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화 음식은 맡기겠습니다
뢰스티.
한국의 감자전과 비슷한 요리였다.
사실 스위스가 아니라 독일의 베른에서 만들어진 요리였다.
스위스의 요리는 프랑스와 독일, 이탈리아의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얇게 채를 썬 감자에 소금과 후추로 간을 해 준다.
그리고 양파를 섞어서 구워 준 후 마지막에 치즈를 올려 주면 끝이다.
간편하고 손쉽게 먹을 수 있는 요리.
스위스 가정 요리 중 하나였다.
지역에 따라서 들어가는 재료가 조금씩 달랐지만, 지금 만든 레시피가 가장 기본적이었다.
‘호텔에서는 베이컨과 수란을 올리는 경우가 많지.’
같이 먹을 수 있게 소시지나 채소를 구워서 줄 때도 있었다.
그만큼 다양하게 쓰이는 요리였다.
하지만 중년인은 스위스에서 이 요리를 먹었다.
더군다나 금전적으로도 힘든 시기.
당연히 저렴한 뢰스티를 먹을 수밖에 없을 거다.
대신 다른 재료들을 따로 담았다.
소시지와 버섯, 아스파라거스.
완성된 요리를 들고 나갔다.
“주문하신 뢰스티입니다. 맛있게 드세요.”
“…감사합니다.”
중년인의 인사를 받은 강현은 주방으로 돌아왔다.
중년인은 바로 포크를 들지 않고 뢰스티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노릇노릇하게 구워진 뢰스티.
무슨 생각을 하는 걸까.
강현으로서는 짐작하기 힘들었다.
“끼잉.”
그때, 옆에 있던 설기가 칭얼거렸다.
자신도 맛보고 싶다는 뜻이었다.
“쉿. 이따가 해 줄게.”
지금은 중년인을 방해하지 않는 게 좋았다.
강현의 말에 설기가 시무룩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드디어 중년인이 포크를 들어 올렸다.
나이프로 뢰스티를 자르자 하얀 김이 모락모락 올라왔다.
중년인은 먹기 좋게 잘린 뢰스티를 입으로 가져갔다.
그리고 천천히, 아주 천천히 씹었다.
마치 추억을 곱씹듯이.
강현은 그의 시간을 방해하지 않기 위해서 조용히 기다렸다.
그의 식사가 끝난 건 한참 뒤였다.
강현이 커피를 건네자 중년인이 놀란 눈으로 강현을 돌아보았다.
“커피도 팔았습니까?”
메뉴에는 적혀 있지 않기 때문이었다.
강현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뇨. 팔 정도의 수준은 아니라서. 서비스입니다. 저번에 주신 커피의 보답이에요.”
강현의 말에 중년인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곧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감사히 마시겠습니다.”
처음 봤을 때보다 표정이 부드러웠다.
“음식은 입맛에 맞으셨습니까?”
“무척이나요. 예전에 먹었던 것보다 맛있었습니다.”
중년인의 말에 강현이 멋쩍게 웃었다.
“맛있었다니 다행이네요.”
“…예.”
강현의 말에 담긴 뜻을 읽은 중년인이 씁쓸하게 웃었다.
곧 커피를 한입 홀짝이고는 입을 열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그대로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도 있었습니다. 산은 제게 있어서 쉼터나 다름이 없었어요. 나란 존재도 무언가를 이뤄낼 수 있다는 희망을 품게 해 주죠.”
묵묵히 오르다 보면 언젠가 정상에 도달한다.
그 성취감은 말로 표현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강현은 조용히 그의 이야기를 들었다.
그는 곧 고개를 저었다.
“…어쩌면 산은 핑계고 그저 도망치고 싶었을 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것도 쉽지 않더군요.”
중년인은 자신을 빤히 쳐다보는 강현을 보며 입을 열었다.
“포기하려고 하면 어르신들이 한 분씩 나타나셔서 먹을 것을 건네주셨습니다.”
“아.”
강현이 탄성을 흘리자 중년인이 웃음을 터트렸다.
“따로 위로를 건네거나 한 것도 아닙니다. 그저 오셔서 음식을 건네고 나중에 접시만 빼놓으라고 말씀하시더군요. 아, 중간에 막걸리를 들고 오신 분은 계셨습니다.”
강현이 볼을 긁적였다.
그 사람이 누군지 짐작이 가기 때문이었다.
“설득이라도 하려는 것인지 알았는데, 한동안 넋두리만 하시다가 떠나가시더군요. 그저 술친구가 필요해서 오신 것 같았습니다.”
우와.
강현이 눈을 질끈 감았다.
얼굴이 화끈거리기 때문이었다.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해서 왔다는데 무슨 짓을 한 건가.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중년인이 고개를 저었다.
“오히려 더 격려되었어요. 그릇을 돌려주기 위해서 기다리다 보니 제 고민도 부질없어 보이더군요. 이 역시 어리광이죠.”
중년인이 자조적으로 웃었다.
“산은 그때와 변하지 않는데. 언제부터인가 제가 멋대로 기댔던 거죠.”
강현으로서는 잘 이해할 수 없는 말이었다.
“오르지 못한다고 해서 산이 아니게 된 게 아닌데.”
그러나 어째서인지 홀가분해 보였다.
“그러고 보니 이상한 일도 있었습니다.”
강현이 쳐다보자 중년인이 아리송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자고 일어나니 동물의 사체들이 놓여 있더군요. 간혹 살쾡이나 여우 같은 야생 동물을 도와주면 그런 일이 있다고는 하던데.”
도와준 기억이 없었다.
강현은 속으로 숨을 삼켰다.
범인이 누군지 알기 때문이었다.
뒷발로 털을 긁어 내던 설기가 강현과 눈을 마주치자 고개를 갸웃했다.
곧 중년인이 강현을 돌아보았다.
“아, 혹시 이 근처에 씻을 곳이 있습니까? 이 꼴로 다니기에는 힘들어서.”
중년인이 제 몸을 가리켰다.
“마을에 손님용 집이 있어요. 숙박비는 따로 안 받으니 정리만 깨끗하게 해 놔 주시면 됩니다.”
강현의 말에 중년인의 눈이 커졌다.
그리고 천천히 창문 너머를 바라보았다.
마을의 정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정말 이상적인 마을이군요. 영화 속이라도 온 것 같습니다.”
“다들 좋은 분들이라서.”
강현도 고개를 끄덕였다.
강현 역시 같은 생각을 했다.
이런 마을에 있는 것 자체가 행운이었다.
“그럼, 염치 불구하고 부탁드리겠습니다.”
“예.”
고개를 끄덕인 강현이 중년인을 안내했다.
어차피 매장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이었다. 그렇게 중년인을 안내하고 돌아오자 익숙한 얼굴들이 강현을 맞이했다.
정기훈 작가와 이정환.
“데려다준 건가?”
“예.”
둘은 강현이 어딜 갔다 왔는지 아는 눈치였다.
고개를 끄덕인 이정환이 입을 열었다.
“내 신경 쓰여서 사정을 알아봤네.”
누군지 말할 것도 없었다. 방금 쉬러 간 중년인이었다.
“등산가들은, 대부분 기업의 스폰을 받네. 박민구, 그 친구도 마찬가지지.”
박민구. 강현은 그제야 중년인의 이름을 알 수 있었다.
강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등산가뿐만이 아니었다. 커다란 대회가 없는 스포츠 선수들은 거의 비슷했다.
등산 역시 산에 오른다고 상금이 나오는 게 아니었다.
“이번 부상으로 기업에서 일방적으로 계약을 해지했다더군. 게다가 위약금까지 청구했어.”
이정환의 말에 강현이 눈살을 찌푸렸다.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이런 일에는 위험이 따르는 게 당연했다.
기업이 그걸 모를 리가 없었다.
“…이런 일이 흔한가요?”
“아니지.”
정기훈 작가가 고개를 저었다. 그의 얼굴도 딱딱하게 굳은 상태였다.
그 역시 이번 일에 분노하고 있는 것이었다.
“무리하게 산행을 잡은 것도 그쪽이야. 그런 주제에 몸 관리를 소홀히 해서 회사의 요구에 따르지 못했다고 주장했어.”
한 번 등반을 마치면 몸이 망가진다.
충분히 회복할 시간이 필요했다.
“다른 종목이었다면 선수들을 보호할 수단이 있었겠지만.”
“…등산 쪽은 부족하다.”
강현이 중얼거리자 둘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의 얼굴에 안타까움이 떠올랐다.
둘은 박민구의 심정을 잘 알았다. 그들 역시 겪어 온 일이었다.
그제야 그가 여기까지 온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단순히 다리를 다쳐서 온 게 아니었다.
평생 산에 오르던 이가 다른 일을 시작하는 건 쉽지 않았다.
하물며 기업에 막대한 배상까지 해야만 했다.
앞이 보이지 않을 거다.
“도움이 될 수 있는 걸 찾아봤는데 쉽지 않아.”
정기훈 작가가 혀를 찼다.
“…나으면.”
“응?”
“발목이 나으면 어떨까요?”
강현의 물음에 정기훈 작가가 고개를 저었다.
“그도 여러 가지 알아봤을 걸세. 고치긴 쉽지 않아.”
그 역시 유명한 등산가였다.
기업도 바로 포기하진 않았을 거다.
여러 가지를 시도했을 거다. 의미가 없는 가정이었다.
그러나 이정환은 달랐다.
강현의 도움을 받은 적이 있기 때문이었다.
“달라질 걸세. 발목이 나으면 다른 기업과 계약을 맺을 수 있겠지. 그럼 그쪽에서 알아서 처리해 줄 거야.”
그렇다면 기업과 개인의 싸움이 아니었다.
기업과 기업.
“하물며 박민구, 그 친구가 등반에 성공한다면.”
지금의 기업이 억지를 부린 게 되어버린다.
“…그렇게 된다면 반대로 이쪽이 위약금을 받아 낼 수 있지.”
일방적인 계약 해지에 대한 위약금.
정기훈 작가가 담담히 말했다.
강현과 이정환의 대화를 듣다 보니 무언가 있음을 알아챈 것이었다.
강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 일의 여파가 어떻게 미칠지는 강현도 예상할 수 없었다.
강현 역시 모든 이에게 선행을 베풀 정도로 오지랖이 넓지 않았다.
하지만.
‘적어도 눈앞에서 곤란해하는 이를 외면할 순 없지.’
비록 이야기를 나눈 건 두 번뿐이었지만, 박민구란 사람을 잘 알 수 있었다.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고마움을 표현하는 이였다.
도와주고 싶었다.
강현의 시선이 밑으로 향했다.
그런 강현의 시선을 받은 설기가 고개를 끄덕였다.
* * *
“으음.”
간지러움에 박민구가 눈을 떴다.
고개를 내리자 새하얀 털 뭉치가 보였다.
아직 꿈이라고 꾸고 있는 건가?
낯선 천장.
곧 정신이 조금씩 돌아왔다.
“…넌.”
어제 먹은 매장에 있던 강아지였다.
박민구와 눈이 마주친 강아지는 제 할 일을 맞췄다는 듯이 유유히 방을 빠져나갔다.
‘어떻게 들어온 거지.’
박민구는 열려 있는 방을 보며 고개를 저었다.
어제 자기 전에 분명 문을 닫았었다.
하지만 그 생각은 오래 이어지지 않았다.
“이렇게 푹 잔 것도 오랜만이야.”
최근 제대로 잠을 잔 적이 있었던가.
몸이 가벼웠다. 이렇게 개운한 적이 얼마 만이던가.
벽을 짚고 몸을 일으키던 박민구의 눈이 커졌다.
발을 디딜 때마다 쿡쿡 쑤시던 고통이 사라진 것이었다.
놀란 박민구가 조심스럽게 발목을 돌려 봤다.
그리고 곧 실소를 흘렸다.
발목을 돌릴 때마다 조금씩 통증이 올라오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래, 나았을 리가 없지.’
고통이 준 것만 해도 큰 발전이었다.
씁쓸하게 웃던 박민구는 아래에서 올라오는 냄새에 눈살을 찌푸렸다.
고린내.
어제 분명 목욕하고 잤을 텐데?
의아해하던 박민구는 아침에 봤던 강아지를 떠올릴 수 있었다.
“그렇군.”
냄새의 원인을 찾았다. 그러나 그리 나쁜 기분은 아니었다.
박민구의 입꼬리가 조금이나마 올라갔다.
“이제 올라가야지.”
이대로 무너질 순 없다.
방황은 충분히 했다. 이제는 앞으로 나아갈 때였다.
고개를 끄덕인 박민구가 옷을 입었다.
집을 정리하고 밖으로 나가자 눈 부신 햇살 때문에 눈살을 찌푸렸다.
봄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따가운 햇살.
하지만 곧 상쾌한 바람이 불어왔다.
그런 박민구가 향한 곳은 강현의 매장이었다.
“어서 오세요.”
언제나처럼 환하게 반겨 주는 강현.
“식사 좀 부탁해도 됩니까?”
“뢰스티로 준비해 드릴까요?”
그러자 박민구가 고개를 저었다.
“음식은 맡기겠습니다. 뢰스티만 빼고요. 언제까지 과거에 얽매일 순 없죠.”
“예. 준비해 드릴게요.”
박민구의 말에 강현이 미소 지었다.
그리고 나온 건 따뜻한 감자 수프와 매콤한 토마토 파스타였다.
먹으면서 웃음이 나오는 음식이었다.
분위기 때문만이 아니었다.
서울에서도 보기 힘든 수준.
뒤늦게 이런 요리사가 시골에 있다는 게 놀라웠지만, 곧 고개를 저었다.
지금 그게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박민구는 밥을 먹는 이 순간을 즐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