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엑스트라 왕자는 세계정복을 시작한다-6화 (6/214)

제6화. 보물사냥 (1)

내가 깨어난 지 이틀이 지났다.

기절하듯 잠들고 사흘이나 지났으니 이 빌어먹을 몸뚱이에 들어온 지 닷새나 되었다는 말이었다.

내가 깨어난 직후부터 나는 숨죽이며 가만히 있었는데도 암살 시도를 당하는 비운의 왕자란 이유로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이런 관심은 파편화된 왕자 유안의 기억 속에서도 찾을 수 없었던 탓에 다소 귀찮았다.

하지만 이 관심은 애초에 내가 유도한 관심이니 감내하는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배후가 왕궁에 암살자를 보낼 정도로 막 나가더라도 이 정도로 주목받는 나에게 암살자를 보내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특히 내 암살 미수를 들은 왕이 이건 왕권에 대한 도전이라며 분노하고 있으니 더더욱 어려운 일이 됐다.

“보호는 좋지만 없던 것들을 달고 다니려니까 귀찮군.”

나는 찻잔에 담긴 홍차를 홀짝이며 별궁 정원 길목에서 경계를 서고 있는 기사 넷을 봤다.

반쯤 보여 주기식이겠지만 어명으로 당분간 왕가의 기사들이 날 호위하게 됐는데, 이게 얼마나 갈진 모르겠다.

“답답하셔도 참으셔야 합니다. 다른 무엇보다도 왕자님의 안전이 최우선인걸요.”

내 불만에 프레시아는 내 옆에 서서 미소 지었다.

그런 그녀를 보며 난 뚱한 얼굴로 말했다.

“정신 사나운데 둘 다 서 있지 말고 앉지?”

내 권유에 호위기사 프레시아와 늙은 시종 헤리온은 정중히 거절했다.

“앉아 있다가는 돌발 상황에 대처하지 못합니다.”

“다른 분들이 전부 서 계신데 저만 앉을 수는 없지요.”

거참 신경 쓰는 것도 많네. 프레시아라면 충분히 앉아서도 대처가 가능할 텐데.

“그런데 어제부터 읽고 계신 두꺼운 책은 무엇인가요?”

프레시아의 물음에 나는 책장을 차르륵 넘기며 대답했다.

“고어(古語) 사전.”

정확히는 선대왕들이 한 사전 편찬 사업의 결과물들을 분해해서 대충 엮어 만든 야매 사전이었다.

200년만 더 지나면 국보로 지정될 역사적 산물이지만 내가 알 게 뭐람.

판본이 꽤 있었으니 한 권쯤은 시간을 버텨 국보가 되어주겠지 뭐.

“사전이요? 사전만 보시는 건가요?”

프레시아가 의아한 듯 물어보자 나는 대충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어, 맞아.”

사실은 아니다.

내가 지금 읽고 있는 건 내 손가락에 끼워진 아퀼라의 마도서였다.

지금 내 눈앞에 텍스트가 떠 있었는데, 아무도 내가 보고 있는 걸 인지하지 못하는 걸 보면 소유자에게만 보이는 듯했다.

“그러신가요…?”

프레시아는 이해하지 못한 듯 날 바라봤지만 나는 홍차를 홀짝이며 마도서에 집중했다.

아퀼라의 마도서에는 각종 마법 지식은 물론 있지도 않은 자식에게 보내는 아퀼라의 일기 같은 편지가 들어 있었다.

마도서의 서문에는 아퀼라가 혹시라도 자신의 자식에게 마법을 가르쳐주지 못할 상황에 대비하려 마도서를 남긴다고 쓰여 있었다.

아퀼라의 일대기엔 소설로는 알 수 없었던 흥미로운 부분이 많았다.

마도서의 내용 중 당장 내게 필요한 정보는 총 두 가지다.

하나는 아퀼라의 마력회로에 대한 설명이었고, 다른 하나는 시조의 유산에 대한 설명이었다.

마력회로의 경우 소설 속 내용과 달리 인두로 지진 것처럼 괴로웠던 이유는 원래 얻은 놈과 달리 내가 마법에 재능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어서였다.

게다가 마법을 제대로 익히려면 마력회로를 세밀하게 개발해야 했는데 그 과정 또한 같은 고통이 따를 거라고 했다.

왜 하필 이딴 몸뚱이에 들어와서 이 고생인지 모르겠다.

분명 엑스트라 중에서도 일찍 요절해서 그렇지 각 분야의 재능충이 넘쳤는데 이런 망한 몸뚱이라니.

아니, 재능 넘치는 것까진 바라지도 않는다.

그저 일반인만 되었어도 그런 고통은 없었을 텐데!

나는 속으로 푸념을 하며 시조의 유산 부분에 눈을 돌렸다.

아퀼라는 시조의 유산을 설명하면서 만약 얻지 못했으면 대신 얻은 녀석이 유산을 제대로 익히지 못하게 만들라고 했다.

그러면서 유산의 원리와 익히는 걸 방해하는 방법까지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었다.

아퀼라가 왜 시조에게 배신당했는지 알 것 같다.

<겨울나무의 현자> 속에선 길버트와 이 마도서를 얻은 녀석과 접점이 없었다. 그래서 그런지 방해받지 않았지만 만약 방해받았으면 군신(軍神) 길버트는 없었겠군.

아니, 원래 길버트가 얻어야 할 걸 내가 꿀꺽했으니 위대한 군신은 사라진 건가?

여하튼 마도서에 따르면 내가 시조의 유산을 제대로 익힐 방법은 하나뿐이다.

그건 바로 운동하는 것.

유산으로 육신을 개조하기 위해선 최저한도의 육신이 필요했다.

내 손목의 퍼센티지는 그 최저한도까지 얼마나 남았는지를 의미한다.

“하아, 운동이라….”

이 극악의 효율을 자랑하는 몸으로 몇 년이 걸릴까 눈앞이 깜깜했다. 나는 사전을 덮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 그럼 산책이나 하러 가자! 날 진찰한 궁중의도 몸을 움직이라고 했잖아.”

난 산책을 빌미로 왕궁 이곳저곳을 돌아다녔다.

* * *

나는 비밀들을 얻기 위한 사전 탐색을 위해 열심히 돌아다니다가 왕궁 안에 위치한 성당을 보고 들어갔다.

이곳이 보물이 숨겨진 일곱 번째 위치였다.

“와, 멋진데?”

성당은 마치 다른 궁궐과 비견될 정도로 웅장하고 아름다웠다.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새하얀 구조물과 햇빛에 비쳐 반짝이는 모자이크 창문은 경건하면서도 신비로운 분위기를 자아냈다.

특히 천장의 투명한 유리 돔 사이로 쏟아져 내리는 햇살 속에서 자애로이 미소 짓는 거대한 여신상은 부수기 아까울 정도였다.

내가 신기해하며 탄성을 내뱉자 수녀들과 성당 청소를 하던 나이 든 대머리 신부가 내게 다가왔다.

“오랜만에 방문하셨군요. 왕자님.”

신부는 특이하게 대머리면서 앞머리가 있었다.

아마 일부러 정수리를 면도한 듯했다.

카푸치노의 어원이 된 중세 카푸친 수도회가 저런 방식으로 머리를 밀었던 것처럼 이 신부의 머리 역시 수도 방식 중 하나인 모양이다.

아니, 그냥 원형 탈모가 세게 온 건가?

“대지의 축복이 있기를.”

나는 신부를 모르지만 신부는 날 아는 모양이니 그냥 알은체하기로 했다.

“오랜만입니다. 대지의 축복이 있기를.”

능청스럽게 신부를 따라 인사하자 신부는 놀라면서도 기뻐했다.

“왕자님께서도 자애로운 대지를 믿기로 하셨습니까?”

아, 왕자 유안은 원래 믿는 신이 달랐나?

이 일대엔 각 자연물을 대표하는 일곱 신을 믿는 종교가 있었다.

각 신은 하나의 종교로 묶이면서도 주로 믿는 신에 따라 종파가 나뉘었는데, 신부는 대지의 여신을 믿는 종파 소속인 듯했다.

나는 당황하지 않고 싱긋 웃으며 말했다.

“저는 모든 신을 믿습니다. 다만 이곳은 위대하신 성녀 달리아나의 유지가 깃든 곳이니 이 인사가 어울릴 듯해서요.”

내 대답에 신부는 아쉬워하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요. 확실히 이곳은 성녀 달리아나 님의 유지가 깃든 곳이지요. 최근 들어선 많이들 잊었지만요.”

성녀 달리아나는 대지의 여신을 모시던 사제로 이 나라를 세우는 데 큰 공헌을 한 여자였다.

왕궁에 있는 성당에 가장 세력이 강한 태양신이 아닌 대지의 여신상이 있는 이유도 그녀 때문이었다.

“그나저나 왕자님께서 그동안 공부를 많이 하셨군요.”

달리아나는 종교적으로 꽤나 업적이 많아서 종파를 가리지 않고 존경받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몇백 년 전 사람이라 종교사를 제대로 배우지 않으면 모르는 사람이 태반이었다.

물론 나야 소설을 읽어서 아는 거지만.

“아하하, 부끄럽습니다.”

“그나저나 이야기는 들었습니다. 많이 힘드셨을 텐데 무사하셔서 다행입니다.”

“다행히 다친 곳 하나 없으니, 모두 신들의 은혜가 아니겠습니까. 아직 달이 절 이끌지 않음이겠지요.”

나는 가식적인 미소로 화답하고는 잠시 기도를 하겠다며 여신상 앞으로 다가갔다.

그리고는 기도하는 척을 하며 투명화한 나비로 하여금 몰래 숨어들을 만한 공간을 찾도록 시켰다.

-냐옹~!

나비는 내게만 들리는 울음소리를 내며 아장아장 허공을 걸었고 나는 여신상 아래 적힌 경전 문구를 읽었다.

이 여신상 안에는 성녀 달리아나의 성유물이 잠들어 있다.

성유물인 작은 로사리오는 지니고 있으면 온갖 병과 독이 통하지 않고 자연치유력을 높여주는 효과가 있었다.

이 허약한 몸뚱이에는 더할 나위 없이 필요한 물건이라 할 수 있었다.

덤으로 손에 쥐면 일시적으로 신성력을 몇십 배는 증폭시킬 수 있다고 하는데, 나와는 상관없는 효과였다.

내가 신성력을 다룰 일은 없을 테니까.

마음 같아선 당장이라도 손에 넣고 싶었지만 성유물을 얻기 위해선 한 가지 작은 문제가 있었다.

오래된 여신상을 지탱하고 있는 게 성유물의 힘이라 로사리오를 빼내면 여신상이 무너져 내린다는 점이다.

여신상이야 무너지든 말든 내 알 바 아니었지만 성유물을 빼내고 성당을 몰래 빠져나올 수 있느냐가 문제였다.

“…신이시여, 저를 도와주소서.”

부디 무사히 성유물을 털어먹을 수 있게 해주십쇼.

그럼 제가 차기 성자를 제대로 키워 드리겠습니다.

차기 성자에게 로사리오는 못 줘도 성인의 지팡이든, 화신의 유해든, 잊혀진 성소든 얻는 걸 최대한 도와줄 테니까 좀 어떻게 안 되겠습니까?

-야옹~!

나비가 성당을 다 둘러봤는지 내게 돌아와 내 주머니 안으로 쏙 들어왔다.

나는 속으로 대답이 돌아올 리 없는 부탁을 마치고 천천히 성당을 나섰다.

“자, 다음은 어딜 가야 할까….”

아직 가봐야 할 곳이 많았다. 앞으로 왕의 거처를 제외하면 네 곳이 남았다.

실행은 밤이 되고 나서부터였다.

다음 행선지를 정하려는데 내 호위로 붙은 기사 중 하나가 불만을 표했다.

“왕자님. 이제 그만 별궁으로 돌아가시죠. 아직 암살 미수 사건에 대한 조사도 끝나지 않았습니다.”

내용만 들어보면 날 걱정하는 듯했지만 말투를 보니 호위 대상인 내가 계속 빨빨거리며 돌아다니자 짜증 난 듯했다.

하기야, 호위 대상이 가만히 안 있고 싸돌아다니면 신경 쓸 게 많아지니 귀찮긴 하겠다.

하지만 그게 나랑 무슨 상관이지?

나는 나보다 키가 큰 기사의 얼굴을 보기 위해 눈을 치켜뜨며 물었다.

“…경의 이름이 어떻게 되지?”

내 물음에 불만을 표한 기사는 마치 자신의 이름을 들으면 어쩔 거냐는 듯이 날 바라봤다.

지금 내 호위를 하고 있다고 자신이 내 기사가 되는 것은 아니니 그로서도 어이가 없을 거다.

“경은 이름이 없나? 아니면 ‘왕자’인 내 말을 무시하는 건가?”

내 물음에 기사는 움찔했다.

왕이 왕권에 대한 도전이라며 분노해 직접 내 호위를 맡겼는데, 그 대상을 개무시한다면 그거야말로 왕권에 대한 도전이다.

내 처지를 생각했을 때 다른 시기였으면  기껏해야 간단한 시말서, 재수가 없어야 감봉이 다였을 거다.

하지만 지금은 잘해야 좌천, 최악의 경우 법에 따라 사형도 당할 수 있는 죄목이 되기도 한다.

“…아닙니다, 죄송합니다. 제 이름은 파실 디 콘레드라고 합니다.”

“그래, 콘레드 경. 경은 왜 내게 거처에 돌아갈 것을 권하는 거지?”

내 물음에 기사는 당연하다는 듯이 말했다.

“말씀드렸다시피 아직 사건에 대한 조사가 끝나지 않았으니 안전을 위해….”

“오호~!”

나는 일부러 과장되게 감탄사를 내뱉으며 그의 말을 끊었다.

“내 안전을 위해서라! 그렇다면 이 왕궁은 안전하지 못하다? 경은 이 나라의 기사들은 고작 암살자 하나 걸러내지 못한다고 시인하는 건가! 경의 고견! 잘 들었네!”

내가 힘차게 박수를 치며 성당 안의 사제들과 일을 하는 시종들, 그리고 순찰을 도는 병사들의 시선을 끌자 기사는 사색이 되었다.

“경이야말로 만고의 충신이군! 그 누가! 윗사람을 위하여 자신들의 허물을 거침없이 드러낸단 말인가!”

그의 표정이 일그러지는 것과는 반대로 나는 환하게 웃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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