지킬 수 있겠어?”
내 장난기 섞인 농담에 프레시아는 얼굴을 붉히며 대답했다.
“같이 먹겠습니다.”
뭐, 내가 누굴 걱정할 처지가 아니긴 하지.
스테이크를 열심히 썰어 먹는데 그때 누군가가 노크를 하며 식당에 들어올 것을 청했다.
“유안 저하, 궁시부(宮侍部)의 상선(尙膳)이옵니다. 식사 중에 불쑥 찾아와 송구하오나 들어가도 괜찮겠습니까?”
그 부탁에 나는 입으로 가져가던 스테이크를 내려놓았다.
궁시부는 왕을 모시는 시종, 궁녀들을 관리하는 부서였고 상선은 그 부서의 최고 관리자를 이르는 말이었다.
즉, 왕의 비서실장이 갑자기 날 찾아온 셈이었다.
프레시아는 급하게 먹던 스테이크를 한입에 욱여넣고는 언제 같이 식사를 했냐는 듯이 호위답게 내 옆에 섰다.
귀엽기는.
“들어오세요, 상선.”
내 허락이 떨어지자 점잖은 차림의 중년이 문을 열고 들어와 몸을 숙이며 인사를 했다.
“상선 제르망 뤼밍이 유안 저하를 뵈옵니다.”
그야말로 왕실 예절 교본이 살아 움직이는 듯한 인사에 나는 속으로 쓰게 웃었다.
소설 속에선 큰 비중이 없는 엑스트라지만 훗날 프레시아가 원수 중 하나인 왕후의 목을 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던 인물이다.
물론 당장은 써먹을 수 없는 사람이었다.
“상선께서 무슨 일로 방문했는지 궁금하나, 일단 식사 중이니 함께 하겠습니까?”
내 권유에 제르망은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하곤 거절의 의사를 밝혔다.
“감사한 말씀이옵니다만, 송구하게도 전하께서 하명하신 일이 있어서 오래 있진 못할 듯합니다.”
“그러합니까? 아쉽지만 공사가 다망한 이를 오래 붙잡아 둘 순 없죠. 상선께선 편히 용건을 보세요.”
내 가식적인 말에 상선은 감사하다고 인사하고는 이곳에 온 이유를 말했다.
“전하께서 하교(下敎)하시길, 일전의 불미스러운 일로 저하의 생신 축하 만찬이 취소된 것을 안타깝게 생각한다 하시었습니다. 때문에 비록 늦었지만 저번 만찬을 대신하여 심궁에서 저하와 간소하게나마 식사를 하고자 하오니 저하의 의향을 여쭙고 오라 하셨습니다.”
그냥 같이 밥 한 끼 하자는 말을 어지간히 어렵게도 한다 싶어 어이가 없었다.
하지만 내 예상대로 흘러가는 건 좋아할 만한 일이다.
다른 건 몰라도 심궁에 있는 비델의 갑옷은 이 왕궁에서 반드시 얻어야 할 것 중 하나였으니까.
나는 속내를 감추며 환한 미소를 지었다.
“그거 기쁜 말씀이군요. 아바마마께 말씀 올리기를 소자가 다시 뵈올 날을 고대하며 기다리겠다고 전해 주십쇼.”
평소 자식에겐 관심도 없던 왕이 이렇게 부른다는 건 역시 낮에 있던 일을 들어서겠지.
왕이 내 암살 미수 사건을 듣고 화를 낸 건 내가 죽을 뻔해서가 아닌 왕권에 대한 도전 때문이다.
빌미가 제공되면 물어뜯기는 정치판에서 왕실을 얕볼 수 있는 시선을 환기시킨 내 연설 아닌 연설이 왕에게 있어 흡족한 대처였다는 말이었다.
“저하의 말씀, 전해 올려 드리겠습니다. 그럼 소인은 이만 물러나겠습니다.”
“예, 상선께서 고생해 주세요. 헤리온, 상선을 배웅해 드리게나.”
내 지시에 헤리온은 정중히 문을 열며 별궁 밖으로 배웅을 나갔다. 두 사람이 나가자 난 술을 한 모금하며 킥킥 웃었다.
“고작 말을 전하는 데 상선을 보낸다라….”
낮에 한 내 행동이 왕은 만족스러웠겠지만 거슬리다 못해 분노가 치밀 사람이 하나 있다.
바로 이 나라의 왕후.
왕의 장남이라는 지위가 내게 있는 한 왕후는 날 미워할 수밖에 없었다.
낮의 내 행동은 왕의 거처에 들어가기 위한 명분이기도 했지만, 왕후에겐 무시하지 못할 도발이자 내가 차후 움직이기 위한 포석이기도 했다.
그런 상황에서 왕의 최측근인 상선의 방문은 단순히 도발을 넘어 불안감을 심어주기에 충분했다.
마치 흡연자를 싫어하는 사람 앞에서 주유를 하며 담배를 피우는 격이다.
이건 왕이 날 도와주는 것인가, 아니면 그저 이용하기 위함인가.
어느 쪽이든 난 주어진 상황을 써먹을 뿐이다.
왕이든, 왕후든 벗겨먹을 수 있을 만큼 벗겨먹어 주겠다.
“맛있네. 좀 더 음미하고 먹었으면 좋았을 텐데 말이야.”
내 프레시아는 급하게 먹은 게 부끄러웠는지 얼굴을 붉혔다.
“노, 놀리지 말아주세요.”
그렇게 말하면 더 놀리고 싶어지는 법이다.
식사를 마친 나는 프레시아와 가볍게 농담을 주고받으며 내 방으로 돌아갔다.
* * *
나는 창가에 걸터앉아 밤하늘을 올려다봤다.
한겨울의 기온이 코끝을 스쳐 지나갔지만 그리 춥지는 않았다.
나비가 방 안으로 들어오는 바람을 막아준 덕분이다.
-냐아~!
“그래그래, 착하지.”
한 손으로 나비와 놀아주며 오늘 낮에 나비에게 살펴두라고 한 장소들을 바람으로 작게 구현화시켰다.
바람이라 눈에 보이지 않아서 그 위로 흙을 뿌렸다. 그러자 바람에 흙이 갇혀 선명한 건축물이 모습을 드러냈다.
오늘 밤 안에 모든 곳을 털어먹는 건 물리적으로나 체력적으로나 불가능했기에 시간을 들여 차츰차츰 공략할 생각이었다.
“나비야, 이 구멍으로 내가 지나갈 수 있겠어?”
내가 환풍구를 가리키자 나비는 잠시 고민을 하더니 울었다.
-냐옹!
“아, 못 들어간다고?”
귓가에 울리는 건 고양이 울음소리인데 무슨 말인지 이해가 되니 신기했다.
“그럼 내가 들어갈 수 있을 만한 곳은 어디가 좋아?”
내 물음에 건물 조형 주변을 돌더니 한곳에 멈춰 서서 3층에 난 환기구를 가리켰다.
“이 구멍과 연결된 부분만 남겨봐.”
내 지시에 환풍 통로만 제외하고 성이 무너지며 허공에 흙으로 만들어진 입체 지도가 남았다.
“과연, 여길 통하면 목적지까지 한 번에 갈 수 있겠네. 잘했어!”
내가 나비의 머리를 쓰다듬자 나비는 기분 좋은 듯 “그르릉.”거렸다.
그렇게 오늘 방문할 곳을 확인하고 흙을 대충 치웠다.
그리고는 창밖으로 다리를 내밀며 말했다.
“나비야, 가자.”
-냐옹~!
내가 아무도 없는 창밖으로 뛰어내리자 발밑에 저항감이 느껴지며 천천히 떨어졌다.
단숨에 5층에서 땅으로 착지한 나는 나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때 누군가가 내 뒤를 따르듯 창문에서 뛰어내렸다.
나와는 달리 빠르게 떨어져 순간 놀랐지만 내 바로 옆에 가뿐히 착지한 얼굴을 보고는 속으로 혀를 찼다.
“왕자님… 아니, 당신은 왕자님이 맞습니까?”
달빛에 비친 프레시아는 당황하면서도 혼란스러워 보이는 표정으로 날 보며 검 손잡이에 손을 댔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