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0화 슬슬 올 때가 되었는데
높은 점수.
일본 제작진들 사이에서 환호성이 들려왔다.
그러나 정작 사내는 눈살을 찌푸릴 뿐 기뻐하지 않았다.
사내의 시선이 향한 곳에는 강현이 있었다.
아는 것이었다.
아직 기뻐하긴 이르다는걸.
한중일과 현지 심사위원 대부분이 만점에 가까운 점수를 줬지만, 만점은 아니었다.
더군다나 다음 차례는 바로 강현이었다.
이어서 강현의 요리가 테이블 위로 올라갔다.
요리 안을 확인한 중국 요리사가 피식 웃음을 흘렸다.
다른 심사위원들 역시 실망한 눈빛을 드러냈다.
강현이 만든 음식은 국수였다.
시장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요리.
위에 올라간 고명 역시 투박했다. 다진 고기와 같이 파와 부추가 올라가 있었다.
그러나 곧 고개를 끄덕였다.
앞의 둘의 수준이 너무 높았다. 저 나이 때 또래라면 이런 요리가 당연하였다.
중국과 일본 제작진들도 안도했다.
그런 와중에 오직 둘만은 표정을 바꾸지 않았다.
바로 황대길과 일본 요리사.
일본 요리사는 젓가락으로 면을 한입 먹었다.
“….”
곧 인상을 찌푸리며 젓가락을 내려놨다.
기대가 너무 컸던 걸까.
옆에 있던 에리카가 카메라를 힐끗거리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아키히로 씨. 그래도 방송이니 어느 정도 반응은….”
일본은 중국과 달랐다. 체면을 중요시 생각했다. 이렇게 노골적으로 티를 내면 안 좋게 볼 수도 있었다.
그녀도 기대했던 비주얼이 아니라 실망했지만, 애써 놀란 표정을 지었다.
국수에 올라온 개미와 알들은 결코 보기 좋은 광경은 아니었다.
“…아니, 필요 없어.”
그러나 일본 요리사, 아키히로는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분하다는 듯이 국수를 노려봤다.
“내 패배다.”
“예?”
에리카가 눈을 껌뻑였다.
그제야 에리카의 시선이 심사위원들에게 닿았다.
처음과 달리 한중일 심사위원들의 표정은 나쁘지 않았다.
그러나 현지 심사위원들의 반응은 전과 달랐다.
대화를 나누며 국수를 먹고 있었다.
때때로 웃음을 던지는 이들까지.
심사를 하는 게 아니었다. 그들은 식사하고 있었다.
놀란 에리카가 젓가락을 들어 올렸다.
독특한 맛.
태국의 풍미가 느껴지면서도 어딘가 익숙한 맛이었다.
안에서 톡톡 터지는 개미의 식감에도 적응이 되었다.
그리고 에리카가 느끼는 감정은 다른 이들도 마찬가지였다.
“…어째서.”
생소하면서도 익숙한 감각에 에리카가 고개를 갸웃했다.
그 답은 옆에서 나왔다.
“태국인들뿐만 아니라 일본인과 중국인의 입맛에도 맞췄어.”
하지만 그 기본은 한식에 있었다.
이 자리에 있는 모든 이가 즐길 수 있는 요리.
강현은 심사를 위해 요리를 한 게 아니었다.
음식.
여기 있는 이들을 대접하기 위해 요리했을 뿐이었다.
아키히로는 자신이 만든 요리를 보았다.
자신의 기교와 감각을 어김없이 드러낸 요리.
하지만.
‘…또 졌군.’
과거, 강현의 요리는 소름이 끼치도록 정교했다.
그를 뛰어넘기 위해 기교를 다듬었다.
지금의 강현과 과거와 달랐다.
기교가 아닌 감각적이었다.
거기에는 어떠한 기교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렇기에 오히려 편하게 먹을 수 있었다.
처음 요리사가 되고자 했을 때, 아키히로가 느꼈던 마음.
내 음식을 즐겁게 먹어 줬으면 했다.
아키히로는 허탈한 웃음을 흘렸다.
그러는 사이 심사위원들이 결과를 발표했다.
52점.
중국의 심사위원이 7점을 줬고 나머지는 만점을 줬다.
그렇게 시합이 끝났다.
한국 제작진들 사이에서 환호성이 울려 퍼졌다.
“…!”
중국 요리사가 욕설을 내뱉으며 모자와 앞치마를 내던졌다.
땅바닥에 떨어진 모자와 앞치마.
그러나 중국 제작진들은 그런 요리사를 보지 않았다.
어두운 표정으로 묵묵히 짐을 싸기 시작했다.
그런 가운데 한 여성이 일행들을 향해서 다가왔다.
중국 여성 참가자.
그녀는 강현을 향해 손을 뻗었다.
요리사도 아닌 보조였던 그녀였기에, 강현은 얼떨떨하면서 손을 잡았다.
그러자 그녀가 입꼬리가 우아하게 올라갔다.
“내 이름은 로사예요.”
유창한 영어. 홍콩식 발음이었다.
“아, 전 강현입니다.”
“알고 있어요. 음, 다음에는….”
그녀는 기억을 더듬듯이 미간을 찌푸리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라면 먹고 갈래?”
“…예?”
너무 놀라서 대답이 늦어졌다.
어눌한 한국어. 발음이 적힌 걸 보고 외운 게 분명했다.
옆에 있던 제작진들과 소현조차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 말이 호감 표현이라는데 맞나요?”
“아, 예.”
강현이 떨떠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맞긴 하다. 방향성이 잘못되었을 뿐.
그러자 그녀가 웃음을 터트렸다.
“그럼, 다음에 봐요.”
윙크하더니 그대로 몸을 돌렸다.
갑작스럽게 나타난 것처럼 제 할 말만 하고 떠나갔다.
강현은 떠나는 그녀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이렇게 직설적인 표현을 들은 적은 처음이었다.
그러다 뒤늦게 사람들의 시선을 깨달았다.
“으르르르.”
어째서인지 떠나는 로사는 노려보고 있는 소현.
그 모습이 설기를 떠올리게 했다.
그리고 히죽히죽 웃고 있는 제작진들.
김윤하 피디가 강현의 어깨에 팔을 둘렀다.
“걱정하지 말라고. 방금 건 방송에 안 내보낼 테니깐.”
“….”
윙크를 건네는 김윤하 피디.
중년 아저씨의 윙크는 로사의 윙크보다 파괴력이 컸다.
당연히 강현을 놀리려고 한 말이었다.
강현이 대꾸하지 않자 김윤하 피디가 웃으며 등을 두드렸다.
하지만 이미 란돌프와 카샨에게 단련된 강현이었다.
흔들림조차 없자 김윤하 피디의 눈에 놀라움이 떠올렸다.
“역시 강현 씨. 평소에 운동 좀 하나 봐? 다음에 섬에서 보물 찾는 예능을 할 생각인데, 어때?”
듣기만 해도 힘들어 보이는 예능이었다.
강현이 고개를 젓자 김윤하 피디가 다시 한번 웃음을 터트렸다.
“생각 있으면 말해 달라고. 그럼….”
김윤하 피디의 시선이 제작진들에게 향했다.
“슬슬 엔딩 준비하자. 이제 일정은 끝이야.”
자유시간이란 뜻이었다. 곳곳에서 환호성이 들려왔다.
출연진들과 달리 정리할 게 많았지만, 그래도 저녁 전에는 끝날 거다.
“아, 저녁에 한잔할 사람들은 미리 말해 줘. 강제는 아니고 자율 참가. 오늘은 내가 쏜다!”
“오오!”
환호성이 더 커졌다. 그때, 작가 하나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괜찮으시겠어요?”
“이런 날에 피디의 회식에 어울릴 직원이 얼마나 있겠어.”
한국도 아니라 해외였다. 마시더라도 잘 어울리는 이들끼리 따로 마시는 게 나았다.
김윤하 피디는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역시나 다 계획이 있던 것이었다.
그러나 작가는 한숨을 내쉬었다.
“…피디님만이라면 그렇죠. 강현 씨와 소현 씨도 있잖아요.”
황대길은 예외라고 해도 다른 게스트도 있었다.
이번 일로 영웅이 된 강현과 아이돌인 소현.
그 둘과 술자리를 가질 기회가 얼마나 있겠는가.
“…어?”
그건 생각 못 했는지 김윤하 피디가 눈을 껌뻑였다.
그러자 뒤늦게 온 황대길이 웃으며 입을 열었다.
“걱정하지 말게. 이 늙은이와 반반 내면 되니까.”
“서, 선생님. 그럴 수는….”
“괜찮네. 안 그래도 이 둘한테 제대로 먹이고 싶었거든.”
황대길이 강현과 소현을 가리켰다.
그러자 김윤하 피디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어쩔 수 없네요. 선생님의 뜻을 거스를 수도 없으니.”
말과 달리 김윤하 피디의 얼굴에는 안심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때, 뒤에서 누군가가 다가왔다.
“오늘 회식하시나 보네요.”
일본 피디였다. 한국어를 몰랐으나 그 역시 방송계 사람이었다.
분위기를 보고 상황을 짐작할 수 있었다.
그 뒤로 아키히로와 에리카가 뒤따랐다.
소현은 에리카를 보자마자 손을 잡고 폴짝폴짝 뛰었다.
모르는 이가 보면 오랜만에 친구를 만난 줄 알 거다.
“예. 일정이 끝나서요.”
김윤하 피디가 말하자 일본인 피디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혹시 괜찮으면 저희도 끼어도 될까요? 물론, 비용은 저희가 부담하겠습니다.”
일본인 피디의 말에 김윤하 피디가 눈을 크게 떴다.
굳이 그럴 필요가 있나?
그러자 일본인 피디가 웃으며 입을 열었다.
“하는 김에 조금만 촬영하고요.”
“아.”
김윤하 피디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제야 사정을 알 수 있었다. 어쨌거나 승부에서 진 일본이었다.
이대로 방송에 내보내는 것보다 한국과 어울리며 모습을 섞어서 보내는 게 나았다.
한일전이란 타이틀보다 친목 경기란 느낌으로.
마침 출연자들끼리의 사이도 나쁘지 않았다. 게다가 강현과 아키히로의 상황도 그림이 좋았다.
뻔히 보이는 수작.
하지만.
‘나쁘지 않지.’
김윤하 피디로서도 나쁠 게 없었다.
“촬영은 삼십 분만 하는 걸로 합시다. 그리고 방송 내보내기 전에 저희 쪽도 확인할 수 있어야 합니다.”
“물론입니다.”
일본인 피디는 당연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 부분은 따로 서면으로 남겨 주실 수 있을까요? 피디님과 방송국 이름으로.”
김윤하 피디의 말에 일본인 피디가 눈을 껌뻑였다.
굳이 그렇게까지 해야 하냐는 눈빛이었다.
그러나 김윤하 피디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화장실 들어가기 전과 나올 때의 마음이 다른 게 사람이었다.
하물며 일본인 피디가 그럴 의도가 없더라도 방송국에서 그리 하라고 하면 해야 했다.
이 때문에 뒤통수를 맞은 게 몇 번이었던가.
김윤하 피디의 단호한 표정에 일본인 피디가 한숨을 내쉬었다.
“…알겠습니다.”
그렇게 합동 회식이 결정되자 아키히로가 강현에게 다가갔다.
“…오늘 요리는 훌륭했다.”
말과 달리 눈빛은 전보다 더 이글거리고 있었다.
“다음에는 반드시 이겨 주지.”
아키히로의 말에 강현이 숨을 삼켰다.
저 말을 실제로 들어볼 줄은 몰랐다.
하지만 곧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예.”
그러자 잠시 머뭇거리던 아키히로가 다시 입을 열었다.
“…술은 잘하나?”
회식 때문인가. 강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잘됐군. 기대하겠다.”
무엇을 기대하겠단 말인가. 강현과 친분을 다지고 싶다는 뜻은 아닐 거다.
그렇다면 저렇게 씹어먹듯이 말하진 않을 거다.
“술로 승부를 겨루겠다는 거네요.”
에리카와의 이야기가 끝났는지 소현이 흥미진진한 눈빛으로 아키히로를 봤다.
“셰프님! 지면 안 돼요!”
두 주먹을 움켜쥐고 파이팅을 외치는 소현.
강현은 멋쩍게 웃었다.
그러나 그 모습을 본 황대길은 안타깝다는 시선을 던졌다.
‘…하필.’
황대길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강현과 술을 마셔 봤기 때문이었다.
강현이 지는 모습은 상상할 수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강현은 체력만큼이나 주량 역시 이세계 주민들로부터 단련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결과는 예상과 다르지 않았다.
* * *
다음날 공항에서 내려서 평창에 도착했을 때는 밤이 되어 있었다.
하루가 그냥 지나간 것이었다.
익숙한 경치, 익숙한 공기.
고향에 돌아온 것처럼 반가운 마음이 올라왔다.
그리고 그건 강현만이 아니었다.
꼼지락꼼지락.
가슴팍에 있던 토리가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너도 그리웠구나.”
강현은 웃으며 토리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황대길은 서울에 일이 있어서 다음 주에나 돌아온다고 했다.
그때, 또다시 술자리를 가지기로 했다.
아키히로가 강현을 붙잡고 술을 먹이는 바람에 제대로 이야기를 나누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태국에서 한 요리에 대해서 할 말이 많아 보였다.
강현은 한번 기지개를 켰다.
이제 다시 일상으로 돌아갈 시간이었다.
하지만 곧 고개를 갸웃했다.
‘슬슬 올 때가 되었는데.’
아니, 이미 왔어야 했다.
벌써 강현의 집이 보이기 시작했다.
‘…무슨 일이 생긴 건가?’
강현은 또 하나의 가족을 떠올리고는 황급히 걸음을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