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엑스트라 왕자는 세계정복을 시작한다-3화 (3/214)

제3화. 책 속의 유약한 엑스트라 (3)

뭐라고 해야 할까, 마법 문자들이 내 주위를 감싸며 회전하니 마치 CG로 가득한 영화 속에 들어온 기분이다.

지금 광경은 다시 한번 내가 소설 속에 들어왔다는 사실을 실감할 수 있었다.

내 주변을 현란하게 춤추던 마법 문자들은 이내 크기를 줄이더니 내 오른팔에 새겨지면서 사라졌다.

허공의 마법 문자들이 사라지자 시조의 유산은 맥없이 땅으로 떨어졌다.

“음, 다 된 건가?”

마법이 새겨졌는데도 뭔가 색다르게 느껴지는 감각은 전혀 없었다.

이상하네? 분명 소설 속에서는 알 수 없는 힘이 느껴지며 잠시 동안 고양감이 느껴진다고 서술되었는데 그런 느낌이 하나도 없다.

일단 나는 땅에 떨어진 책을 주워들어 확인했다.

“책 내용은 전부 내 팔에 들어간 건가?”

책의 모든 페이지가 내용 하나 없이 빈 백지였다.

혹시 모르니 책을 챙기려는데 살짝 흘러내린 소매 사이로 알 수 없는 작은 문자가 새겨져 있는 걸 발견했다.

이것도 소설 속에선 없던 내용이다.

“이건, 고어(古語)인가?”

왕자 유안의 기억 중 이런 비슷한 글자가 떠올랐다.

아마도 시조가 살던 시대의 글자인 듯했는데 이 몸뚱어리의 원래 주인이 공부를 안 한 모양인지 읽을 수가 없었다.

“아이씨, 뭔가 불길한데.”

그래, 우선 시조의 유산이 제대로 내 몸을 바꿨는지 확인해 보자.

나는 방금 전 손가락을 찔렀던 것처럼 옷핀을 들고 집중했다.

“단단해져라. 단단해져라. 단단해져라….”

소설 속에서 이 힘을 얻은 조연처럼 힘을 발현하기 위해 되뇌며 손가락을 찔렀다.

푹!

“쓰읍-!”

옷핀은 아무런 저항을 못 받는 것처럼 내 손가락에 구멍을 냈다.

너무나 쉽게 손가락 끝에 핏방울이 맺히자 나는 당황했다.

“뭐야? 그 화려하던 이펙트는 사기였어?!”

이상하다. 왕자 유안의 처지도, 프레시아의 외모도, 왕실 서재의 비밀 장치 위치도 모두 소설 <겨울나무의 현자> 속 그대로였다.

그런데 왜 시조의 유산은 아닌 거지?

아니, 책에서 문자가 튀어나오는 거나 오른팔에 문자가 스며드는 것도 묘사 그대로다.

그렇다면 문제는….

“아니, 아니지? 그럴 리가….”

문제는 왕자 유안, 이 몸뚱어리에 있다는 의미다.

“그래, 아직 속단하기는 이르지.”

일단 소설 속 내용과 다른 부분인 손목 아래 새겨진 작은 문자를 해독해 봐야겠다.

왕자 유안은 옛 문자를 배운 적이 없지만 어차피 같은 언어 체계에 문자의 형태도 그리 크게 변하지 않았다.

길지 않은 문장이니 시조 시대부터 현 시대까지 책을 넣어둔 이 서재의 책들을 시대 역순으로 살핀다면 해석 못 할 것도 없다.

어려워봤자 훈민정음 해례본을 해석하는 정도겠지.

* * *

“왕자님께서 생각보다 많이 늦으시네요.”

프레시아는 한 갈래로 땋은 붉은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꼬며 걱정했다.

그녀의 말에 유안의 시종 헤리온은 먹음직한 샌드위치가 담긴 바구니를 보며 쓰게 웃었다.

“그러게 말입니다. 기껏 주방장이 이곳까지 가져다 준 도시락이 다 식겠군요.”

자신의 뒤통수를 후려갈긴 게 유안이라는 것도 모르고 주방장이 도시락을 가져오며 자신의 무례를 사과하는 모습이 웃기면서도 안타까웠다.

주방장이 유안을 대놓고 무시하고 깔봤지만 그는 딱히 왕후의 사람이 아니었다.

그저 전체적으로 유안을 무시하는 별궁의 분위기에 휩쓸려 똑같이 했을 뿐이다.

그건 왕후가 심어놓은 일부 사람들을 제외한 대부분의 별궁 사람들도 그랬다.

제1왕자인 유안을 모시는 별궁에 속해 있다는 건 좌천당했다는 뜻이었고, 그만큼 정치에 무지하다는 의미였다.

그런 와중에 유안이 왕족이나 귀족들만 진찰하는 궁중의까지 불러주니 주방장이 미안해하며 사과를 하는 것도 이상하지 않았다.

“그러게요. 그런데 왕자님께서 깨어나시고부터 조금… 이상해진 것 같지 않으신가요?”

프레시아가 머뭇거리며 묻자 헤리온은 속으로 그렇다고 생각했지만 입으로는 다르게 말했다.

“왕자님께선 이상하시지 않습니다.”

속내와 정반대로 말하는 건 오랫동안 왕궁에서 일하며 몸에 밴 습관이었다.

어떤 이유로 매질을 당하고 목이 달아날지 모르는 왕궁에서는 시종들 간의 간단한 잡담에도 목숨이 위험했다.

어디에 듣는 귀가 있을지 모르니 험담으로 들릴 수 있는 말은 절대적인 금기였다.

하지만 아직 어린 기사는 그 사실을 깨닫기에는 세상의 쓴맛을 알지 못했다.

헤리온의 단호한 말에 프레시아는 당황하며 손을 내저었다.

“아, 아니요! 이상하다는 게 아니라, 그 뭐라고 해야 할까… 평소라면 하지 않으실 행동들을 하셔서 말이에요.”

확실히 그랬다.

술은 입에도 대지 않던 사람이 술을 찾고, 벌레 하나 죽이지 못하는 심약한 성격에 전력으로 주방장의 머리를 후려갈겼으니 말이다.

“변화라는 게 갑자기 일어날 수도 있습니다. 사람은 그저 작은 계기에도 다른 사람인 것처럼 변하기도 하지요. 왕자님의 나이대라면 그 변화가 두드러질 시기고요.”

“그런가요?”

“그리고 변화가 꼭 나쁘리란 법은 없지요.”

헤리온의 말에 프레시아는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그렇네요. 확실히 왕자님께서 그 요리사 머리를 후려칠 때는 통쾌했거든요!”

그녀의 외침에 늙은 시종은 순간 고개를 끄덕일 뻔했지만 숙련된 처세술로 그저 미소를 지었다.

“그나저나 만찬 준비를 할 시간이 있으면 좋겠군요.”

두 사람은 유안이 올라간 계단과 시계를 보며 하염없이 기다렸다.

* * *

나는 널브러진 책들 사이에서 바닥에 손을 짚고 좌절했다.

내 손목의 문자를 해석하는 건 다행히 선대왕들 중 사전 편찬 사업을 한 사람이 몇몇 있어서 그리 어렵지 않았다.

하지만 해석한 문장은 날 좌절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아아, 이럴 순 없어.”

손목에 새겨진 세 줄짜리 글자를 해석하자면 이렇다.

‘인증 통과’

‘근골격 부적합으로 술식 입력 실패.’

‘강제 술식 부여 중 – 0.04퍼센트.’

이 말인즉, 내가 시조의 유산을 얻은 조연과 같은 스타트 지점에 도달하려면 엄청난 시간이 걸린다는 의미였다.

해석하는 동안 문장이 전혀 바뀐 게 없으니 최악의 경우 이 퍼센트라는 게 단순히 시간이 지난다고 채워지는 게 아닐지도 몰랐다.

“제길! 이럴 거면 원래 유산을 받는 조연인 길버트한테 주는 게 더 나았잖아!”

길버트는 주인공 제이드에게 도움을 받고 충성스러운 동료가 되는 조연이었다.

당연히 처한 상황이나 해결 방법을 알고 있으니 내 아군으로 끌어들이기도 쉬웠다.

시조의 유산을 계승받은 길버트는 제이드나 프레시아에 버금가는 괴물로 성장하니 당장 써먹을 수도 없는 이딴 몸뚱이가 가지는 것보다 훨씬 나았다.

“아니야. 실망하지 말자. 아직 두 개나 남아 있어.”

후회할 시간 따윈 없다. 옛 글자를 해독하느라 시간을 허비한 만큼 바쁘게 움직였다.

생각대로 되지 않는다는 걸 깨달은 이상 살아남기 위해선 더한 준비를 해야 했다.

“다음으로 중요한 게 시조의 손에 죽은 시조의 연인 아퀼라의 마력회로였던가?”

위대한 마녀 아퀼라는 이 나라를 건국하는 데 가장 큰 공을 세운 여자였지만 결국 시조의 배신으로 비참한 최후를 맞는 인물이었다.

왕실 서재에 아퀼라의 마력회로가 있는 이유는 시조의 유산을 계승할 수 있도록 마도서를 만든 게 그녀이기 때문이었다.

시조의 유산을 만들던 아퀼라는 자신과 시조의 자식을 위해 자신의 생명 같은 마력회로의 일부를 몰래 남겨두기로 했다.

하지만 자식을 낳기도 전에 배신당해, 끝내 어둠 속에 묻힌 비운의 유산이다.

그녀의 마력회로는 재능 있는 마법사가 얻는다면, 역사에 이름을 남길 위대한 대마법사가 될 수 있을 정도로 엄청난 힘이었다.

하필 얻는 사람이 왕자 유안을 죽이는 데 일조한 프레시아의 원수 중 한 명이란 게 문제였지만 말이다.

“그래서 더 중요한 거지.”

왕자 유안을 죽인다는 말은 곧 날 죽인다는 말이니까.

난 소설의 내용을 기억해 내며 아래로 내려갔다.

얻는 게 주인공이 아니라 묘사가 너무 대충 되어 있었지만 3층 책장에 꽂혀 있는 아퀼라의 저서를 찾으면 된다.

나는 책장을 빠르게 훑어 저자란에 아퀼라라고 적힌 책을 찾았다.

“찾았다.”

시조가 자신의 배신을 덮기 위해 아퀼라의 기록 대부분을 지워버려서 그런지, 아니면 이제 아무도 그녀의 존재를 몰라서인지 책은 한 번도 뽑히지 않은 것처럼 먼지가 쌓여 있었다.

상태를 보아하니 아직 ‘아르카나, 01’ 그 능구렁이가 발견하지 못한 모양이었다.

언제 얻었는지 서술이 안 돼 있어서 불안했는데 다행이다.

나는 망설임 없이 책을 꺼내 펼쳤다.

“어디 보자, 마지막 페이지의 마지막 문단의 글자에서 고어 ‘퀘이’를 긁어내면….”

마지막 문단에서 고어 ‘퀘이’를 긁어내 ‘유산(遺産)’이란 의미의 문자로 바꿨다.

그러자 책 안의 문자가 솟아오르더니 허공에 마법진을 만들었다. 그리고는 마법진 안에서 작은 수정이 떨어졌다.

수백 년의 세월 속에서도 수정은 한 점의 티끌 없이 반짝였다.

이 책을 원래 발견하는 사람 또한 이 책을 얻고 꽤 시간이 지나서야 책에 숨겨진 비밀을 알아낸다.

이 수정을 가슴에 맞대면 안에 담긴 마력회로가 몸에 새겨지게 된다.

“후우~!”

나는 수정을 맞대기 전에 심호흡을 했다.

묘사되기론 이식받는 과정에 전신이 화끈거린다고 했다.

당장 이식을 받는다고 해도 아는 마법이 없으니 큰 쓸모는 없다.

하지만 이런 건 아끼다가 탈취당할 수도 있으니 미리미리 해두는 게 좋았다.

소설 속 묘사로는 찬 데 있다가 갑자기 온탕에 들어간 정도로 화끈거렸다고 했으니 괜찮겠으아아악!

“으아아아아악!”

수정을 가슴에 맞대자 심장에서부터 인두로 지지는 느낌이 들더니 전신으로 퍼져갔다.

“끄르르륵! 으으윽! 이게 어디가! 온탕! 끄아아악!”

나는 참을 수 없는 고통에 바닥을 구르며 몸부림쳤다.

너무 고통스러워서 살아야겠다는 생각에 수정을 떼어내려 했지만 가슴에 붙은 수정은 떨어지지가 않았다.

이렇게 고통스러울 줄 알았으면 다른 녀석한테 줄 것을 후회했다.

그렇게 한참을 구르다가 격통이 멈추고 나서야 제대로 숨을 쉴 수 있었다.

“허억! 허억! 아, 스파, 쓰읍! 진짜 뒈지는 줄 알았네.”

거울이 없어 지금 내 상태를 확인할 순 없었지만 정상적인 몰골은 아닌 듯했다.

수정을 억지로 떼어내기 위해 가슴을 할퀸 탓에 긁어낸 흔적 곳곳에 핏방울이 맺혔고, 바닥을 구르다 잘못 부딪쳤는지 코피가 터졌다.

나는 손수건으로 대충 코를 막고 부들거리는 손으로 옷매무새를 가다듬었다.

아직도 잔통증이 남아 있었지만 방금 전의 통증이 너무 충격적이라 별것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어? 이게 뭐야?”

수정이 붙어 있던 가슴에 수정은 사라졌고 웬 작은 은색 반지가 붙어 있었다.

이런 묘사는 없었는데?

반지에는 고어로 뭐라고 적혀 있다.

즉석에서 내가 해석할 수 있는 부분만 해보자면 ‘와’, ‘아이를’, ‘아퀼라가’였다.

“설마 ‘그이와 아이를 위하여 아퀼라가’?”

내 생각이 맞다면 이 반지는 원래 마력회로를 얻는 녀석이 가지고 있던 아퀼라의 마도서였다.

나중에 제이드의 손에 들어가게 되지만 그건 소설이 종반부에 들어서고 나서다.

이 마도서는 태어나지도 않은 아이가 마법을 익힐 수 있도록 만든 마도서였지만 당연히 고어로 쓰여 있어 해석이 필요했다.

“당장은 못 쓰겠지만 땡잡았네.”

아퀼라의 마도서는 드래곤도 탐내는 수준의 마법 지팡이의 역할도 해주는 보물이라 가치는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이게 수정 속에 있었던 건가?

하지만 순순히 기뻐하기에는 너무나 고통스러웠다.

지금 내게 아퀼라는 비운의 여인이 아니라 희대의 개새끼였다.

그런데 소설 속 묘사와 다른 이유는 설마 또 이 저주받은 몸뚱어리 때문인 건가?

예측이 맞을 것 같아 한숨을 내쉬며 오른팔의 문장을 다시 보는데 글자가 바뀌어 있었다.

‘0.0407퍼센트.’

“하하, 아하하하! 이 XXX! XX같은 XXX가! 그 고통을 받았는데 고작 0.0007퍼센트가 올라?! 싸구려 과자도 이것보단 많이 첨가해 주겠다!”

나는 간신히 몸을 일으켜 시간을 확인했다.

시간상 왕실 서재 말고 다른 곳에 숨겨진 건 다른 날에 찾아야 할 것 같았다.

나는 근처에 꽂혀 있는, 겨울나무의 현자만 읽을 수 있는 것으로 추정되는 책을 챙기고 이곳에서 내가 얻을 수 있는 마지막 비밀을 찾으러 움직였다.

최우선 목표였던 시조의 유산이 꽝이었던지라 내 목숨을 구할 수 있는 건 그것에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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