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화 나보다 자네가 더 잘 알 테니
정신없이 음식을 집어넣었다.
산에 있을 때도 어르신들이 음식을 가져다주었지만, 대부분 나물 무침이나 전이었다.
제대로 된 음식을 먹은 건 오랜만이었다.
박민구는 음식을 먹는 게 이렇게 즐거운 일인지 새삼스럽게 깨닫게 되었다.
‘그래.’
죽었으면 이 기쁨도 깨닫지 못했을 거다.
마지막 한 가닥까지 깨끗하게 비운 박민구가 깊은숨을 내쉬었다.
그러고는 자리에서 일어나서 강현에게 갔다.
오만 원권 한 장을 받아 든 강현이 쳐다보자 박민구가 입을 열었다.
“다 드리는 건 아닙니다. 잔돈이 없어서요. 다시 산에 들어갈 것도 아니니 따라오시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러한 박민구의 말에 강현도 웃음을 흘렸다.
첫 만남을 떠올렸기 때문이었다.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건 괜찮아요. 저번에 많이 주셔서 충분합니다.”
강현이 오만 원권을 돌려주자 박민구가 고개를 저었다.
“저번에 드린 건 팁이에요. 정말로 맛있었거든요. 이번에도 그러고 싶은데, 돌아갈 차비를 생각해야 해서.”
“그럼, 외상으로 달아 놓을게요.”
강현의 말에 박민구의 눈이 커졌다.
강현이 그런 박민구를 보며 부드럽게 웃었다.
“나중에 다시 들러 주세요. 그때는 건강하신 모습으로요.”
돈을 재차 돌려주는 강현.
박민구는 차마 이번마저 거절하지 못하고 돈을 받았다.
그러고는 멋쩍게 웃으며 뒷머리를 긁적였다.
“이곳에 온 건 정말 행운 같군요.”
목이 메는지 그의 목소리는 잠겨 있었다.
강현은 그런 그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 그리 생각합니다.”
사람에게 생긴 상처는 사람을 통해서 치료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강현이 준비한 건 그뿐만이 아니었다.
강현은 작은 병 하나와 명함을 건넸다.
명함에는 박민구도 잘 알고 있는 회사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유명 매니지먼트.
“이건….”
“미리 말해 놨으니 연락해 보세요. 도와줄 겁니다. 운동선수를 관리하진 않지만, 적어도 믿을만한 회사를 소개해 줄 순 있을 거예요.”
박민구가 숨을 삼켰다.
생각지도 못한 말이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전 이제 산을 오를 수 없어요.”
제 다리를 가리켰다.
그러자 강현이 병을 가리켰다.
“바르면 부상에 도움이 될 겁니다. 저도 손목이 안 좋았는데 도움을 받았어요.”
강현의 말에 박민구가 눈을 껌뻑였다.
수많은 병원을 찾아가도 고개를 저었다. 약을 발라서 나을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몇 번이나 입을 열려다가 고개를 흔들었다.
“…감사합니다.”
순순히 받아 드는 박민구를 보며 강현이 오히려 놀랐다.
화를 내거나 꼬치꼬치 캐물을 것으로 생각했던 것이었다.
그런 강현을 보며 박민구가 입을 열었다.
“제게는, 지금 이 순간도 기적 같습니다.”
다른 이에게 말하면 믿기 힘들 거다.
거기에 약 하나가 더 생긴다고 해서 달라질 건 없었다.
물론, 박민구는 약이 효과가 있을 거로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박민구를 생각해서 준비한 선물이었다.
그 마음을 기쁘게 받아들이는 것이었다.
“그럼, 일이 정리되는 대로 다시 찾아뵙겠습니다. 일이 잘 끝나면 이 마을에 사는 것도 나쁘지 않겠네요.”
박민구가 매장과 창문 너머의 마을을 돌아보며 말했다.
마을의 인상이 마음에 든 모양이었다.
그렇게 인사를 건넨 박민구가 매장을 나섰다.
강현은 그런 박민구를 보며 미소 지었다.
박민구의 말과 달리 박민구가 마을에 내려오는 일은 한동안 없을 거다.
‘이제부터 바빠지실 테니.’
강현의 시선이 뒤로 향했다.
해맑게 웃고 있는 설기.
어제 설기의 침을 받기 위해 얼마나 노력했던가.
일부로 고기 한 점, 한 점을 정성스럽게 구우면서 침을 받아 냈다.
덕분에 이정환에게 건넸던 것보다 많은 양을 구할 수 있었다.
그걸로도 부족해서 새벽에 몰래 보내기까지 했다.
이정환과는 달랐다.
박민구는 은퇴하기에 너무 젊었다.
‘…기적인가.’
강현이 이 마을에 온 것이 기적이었던 것처럼, 박민구 역시 강현을 만난 것이 기적이었다.
강현도 박민구가 거절했으면 더 권유하지 않았을 거다.
설명하기 힘들기 때문이었다.
“쓸모없는 일이 되지 않아서 다행이네.”
“컹!”
강현이 설기를 보며 웃었다.
그리고 설기 역시 꼬리를 흔들며 웃었다.
* * *
서울로 향하는 버스에 탄 박민구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떠나온 마을을 떠올렸기 때문이었다.
‘…동화 속이라도 다녀온 것 같군.’
뜻하지 않은 선물까지 받았다.
박민구의 시선이 명함과 유리병으로 향했다.
유리병에 담긴 액체.
무엇에 홀린 듯이 병을 열었다.
그러고는 슬쩍 주변을 돌아보았다.
다행히 버스 안은 한적했다.
기사님을 제외하고는 앞쪽에 앉은 할머님과 박민구뿐이었다.
박민구는 등산화를 벗고 액체를 발랐다.
효과가 없다고 하더라도 강현을 탓할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혹시나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곧 박민구의 눈이 커졌다.
“…무슨.”
신기하게도 통증이 사라지고 있었다.
박민구는 놀란 눈으로 병을 보았다.
이렇게 즉각적으로 반응이 일어날 줄은 몰랐다.
박민구의 눈이 버스 기사에게 향했다.
버스에서 내려야 한다.
강현에게 가서 무슨 약인지 묻고 싶었다.
하지만 그 충동을 억눌렀다.
“…그래, 기적은 기적으로 봐야지.”
그걸 파헤쳐서는 안 되었다. 알려 줘도 되는 것이라면 강현이 말해 줬을 거다.
선의를 무시하는 꼴이었다.
“나도 정말 못났군.”
마음을 내려놨다고 생각했는데, 바로 욕심이 올라왔다.
씁쓸하게 웃은 박민구가 병뚜껑을 닫았다.
혹시라도 열리지 않게 잘 닫혔는지 몇 번이나 확인했다.
양도 얼마 없는데 흘러 나가면 큰일이었다.
소중하게 품에 갈무리한 뒤 발을 움직여 보였다.
아직 움직일 때 시큰거렸지만, 큰 발전이었다.
‘…이 정도면.’
다시 할 수 있을지도 몰랐다.
박민구의 눈빛이 바뀌었다.
그와 함께 손에 쥔 명함이 보였다.
이 역시 강현이 건네준 것이었다.
“…아직 포기하지 말라는 건가.”
더 나아갈 수 있었다.
각오를 다진 박민구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밑에서 고린내가 올라왔다.
약을 바른 부위였다.
며칠 산행을 하고 나서 신발을 벗었을 때와 비슷한 냄새.
하지만 최근에도 맡아 본 적이 있었다.
박민구는 아침에 보았던 강아지를 떠올렸다.
그러고는 피식 웃음을 흘렸다.
그럴 리가 없었다.
다시 맡아보니 그때와는 조금 달랐다.
고기의 냄새, 그리고 희미한 기름의 냄새까지 섞여 있었다.
‘좋은 약일수록 몸에 쓴 법이지.’
당연히 냄새 또한 고약할 거다.
하지만 발만 나을 수 있다면 이 정도는 문제도 아니었다.
그러나 곧 박민구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이거, 지하철로는 못 가겠구나.’
매너는 지켜야 했다.
약발을 받기 위해서 함부로 씻을 수도 없었다.
그렇게 새로운 고민이 떠오른 박민구였다.
* * *
시간은 흘러갔다.
에밀리야가 선물 받은 씨앗들은 하루가 다르게 쑥쑥 커 나갔다.
‘…정말 하루가 다르게.’
어느새 먼저 심은 허브들보다 더 커져 있었다.
마을 사람들이 어떤 식물이냐고 물을 정도였다.
‘이 기세라면 여름이 되기 전에 수확하겠는걸?’
강현은 어이없는 눈빛으로 밭을 보았다.
새싹이 올라오기 시작한 허브들과 달리 푸른 잎을 뽐내고 있는 아이들.
그리고 메추리알만 한 열매도 조금 자라 있었다.
자세히 보지 않았다면 모르고 지나갈 정도로 아주 조금.
혹시나 반지가 방해되는 게 아닌지 걱정했지만, 다행히 알아서 조금씩 위로 올라가고 있었다.
신기한 현상이었다.
“어, 저 양반. 저 때 그 양반 아니여?”
이장의 말에 강현이 상념에서 깨어났다.
고개를 돌리자 이장이 정기훈 작가와 이정환과 함께 뉴스를 보고 있었다.
뉴스에 나오는 인물은 강현도 잘 알고 있는 이였다.
박민구.
시간이 흘러서 까맣게 잊고 있었다.
그러다가 고개를 갸웃했다.
‘이장님이 민구 씨를 아셨나.’
하지만 곧 떠올릴 수 있었다.
‘…산속에서 막걸리를 같이 마셨다고 했지.’
강현보다 더 긴 시간을 함께했다.
[오늘은 노력과 성실의 아이콘이죠. 칠전팔기의 사나이. 산악인 박민구 씨를 모셨습니다. 시청자분들에겐 박민구 대장님이란 호칭이 더 친숙할 겁니다.]
앵커의 말에 쑥스러워하면서 인사를 건네는 박민구.
하지만 그의 눈빛에는 당당함이 묻어 나오고 있었다.
“저 양반, 다리는 나았나 보네. 잘 되었구먼.”
이장의 말에 사람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순간적으로 정기훈 작가와 이정환의 시선이 강현에게 향했다가 떨어졌다.
강현도 그 시선의 의미를 알기에 쓴웃음을 흘렸다.
고맙게도 둘은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그저 뉴스에 나오는 박민구를 축하해 줄 뿐이었다.
[얼마 전 크게 다치셨다고 들었는데, 이렇게 또 한 번 에베레스트를 정복하시다니 대단합니다. 비록 16분 차이로 과거의 기록은 넘지 못하셨지만, 그래도 놀라운 기록이죠. 부상을 딛고 다시 산에 오를 수 있었던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앵커의 질문에 잠시 고민하던 박민구가 입을 열었다.
“기적이죠. 다치고 수많은 의사를 찾아갔지만, 모두가 고개를 저었습니다. 정말로 기적을 만났다고밖에 말할 수 없습니다.”
박민구의 말에 앵커의 얼굴에 당혹스러움이 떠올랐다.
기적이라니.
처음 소개했던 것처럼 노력이나 성실을 말할 줄 알았다.
그런 앵커의 기색을 알아챘는지 박민구가 미소 지었다.
“모두가 저처럼 기적을 만날 수는 없을 겁니다. 하지만 미리 포기한다면 그 기적을 접할 기회조차 얻지 못할 겁니다.”
그제야 앵커가 탄성을 뱉었다.
[기회는 준비된 자들에게 오는 법이죠. 역시 박민구 대장님다운 말씀이십니다. 혹시 그 기적이 어떤 것이었는지 말씀해 주실 수 있을까요?]
그러나 박민구가 고개를 저었다.
“저도 그 상황을 정확히 정의하기는 힘듭니다. 그저 한바탕 꿈을 꾼 것 같은 기분입니다.”
[아….]
앵커의 입에서 다시 한번 곤혹스러운 탄성이 흘러나왔다.
하지만 박민구는 개의치 않았다.
“물론 덕분에 얻게 된 소중한 인연이 있죠. 은혜를 받기도 했고, 언젠가 갚을 생각입니다.”
앵커의 눈이 빛났다. 드디어 쓸만한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을 거란 생각에서였다.
[혹시 그에 대해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을까요?]
하지만 다시 박민구는 고개를 저었다.
“당사자가 원치 않아 할 것 같아서 말하지 않겠습니다. 기적은 기적으로 놔둬야 아름다운 법이죠.”
단호한 박민구의 말에 앵커가 어색한 웃음을 흘렸다.
아마 뉴스를 보고 있는 모든 이들이 비슷한 표정일 거다.
하지만 이 자리에 있는 이들은 박민구의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기적은 기적으로 놔둬야 아름답다라.”
정기훈 작가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이어서 이정훈도 고개를 끄덕였다.
“맞는 말이지.”
그러나 둘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이장은 눈살을 찌푸렸다.
“아니, 저게 뭔 귀신 씻나락 까먹는 소리여. 저럴 거면 말을 꺼내질 말든가! 그래서 뭔 기적인데!”
이장의 호통 소리에 사람들이 웃음을 터트렸다.
그러나 강현만은 멋쩍게 웃으며 볼을 긁적였다.
강현은 저 인터뷰가 강현에게 보내는 감사의 인사라는 걸 알기 때문이었다.
“아, 강현. 시간 될 때, 대길 그 친구에게 연락해 보게.”
“선생님께요?”
정기훈 작가의 말에 놀란 강현이 되물었다.
요즘 바빠서 얼굴 본지도 오래되었다.
“그래. 자네한테는 일부러 이야기하지 않는 것 같은데. 새로 방송을 하나 하는데, 문제가 있나 봐. 이쪽은 나보다 자네가 더 잘 알 테니.”
강현이 고개를 갸웃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