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화 너무 많기는 하네
의자에 올라가서 장롱 너머를 확인했다.
아주머니의 말대로였다.
먼지와 거미줄이 깨끗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강현은 설기를 들어서 내려왔다.
그리고 먼지털이개로 했던 것처럼 거미줄을 걷어 냈다.
“…청소까진 말리지 않겠는데, 벌레는 주워 먹으면 안 된다.”
특히나 거미.
강현의 말에 설기의 몸이 움찔거렸다.
설마.
강현의 눈초리가 날카로워졌다.
난 아무것도 몰라요, 하면서 고개를 갸웃하는 설기.
하지만 잠깐 동안 설기의 눈동자가 떨려 오던 걸 알고 있었다.
강현이 다시 한번 한숨을 내쉬었다.
그 뒤로는 일사천리였다.
아주머니들의 칭찬에 설기도 더 이상 강현의 눈치를 보지 않고 움직였다.
제 몸으로 청소를 시작한 것이었다.
“아이쿠, 저 쪼그만 게 어찌 저리 잘 올라가지.”
“김 씨 언니네도 높은데 좋아하긴 하는데 저만큼은 못하던데.”
“걘 고양이잖아.”
아주머니들은 설기를 보며 쑥덕거렸다.
설기 덕분에 일하기 편해진 건 사실이었다.
강현도 못마땅한 표정으로 바라볼 뿐 말리지 못했다.
‘…하긴, 상후도 일하고 있으니.’
마을의 행사였다. 돕겠다고 나서는데 말릴 수는 없었다.
그렇게 또 다른 집을 청소하고 나오자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동생, 왔어?”
아까보다 기운 없어 보이는 장만기.
“뭐 하시는 거예요?”
“담 보수.”
장만기가 그리 말하고는 돌담에 돌멩이를 끼워 넣었다.
“에구구. 허리야.”
장만기가 뒤로 물러나자 재빨리 황토색 시멘트를 바르는 곽도현.
장만기와 달리 곽도현의 얼굴은 밝았다.
“할 만해?”
“예, 재밌어요. 저희 마을은 이렇게 다 같이하진 않거든요.”
곽도현이 웃으며 말했다.
여럿이 작업하는 게 신기한 모양이었다.
강현 역시 비슷한 생각을 가지고 있기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멀리서 목소리가 들렸다.
“빨리 혀! 오늘 내로 다 고치려면 부지런히 움직여야 혀!”
이장이었다.
하지만 그런 이장을 붙잡는 이가 있었다.
“뭐가 그리 급하다고 닦달해. 오늘 못하면 내일 하면 되지! 참 왔으니 참부터 먹고 해!”
박 씨 할머니.
뒤로는 다른 할머니들도 서 있었다.
아주머니들이 일하고 있으니 직접 식사를 만들어 오신 것이었다.
“그럴까?”
주전자를 본 이장이 저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그러자 멀리서 그 모습을 본 장만기가 소리쳤다.
“맞습니다! 다 먹고 살자고 하는 것 아닙니까?”
넉살 좋은 그의 말에 듣고 있던 사람들이 웃음을 터트렸다.
헛기침한 이장이 주변을 돌아보았다.
“다들 먹고 하지.”
“아자!”
이장의 말에 장만기가 환호성을 내질렀다.
사람들이 우르르 모였다.
그러나 전보다 숫자가 많이 줄었다.
‘선생님들도 안 계시고.’
강현이 주변을 두리번거리자 이장이 입을 열었다.
“다른 사람들은 길을 청소하고 있을 거여.”
“아.”
그러고 보니 그런 이야기를 했었다.
“그쪽도 사람을 보냈으니 여기나 잘해.”
박 씨 할머니가 퉁명스럽게 말했다. 그러나 그 속에 담긴 감정을 알기에 강현이 미소 지었다.
“우와, 주먹밥입니까?”
먹기 좋게 말아진 주먹밥.
그리고 가지런히 놓인 두릅과 고추장이 보였다.
마지막으로 냉이된장국까지.
두릅과 냉이. 둘 다 봄을 상징하는 나물이었다.
“벌써 나물들이 나와요?”
“그럼 봄인데.”
옆에 있던 아주머니가 대신 대답했다.
다른 이들도 고개를 끄덕였다.
고추장에 두릅을 푹 찍어서 입으로 가져가는 이장과 장만기.
이어서 막걸리를 벌컥벌컥 들이켰다.
그 모습을 본 강현이 고개를 갸웃했다.
냉이는 몰라도 두릅은 4월에나 나오는 게 아닌가.
그런 강현의 생각을 알아챘는지 아주머니 한 분이 웃으며 입을 열었다.
“얘는 박 씨 할머니가 따로 심은 걸 거야.”
“아.”
그렇다면 이해가 되었다. 덕분에 남들보다 빨리 먹을 수 있게 된 것이었다. 강현의 시선이 향하자 박 씨 할머니가 퉁명스럽게 입을 열었다.
“농사꾼이 농사짓는 게 무슨 큰일이라고.”
말과 달리 박 씨 할머니의 얼굴에 자랑스러움이 떠올랐다.
요리사와 같았다.
키운 작물을 맛있게 먹어 주는 것이야말로 농사꾼의 기쁨이었다.
“그러고 보니 저 위에 달래도 올라왔더라고.”
한 아주머니의 말에 다른 이들의 눈이 빛났다.
“내일 가서 따오려고.”
“저도 같이 가요.”
“저도.”
이런 시골에서는 나물 캐러 가는 것 역시 하나의 즐거움이었다.
“강현 총각도 어때?”
아주머니의 질문에 시선들이 향했다.
기대 섞인 눈빛.
강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같이 데려가 주시면 저야 감사하죠.”
“역시 강현 총각이야. 말도 참 예쁘게 해.”
“우리 남편도 배웠으면 좋겠네.”
“그렇지? 아주 일등 신랑감이야. 결혼만 하면 딱이겠어.”
결국, 돌고 돌아서 다시 이건가.
강현은 어색하게 웃었다.
모두가 즐거운 자리.
그러나 홀로 이 자리를 즐기지 못하는 이도 있었다.
“끼잉.”
앞발로 주먹밥을 툭툭 치는 설기.
밥이 왔다고 했을 때만 해도 꼬리가 신나게 흔들렸는데, 어느새 멈춰 있었다.
불쌍한 표정으로 강현을 바라보는 설기.
그러나 강현으로서도 방법이 없었다.
그때, 설기의 모습을 본 한 아주머니가 고개를 갸웃했다.
“설기가 웬일이래? 속이 안 좋아?”
설기가 먹을 것을 거부하기 때문이었다.
그러자 옆에 있는 아주머니가 다리를 툭 쳤다.
“쟨 고기 아니면 안 먹잖아.”
“그래?”
눈을 휘둥그레 뜨는 아주머니. 그러나 다른 이들은 알고 있었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어느새 설기의 입맛까지 마을에 알려진 것이었다.
강현은 얼굴이 화끈거리는 걸 느끼며 설기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지금은 이거 먹고 참아. 이따 고기 구워 줄게.”
“끼잉?”
진짜?
설기가 눈을 반짝였다. 강현이 고개를 끄덕이자 설기가 허겁지겁 주먹밥을 먹어 치웠다.
‘…역시, 먹을 수 있었네.’
그릇을 깨끗하게 비운 설기가 고개를 들었다.
“컹!”
다 먹었어, 봤지?
그런 눈빛.
강현이 고개를 끄덕이기도 전에, 뒤에서 웃음이 터져 나왔다.
“이장님. 저녁은 고기 먹어야겠어요.”
“맞아, 맞아. 설기 저 녀석이 얼마나 일을 잘하는데. 고기 정도는 먹여야죠.”
“안 그래도 주문했어! 힘쓴 뒤에는 고기를 먹는 게 당연하지.”
“컹!”
맞다는 듯 설기가 짖었다.
그 때문에 사람들이 다시 한번 웃음을 터트렸다.
“크으. 고기 먹기 위해서라도 후딱 끝내야겠어.”
남은 막걸리를 들이켠 정만기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자 다른 사람들도 하나둘 따라서 일어났다.
식사가 끝났으니 다시 일할 시간이었다.
밥을 먹은 덕분인지, 아니면 저녁에 있을 고기 파티 때문인지.
전보다 작업이 빨라졌다.
그러나 그 누구보다 열성적인 건 설기였다.
* * *
지글지글.
불판 위에 고기가 올라갔다.
“역시 노동 후의 한잔이 최고지!”
“컹!”
막걸리를 들이켠 장만기의 말에 여기저기도 호응이 일어났다.
다들 일이 끝나자마자 모여서 꼴이 엉망이었지만, 누구도 신경 쓰지 않고 있었다.
옆에서 고기를 받아먹고 있는 설기도 힘차게 짖었다.
역시나 가장 빨리 고기가 익는 자리를 찾아낸 것이었다.
강현은 애써 설기에서 눈을 뗐다.
“저럴 거면 차라리 이 마을로 이사 오지.”
강현이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그러나 옆에 듣던 곽도현은 쓴웃음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여기뿐만 아니라 다른 마을에도 다니세요.”
콜라를 홀짝이는 도현의 말에 주변이 조용해졌다.
표정을 보니 몇 번 끌려가 본 게 분명했다.
“…정말 대단한 양반이네.”
누군가의 중얼거림에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막걸리잔을 들어 올리고 건배를 외치는 정만기.
사람들이 잔에 시선이 팔린 틈을 타서 냉큼 고기를 입으로 가져가는 설기.
사람들은 애써 그들을 외면했다.
그러던 강현의 눈에 누군가가 들어왔다.
어르신 삼인방이었다.
그나마 멀쩡한 황대길과 달리 다른 둘은 앓는 소리를 내고 있었다.
“괜찮으세요?”
둘은 고개를 젓는 걸로 대답을 대신했다.
“그러길래 운동 좀 하라니까.”
황대길이 웃으며 말했다. 끙, 하고 침음성을 내뱉는 둘.
“무리하시지 마시고 쉬엄쉬엄하시지.”
강현이 걱정스럽게 말하자 셋이 한숨을 내쉬었다.
정기훈 작가가 입을 열었다.
“형님들이 저리 일하는데 어디 빠질 수가 있어야지.”
형님들.
마을 어르신들을 말하는 것이었다.
그제야 강현은 사정을 알 수 있었다.
나이가 많다고 해도 오랫동안 농사를 지으신 분들이었다.
당연히 체력부터가 달랐다.
그렇다고 조금이라도 젊은 그들이 우는소리를 할 수도 없었다.
“오늘 파스라고 붙이고 자야겠어.”
이정환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그 말에 강현의 시선이 설기를 찾았지만, 곧 고개를 저었다.
‘…존엄은 지켜드려야지.’
차라리 며칠 앓는 게 나으실 거다.
며칠 상황을 보고 진짜 안 좋을 때 쓰는 게 나았다.
최후의 방법.
강현과 눈이 마주친 설기가 고개를 갸웃했다.
설기의 입 주변이 기름으로 번들거렸다.
곧 설기의 관심이 고기로 옮겨 갔다.
피식 웃은 강현은 술잔을 홀짝였다.
미지근한 막걸리가 목을 타고 넘어갔다.
하지만 큰 상관은 없었다. 봄이 왔다고는 하지만, 아직 제법 쌀쌀했다.
‘이 정도가 딱 좋지.’
삼겹살을 쌈장에 찍어서 쌈 위에 올린다.
쌈은 상추가 아닌 산마늘이었다.
명이나물이라고도 불리는 것.
이 역시 봄나물이었다.
고기 구울 준비하는 동안 할머니들과 아주머니들이 캐 온 것이었다.
방금 캔 산마늘의 향과 고기의 향이 입안 가득히 퍼져 갔다.
도시에서는 쉽게 맛볼 수 없는 호사.
강현의 입에 미소가 피어났다.
‘이제 정말 봄이네.’
씹을 때마다 봄 향기가 물씬 흘러나왔다.
이제 눈이 녹았다.
다시 농사의 계절이 돌아오고 있었다.
* * *
아침에 매장을 내려오던 강현을 향해 설기가 짖었다.
강현은 그 이유를 짐작할 수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매장 앞에 검은 봉지들이 수북하게 놓여 있었다.
“또 왔네.”
봉지들을 본 강현이 실소를 흘렸다.
청소가 끝난 다음 날.
아주머니들과 나물을 캐고, 고마움에 음식을 대접했더니 그 뒤로 이렇게 나물들이 쌓이고 있었다.
각종 봄나물.
심지어는 강현이 모르는 나물들도 있었다.
이뿐만이 아니었다. 직접 무친 나물들도 많이 받았다.
그 덕분에 냉장고에는 풀 내음만 가득했다.
매일 같이 나들이 겸 나물을 캐러 다니고 있었다.
“끼잉.”
설기가 불만스럽게 나물들을 바라보았다.
그도 그럴 것이 선물 받은 나물들을 섞을 순 없었다.
자연스레 고기의 비중이 줄고 나물의 비중이 늘어날 수밖에 없었다.
강현은 그런 설기를 다독였다.
‘그래도 너무 많기는 하네.’
강현의 집만 이런 게 아니었다.
지금 시기, 마을 어느 집에 가더라도 나물밖에 올라오지 않는다.
강현에게 선물해 준 건 그야말로 일부였기 때문이었다.
‘그 일부가 모이면 이렇게 되는 건가.’
티끌 모아 태산이라고 했던가.
그 말을 실감하고 있었다.
“…이건 혼자 먹기 힘들겠네.”
나물의 냄새가 코를 찔렀다.
그렇다고 다른 마을 사람들에게 나눠 줄 수도 없었다.
하지만 강현이 혼자 먹을 필요는 없었다.
강현에겐 남들에게 말할 수 없는 친구들이 있기 때문이었다.
다행히도 곧 주말이었다.
“이번에도 한 짐을 가져가겠네.”
강현이 피식 웃었다.
그런 강현을 보며 설기와 토리가 고개를 갸웃했다.
강현은 웃으며 둘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일단 집에 보낼 것만 좀 빼야지.”
그래도 가족도 챙겨야 했다.
강현은 웃으며 봉지들을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