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6화 맙소사
향긋한 봄나물 냄새.
곳곳에서 기름에 전을 굽는 소리가 들려왔다.
취기가 올라온 어르신 몇 분이 일어나서 노래를 뽐냈다.
강현을 신경 쓰던 이들도 축제가 시작되자마자 저마다 즐기고 있었다.
덕분에 강현도 이 자리를 즐길 수 있었다.
“그나저나 설기는 언제 와요?”
수진의 물음에 강현이 어색한 웃음을 흘렸다.
사실 이미 와 있기 때문이었다.
“금방 온다고 했어요.”
“정말요?”
기뻐하는 수진을 보니 강현의 양심 한쪽이 쿡쿡 찔렸다.
수진은 주스를 한 입 마시고는 입을 열었다.
“안 그래도 하은이가 많이 심심해하더라고요.”
강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평소 설기가 하은에게 자주 가는 걸 알기 때문이었다.
‘친구가 되었나 보네.’
강현이 웃음을 흘렸다.
그러던 강현의 눈에 무언가가 들어왔다.
어둠 속에 꿈틀거리는 작은 그림자.
마침 그림자의 주인도 강현을 발견했는지 멈춰 섰다.
슬그머니 온 길을 돌아가는 그림자를 보며 강현이 실소를 흘렸다.
그새를 못 참고 냄새에 홀려서 나온 설기였다.
정말로 설기다운 모습이었다.
‘…인내심이 바닥났구나.’
지금까지 참은 것만 해도 대단한 일이었다.
강현은 핸드폰을 확인했다.
다행히도 곧 시작할 시간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앞으로 걸어가는 이장이 보였다.
마이크 앞에 선 이장은 몇 번이나 헛기침하고 입을 열었다.
“주목. 주모옥!”
이장의 말에 사람들이 하나둘 잔을 내려놨다.
뒤늦게 이번 잔치의 목적을 깨달은 마을 사람들의 표정이 다시 변했다.
강현은 힐끗거리는 시선에 쓴웃음을 흘렸다.
그러는 사이 이장이 입을 열었다.
“이번에 아주 큰 일이 있었어.”
드르륵.
이장이 말하는 사이 아저씨 두 분이 무언가를 끌고 왔다.
커다란 텔레비전.
행사 때나 쓸법한 장비였다.
마을 사람들도 놀랐는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오메, 뭔 놈의 테레비가 저리 크데?”
“바퀴도 달렸어.”
여기저기서 웅성거렸다.
“…저건?”
“이번에 읍내에서 빌리셨다고….”
강현의 물음에 수진이 웃으며 말했다.
강현은 차마 따라 웃을 수 없었다.
이장이 미리 양해를 구한 이유를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그게 대체 뭐라고….’
저런 장비까지 빌리는지.
한숨이 저절로 나왔다.
그사이 바로 이장의 말이 이어졌다.
“저 먼 이국땅에 가서 중국놈들과 일본놈들을 이기고 민족의 자긍심을 세우고 온 강현에게 박수!”
“….”
강현이 고개를 갸웃했다.
‘내가 그랬, 나?’
잠깐 딴생각하는 사이에 엄청난 이야기가 나오고 있었다.
강현의 얼굴이 당혹스러움으로 물들어 가거나 말거나, 이장은 뒤쪽을 향해 눈짓했다.
그러자 대기하고 있던 이들이 밧줄을 끊었다.
그와 함께 지붕에 걸려 있던 천막이 내려왔다.
더욱 커지는 박수 소리.
그러나 몇몇은 고개를 갸웃했다.
그도 그럴 것이.
“…반대 아니야?”
경 강현 텔레비 출연! 축이란 글자가 뒤집혀 있었다.
‘읽는 데 문제는 없지만.’
어르신들은 뒤집힌 줄도 모르고 박수 치고 있었다.
사실을 눈치챈 이들은 서로 눈치를 보더니 모른 척 박수를 쳤다.
뒤집히면 또 어떤가.
그렇게 환호 속에 텔레비전의 전원이 켜졌다.
그러자 사람들이 숨을 죽였다.
텔레비전에는 아직 광고가 한창이었다.
강현은 그런 사람들을 보다가 힐끗 고개를 돌렸다.
멀리서 강현의 시선을 알아챈 건가.
아니면 본능적으로 느낀 것인가.
강현의 시선이 향하자마자 작은 털 뭉치가 담벼락을 넘었다.
“어머나.”
담벼락 근처에 있던 아주머니 한 분이 놀라서 뒷걸음쳤다.
그러거나 말거나 털 뭉치는 허공을 향해 고개를 치켜들었다.
“아우우우우우우!”
하울링.
저 멀리서 자고 있던 새들이 푸드덕푸드덕 날아올랐다.
동시에 마을 사람들의 시선도 한 곳으로 향했다.
“서, 설기 아니야?”
“어머, 언제 왔데?”
“컹! 컹!”
사람들은 곧 반가운 얼굴로 설기에게 향했다.
여기저기 손을 뻗는 이들을 피하며 늠름하게 걸어가는 설기.
그 모습에 강현이 실소를 흘렸다.
‘이런 날쯤은 만지게 해 줘도 될 텐데.’
마을 사람들이 설기를 얼마나 귀여워하는지 알 수 있었다.
손길을 피하는 와중에 먹을 것만 골라서 낚아채고 있었다.
곧 설기가 의기양양해진 모습으로 강현이 있는 자리까지 왔다.
“언제 온 거예요.”
설기에게 반갑게 손을 흔들던 수진이 물었다.
“오늘 왔어요. 마침 이번 이야기를 들어서.”
깜짝 놀라게 해 주려고 기다렸다.
그 말에 민호와 수진이 웃음을 흘렸다.
“강현 씨도 역시 이 마을 사람이네요.”
수진의 말에 강현이 멋쩍게 웃었다.
차마 부정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사이 다가온 설기가 강현의 다리에 몸을 비볐다.
그때.
“어, 나왔다!”
누군가의 외침에 사람들의 시선이 옮겨 갔다.
텔레비전에 강현의 얼굴이 비치고 있었다.
“오오! 뉘 집 자식인지 잘 생겼다.”
“쉿 조용히 좀 해.”
웅성거림이 점차 줄었다. 사람들은 먹는 것도 멈추고 TV를 바라보고 있었다.
강현이 있는 곳 역시 마찬가지였는데, 그런 셋을 향해 다가오는 이들이 있었다.
“오셨어요?”
“괜찮네.”
수진이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하자 온 이가 손짓했다.
정기훈 작가.
뒤로 이정훈과 황대길도 의자를 끌고 와서 테이블에 앉았다.
파전 하나를 집어먹은 황대길이 입을 열었다.
“일본도 오늘 방영한다고 했네.”
“그래요?”
강현이 고개를 갸웃했다.
한국과 날짜를 맞춘 건가?
“원래 방송은 이틀 뒤이지만, 한국이 먼저 방송하는 건 내키지 않았던 모양이야.”
황대길의 말에 강현이 쓴웃음을 흘렸다.
참으로 일본다운 이야기였다.
“그리고 중국은 아예 폐지했다더군.”
“예?”
강현이 눈을 껌뻑였다. 이건 예상하지 못했다.
그러나 황대길은 사정을 아는 듯 혀를 찼다.
“처음부터 이걸 위해 급조한 방송이었으니 쓸모가 없었겠지.”
어느 정도 활약을 했다면 편집으로 어떻게든 만들겠지만, 강현이 너무 압도적이었다.
그러한 황대길의 말을 들은 일행들의 시선이 강현에게 향했다.
대체 어떤 활약을 했기에 황대길이 저런 소리를 하는지 궁금한 것이었다.
그러나 강현은 멋쩍게 웃을 뿐이었다.
그 상황을 직접 본 황대길만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던졌다.
“직접 보면 알 것이네.”
황대길의 말에 사람들의 시선이 TV로 향했다.
시작은 여행부터였다.
황대길과 강현, 소현. 셋이 음식을 먹는 장면이 나왔다.
“참으로 부럽군.”
“먹고 싶다면 말하게. 똑같지는 않겠지만, 흉내라면 낼 수 있네.”
황대길의 말에 사람들이 웃었다.
겸손이란 걸 잘 알기 때문이었다. 당장 TV에서만 보더라도 재료를 실시간으로 분석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정환은 고개를 저었다.
그러자 황대길이 실망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내 실력을 못 믿는 건가.”
“설마, 그럴 리가 있겠는가.”
이정환이 무슨 소리를 하냐는 듯이 손을 저었다.
그러한 이정환의 모습에 황대길이 웃음을 흘렸다.
황대길도 이정환이 거절한 이유를 알기 때문이었다.
같은 음식을 먹는다고 해서 같은 느낌을 받는 건 아니었다.
식사를 즐긴다는 건, 단순히 맛만 보는 게 아니었다.
어디서, 누구와 먹는지도 중요했다.
그 추억까지 같이 먹는 것이었다.
“다음에 같이 가면 되지 않은가.”
정기훈 작가가 해답을 내놨다.
“남는 게 시간인데 못 갈 이유가 있는가.”
정기훈 작가의 말에 황대길도 고개를 끄덕였다.
“좋은 생각이군. 방송 촬영도 곧 끝나 가니 같이 여행이라도 가세.”
“모처럼이니 다른 사람도 데려가지.”
마을 사람을 말했다.
그렇게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어느새 이튿날이 방송되고 있었다.
가볍게 미션을 진행 중이던 일행들이 일본 제작진을 만나는 장면이었다.
이어서 차를 타고 장소를 이동하는 모습.
그 모습을 보던 수진이 슬그머니 입을 열었다.
“정말 우연인가요?”
강현은 쓴웃음을 흘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수진의 물음은 다른 이들도 궁금해하는 것이었다.
너무 공교롭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제작진들이 모여서 회의하는 모습이 나오고 나서야 우연임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시작된 게임.
일본인 참가자인 아키히로가 앞으로 나섰다.
그 모습을 본 강현이 고개를 갸웃했다.
‘내가 먼저 던지지 않았나?’
아쉬운 표정으로 물러나는 아키히로.
이어서 중국인 셰프가 앞으로 나섰다.
결과는 다르지 않았다.
그렇게 앞의 둘이 끝나자 강현이 걸어 나왔다.
“…어?”
강현은 걸어 나오는 자신을 보며 눈을 껌뻑였다.
강현이 나타나자마자 방송의 분위기가 바뀌었다.
기분 탓이 아니었다.
배경음부터 특수 효과까지.
천천히 걸어 나오는 강현의 모습은 마치 전쟁터에 나서는 전사처럼 비장했다.
‘…여행 방송 맞아?’
방송을 지금 본 사람이라면 다른 방송으로 착각했을 거다.
그러거나 말거나 사람들은 강현의 모습에 열렬히 환호했다.
“오오!”
“멋지다!”
마치 제 자식이 나온 것처럼 기뻐하는 이들.
그렇게 자리에 선 강현은 담담한 시선으로 풍선을 바라보았다.
‘내가 저런 눈빛이었나?’
아니었다.
저 당시 얼마나 맞춰야 할까, 고민하고 있었다.
천천히 다트를 들어 올리는 강현.
곧 다트가 풍선을 터트렸다.
그리고 강현은 마지막 다트를 던지고 확인조차 하지 않고 몸을 돌렸다.
“…뭔….”
강현은 말문이 막혔다.
누군가에게 뒤통수를 크게 맞은 느낌이었다.
자리로 돌아가는 강현을 본 수진과 민호의 눈빛이 바뀌었다.
“…강현 씨에게 저런 모습도 있었군요.”
“멋집니다.”
둘이 이럴 텐데, 다른 이들은 어떻겠는가.
의외란 듯이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에 강현의 얼굴이 화끈거렸다.
특히나 상후의 눈빛은 반짝이다 못해 따가울 정도였다.
다행이라면 이 자리에 미영이와 곽도현이 없다는 사실이었다.
“전 저런 적이….”
없다.
하지만 믿을 리가 없었다.
자리로 돌아와서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담담하게 앉아 있는 강현.
그러나 현장에 있던 강현과 황대길은 그 모습이 다트를 던지기 전의 모습이란 걸 알아챘다.
곧 중국이 항의하는 장면이 잡혔다.
마을 사람들이 제 일처럼 분통을 터트렸다.
강현에게 괜찮냐는 묻는 제작진.
그러나 강현은 담담히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상관없다는 태도.
순간적으로 내가 저랬었구나. 착각할 정도로 잘 만들었다.
이어지는 경기도 전과 다르지 않았다.
예능처럼 게임을 즐기는 사람들.
그러나 강현이 나올 때만 달라졌다.
슬로우가 걸리고 배경음도 더 웅장했다.
“히야.”
누군가의 감탄 소리.
강현은 얼굴이 화끈거렸다.
옆을 보자 설기도 눈을 반짝이고 있었다.
사람들은 강현이 게임을 이길 때마다 환호성을 질렀다.
그리고 그때마다 강현의 몸은 더욱 움츠러들었다.
방송이 끝나고 나서야 강현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너무 이른 안도였다.
예고편이 남아 있기 때문이었다.
둥, 둥, 두둥.
잔잔하게 깔리는 북소리.
음악 소리가 점점 커졌다.
마치 블록버스터 영화에나 나올 법한 웅장한 배경음.
하지만 소현과 황대길의 모습을 주로 비출 뿐, 정작 강현의 모습은 잘 나오지 않았다.
첫 방송에 너무 비중이 많았던 걸 걱정한 건가.
곧 노래가 끝나고 화면이 어둠에 잠겼다.
하지만 끝이 아니었다.
“선생님은 걱정이 되지 않습니까?”
제작진의 물음.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네. 장담하건대….”
어둠 속에서 황대길의 목소리가 들렸다.
“강현 같은 인재가 이 아시아에 둘이나 있을 것 같진 않군.”
“아….”
뒤늦게 터져 나온 탄성은 방송에서 나온 게 아니었다.
강현이었다.
곧 주변이 서서히 밝아지면서 강현의 얼굴이 나타났다.
“강현 씨?”
“…예, 나가죠.”
제작진의 부름에 눈을 뜬 강현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강현의 얼굴에 두려움이나 긴장은 없었다.
그저 담담히 걸어나갈 뿐이었다.
대회장으로 나서는 강현의 뒷모습을 마지막으로 예고편이 끝났다.
방송이 끝났음에도 누구도 입을 열지 못했다.
“…맙소사.”
고요한 가운데. 절망적인 강현의 탄식만 들려올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