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화 돕게 해 주세요!
강현이 돌아왔을 때, 마을은 활기찼다.
그 전과는 다른 모습.
분주하게 오가는 사람들을 보며 강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멀리서 기계 소리도 들려왔다.
‘땅을 가나 보네.’
겨울 동안 얼어있던 땅을 뒤집는 것이었다.
그래야 새롭게 농사를 지을 수 있었다.
그렇게 마을을 구경하며 걷고 있자 설기의 귀가 쫑긋 솟아올랐다.
“무슨 일 있어?”
강현의 물음에도 주변을 두리번거리는 설기.
곧 킁킁 냄새를 맡더니 뛰쳐나갔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눈을 껌뻑이는 강현.
그러나 설기만 반응한 게 아니었다.
가슴 주머니에 있던 토리도 꼼지락거리며 얼굴을 내밀었다.
흘러내린 반지를 다시 머리에 쓰는 토리가 강현을 돌아보았다.
“내려 달라고?”
끄덕끄덕.
강현이 토리를 바닥에 내려주자 토리가 땅속으로 들어갔다.
설기라면 모를까, 토리까지 저런 반응이라니.
뭔가 일이 있는 게 분명했다.
강현은 걸음을 서둘렀다.
그러자 보이기 시작하는 집.
“컹! 컹!”
설기가 집 앞에서 강현을 보고 짖고 있었다.
한 번 짖더니 빙그르르 돌고 다시 짖는 설기.
빨리 오라고 닦달하는 것이었다.
“알았어.”
한숨을 내쉰 강현이 황급히 집으로 향했다.
“대체 무슨 일이야?”
집에 도착한 강현이 고개를 갸웃했다.
변화가 없기 때문이었다.
‘도둑이라도 들었나 싶었는데.’
이런 시골까지 도둑질하러 올 리 없었다.
“컹!”
그쪽이 아니란 듯 짖는 설기. 고개를 돌리자 어린나무 아래에 있는 설기가 보였다.
설기뿐만 아니라 토리도 나무 아래서 물끄러미 위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둘을 따라 시선을 옮긴 강현은….
“어?”
눈을 크게 떴다.
어린나무에 무언가가 달려 있었기 때문이었다.
“…열매?”
그러나 열매치고는 모양이 조금 이상했다.
‘마치 알 같네.’
강현의 시선이 설기와 토리에게 향했다.
“얘 때문에 그런 거야?”
“컹! 컹!”
끄덕끄덕.
둘의 반응을 본 강현은 볼을 긁적였다.
‘둘이 저러는 걸 보니 평범한 건 아니네.’
정령목의 가지에서 나온 열매.
평범할 리가 없었다. 강현은 다시 열매를 살폈다.
엄지손가락 한마디만 한 조그마한 열매.
메추리알보다 조금 작은 크기였다.
강현은 앤의 정령목을 떠올렸다.
‘열매는 못 본 거 같은데.’
나뭇잎만 풍성했다.
그리고 일반적인 열매라면 저렇게 하나만 나올 리가 없었다.
“컹! 컹!”
강현을 부르며 점프를 뛰는 설기.
강현은 곧 그 뜻을 이해했다.
“가까이에서 보고 싶다고?”
“컹!”
웃음을 흘린 강현이 설기를 들어 올렸다.
그러자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열매를 바라보는 설기.
먹을 걸 볼 때와는 다른 반응이었다.
그리고 강현의 기억 속에 비슷한 모습이 있었다.
‘그래, 하은이 처음 볼 때가 저랬지.’
민호와 수진의 딸.
그때, 누군가가 강현의 바지를 당겼다.
토리였다.
“토리도 보고 싶어?”
끄덕끄덕.
강현은 설기를 내려놓고 토리를 들어 올렸다.
그러자 아쉬운지 끼잉, 앓는 소리를 내는 설기. 하지만 더 조르지 않고 뒤로 물러났다.
토리에게 양보하겠다는 뜻이었다.
‘기특하네.’
이따가 간식이라도 챙겨 줘야겠다.
그리 생각한 강현이 토리를 바라보았다.
토리 역시 설기와 마찬가지로 열매를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더니 제 머리로 손을 뻗었다.
“응?”
하지만 제 뜻대로 안 되자 강현을 돌아보는 토리.
“…열매에 올려 달라고?”
끄덕끄덕.
에밀리야에게 받은 반지.
고작 반나절도 안 되었지만, 토리가 얼마나 아끼는지 알고 있었다.
여기 올 때까지 한시도 떨어지지 않고 있었다.
“괜찮겠어?”
강현의 물음에 잠시 고민하던 토리가 고개를 끄덕였다.
강현은 그런 토리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반지를 열매 위에 올렸다.
마치 제 것인 것처럼 쏙 들어가는 반지.
그때, 뒤에서 인기척이 들려왔다.
“거기 서서 뭐 하는 겨?”
“아, 이장님.”
강현은 토리를 가슴 주머니에 넣고는 고개를 돌렸다.
휘적휘적 걸어오는 이장.
그의 손에는 괭이가 들려 있었다.
작업이라도 하다가 온 건가? 그렇다고 보기에는 괭이의 상태가 너무나 깨끗했다.
“왜? 나무에 문제가 있어?”
“아뇨. 열매가 나서요.”
“열매?”
이제 막 새싹이 나는 나무에 무슨 열매란 말인가.
강현의 말에 이장이 나무를 살피더니 고개를 저었다.
“열매가 어딨는디?”
그런 이장의 모습을 보고 강현은 깨달았다.
‘보이지 않는구나.’
강현과 설기, 토리의 눈에만 보이는 것이었다.
강현은 서둘러 입을 열었다.
“아뇨. 제가 착각했나 봐요.”
“그렇지? 그래도 너무 실망하지는 마. 꾸준히 키우다 보면 열매가 날 거여.”
“예.”
강현은 쓴웃음을 삼키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키우는데 관심 있으니 잘됐구먼. 자.”
이장은 들고 온 괭이를 강현에게 건넸다.
얼떨결에 괭이를 받아 든 강현이 고개를 갸웃했다.
“혹시 손이 필요하세요?”
일꾼이 필요하냐는 의미였다.
그러자 이장이 손을 내저었다.
“손은 무슨! 그짝 꺼야.”
“예?”
“이 건물 그짝 꺼 아니야?”
이장이 건물을 턱짓했다.
“아, 예.”
강현의 것이 맞았다.
“그럼, 저쪽 텃밭도 그짝 거지.”
그제야 강현은 건물 뒤에 있는 작은 땅을 떠올렸다.
‘그러고 보니 부동산에서 그런 말을 했었지.’
당시에는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고작 8평 남짓. 원룸 정도 되는 크기였다. 마당 같은 느낌이었기에 아무런 생각이 없었다.
그런 강현의 모습을 본 이장이 혀를 찼다.
“그래도 시골에 왔는데 농사는 지어 봐야지. 작년에야 시기를 놓쳤지만, 땅을 놀려서 뭐 해. 잘 키우면 용돈이라도 벌 수 있을 거여.”
이장이 어리둥절한 강현의 어깨를 두드렸다.
“하다가 모르는 것이 있으면 물어보고.”
그리 말한 이장은 그대로 휘적휘적 떠나갔다.
그렇게 떠나가는 이장을 보며 강현은 볼을 긁적였다.
손에는 얼떨결에 받은 괭이가 그대로 남아있었다.
땅을 뒤집을 때 쓰는 것.
고개를 돌리자 설기와 토리가 강현을 쳐다보고 있었다.
초롱초롱한 둘의 눈을 보니 웃음이 흘러나왔다.
“…농사라.”
생각지도 못했다.
그러나 최근에는 시간이 남았다.
‘서울의 일도 슬슬 정리된 것 같고.’
한정우에게서 연락이 오는 것도 드물어졌다. 새로운 매장이 안정된 것이었다.
“나쁘지 않겠어.”
강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일반 식자재는 옆 마을에서 구할 수 있었지만, 허브는 매번 읍내로 나가야 했다.
직접 키우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었다.
이장의 말대로 마을 사람들 모두가 훌륭한 농사꾼이었다.
모르는 건 배우면 되었다.
게다가 에밀리야도 있었다.
요정.
그녀에게 조언을 구하면 실패할 리가 없었다.
‘그리고 저것도 물어봐야 하니.’
강현의 시선이 어린나무로 향했다.
그때, 누군가가 눈에 들어왔다.
강현을 향해 두 팔을 벌리고 있는 토리.
“그래, 너도 있었구나.”
강현이 웃음을 흘렸다.
* * *
다음날부터 강현의 아침은 분주해졌다.
새벽에 마을 한 바퀴를 돌고 와서 바로 괭이질해야 하기 때문이었다.
식당에는 지장을 줄 수 없으니 이른 아침에 움직여야 했다.
하지만 그리 나쁜 기분은 아니었다.
오히려 아침마다 땀을 흘리니 상쾌한 기분이었다.
안 그래도 최근에 체력이 늘어난 탓에 뜀박질만으로는 운동이 되지 못했다.
괭이질을 멈춘 강현이 목을 축였다.
힐끗 옆을 보자 나무 앞에 앉아있는 설기가 보였다.
열매를 보려는 것이었다.
이제는 일상이 되었다.
그런 설기를 보던 강현이 고개를 갸웃했다.
오늘은 토리의 모습이 보이지 않기 때문이었다.
토리를 찾아 두리번거리던 강현은 화들짝 놀랐다.
강현의 앞에서 쏙, 튀어나왔기 때문이었다.
“…또 도와준 거야?”
강현의 물음에 고개를 끄덕이는 토리.
실소를 흘린 강현은 토리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도와주는 건 고마운데. 조심해야 해.”
잘못하면 괭이질에 맞을지도 몰랐다. 강현의 말에 고개를 갸웃하는 토리.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었다.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 강현은 몸을 일으켰다.
전에도 말했지만, 어쩔 수 없는 모양이었다.
게다가 돕는다고 하는데 뭐라고 할 수도 없었다.
‘어차피 땅 고르는 건 이제 끝났으니.’
토리 덕분에 예상보다 빨리 끝났다.
남은 건 씨앗을 심는 것.
‘…읍내에 한 번 갔다 와야겠네.’
허브 종자를 사려면 읍내에 나가야 했다.
어디에 파는지는 이미 알고 있었다.
전에 에밀리야에게 선물해 주기 위해 한 번 다녀왔기 때문이었다.
‘오레가노랑 타임, 바질 정도면 되려나?’
파슬리와 로즈메리는 이곳에서도 구할 수 있었다.
강현은 정리된 땅을 보았다.
세 개만 키우기에는 제법 넓은 땅.
“…꼭 그것만 키울 필요는 없지.”
강현의 머릿속에 이계의 식물들이 떠올랐다.
그중에는 강현이 보기에도 매력적인 식자재도 있었다.
마구잡이로 키우면 문제가 생길지도 모르지만.
‘여기 내에서만 키우면 괜찮을 것 같은데?’
한 번 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이것도 한번 상담해 봐야겠네.’
강현은 괭이를 내려놓았다.
* * *
“정령목에 열매가요?”
주말.
강현의 이야기를 들은 에밀리야가 작게 탄성을 뱉었다.
역시나 흔한 현상은 아니었다.
저 멀리 서 있는 아우라가 이쪽을 힐끗거리고 있었다.
설기를 보내 연락하니 마침 같이 있었는지 함께 온 것이었다.
‘그냥 같이 들어도 되는데.’
관심없는 척 고개를 돌리고 귀만 쫑긋거리는 아우라를 보며 강현이 실소를 흘렸다.
강현은 아우라에게서 시선을 떼고 생각에 잠긴 에밀리야에게 보았다.
강현의 시선이 닿자 에밀리야가 미안한 듯 입을 열었다.
“죄송해요. 그에 대해서는 저도 들어 본 적이 없어요.”
에밀리야의 말에 강현의 눈이 커졌다.
그녀도 모를 줄은 몰랐다.
“정령목은 정령 중에서도 드물어요. 게다가 온전히 정령계에만 속해 있는 아이들도 아니어서.”
강현은 그 뜻을 이해했다.
정령들과 달리 정령목은 다른 이들도 볼 수 있었다.
“오히려 세계수와 닮았죠.”
“세계수요?”
생소한 단어에 강현이 고개를 갸웃하자 에밀리야가 부드럽게 웃었다.
“예. 이 세계와 정령계를 이어 주는 나무에요. 음, 복잡한데. 세계수는 정령이라기보다 신에 가까운 존재예요.”
강현이 눈을 껌뻑였다.
신이란 말에 힐끗 설기를 보자 설기가 긴 하품을 했다.
설기도 신의 혈족이 아니었던가. 그러나 하는 꼴을 보면 신 같지는 않았다.
“아마 저보다 앤 씨가 더 잘 거예요.”
정령목과 계약한 장본인 아닌가.
그러나 만나고 싶다고 해서 쉽게 만날 수 있는 이가 아니었다.
앤이 사는 곳까지 가려면 적어도 일주일은 걸렸다.
‘왕복하면 이주지.’
강현이 곤혹스러워하자 에밀리야가 입을 열었다.
“장로분들이나 다른 요정들에게 여쭤 볼게요.”
장로들 역시 에밀리야만큼이나 오랜 생을 살았다.
누구 하나쯤은 정령목에 대해서 알 수도 있었다.
“예. 부탁드려요.”
강현이 고개를 숙였다. 그러나 용무는 열매만이 아니었다.
“그리고 새롭게 식물을 키운다고 하셨죠?”
“예.”
목소리 톤이 달라졌다. 아까와 달리 반짝이는 눈으로 강현을 바라보는 에밀리야.
“그에 대해서는 다행히도 제가 도울 수 있을 것 같네요. 아니, 돕게 해 주세요!”
그녀의 시선에 강현은 저도 모르게 뒷걸음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