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엑스트라 왕자는 세계정복을 시작한다-5화 (5/214)

제5화. 책 속의 유약한 엑스트라 (5)

“누구냐?”

나는 돌아올 리 없는 물음을 물었다.

소설 속에선 끝내 이 암살자가 누구인지는 밝혀지진 않지만, 딱히 누군지 알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그러나 뜻밖에도 암살자가 입을 열었다.

“그리 묻는다고 대답하리라 생각했나?”

암살자의 되물음에 나는 가볍게 놀랐다.

말없이 죽이려 들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혓바닥이 긴 놈이군.

암살자 놈이 모시는 배후 조직에는 여러 강한 괴물들이 있었지만 이놈은 아니다.

눈앞의 암살자도 결국 배후에게 왕자 유안의 죽음을 보고하고 처리당하는 엑스트라에 불과했다.

놈의 배후는 꽤나 인재를 아끼는 새끼다.

날 죽였다는 사실을 알고 있단 것만으로도 토사구팽 당했다는 건 그만큼 별 볼 일 없는 녀석이란 뜻이었다.

너무 강한 암살자는 왕궁을 지키는 여러 괴물들의 감각에 걸릴 위험이 있으니 일부러 약한 놈을 보낸 거다.

왕자 유안 같은 걸 죽이는 데 거창하게 소 잡는 칼을 쓸 필요는 없다는 거겠지.

솔직히 왕자 유안에게는 닭 잡는 칼도 과분하다.

“저런, 사람이 정이 없군. 염, 아니 달의 주인에게 누가 보냈는지 정도는 말해줘야지 않은가?”

평소 습관대로 염라대왕이라고 하려다 이 세계관 속 저승을 관장하는 신으로 바꿔 말하며 능글맞게 웃었다.

이 세계는 태양에서 영혼이 태어나 죽으면 달로 간다고 믿었다.

난 딱히 신을 믿진 않지만 그렇다고 다른 사람의 신앙을 부정하진 않는다.

내가 여유롭게 술잔과 술병을 들자 암살자는 미간을 좁혔다.

“왜? 한잔할 텐가?”

“지금 날 기만하는 건가!”

암살자는 내 물음에 버럭 했다. 그 반응에 나는 조소를 머금었다.

“하찮군. 네까짓 게 기만당할 만큼 대단해 보이는가? 집주인 몰래 기어들어 온 더러운 시궁쥐 주제에 스스로를 너무 대단히 생각하지 말게나.”

“이…!”

복면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는데도 얼굴이 붉어지는 게 눈에 보일 정도로 분노했다.

놀리는 맛이 있는 놈이구만.

“내 친히 조언하니 새겨듣게. 자네같이 스스로를 부풀려 생각하는 건 조증의 증상 중 하나라네. 혹은 과대망상증이거나.”

내 친절한 조언에 모욕을 당했다고 생각했는지 암살자는 품속의 단검을 뽑아 들었다.

원래 사람은 감추고 싶은 진실이 들춰지면 화를 내기 마련이다.

“감히 이 보잘것없는 버러지가!”

암살자의 외침과 함께 고장 난 시계가 울리며 창가를 비추는 달빛이 휘두르는 단검에 맺혔다.

마치 죽음을 관장하는 달의 신이 가호하는 것처럼 예리한 단검은 심장을 노리고 가슴을 파고들었다.

쨍그랑!

프롤로그 속 장면처럼 바닥에 붉은 액체가 번지며 달빛이 애처로이 반짝였다.

이로써 왕자 유안은 죽음을 맞이한다.

…이제부터는 오롯이 나의 삶이 시작된다.

나는 잔을 놓친 손으로 단검 손잡이를 쥐고 있는 암살자의 팔을 붙잡았다.

“어?!”

암살자는 갑자기 자신의 팔이 붙잡히자 당황했고 나는 웃으며 외쳤다.

“나비야! 귀!”

내 외침과 동시에 나비는 내가 사전에 지시했던 대로 움직였다.

그러자 암살자의 양쪽 귀에서 핏방울이 터져 나오며 피가 흘렀다.

나비는 바람을 다루는 바람의 요정이다. 그럼 바람이란 무엇인가? 바람은 대기 중 공기의 움직임을 말한다.

그럼 공기는 왜 움직이는가?

대기압의 변화에 따라 물이 위에서 아래로 흐르듯 공기도 높은 기압에서 낮은 기압으로 흐르게 된다.

그렇다는 건 바람의 정령은 압력을 다룰 수 있다는 말이기도 하다.

내가 나비에게 지시했던 건 암살자의 귓가에 나비가 할 수 있는 최대한도의 압력 차를 발생시키는 거였다.

그 결과 암살자의 고막이 터지고 몸의 중심을 잡는 중요 기관인 반고리관은 뭉개졌다.

암살자가 몸을 휘청거리자 나는 손에 쥐고 있는 술병으로 암살자의 정수리를 전력으로 후려쳤다.

“억!”

둔탁한 소리가 울리며 암살자의 머리에서 피가 흘렀다.

이 허약한 팔로 휘두르는 술병을 피하지 못할 정도로 암살자의 평형 기관은 망가져 있었다.

그런데 영화나 드라마와 다르게 내가 휘두른 술병은 피가 묻었을 뿐 멀쩡하네?

하기야, 영화 소품은 화려한 시각 효과를 위해 설탕 공예로 만든 가짜니 당연한가.

“어, 어떡, 어, 어….”

암살자는 방금 타격으로 뇌출혈이 생겼는지 말을 제대로 하지 못하며 경악했다.

“꼴에 암살자로서 단련됐다 이건가? 뭐, 검으로 산도 날려버리는 괴물들이 있는 세계니. 이 허약한 몸으로 한 번에 죽일 수 있으리라 생각한 게 헛된 기대였군.”

일반인이었으면 말을 할 수 있기는커녕 나비의 공격에 죽었어도 이상하지 않았다.

분노한 상태로도 정확히 내 심장을 찌르려 한 걸 보면 정신 상태는 몰라도 육체는 암살자로서 완성된 것 같았다.

“아, 어떻게 내가 살아 있는 거냐고 물었었나? 내 대답은 평소 독서를 열심히 해서다, 라네.”

나는 내 가슴에 박힌 단검을 뽑아내고 옷섶을 풀었다. 그리고 코르셋 윗부분에 걸쳐 고정시킨 두꺼운 책을 꺼냈다.

양장본을 거의 관통하다니. 어쩐지 가슴이 뻐근하더라.

나는 책을 바닥에 던지고 술병을 높이 들었다.

“대답이 되었으면 좋겠군. 그럼 잘 가게. 배웅은 멀리 가지 않겠네.”

그리고는 힘껏 술병을 내리쳤다.

이것은 안타깝게 죽어버린 가여운 왕자에게 보내는 애도였다.

* * *

프레시아는 왠지 모를 불안감에 주군인 유안을 보러 잠시 자신이 맡은 경비 구역에서 벗어나 대기실로 향했다.

그 행동이 빌미가 되어 <겨울나무의 현자> 속에선 최악의 좌천지로 발령 나게 되지만 그녀로서는 알 길이 없었다.

프레시아가 대기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그녀의 눈에 들어온 건 바닥을 적신 붉은 무언가와 땅에 쓰러진 복면의 사내, 그리고 핏방울이 떨어지는 술병을 쥐고 서 있는 유안의 모습이었다.

“이게 무슨…!? 왕자님! 괜찮으십니까! 다치신 곳은 없습니까!”

프레시아가 걱정 어린 얼굴로 유안의 상태를 살피자 그녀가 모시는 가녀린 왕자는 흥분해서 커진 동공에 파리해진 안색과 달리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다친 곳은 없다. 바닥에 흐른 것은 와인이고 말이야.”

“다친 곳이 없다니 다행입니다! 그런데 무슨 일이 있었던 겁니까?”

프레시아의 물음에 유안은 잘게 떨면서 술병을 그녀에게 건넨 뒤 대답했다.

“암살자가 날 찾아왔을 뿐이야. 암살자를 처리한 건 내 호위인 경이 한 것으로 하지.”

“예?”

술병을 받아든 그녀는 순간 상황 파악이 되질 않아 되물었다.

암살은 누군가의 원한을 사거나 방해가 될 때나 이루어지는 행위다.

평소 유안의 행실이나 처지는 누군가에게 노려질 만한 상황과는 거리가 멀었다.

유안을 싫어하는 왕후조차 눈에 거슬리는 잡초로나 여길 뿐이다.

“그리고 어서 사람들에게 알려라. 왕궁에 암살자가 숨어들었다고, 전하의 안전을 위해 움직이라고.”

“아! 예, 알겠습니다.”

프레시아의 대답에 유안은 흐릿한 미소를 지었다.

“뒷일을 부탁한다. 넌 내 안전을 지키고… 모르겠는 일이 있다면, 시종… 헤리…온에게… 물어서….”

말을 다 끝마치지 못한 유안은 긴장이 풀렸는지 기절하듯 잠들었다.

“왕자님? 왕자님! 밖에 누구 없느냐! 궁중의! 누가 당장 궁중의를 불러와!!”

프레시아는 쓰러지는 유안을 끌어안으며 외쳤다.

유안이 깨어 있다면 소설 속 그대로라고 웃었을 테지만 그는 이미 깊은 잠에 빠진 상태였다.

프롤로그와 다른 점은 죽어 있는 게 유안이 아니라 암살자고, 바닥을 적신 게 소중한 이의 선혈이 아닌 와인이란 것뿐이었다.

별궁 전체를 울리는 프레시아의 외침에 사람들은 만찬장 옆 대기실에 몰려들었고 암살자에 대한 소문이 순식간에 왕궁 전체에 퍼졌다.

만찬은 당연히 취소되었으며, 왕은 급하게 근위 기사들의 호위를 받으며 별궁으로 오던 발길을 돌렸다.

왕궁 전체에 봉쇄령이 떨어지고 기사들은 혹시 모를 다른 침입자를 찾기 위해 분주하게 움직였다.

별궁 사람들을 다독인 건 유안의 전속 시종 헤리온이었으며 프레시아는 자신이 유안을 지키지 못했다는 걸 자책하며 초조한 마음으로 유안의 곁에서 밤을 지새웠다.

살얼음판 같은 왕궁에는 암살자에 대한 이야기와 함께, 유안의 가슴에 학대의 흔적처럼 보이는 상처가 있었다는 소문도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만일 학대라면 그건 누구의 짓일까?

왕궁 사람들은 모두가 한 사람을 떠올렸지만 감히 입 밖으로 내는 이는 없었다.

* * *

정신을 차리고 눈을 뜨니 어딘가 본 듯한 천장이 보였다.

얼굴을 쓸어 만지며 잠을 깨니 이곳이 내 방이란 사실을 깨달았다.

다시 눈을 뜨면 원래 안유안이 살던 세계일 가능성에 기대를 걸었는데 역시나 괜한 기대였던 모양이다.

뭐, 친구가 죽어버리고 딱히 그 세계에 미련은 없었다.

가족은 없었으니까.

걸리는 게 있다면 딱 하나, 친구 배웅을 하지 못했다는 것뿐이다.

“으음….”

창가 쪽으로 시선을 두니 햇빛이 비스듬하지 않고 짧았다.

그걸로 보아 정오 무렵이란 사실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내가 기절한 게 오후 6시 무렵이니 대충 계산해도 최소 18시간은 잠들었구만.

“와, 왕자님… 깨어나셨….”

안절부절못하며 자리에서 일어난 프레시아는 일어난 날 보고는 쓰러지듯 내 침대에 고개를 박았다.

“프레시아?”

새근새근 숨을 쉬는 걸 보니 잠든 모양이다.

프레시아는 시작부터 반쯤 완성된 주인공이었는데 고작 밤 좀 새웠다고 기절하듯 잔다고?

어이가 없어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는데 오른팔 손목 아래 새겨진 글자가 바뀌었다.

‘0.0411퍼센트’

순간 욕지기가 치밀어 올랐지만 애써 참았다.

어제 그 지랄을 떨었는데도 더 오른다는 게 꼴랑 0.0004퍼센트야?

한숨을 내쉬는데 머리를 쓸어 넘긴 손에 기름기가 기분 나쁘게 묻은 게 느껴졌다.

만져지는 감촉으로 보아 하룻밤 사이 생길 개기름이 아니었다.

난 며칠을 잔 거지?

일단 나는 침대에서 몸을 일으켜 기절하듯 잠든 프레시아를 침대 위에 눕히려 했다.

“끄응, 뭐 이리 무거워? 갑옷? 지금 갑옷 입고 있는 거야?!”

억지로 끙끙거리며 침대 위로 끌어 올리려는데 ‘내’ 전속 시종이 노크를 하며 문을 열고 들어왔다.

“어… 음, 나중에 찾아뵐까요?”

헤리온의 물음에 나는 고갯짓하며 들어오라 했다.

“보지만 말고 좀 같이 들어줘. 얘 내 얼굴 보자마자 기절했다니까?”

내 부탁에 반백발의 늙은 시종은 푸근한 미소를 지으며 프레시아를 침대 위에 눕히는 걸 도왔다.

역시 수인이라 그런지 나이가 많은데도 힘이 좋았다.

“프레시아 경은 기절할 만합니다. 만 사흘이 넘도록 잠도 자지 않고 신경을 곤두세우며 왕자님의 곁을 지켰으니까요.”

그의 말에 나는 혀를 내둘렀다.

“사흘이나? 잠도 안 자고? 다른 기사들도 있었을 텐데?”

내가 아무리 처지가 거지 같다고 해도 기본적으로 순찰을 돌고 별궁을 지키는 병사와 기사들도 있었다.

그들을 믿을 수 있느냐는 별개의 이야기지만 충분히 쉴 수 있었을 텐데 왜 미련하게 쉬지도 않았는지 모르겠다.

내가 어이없다는 듯이 묻자 헤리온은 싱긋 미소를 지었다.

“프레시아 경이 말하기를 왕자님께서 직접 자신의 안전을 지키라 명하셨다고 하더군요.”

그 말 한마디 때문에 이렇게 미련하게 굴었다고?

아이고 머리야. 내가 이 미련한 아가씨를 어찌해야 하냐.

속으로 깊은 한숨을 내쉬고는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해 봤다.

당장 눈앞의 목적인 암살자를 물리쳤다고 해도 내 생존이란 목표를 이뤄 냈다고 할 순 없었다.

왕궁까지 암살자를 보내는 새끼가 한 번 실패했다고 포기할 리가 없으니까.

그렇다면 여전히 내 목표는 생존이다.

그리고 덤으로 감히 날 노리는 것들에게 대가를 치르게 해주자.

내 복수는 이미 시작되었다.

“후후후.”

나는 즐겁게 웃으며 프레시아의 머리카락을 쓸어줬다.

아, 얘도 머리 안 감았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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