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3화. 성질머리는 그대로야.
황대길이 새로운 프로그램에 들어가는 건 알고 있었다.
세계를 돌아다니며 음식을 먹고 또 재현해보는 프로그램으로 알고 있었다.
이야기를 들었을 때 강현도 혹했었다.
매장과 이세계 주민들만 아니었다면 한번 도전해봤을 거다.
하지만 그와 반대로 의문도 떠올랐다.
‘...곤란한 일이 있나?’
예상보다 시청률이 안 나오기라도 한 건가.
아니면 예산이 떨어졌다거나.
그렇다고 해도 강현이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직접 물어보면 되겠지.’
혼자 고민하고 있어봤자 의미가 없었다.
강현은 일을 끝나자마자 핸드폰을 들었다.
짧은 통화음이 나오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황대길이 전화를 받았다.
[오, 자네인가.]
“예. 선생님. 잘 지내셨어요?”
[그렇다고 말하고 싶은데, 그렇진 못하고 있네.]
핸드폰 너머로 황대길의 씁쓸한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자네가 이렇게 전화한 걸 보니 그 친구들이 이야기했나 보군. 하여튼 말도 안 들어.]
황대길의 말에 강현이 어색한 웃음을 흘렸다.
둘을 위해서 부정해주고 싶지만, 의미가 없었다.
평소 연락을 잘하는 강현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아니, 업무 때문이라도 자주 통화하기 때문에, 굳이 안부 인사를 건넬 필요는 없었다.
게다가 둘 역시 이를 알면서도 알린 것이었다.
강현은 변명하기보다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예. 자세한 사정은 못 들었는데, 무슨 일인가요?”
강현의 물음에 황대길은 한숨을 내쉬었다.
[대단한 일은 아니네. 생각보다 반응이 좋게 나오고 있어.]
좋은 일이었다. 하지만 그뿐이라면 황대길이 고민하지도 않았을 거다.
[얼마 전 일본 방송국에서 연락이 왔었네. 일본 내에서도 비슷한 프로그램을 진행하나 봐.]
“아.”
강현이 탄성을 뱉었다.
[우리로서도 나쁘지 않기에 협력하기로 했네. 그런데 어디서 들었는지 중국에서도 연락이 왔어.]
그제야 강현은 사정을 짐작할 수 있었다.
황대길이 진행하는 프로그램은 단순히 여행만 다니는 게 아니었다.
게스트와 같이 현지 재료들로 요리한다.
거기에 한중일이 걸리면….
‘...요리 대회지.’
더 이상 예능으로 볼 수 없었다.
중국의 제안은 거절하기 힘들었다.
일본과는 손을 잡으면서 자기네들과는 왜 협력 안 하냐고 따질 거다.
방송국으로서는 눈치를 볼 수밖에 없었다.
[그동안의 게스트들은 요리나 여행에 관심이 있는 연예인들이었다네. 하지만 이번에는 특집으로 젊은 요리사를 한 명씩 더 데리고 가기로 했네.]
노골적이었다. 연예인들을 불러서 하하 호호할 생각은 없었던 것이었다.
방송은 연예인들이 맡고 요리는 각국에서 불러온 젊은 요리사들이 진행할 게 분명했다.
[사실 지원은 많이 오고 있네.]
그럴 거다. 한 번 출연으로 스타가 될 수 있었다.
그런데도 황대길이 고민한다는 건….
‘마음에 드는 이가 없나 보네.’
한식의 거장이자 요리 평론가.
그의 눈에 찰 젊은 요리사가 몇이나 있겠는가.
여기에는 강현도 한몫했다.
강현과 있다 보니 눈이 더 높아진 것이었다.
[제자들이 끼우는 아이 중에는 제법 미래가 기대되는 아이도 있긴 하지만….]
황대길이 한숨을 내쉬었다.
[이길 수 있을지는 모르겠군.]
경험을 위해서라면 나쁘지 않았다. 하지만 그래서는 안 되었다.
잘 나가던 프로그램이 휘청거릴 수도 있었다.
가깝지만 먼 나라.
바로 중국과 일본 아닌가.
강현은 황대길이 걱정하는 게 무엇인지 잘 알았다.
한국 요리계도 많이 발전했다.
하지만.
‘...아직 중국과 일본을 넘어서긴 힘들지.’
한국의 요리사들이 이름을 알리기 시작한 건 최근이었다.
들인 노력과 시간이 달랐다.
아니나 다를까.
일본과 중국에서 나온다는 요리사의 이름은 강현도 들어봤다.
[너무 부담가지지 말게나. 한정우. 그 친구도 있으니.]
강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한정우라면 이들과 겨룰 수준은 되었다.
강현은 황대길이 저리 말하는 이유를 알고 있었다.
강현의 사정을 알기 때문이었다.
이제 다시 조용하게 사는데, 방해하고 싶지 않은 것이었다.
하지만 강현은 크게 개의치 않았다.
‘그렇다면 추석 때도 나가지 않았겠지.’
더 이상 과거에 얽매이지 않고 있었다.
지금까지 평창에 머무는 것도 그들을 피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평창이 좋기 때문이었다.
‘이세계도 있고.’
생각을 정리한 강현이 입을 열었다.
“그럼, 이번에 가는 곳은 어딘가요?”
[태국이라네.]
황대길이 담담히 말했다.
* * *
태국.
그 이름을 들었을 때, 강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미식과 요리의 나라.
동양의 요리를 말할 때 빠지지 않는 나라였다.
황대길과 통화하고 하루가 지났다.
이제는 대답을 줘야 했다.
‘솔직히, 흥미가 있어.’
대회보다는 태국 요리에 흥미가 있었다.
언젠가 한 번은 가보고 싶었던 나라였다.
좋은 기회임에는 틀림이 없었다.
하지만.
강현의 시선이 옆으로 향했다.
간식으로 토스트를 먹어 치운 설기가 고개를 갸웃했다.
적어도 나흘 이상은 자리를 비워야 했다.
매장은 괜찮겠지만, 설기가 문제였다.
‘...마을에 맡길 순 없겠지.’
하루는 어떻게든 버틸지 몰라도 그 이상은 설기를 감당하기 힘들 거다.
후다닥 문밖으로 달려가는 설기.
나무 밑에서 쉬고 있는 토리에게 달려들었다.
멍하니 있다가 봉변당한 토리가 흙으로 도망쳤다.
그렇다고 태국까지 데려갈 수도 없었다.
“역시 거절해야겠네.”
어쩔 수 없었다.
그렇게 생각한 강현이 전화기를 들어올리자마자 문이 벌컥 열렸다.
딸랑딸랑.
깜짝 놀란 강현이 돌아보자 이장이 숨을 고르는 게 보였다.
“이장님? 무슨 일 있으세요?”
“있지. 아주 큰 일이!”
이장의 말에 강현이 눈을 껌뻑였다.
그러자 이장이 성큼성큼 걸어왔다.
“들었어. 일본이랑 중국이랑 싸우러 간다며!”
“예?”
싸우다니. 요리 대결을 말하는 건가.
“그 둘이랑 싸우러 가는데 그냥 보낼 수야 있나!”
이장이 주먹을 불끈 쥐며 외쳤다.
강현은 어색하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그거라면 거절하려고요.”
“...엉?”
삐그덕. 이장의 고개가 강현에게 향했다.
“매장도 있고, 설기도 있어서 자리를 오래 비우긴 힘들 것 같아요.”
“그게 무슨 소리여! 그 짝이 안 가면 누가가!”
이장의 외침에 강현이 저도 모르게 뒷걸음쳤다.
강현을 보는 이장의 눈빛이 번뜩였다.
“그놈들에게 지는 건 못 봐. 설기는 걱정하지 말어.”
갑작스러운 부름에 설기가 고개를 갸웃했다.
“마을에서 돌봐주기로 했어. 삼시 세끼로 고기 먹여줄 테니.”
고기란 말에 설기의 눈이 반짝였다.
강현은 어처구니가 없는 눈빛으로 설기를 보았다.
“멸공의 횃불이 되는 겨! 멸…. 컥!”
“이 양반이 진짜. 전쟁이 끝난 지가 언젠데.”
뒤에서 나타난 손이 이장의 목덜미를 낚아챘다.
박씨 할머니였다.
“오셨어요.”
“그래, 일 봐. 이 양반은 신경 쓰지 말고.”
“자, 잠깐. 아직 할 말이…!”
“할 말은 무슨. 그리고 전쟁 때 총이나 쥐어봤어? 다 끝나서 태어난 양반이 뭔 멸공이야!”
박씨 할머니는 그대로 이장을 끌고 떠나갔다.
한바탕 폭풍이 불어간 것 같았다.
강현은 둘이 떠난 자리를 보고는 실소를 흘렸다.
그리고 고개를 돌리자 반짝이는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설기가 있었다.
기대가 섞인 눈빛.
저 눈빛의 의미는 뭘까.
“...설기야. 내가 없어도 괜찮겠어?”
강현의 물음에 설기의 얼굴이 시무룩해졌다.
“끼잉.”
고개를 젓는 설기. 하지만 그 꼬리는 전보다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
강현의 눈빛이 떨떠름해졌다.
강현이 다시 입을 열었다.
“아니지? 그래도 같이 있는 게 좋지?”
“컹!”
물론이라는 듯이 힘차게 짖는 설기. 하지만 아까와 달리 꼬리가 힘없이 내려가고 있었다.
‘...나보다 고기인 건가.’
강현의 표정이 차가워지자 설기가 황급히 짖었다.
“컹! 컹!”
거기서 멈추지 않고 제 꼬리를 향해 으르렁거렸다.
너 왜 자꾸 말을 안 듣냐고 훈계하는 것 같았다.
꼬리를 노려보며 빙빙 도는 설기.
곧 순진한 눈망울로 강현을 바라보았다.
마치 저 꼬리는 자신과 무관하다고 피력하는 것이었다.
그 모습에 강현이 실소를 흘렸다.
“그래, 믿어주마.”
그러고는 설기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컹.”
그제야 안도하는 설기. 그런 설기를 보며 강현은 생각에 잠겼다.
‘꼬리의 반응을 보면 마냥 싫지만은 않은 것 같네.’
꼬리는 본능에 충실했다.
어리기 때문에 금방 기분이 바뀌겠지만, 이제 설기도 마을에 익숙해졌다.
평소에도 산책 다녀올 때마다 알아서 뭔가를 얻어먹고 있었다.
‘...심심하면 숲에 돌아가 있어도 되니까.’
설기라면 혼자서 할아버지 댁에 가는 것도 가능했다.
고민을 마친 강현이 핸드폰을 들어 올렸다.
* * *
며칠 뒤.
짐을 챙긴 강현은 설기 앞에 섰다.
“정말 괜찮겠어?”
끄덕끄덕.
설기가 아쉬워하는 기색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곧 자신을 믿으라는 듯이 늠름하게 턱을 세웠다.
하지만 입가에 번들거리는 기름이 올라오는 신뢰를 박살 내고 있었다.
‘또 어디서 얻어먹고 왔구나.’
강현의 이야기가 전해지자, 떠나기 전부터 사람들이 설기를 챙겼다.
강현이 안심할 수 있게 하려는 것이었다.
마을 내에서는 이미 강현은 독립운동에 나서는 투사와 같았다.
덕분에 설기만 신났다.
“...심심하면 이세계에 가 있어도 돼.”
하지만 설기가 고개를 저었다.
걸을 때마다 먹을 게 나오니 이세계에 가고 싶은 마음이 들 리가 없었다.
이세계로 넘어가면 마음껏 사냥하고 뛰놀 수 있다지만, 다시 생고기를 먹어야 했다.
설기가 어느 쪽을 택할지는 뻔했다.
강현은 설기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 고개를 들었다.
“그럼 잘 부탁드려요.”
“그래, 걱정하지 말고 다녀오게.”
정기훈 작가였다. 옆에 있던 이정환과 민호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가서 일본놈이고 중국놈이고 머리통을 다…!”
이장이 무언가를 외치려다가 사람들에게 끌려갔다.
강현은 애써 그 광경을 외면하고 몸을 돌렸다.
그리고 대기하고 있던 차에 올랐다.
차에는 이미 익숙한 이가 있었다.
“안녕하세요. 이번에 강현씨를 담당하게 된 씨엔제이 엔터….”
“시끄러우니깐 출발이나 해.”
“모처럼 만났는데 형한테 이러기야?”
강현의 차가운 대꾸에 윤섭이 투덜거리며 차를 출발시켰다.
사람들과 인사를 나누는 사이에 익숙한 차가 나타나서 얼마나 놀랐던가.
그렇게 차가 출발하자마자 뒷좌석에서 그림자가 불쑥 튀어나왔다.
“짜잔!”
강현은 뒤에 누가 타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기에 놀라지 않았다.
“오랜만이네요.”
“...치, 재미없어요. 그보다 셰프님 말 놓기로 했잖아요.”
귀엽게 생긴 소녀가 입을 삐쭉 내밀었다.
윤섭이 담당하던 그룹의 리더인 소현이었다.
그렇게 차가 마을을 벗어나자 강현이 윤섭을 돌아보았다.
“그래서 어쩐 일이야?”
원래는 민호가 시내까지 태워주기로 했다.
윤섭이 나타난 건 예정에 없던 일이었다.
“무슨 일이긴, 아까 말한 것처럼 매니저로 따라가는 거야.”
윤섭이 태연스럽게 말했다.
곧 강현의 눈이 차가워지자 윤섭이 황급히 말을 이었다.
“이번에 소현이가 너랑 같이 나가게 되었어.”
놀란 강현이 뒤를 돌아보자 소현이 배시시 웃었다.
그러자 옆에서 윤섭이 투덜거렸다.
“장난도 못 치겠네. 요즘 좀 부드러워졌다고 생각했는데, 성질머리는 그대로야.”
강현이 돌아보자 윤섭이 아차 하는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혼잣말이야. 혼잣말. 신경 쓰지 마.”
그런 윤섭을 보며 강현이 한숨을 내쉬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