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0화. 그리 오래되지 않은 이야기
그리 오래되지 않은, 얼마 전 이야기를 해보자.
때는 살이 에일 듯이 추운 겨울날이었고, 나는 친구와의 약속 장소로 향하던 중이었다.
그날따라 유난히 빠르게 출발한 탓에 나는 잠시 추위를 피하기 위해 어느 낡고 허름한 중고 서점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딱히 책을 살 생각은 없었다.
약속이 있어 외출했는데 책을 사봤자 거추장스러울 뿐이고, 책이라고는 하나같이 낡고 해진 책들밖에 없었다.
그저 겨울바람을 피해, 잠시 시간을 때우던 중.
낡은 책들 사이에 유난히 새 책 같은 책이 눈에 띄었다.
중고 책방답지 않게 전권이 다 있다는 것에 신기해하던 나는 정신을 차리고 보니 시리즈 전권을 손에 들고 약속 장소에 도착해 있었다.
친구는 갑자기 무슨 책이냐 물었고, 나는 <겨울나무의 현자>라는 들어본 적 없는 소설을 보며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날은 추웠고, 책은 더럽게 무거웠으며, 지갑에선 20만 원이 사라져 있었다.
그런 별것 아닌, 아니 20만 원은 별게 아닌 게 아니지만.
그리 오래되지 않은 이야기였다.
제1화. 책 속의 유약한 엑스트라 (1)
잠에서 깨니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파왔다.
마치 누군가 내 뒤통수라도 세게 후려친 것처럼 눈앞이 어질어질했다.
어제 밤늦게까지 보드카를 희석시키지도 않고 스트레이트로 두 병, 아니 세 병이었나?
어쨌든 쉬지 않고 들이켠 탓에 나답지 않게 숙취가 온 모양이었다.
“으으으… 죽을 것 같아….”
나는 손으로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며 한쪽 눈과 이마를 짓누르듯 짚었다.
과거 불광천의 미치광이, 유교 브레이커 ‘안유안’이라 불린 나답지 않았다.
천하의 내가 숙취로 죽을 것 같다는 소리를 입 밖으로 내다니, 친구가 들었으면 그 특유의 썩은 눈깔을 크게 뜨며 폭소할 일이다.
생각이 거기에 닿자 나는 앓는 소리가 섞인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그렇게 보드카를 병나발 분 곳이 그 친구의 장례식장이었던 게 떠올랐다.
아무리 내가 술을 입에 달고 다닌다고 하지만 그래도 절제라는 것을 할 줄은 아는 놈이다.
이성을 잃는 걸 혐오하는 나이기에 내 주량을 넘어선 과음은 절대 하지 않았다.
망할 놈의 새끼. 죽이려 해도 절대 안 뒈질 것처럼 굴더니 그렇게 먼저 가버리다니. 싸가지 없는 새끼.
마음 한 켠이 허탈해져 눈을 감은 채로 누워 있는데 가만히 있다 보니 너무 덥게 느껴졌다.
“끄응, 뭔 놈의 장례식 모포가 이렇게 두꺼워?”
신경질적으로 덮고 있던 무거운 이불을 걷어차며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천천히 눈을 떠 주변을 둘러봤다.
크다 못해 넓다고 표현해야 할 침대와 그 침대가 들어가고도 한참 남는 공간의 방.
벽에는 고풍스럽다 못해 촌스럽게 느껴지는 벽지가 붙어 있었고, 천장에는 유리인지 크리스털인지 모를 것으로 만든 샹들리에가 달려 있었다.
그러니까….
“여기가 어디야?!”
어딜 봐도 여긴 친구 놈의 장례식장이 아니었다.
자고 있는 사이에 납치당했나? 아니, 내가 막 나가긴 해도 원한 관리는 철저한 편이다.
납치당할 만한 일을 안 한 건 아니었지만 일을 벌일 때 내게 보복할 만한 녀석은 멀쩡히 두지도 않는다.
게다가 납치를 당했다면 이런 어디 유럽풍으로 꾸민 비싼 방 같은 곳이 아니라 곰팡이 핀 비좁은 반지하 창고 같은 데서 눈을 떴을 거다.
지금 내 상황에 대해 파악하다가 뭔가 이상한 점을 느꼈다.
내 손이 이렇게 하얬나?
손뿐만이 아니다. 내 팔이 평소보다 얇은 데다 한눈에 봐도 비싸 보이는 원단의 옷을 입고 있었다.
침대에서 몸을 일으켜 세우려는데 갑자기 누군가가 방문을 벌컥 열고 들어왔다.
“왕자님! 정신 차리셨습니까!”
걱정이 가득한 미성의 주인은 붉은 머리칼을 뒤로 땋은 갑옷 차림의 미인이었다.
얼굴이 앳되어 중성적으로 보였다.
소년인지 소녀인지 모를 미인을 어디선가 본 것 같다고 생각하는데, 그 뒤로 안경을 쓰고 집사 차림을 한 개 탈의 사내도 다급하게 따라 들어왔다.
뭐지? 몰래카메라인가?
저 머리에 쓴 탈은 어떻게 만들었기에 진짜 개 대가리가 달린 것 같지?
퍼리들이 환장할 것 같은 인형 탈이군.
아직 술에 덜 깼는지 다소 한가로운 감상을 생각하고 있는데 개 머리의 집사는 걱정스레 물었다.
“왕자님! 어디 아프시지는 않습니까? 괜찮습니까?”
잠깐, 왕자님? 그거 날 보고 하는 소리야?
내가 어이가 없어 뭐라고 하려는데 붉은 머리칼의 미인이 울먹이며 날 끌어안았다.
“정신을 차려서 다행입니다! 제가! 제가…!”
너무 세게 끌어안느라 목이 졸려 숨이 순간 안 쉬어졌다.
아니, 어려 보이는 녀석이 뭐 이리 힘이 강해?!
이게 무슨 일인가 파악을 하려 머리를 굴리는데 개 머리에 걸쳐진 안경에 내 모습이 비쳤다.
밝은 금발의 앳된 미소년을 본 나는 경악했다.
안경에 비친 나는 내가 아니었다.
나는 날 끌어안는 녀석을 떨어뜨리려고 밀쳤지만 힘 차이 때문에 미동도 하지 않았다.
내가 항복하듯 갑옷 위를 탭하자 그제야 얼굴을 붉히며 떨어졌다.
“아! 죄, 죄송합니다! 저도 모르게….”
부끄러워하며 사과를 하는 녀석을 보며 나는 미간을 좁혔다.
“이름.”
“예…?”
갑작스러운 내 말에 푸른 눈을 동그랗게 뜨며 되물었다.
“머리 아프니까 두 번 말하게 하지 마. 네 이름.”
짜증 섞인 목소리로 말했지만 아프다는 말에 반응해 안절부절못했다.
“제 이름 말씀이십니까? 왕자님의 호위기사인 프레시아 자밀레이온입니다. 그런데 머리가 아프시다니…! 당장 궁중의를!”
프레시아.
어디서 들어본, 아니 읽어본 이름이었다.
하지만 확신할 순 없었다.
그런 말도 안 되는 일이 일어날 리가 없지 않은가!
나는 프레시아의 어깨를 붙잡아 진정시키며 물었다.
“그럼, 내 이름은 뭐지?”
“와, 왕자님…?”
“진정하고 대답해라. 내가 누구냐!”
내 호통에 프레시아는 반사적으로 한쪽 무릎을 꿇으며 충성의 서약을 하듯 우렁차게 외쳤다.
“왕자님께서는 대 듀플리온 왕실의 적자! 유안 델 아즈데미안 듀플리온 제1왕자 저하이시옵니다!”
나는 ‘그녀’의 어깨를 짚고 침대에서 일어났다.
‘내’ 이름을 듣자 머리가 지끈거리며 이 육신의 기억의 파편이 눈앞을 스쳐 지나갔다.
그리고 나는 알고 싶지 않은 사실을 깨닫고 말았다.
“그래, 난 이 나라의 1왕자 유안이다. 안 그런가? 프레시아 경.”
나는 어느 소설 속에 나오는 유약한 엑스트라 왕자가 되어 눈을 뜨고 말았다는 사실을 말이다.
“예! 그렇습니다!”
힘차게 대답한 그녀는 그 소설 속에 등장하는 여주인공이다.
문제는 그 소설이 여주인공이 모시는 1왕자가 죽는 걸로 시작한다는 거였다.
그리고 더더욱 문제는 어리숙하고 유약한 왕자 유안이 죽는 건 열일곱 살이 되는 생일날, 즉 오늘이었다.
한마디로 난 시작부터 뒈지게 생겼다는 의미였다.
망했다. 왜 하필! 다른 멀쩡한 엑스트라도 많았잖아!
* * *
나는 잠시 생각할 시간을 가지기 위해 두 사람에게 말했다.
“아직 잠이 덜 깨서 그런데 잠시 나가 있어 주겠나?”
처음 보는 두 사람임에도 지시를 내리는 게 자연스러웠다. 이건 이 몸뚱어리의 영향인 건가?
내 짜증이 섞인 목소리에 두 사람은 당황한 얼굴로 날 바라봤다.
심약해 빠진 왕자가 이런 식으로 말한 적이 없었을 테니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머리가 복잡해 상대해 줄 겨를이 없었다.
“내 말 안 들리나?”
내 물음에 노령의 웨어 비스트, 늑대종(種)의 시종이 정신을 차리고 예의를 다해 대답했다.
“아닙니다. 송구합니다. 프레시아 경, 왕자님께서 피곤하신 듯하니 잠시 밖에서 대기하시죠.”
“네? 아, 예….”
나는 소설 속 여주인공 프레시아와 왕자의 전속 시종을 물리고 침대에 걸터앉아 지금 내 상황을 정리했다.
쉽사리 믿기 힘들지만 아무래도 나는 소설 <겨울나무의 현자> 속으로 들어온 모양이었다.
파편화되어 정확하게 읽기 힘들지만 왕자 유안의 기억과 여주인공 프레시아의 외모 묘사를 떠올려 보면 믿을 수밖에 없었다.
지금의 프레시아는 꽤나 앳돼 보이지만 소설 3권의 표지 삽화와 많이 닮아 있었다.
“어떤 미친 과학자가 날 통 속의 뇌로 만들어 환상을 보여주는 게 아니라면 현실인 건가.”
피부로 느껴지는 촉감, 향수 냄새에 자극되는 후각, 밝은 햇살에 눈이 부시는 시각.
내가 아는 한 이 정도로 현실 감각을 추체험시키는 기술 따위는 들어본 적 없었다.
게다가 완결까지 약간의 회상 외에는 간간히 이름만 불릴 뿐, 프롤로그 이후로 죽어서 등장하지도 않는 왕자 유안의 기억을 내가 떠올릴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아니, 지금 내가 고민해야 할 부분은 어째서 내가 왕자 유안이 되었는가가 아니군.”
그래, 내가 고민해야 할 건 그런 한가한 부분이 아니다.
지금 내가 정말로 고민해야 할 건 지금 죽으면 실제로 죽는가다.
가령 여기가 컴퓨터 안이고 여기서 죽으면 게임 오버가 되어 원래 나로 되돌아갈 수 있는 건가?
아니면 정말로 내가 소설 속의 왕자가 되어서 죽으면 영원히 죽는 걸로 끝나는 건가?
“골치 아프게 됐네.”
그렇게 중얼거리며 양손으로 힘차게 내 뺨을 때렸다.
얼얼한 느낌이 감각을 날카롭게 만들었다.
이 정도로 사실적인 감각이라면 설령 이게 가상의 공간이라도 여기서 죽으면 쇼크사 할 가능성이 높았다.
한숨을 내쉬며 머리를 헝클어뜨리고는 지금 상황과 앞으로 어떻게 할지를 정했다.
“쯧, 가능성 적은 도박을 할 수는 없지.”
방향성은 정해졌다.
지금부터 나는 소설 속의 맥없이 죽어버리는 유약한 왕자 유안으로서 살아간다.
그와 동시에 왜 내게 이런 일이 벌어졌는지 알아본다.
그러려면 일단 당면한 과제는 살아남는 게 되겠군.
“재미있겠어.”
이렇게 짜릿한 느낌은 죽어버린 썩은 눈깔을 한 친구 놈을 상대할 때 이후로 처음이었다.
그러고 보면 화장하는 것도 제대로 지켜보질 못했네.
갑자기 우울해지자 나는 고개를 젓고 살아남을 방법을 구상했다.
이 소설 속 세상은 단순히 인간만 등장하는 게 아니다. 드래곤, 웨어 비스트, 트롤, 난쟁이, 요정, 나무 인간 등 각종 아인종들이 용광로처럼 바글거렸다.
게다가 넓은 범위로 치면 언데드들까지 이성과 인격을 지니며 국가를 이루고 있을 정도였다.
물론 모든 언데드가 이성적인 건 아니었지만 말이다.
“일단 소설의 내용을 점검해 보자.”
내가 읽은 소설의 도입부는 왕자 유안의 죽음으로 시작해, 왕자를 지키지 못한 호위기사인 여주인공 프레시아가 문책을 받고 ‘세상의 끝’이라는 마경으로 좌천당한다.
‘세상의 끝’이라 불리는 곳은 온갖 몬스터들이 들끓는 바스타유 산맥과 접경 지역이다.
그곳은 하루를 살아남으면 전사로 인정받고, 한 달을 살아남으면 언제든 등을 맡길 수 있는 전우로 대우받으며, 일 년을 살아남으면 위대한 투사로 추앙받는 곳이다.
그곳에서 장장 3년을 살아남은 프레시아는 전우들을 살리기 위해 몰려오는 몬스터 대군을 홀로 상대하다 죽을 뻔한다.
그러나 위기의 순간 산맥에 숨어 살고 있던 주인공 ‘겨울나무의 현자 제이드’ 덕분에 구사일생한다.
그렇게 살아남은 프레시아는 제이드와 함께 여러 사건을 통해 세상을 지배하려는 사악한 여러 암중세력과 싸우며 자신이 사랑했던 왕자 유안….
“잠깐, 사랑했던?”
아니, 여기는 중요한 부분이 아니다. 당장 오늘 내가 뒈지게 생겼는데 사랑 타령을 할 때야?
여하튼… 왕자 유안이 암중세력 ‘아르카나’의 계략으로 살해당했음을 깨닫고 그 복수와 세상을 구하는 여정을 떠난다.
이게 소설 <겨울나무의 현자>의 대략적인 줄거리이다.
대부분의 서사는 주인공인 제이드를 위주로 진행되지만 작가가 여주인공인 프레시아의 서사에도 꽤나 공을 들였기에 지금 당장 유용한 정보도 많이 알 수 있었다.
특히 프레시아가 계속해서 꾸는 악몽인 왕자 유안이 살해당하는 장면에 대해서는 끊임없이 언급된다.
‘8분 늦게 울리는 시계가 6시 8분을 가리킬 때, 프레시아가 모시는 가녀린 왕자 유안의 심장에 날카로운 비수가 꽂혔다. 섬뜩한 시계 종소리가 울려 퍼지며 창가를 비추는 달빛은 애처로이 흐르는 붉은 선혈을 따라 무참히 반짝인다.’
내 미래라고 생각하니까 표현이 좀 기분 더럽군.
참고로 엑스트라인 왕자 유안이 등장하는 분량의 상당 부분은 살해당할 당시의 회상이다.
여자 주인공의 트라우마를 상징하는 장면이라 그런 거겠지만 참으로 빈약한 분량이 아닐 수 없었다.
그래도 덕분에 어디서 어떻게 살해당하는지 정확하게 알 수 있으니 대처가 가능했다.
시계를 보아 하니 앞으로 내게 남은 생은 8시간하고도 8분 남짓.
그 안에 살 방법을 마련해야 한다.
생각이 정리가 된 나는 침실 문을 열고 나갔다.
마치 거실 같은 공간이 나왔는데 유안의 기억에 따르면 내 ‘방’은 스위트룸처럼 거실과 여러 방이 연결된 형태인 듯했다. 역시 왕자는 다르구만.
“왕자님, 기분은 나아지셨나요?”
프레시아는 내가 침실에서 억지로 내보낸 것 때문에 우물쭈물하며 조심스럽게 물어왔다.
나는 왕자 유안의 기억을 더듬으며 엑스트라 특유의 존재감 옅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덕분에 많이 좋아졌어. 걱정해 줘서 고마워.”
일단 내 안전이 확보될 때까지는 왕자 유안의 가면을 쓰기로 했다.
지금으로서는 내가 완벽히 믿을 수 있는 사람은 없다. 나 스스로를 지킬 자구책이 필요했다.
프레시아는 내 대답에 안심한 듯 미소 지었다.
“그럼 오늘 6시 반에 있을 정찬에 참석할 수 있으시겠네요! 다행입니다. 전부터 기대하셨잖아요.”
오늘은 왕자 유안의 생일이다.
왕자의 생일이면 으레 귀족들을 불러 모아 연회를 하기 마련이었지만 이 몸뚱어리의 생일은 아니다.
현재 왕자 유안은 1왕자라는 지위에도 입지는 상당히 좋지 못했다.
그도 그럴 것이 이 몸뚱어리는 현 왕후의 자식도 아닐뿐더러 뒷배가 되어줄 외가도 간신히 귀족 소리를 듣는 몰락 직전의 미약한 가문에 불과했다.
그럼에도 왕자 유안이 오늘 정찬을 기대한 이유는 하나뿐이었다.
평소 잘 보지 못하는 아비인 왕이 참석을 예고했기 때문이었다.
나는 가능한 유약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걱정을 끼친 것 같아 미안해.”
내 사과에 프레시아는 당황하며 고개를 내저었다.
“아닙니다!”
“아, 그런데 내가 왜 쓰러졌던 거지?”
확실하지는 않지만 읽을 수 있는 기억상으로 왕자 유안은 술이라고는 입에도 대지 않은 것 같으니 일단 지금 내가 느끼고 있는 두통은 숙취가 아닐 거다.
내 물음에 프레시아는 송구스럽다는 듯이 시무룩해졌다.
“왕자님께서 나무 위에서 못 내려오고 있는 고양이를 구하시다가 그만 발이 미끄러지셔서… 죄송합니다. 호위기사인 제가 지켜 드렸어야 했는데.”
아, 그러고 보면 회상 장면 중에 그런 게 있기는 했지.
4권 267페이지 3번째 문단부터였던가?
과연 유약 왕자. 고작 고양이 하나 못 구해서 이 꼴이라니 한심하기 짝이 없군.
“됐어. 이제부터 잘 지키면 되지.”
정말이지 부탁한다. 지금부터 내 목숨이 걸려 있으니까.
“자, 그럼 잠시 산책이나 하러 갈까?”
내가 밖으로 나서려 하자 늙은 시종이 앞을 막아섰다.
“실례합니다, 왕자님. 송구스럽지만 잠옷 차림으로는….”
그 지적에 그제야 내가 입고 있는 게 잠옷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 * *
평상복으로 갈아입고 호위기사인 프레시아와 늙은 시종과 함께 왕궁을 거닐다 보니 왕자 유안의 평가가 피부로 느껴졌다.
길을 걷다 마주친 시녀와 기사들이 왕자인 내게 건성으로 고개를 까딱거리는 수준으로 인사를 하고 지나쳤다.
가끔씩 아예 날 보지도 못했다는 듯이 무시하거나 대놓고 비웃고 지나가는 녀석들도 있었다.
“이…!”
프레시아는 날 무시하는 녀석들을 볼 때마다 주먹을 움켜쥐었지만 싸움을 걸진 않았다.
함부로 싸움을 벌였다가는 가뜩이나 불안정한 내 입지에 타격을 줄 수 있기에 참는 듯했다.
궁궐을 꽉 잡고 있는 왕후는 당연히 자신의 자식인 제2왕자를 왕세자로 세우길 원했으니 2왕자보다 연공서열이 높은 내가 거슬렸을 거다.
그렇기에 왕후의 입김이 닿는 녀석들은 날 무시할 수밖에 없었다.
실제로 왕자 유안의 죽음에 왕후가 연관되어 있기도 했다.
물론 왕자 유안은 왕후에게 있어 일부러 죽일 만큼 가치가 있지 않기에 주범은 아니고 따로 배후가 있었다.
봉건제의 장자 계승 원칙도 어느 정도 뒷받침이 있어야 가능한 일이니까.
그래도 먼저 내게 다가와 대놓고 시비를 거는 귀찮은 놈은 없어서 다행이다.
여기가 소설 속 세계인 것을 감안하면 독자의 즐거움을 위해 날 건드는 놈도 있을 법한데 말이다.
카타르시스를 위한 발판 구간같이 말이야.
하긴 현실적으로 유약하기 짝이 없지만 그래도 왕의 자식이라는 지위는 한낱 기사 따위가 욕보일 수 없는 위치다.
잠깐의 저열한 쾌락을 위해 일가족이 참수당하는 멍청이라면 애초에 궁궐에 들어올 수도 없었을 테니까.
귀찮음을 덜어서 좋긴 했지만 솔직히 독자로서는 좀 아쉽네.
“왕자님. 저희는 지금 어디로 가는 건가요? 산책을 하기 좋은 정원은 반대 방향인데요.”
순수한 프레시아의 물음에 나는 싱긋 웃었다.
“일단 주방. 점심은 간단한 걸로 때울까 해서.”
내 대답에 늑대 머리의 늙은 시종이 길 안내를 하기 시작했다.
“주방이라면 오른쪽 복도로 꺾은 다음 나오는 계단에서 내려가면 바로 있습니다.”
“그래?”
변변치 않은 기억보다는 역시 내부를 꿰고 있는 시종이 더 믿음직스러웠다.
일단 프레시아가 구하지 못할지도 모르는 내 목숨이 위험해지기 전에 내 몸을 지키기 위해서 왕궁에 숨겨져 있는 것들을 얻어야 했다.
이 세계에는 숨겨진 비밀과 보물들이 많았는데, 당연히 왕궁은 여자 주인공 프레시아와 관련된 무대인 만큼 얻을 수 있는 게 상당히 많았다.
물론 대부분은 다른 곳에서 얻은 물건들을 토대로 얻을 수 있는 것들이었지만, 그런 것 없이 그저 우연이라는 이름의 주인공 보정으로 얻을 수 있는 것들도 있었다.
내가 노릴 것은 우선 그런 것들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주방에는 지금 내가 가장 원하는 게 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