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화. 책 속의 유약한 엑스트라 (2)
주방으로 들어가자 꽤 넓은 주방이 눈에 들어왔다.
그러나 넓은 주방에 맞지 않게 요리사는 단둘뿐이었다.
그나마도 정신없이 움직이는 건 어린 요리사 하나뿐이고 중년의 요리사는 앉아서 하품을 하며 신문이나 보고 있다.
주방의 모습은 왕자 유안의 처지를 그대로 투사하고 있는 것 같았다.
아무리 그래도 왕자가 머무는 궁의 요리사가 둘뿐이란 건 그만큼 왕자 유안이 무시를 당하고 있다는 의미였다.
“처참하군.”
여기 오면서 시종이 말하기를 이 주방이 이 궁을 관리하는 궁녀와 시종들의 식사도 만든다고 했다.
일은 수습으로 보이는 애송이가 혼자 다 하고 있으니 별궁이 돌아가는 꼴이 눈에 훤했다.
내가 작게 중얼거리자 늑대 머리의 늙은 시종은 면목 없다는 듯이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아니, 자네가 사과할 일은 아니지.”
나는 그렇게 말하고는 두 사람을 떨어트리고 혼자 주방장으로 보이는 중년의 요리사에게 다가갔다.
“어흠.”
내가 주방장에게 다가가 작게 헛기침을 하자 그제야 내가 주방에 들어왔다는 걸 알았는지 귀찮은 표정으로 날 훑었다.
주방장은 왕자가 왔음에도 예의를 표하기는커녕 신문을 다음 장으로 넘기며 퉁명스레 물었다.
“무슨 일이십니까?”
내 얼굴을 알 텐데 날 보지도 않는 작태에 순간 성격이 튀어나올 뻔했지만 가까스로 참았다.
우선 지금은 왕자 유안으로서 튀는 행동은 삼가야 할 때다.
나는 심호흡을 해 마음을 가라앉히고 왕자 유안 특유의 여려 보이는 미소를 지었다.
“부탁하고 싶은 게 있어 왔다네.”
내 말에 주방장은 단호하게 말했다.
“안 됩니다. 저 바쁩니다.”
“…뭐?”
내가 어이가 없어 신문이나 훑는 주방장과 미친 듯이 일하고 있는 수습을 번갈아 봤다.
그러자 주방장은 이번에도 날 보지 않으며 귀찮음이 가득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주방 일이란 게 보통 중노동이 아니라서 말입니다.”
수습 요리사를 보면 확실히 그래 보인다. 하지만 이 새끼는 아니다.
“그러니 방해하지 마시고 이만 방으로 돌아가시죠. 방에 계시면 어련히 식사를 가져다줄 텐데 여기까지 기어 나오셔서….”
아, 안 되겠다. 역시 사람은 제 성질껏 살아야지 이대로는 암살자가 아니라 화병으로 뒈지겠다.
나는 주방장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무의식적으로 선반에 쌓여 있는 프라이팬 손잡이를 잡고 그대로 주방장의 머리를 후려쳤다.
쾅-! 째재쟁-!
“어억!”
바닥에 조리 도구들이 떨어지며 시끄러운 소리를 냈고 주방장은 갑작스러운 충격에 머리에 피를 흘리며 쓰러졌다.
역시 허약한 몸뚱어리라도 중력을 이용하면 충분히 골로 보낼 위력이 나오는군.
아~! 상쾌해라. 그러게 누가 착하게 살아 보겠다는 사람 성질을 긁으라고 했나?
프레시아와 늙은 시종은 내 행동에 경악했는지 입을 다물지 못했고 일 때문에 정신이 없던 수습은 소리에 놀라서 나와 주방장을 바라봤다.
나는 몸을 낮추고 손가락에 침을 묻혀 눈가에 바르며 외쳤다.
“주방장! 괜찮은가! 아이고! 이 사람아! 그러게 그릇을 잘 놨어야지 이게 뭔가!”
그리고는 어깨를 잡고 주방장의 몸을 흔들었다.
머리를 다친 상태에서 이런 행동은 독이었지만 상관없다.
이 싸가지 없는 새끼가 뒈지든 말든 내 알 바인가?
“으으… 와, 왕자님?”
“쳇.”
주방장이 정신을 차리자 나는 그만 혀를 찼지만 이내 닭똥 같은 눈물을 쥐어짜며 말했다.
“정신이 드는가? 자네 머리맡에 잘못 놓인 조리 도구들이 갑자기 떨어졌다네!”
“그, 그렇군요….”
주방장은 눈물을 글썽거리는 날 범인으로 의심하지 못했는지 간단히 수긍했다.
주방장이 나중에 수습에게 짜증을 부릴 순 있겠지만 해코지는 못 할 거다.
수습이 일을 때려치우는 순간 지금 수습이 하는 일을 전부 주방장이 혼자 해야 할 테니까.
그나저나 이럴 땐 왕자 유안의 평소 행실이 써먹기 좋구만. 좋은 정보를 알았다.
나는 늑대 머리의 늙은 시종을 보며 외쳤다.
“어서 궁중의를 불러오게! 주방장이 크게 다쳤지 않은가!”
“…예. 알겠습니다.”
오랫동안 왕궁에 있던 시종답게 상황 파악을 끝내고 재빠르게 움직였다.
나는 울먹거리는 목소리로 주방장에게 사과했다.
“미안하네. 내가 자네에게 말을 걸지만 않았다면 충분히 피할 수 있었을 텐데….”
내 일부러 코를 훌쩍이며 눈물을 닦는 척을 하자 주방장은 당황했다.
“아, 아닙니다. 저는 괜찮습니다.”
대놓고 무시를 했는데 내가 이렇게 나오니 죄책감이 드는 모양이었다.
끝까지 무시했으면 좀 더 짜릿한 경험을 시켜줬을 텐데 아쉽네.
“괜찮다니 다행이군. 그런데 술은 어디에 보관하고 있는지 아나?”
“예? 예… 술은 저기 지하 저장고에 보관 중입….”
“그렇군. 몸조리 잘하게나. 자네는 많은 사람들을 지탱하고 있는 주방의 책임자 아닌가. 자네가 건강해야지 이 별궁이 바로 서고, 나아가 이 나라가 바로 서는 게 아니겠는가?”
나는 주방장의 말을 자르고 술이 보관되어 있는 지하 저장고로 들어갔다.
지하 저장고에는 도수가 20도에도 미치지 못한 술뿐이었지만 아쉬운 대로 몇 병 챙겨 나왔다.
* * *
왕자 유안의 늙은 전속 시종이 말단 궁중의를 데려오자 궁중의에게 주방장을 떠넘기고 나는 프레시아와 시종을 데리고 주방을 떠났다.
주방에서 멀리 떨어지자 할 말이 많은 듯하던 프레시아가 눈치를 보다 조심스럽게 내게 물었다.
“왕자님, 그 술은 어쩐 일로 가져오셨는지 여쭤도 괜찮을까요?”
고르고 고른 물음이 그건가?
그녀의 물음에 나는 웃으며 술과 함께 챙겨온 코르크 따개로 마개를 땄다.
퐁-!
맑고 청아한 소리가 울리며 병 안의 와인이 출렁였다.
크으~! 맑은 소리 좋구나!
나는 병목을 잡고 술을 한 모금 크게 들이켰다.
“크으~! 좋다.”
역시 왕실 술이라 그런지 맛이 좋다. 싸구려는 애초에 왕궁 안으로 납품이 안 되는 거겠지.
“와, 왕자님?”
당황해하는 프레시아의 얼굴을 보며 나는 싱긋 웃어 보였다.
“그냥 내가 마셔보고 싶어서 말이야.”
내 말에 그녀는 얼빠진 얼굴을 했다.
내가 왕자 유안의 행세를 한다고 마음먹기는 했지만 내 본질은 어디까지나 안유안이다.
당연히 일을 시작하는데 술부터 챙겨야 나다운 거였다.
역시 난 알코올이 들어가야 머리가 잘 돌아간다니까.
“뭘 걱정하는지는 알아. 티 나게는 안 마실 테니 걱정하지 마.”
아마 프레시아는 저녁에 있을 왕과의 만찬을 걱정하는 걸 거다.
하지만 괜한 걱정이다. 난 이성을 잃는 걸 혐오하는 사람이다.
몸을 못 가눌 정도로는 마시지 않으니 괜찮다.
음, 그런데 원래 내 몸이 아니라 그런지 알코올이 훅 올라오는 느낌이네.
뭐, 적게 먹고도 흥이 나는 거니 오히려 좋은 건가?
프레시아의 걱정스러운 얼굴에 시종이 그녀를 다독였다.
“조금 정도는 괜찮을 겁니다. 오히려 긴장을 푸니 좋을 수도 있겠군요. 물론 과하면 좋진 않겠습니다만….”
늙은 시종은 내가 왕과의 만찬이 긴장되어 술을 마시는 것이라 여기는 듯했다.
내가 그 망할 정치 괴물을 만나는 게 뭐 긴장되는 일이냐고 말하고 싶었지만, 오해라도 술 마시는 걸 방해하는 것보단 나으니 가만히 있기로 했다.
시종의 말에 프레시아는 “아하, 과연 그렇군요.”라고 중얼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뭘 납득했는지 모르겠지만, 그래. 니들 맘대로 생각해라.
난 내 갈 길을 가련다.
“그럼 이번엔 정원으로 가는 건가요?”
프레시아의 물음에 나는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아니, 오랜만에 아바마마를 만나 뵙는 거니 조금 그럴듯한 대화거리가 필요하지 않겠어?”
내가 생각해도 그럴듯한 핑계거리다.
“그럼…?”
“왕실 서재로 가자. 유식해 보이는 데는 책이 최고지.”
내가 가장 원하는 걸 챙겼으니 이제 진짜로 내 몸을 구해줄 것을 얻으러 가야지.
* * *
왕실 서재는 왕자 유안이 사는 별궁과 그리 멀리 떨어져 있지 않은 위치에 있었다.
서재의 규모를 보면 궁 하나를 통째로 사용하니 도서관이라 해야 옳겠지만, 왕가의 핏줄만 들어갈 수 있으니 서재란 표현이 더 그럴듯했다.
물론 <겨울나무의 현자>의 주인공 제이드는 그런 규칙은 가볍게 무시하고 숨어 들어가지만 말이다.
이곳 왕실 서재는 현 시점에서는 반쯤 버려진 곳이었다.
그도 그럴 게 왕가(王家) 사람치고 책과 친한 사람이 드물었으니 당연했다.
왕자들은 모두 의무적으로 여러 교육을 받긴 했으나 교습에 필요한 책은 모두 더럽게 넓은 자신의 방에 두지 굳이 서재까지 오지 않았다.
그게 몇 세대에 걸쳐 이루어지니 지금 와서는 반쯤 버려진 거다.
왕실 서재는 그 자체만으로도 왕실의 재산이니 명목상 서재를 관리하는 사서가 존재하기는 했다.
하지만 출입 문제로 전문 인력이 아니라 유력 가문과 결혼하지 못한 방계 왕족이 생계를 위해 자리를 차지하고 있을 뿐이었다.
당연히 사서는 로비에 앉아 시간만 때우거나 출근도 제대로 하지 않는 경우가 허다했다.
지금도 사서가 앉아 있어야 할 곳에 아무도 없었다.
“두 사람은 여기서 기다리고 있어. 로비에도 읽을 만한 책이 많으니까 보고 있든가.”
내 말에 두 사람은 고개를 끄덕이며 날 배웅했다.
“예. 천천히 다녀오십시오.”
“다녀오세요.”
“아, ‘엘도라도 모험기’였던가? 그 책이 재미있어 보이더라고.”
나는 미래의 프레시아가 이곳 로비에서 관심을 보였던 책 이름을 떠올려 추천해 주고 서재로 올라갔다.
계단을 올라가는데 무언가 얇은 거품막 같은 게 내 몸을 훑고 지나가는 느낌이 들었다.
이게 외부인의 출입을 막는 시조의 마법인가?
왕실 서재에 왕가의 혈통만 들어갈 수 있는 이유가 이 마법 때문이었다.
주인공 제이드가 숨 쉬듯 이 마법을 뚫고 들어간 걸 생각하면 그렇게 대단한 마법은 아니겠지만.
서재 내부의 상태는 그리 썩 좋다고 할 수 없었다.
책장 가득 책들이 꽂혀 있었는데 책장이 부족했는지 서재 한 켠에 책이 무질서하게 쌓여 있었다.
“역시 관리가 안 되어 있구만.”
솔직히 나랑은 상관없었다. 나는 얻을 거만 얻고 가면 된다.
왕실 서재의 숨겨진 비밀은 총 여섯 가지다.
1개는 주인공이 계승한 ‘겨울나무의 현자’밖에 읽지 못하는 책, 2개는 스토리가 진행되기 위해 사용되는 물건이다.
나머지 3개는 나도 사용할 수 있는 것들이었다.
3가지 비밀 중 내가 우선적으로 노리고 있는 건 단연 ‘시조의 유산’이다.
시조의 유산은 말하자면 신체 개조 비술서로, 왕실 서재에 왕가의 혈통 외의 사람이 들어오지 못하는 마법이 설치된 이유였다.
시조의 유산을 받아들이면 평범한 재능의 기사도 최강의 소드 마스터가 될 수 있다.
단점은 단순히 육체를 개조한 것에 불과할 뿐 강해지기 위해선 스스로의 큰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과 처음에는 원할 때 짧은 시간 동안 전신이 갑옷을 입은 것처럼 단단해질 뿐이라는 점이다.
“별 쓰잘데기 없지만 당장 내 몸뚱어리를 구하는 데는 최고의 효과라 다행이네. 어디 보자, 소설 내용이 맞다면 여기 어디쯤일 텐데.”
나는 소설 속 내용을 떠올리며 꼭대기 층으로 올라가 오른쪽 벽 끄트머리 책장 뒤로 손을 뻗어 더듬거렸다.
그리고는 이내 손에 걸린 숨겨진 장치를 가동시켰다.
드르륵- 덜컹!
“됐다!”
장치를 가동시키자 몇몇 책장이 움직이며 작은 공간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 공간 안에는 고급스러운 책 한 권이 들어 있었는데 그 책이 바로 시조의 유산이었다.
나는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옷핀을 손가락에 찌른 뒤, 피를 책 표지에 묻혔다.
그러자 책이 은은하게 빛나더니 갑자기 공중에 떠올라 ‘차르륵~!’ 소리를 내며 펼쳐졌다.
“오오! 완전 판타지!”
그리고는 책 속에서 빛나는 마법 문자들이 떠오르며 내 주위를 감싸기 시작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