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엑스트라 왕자는 세계정복을 시작한다-4화 (4/214)

제4화. 책 속의 유약한 엑스트라 (4)

내 앙상한 몸뚱어리에서 우렁찬 꼬르륵 소리가 울려 퍼졌다.

“아, 쓰벌. 배고프다. 빨리 끝내고 밥이나 먹어야지.”

원래 계획대로였으면 점심시간 이전에 나가 다른 곳에 숨겨진 비밀 몇 개를 얻을 생각이었다.

하지만 고어 해독과 예상치 못한 고통에 정신이 나가버려 점심시간을 꽤 넘긴 상태였다.

가뜩이나 부족한 체력에 고생까지 하니 더더욱 배가 고팠다.

“차라리 비델의 갑옷을 얻을 걸 그랬나? 아냐, 이 몸뚱어리의 처지를 생각했을 때 심궁(深宮)에 들어가는 것도 어려울 텐데 뭐.”

왕궁은 왕이 사는 심궁을 비롯해 여러 궁으로 이루어졌는데, 내성벽 안쪽에 위치한 궁은 내궁, 밖의 궁은 외궁이라 불렸다.

일단 나는 왕자 신분이라 내궁과 외궁의 출입이 자유로운 편이었지만 왕이 거처하는 곳은 아무리 왕자라도 함부로 들어갈 수가 없었다.

그렇기에 왕자 유안이 생일날 애비 새끼를 보는 걸 그렇게 기대한 거다.

자신의 자식 또한 정치적 요소로밖에 보지 못하는 냉혹한 사람이란 것도 모르고 말이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어머니는 어린 시절 죽고, 계모와 이복동생들은 자신을 하찮게 보며 깔보는 상태에서 그나마 유일하게 가족이라고 할 수 있는 사람이 왕이었으니까.

그나마도 생일날 애비 얼굴도 보지 못하고 죽어버렸다.

“하아~ 나도 그렇지만 이 몸뚱어리도 참 빌어먹게 박복한 인생이네.”

나는 잠시 재수 없는 삶을 산 왕자 유안에게 애도를 표하며 5층으로 올라갔다.

이곳에는 시조의 아내들 중 정실인 왕후 리즈벳이 남긴 비밀이 남아 있다. 정확히는 5층 바닥 타일 아래 숨겨져 있다.

때문에 나는 바닥에 귀를 대고 바닥 타일을 하나하나 두드렸다.

그냥 쳐서는 소리를 구분할 수 없었기에 신고 있는 구두를 벗어 힘껏 내려쳤다.

이걸 발견한 주인공 제이드는 그냥 서재를 돌아다니다가 미세하게 다른 발걸음 소리로 알아냈지만 난 그런 괴물 같은 청력 따윈 없다.

무작정 바닥을 내리치기에는 이 서재는 빌어먹게 넓어서 소설 속 제이드가 훑었던 책 제목을 토대로 범위를 줄였다.

“음, 여기인가.”

나는 아까 전 주방에서 술을 챙기면서 같이 챙긴 나이프가 달린 코르크 따개로 타일 틈에 박아 넣었다.

그리고는 나이프가 휘어지도록 체중을 실어 타일을 들어 올렸다.

“읏차차차!”

고작 타일 하나 들어내는 데도 팔이 부들거리는 썩은 육체에 한숨이 나왔다.

그래도 나는 타일 아래 숨겨진 탁구공만 한 하얀 공을 보며 웃었다.

“찾았다, 마스코트.”

내가 보기엔 리즈벳의 유산은 솔직히 왕궁에서 얻을 수 있는 비밀들 중 가장 별 볼 일 없었다.

왜냐하면…

-냐아옹.

리즈벳이 하얀 공 안에 남긴 건 보잘것없는 바람의 정령이기 때문이다.

귓가에 들리는 소리에 하얀 공을 들자 손에서 공이 연기처럼 흩어지며 손바닥만 한 크기의 검은 줄무늬의 하얀 고양이가 모습을 드러냈다.

이 작은 고양이가 소설 <겨울나무의 현자>에서 하는 일이라고는 심신이 지친 주인공 일행의 활력소가 되어주는 것, 그거 하나였다.

생각해 보면 이 바람의 정령은 최고의 마스코트다.

작고 귀여우면서 주인에게 애교도 곧잘 부리지, 정령이라 목욕시킬 필요도 없고 식사와 배변 관리도 필요 없다.

그래도 주인공인 제이드 일행이 하나같이 괴물들이라 상대적으로 귀여움 빼곤 쓸모가 없어서 그렇지 지금의 나 같은 약골은 가볍게 때려눕힐 수 있을 터였다.

-미야옹.

오랜 잠에서 깨어나 내 손바닥 위에서 기지개를 켠 고양이는 내 냄새를 맡더니 내 손에 얼굴을 비비며 애교를 부렸다.

앞서 얻은 것들이 하도 예상과 벗어나서 이 녀석도 날 싫어하면 어쩌나 했는데 다행히 주인으로 인정한 듯했다.

이거라도 제대로 얻어서 다행이다.

아니었으면 진짜로 죽었을 거다.

아니, 사실 지금도 목숨이 위험한 상황인 건 맞았다.

그저 빼도 박도 못 하고 죽을 상황에서 나 자신을 구할 방위 수단이 생겼다는 것에 불과했다.

“네 이름은… 나비로 하자.”

고양이 이름이 나비면 충분하지, 뭐.

이름을 멍멍이로 안 한 게 어디야. 참고로 주인공 제이드가 붙여준 이름은 ‘아사자하드미올리 메르쿠히 자비아 드 제이드’였다.

해석하자면 ‘제이드의 고귀하고도 아름다운 울음소리를 지닌 바람의 여신’이라고 한다.

괭이 새끼 이름을 그따위로 짓는 사람이 어디 있어?

나비는 이름이 마음에 드는지, 아니면 그냥 내가 마음에 드는 건지 공중에 떠올라 아장아장 걸으며 내 어깨에 올라와 뺨을 비볐다.

“나비야. 투명화.”

-냐아.

내 지시에 나비는 몸을 투명하게 바꿨다.

분명 보이지 않는데 어디 있는지 감각적으로 느껴졌다.

굉장히 새로운 느낌이었는데 이게 정령 계약자가 느끼는 감각인가?

나는 간단히 나비의 힘을 잠깐 실험해 보고는 서재를 대충 정리하고 내려갔다.

“다녀오셨습니까. 생각보다 오래 걸리셨습니다.”

늑대 머리의 늙은 시종의 말에 나는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책을 읽느라 시간 가는 줄 몰랐네. 아, 그거 내 도시락인가?”

내가 도시락 바구니에서 샌드위치를 꺼내 한입 베어 물자 시종은 나긋나긋하게 주의를 줬다.

“식사 시간이 지나 배가 고프시겠지만 전하와의 만찬이 곧이니 이것으로 배를 채우시는 건 안 됩니다.”

“알아. 하지만 만찬장에서 꼬르륵 소리가 나지 않을 정도로는 먹어야지.”

애초에 일이 잘 풀리든 안 풀리든 만찬은 취소될 테니 배불리 먹어도 상관없었다.

하지만 난 전속 시종의 조언대로 허기를 채울 정도만 먹기로 했다.

지금 몸을 둔하게 만드는 건 자살행위였다.

그때 프레시아가 내게 얼굴을 가까이 붙이더니 냄새를 맡기 시작했다.

뭐지? 혹시 나비가 들킨 건가?

내가 당황하자 프레시아는 심각한 얼굴로 말했다.

“피 냄새… 왕자님! 어디 다치셨어요?! 왜 몸에서 피 냄새가!”

그녀의 외침에 전속 시종도 놀라서 날 바라봤다.

“다치셨습니까?! 어서 상처를 보여주시죠! 아니, 궁중의를 바로 불러오겠습니다!”

아니, 늑대 수인보다 먼저 피 냄새를 알아차리다니 이 녀석은 얼마나 후각이 좋은 거야?

난 시종이 밖으로 달려 나가려는 걸 붙잡으며 말했다.

“진정해. 그냥 책장에서 책을 뽑다가 같이 딸려 나온 책에 맞아서 코피 좀 난 것뿐이니까.”

고양이를 구하려다 땅에 떨어져 기절한 몸뚱어리에 걸맞은 변명거리였다.

그만큼 설득력이 있었는지 두 사람은 걱정하면서도 금세 수긍했다.

“아침에도 그렇고 제가 얼마나 걱정했는지 아세요?”

프레시아는 평소 누나처럼 굴듯 친근하게 말했다.

설정상 프레시아는 아직 열다섯 살이고 왕자 유안은 오늘 열일곱 살이 된다.

“알았어, 조심할게. 이제 만찬 준비할 시간도 얼마 안 남았는데 돌아가자.”

내가 앞장서자 두 사람은 알겠다며 따라왔다.

왕자 유안의 여명이 얼마 남지 않았다.

* * *

별궁으로 돌아와 온 나는 별궁 궁녀들의 도움을 받으며 절차대로 움직여 먼지와 피가 묻은 옷에서 화려한 연미복으로 갈아입었다.

왕이 온다고 별궁의 모두가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는데 왕자 유안의 전속 시종은 그들을 통괄하기 위해 바빴다.

마음 같아선 옷을 혼자 입고 싶었지만 평상복과 다르게 이 광대처럼 우스꽝스러운 복장은 혼자 입을 수 있는 종류의 옷이 아니었다.

궁녀들은 옷을 갈아입는 도중 드러난 내 가슴의 상처를 보고 놀랐지만 나는 비련의 주인공처럼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이 상처에 대해선 다른 데서 이야기하지 말거라. 나는 상관이 없으나 그대들이 다칠까 우려되는구나.”

내 말에 궁녀들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빠르게 돌아가는 동공을 보아 하니 그녀들의 머릿속에서는 이미 한 편의 드라마가 완성된 모양이었다.

아마 그 드라마 속의 나는 왕후에게 괴롭힘을 받는 불행한 왕자겠지.

평소에는 왕자 유안을 무시하던 이들이었지만 동정심이 들었는지 분주하게 옷을 준비하는 동안 괜찮을 거라며 위로의 말을 건네 왔다.

이 이야기가 새어나가든 아니든 상관없었다.

아니, 오히려 새어나간다면 더 좋겠군. 재미있겠어.

나는 웃음을 참으며 옷매무새를 마무리했다.

“그런데 코르셋은 필요 없지 않겠습니까?”

확실히 이 몸은 말라서 코르셋이 전혀 필요 없었다.

나이가 꽤 어려 보이는 궁녀의 물음에 나는 싱긋 웃어주며 대답했다.

“오랜만에 아바마마를 뵈옵는 것이니 안 보이는 곳이라도 예를 차려야지.”

코르셋은 원래 남성용 신체 보정 기구라 궁중 연미복에 포함되어 있어 내 말은 정론이었다.

파편화된 왕자 유안의 기억에 따르면, 오히려 정식 여성용 사교 복장에는 코르셋이 포함되지 않았는데 최근 들어 사교계 여성들이 몰래 사용하고 있다고 한다.

이놈은 좀 도움이 될 만한 공부나 해둘 것이지 별 쓸데없는 정보나 머리에 쑤셔 넣었다.

하여간 몸뚱이고 정신이고 허약해 빠져서 도움 되는 게 하나도 없다.

“아, 죄송합니다.”

이름 모를 궁녀의 사과에 나는 대충 넘어갔다.

“아니, 죄송할 게 뭐 있어.”

사실 코르셋은 예의를 차리기 위해 입은 게 아니라 갑옷 대용으로 입은 거다.

철제 코르셋은 체인메일보단 못하겠지만 복부만이라도 충분히 보호해 줄 수 있다.

“다들 고생들 했고, 프레시아를 불러주겠어?”

내 부탁에 궁녀들은 알아보겠다며 나갔다가 별궁 경비로 차출되어 당장 오지 못할 거란 소식을 가져왔다.

과연, 내 유일한 개인 호위를 이런 식으로 빼간다는 말이지?

이건 왕후의 짓이다.

그래놓고 호위 실패를 이유로 바스타유 산맥에 좌천 보내다니.

어처구니가 없구만.

“그런가, 알겠다. 그나저나 피곤하군. 다들 바쁠 텐데 나에게 잡혀 있지 말고 일들 보게나.”

나는 잠시 쉬겠다고 말하고 궁녀들을 내보냈다.

그렇게 왕자 유안이 사망하는 만찬장 옆 대기실에 홀로 남은 나는 각오와 준비를 하며 이곳으로 올 암살자를 기다렸다.

사실 처음 내가 왕자 유안이 되었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어떻게든 강짜를 부려 프레시아를 데리고 있을까 하는 고민도 해봤다.

하지만 두 가지 이유로 이번 암살 시도에 프레시아를 끌어들이지 않고 나 혼자 해결하기로 마음먹었다.

하나는 프레시아가 내 곁이나 근처에 있을 경우 암살자가 오늘 날 죽이는 걸 포기할 위험 때문이었다.

오늘이 평화롭게 지나간다면 언제 어디서, 내가 대비할 수 없는 상황에서 날 암살하려 들지 몰랐다.

피할 수 없는 위험이라면 통제할 수 있는 상황 속에서 해결해야만 한다.

다른 이유는 이번 암살 시도를 내가 이용하기 위해서다.

아무리 왕자 유안이 무시받고 홀대받는다고 해도 왕자, 그것도 제1왕자다.

그런 왕자가 암살 시도를 당했다? 그것도 생일날 왕과의 만찬을 앞두고?

당장 이용해 먹을 수 있는 아이디어가 대여섯 개는 떠오른다.

“크흐흐흐. 이런 귀한 기회를 날려버릴 순 없지. 안 그래? 나비야.”

-냐, 냐오옹.

왠지 나비가 떨고 있는 느낌이었지만 보이지 않으니 기분 탓이겠지.

“그래, 그래. 너도 나처럼 생각하는구나. 오늘이 끝나면 함께 이 왕궁을, 아니 왕도 자체를 신나게 끝까지 벗겨먹자고.”

-야옹!

그때 나비가 나만 들리는 목소리로 시간을 알리며 울었고, 대기실의 괘종시계의 바늘이 6시 정각을 지났다. 그러나 시계는 울리지 않았다.

대기실의 시계는 묘사대로 8분 늦게 울리니 암살자가 오는 건 앞으로 5분 남짓한 시간이었다.

나는 투명한 상태로 몸을 숨기고 있는 나비의 턱을 쓸어 만져주며 긴장을 풀었다.

과한 긴장은 몸을 굳게 만들 뿐이다.

댕-!

이윽고 시계 종소리가 울리기 시작했고, 허락도 없이 대기실 문이 열리며 복면의 사내가 안으로 들어왔다.

그렇게 이야기는 프롤로그를 시작한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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