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화 이제 집이야
입가에 묻은 붉은 양념.
흔들리는 꼬리.
닭볶음탕 한 판으로 모자라서 볶음밥까지 싹싹 긁어 먹은 설기는 배를 땅바닥에 대고 행복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조금 있다 가야겠네.”
어제 식사가 부실했던 만큼 더 행복해 보였다.
저 행복을 방해할 수 없었다.
강현은 볶음밥을 비벼 달라고 했을 때, 주인아저씨의 표정을 떠올렸다.
‘그렇게 안 생겼는데 잘 먹네. 먹방, 뭐 그런 거 하는 건가?’
놀란 눈으로 강현을 보던 주인아저씨.
생각지도 못한 오해가 생겨 버렸다.
‘먹은 건 전부 저 녀석이지.’
강현의 시선이 엎드려있는 설기에게 향했다.
주인아저씨는 강현이 아니라 설기가 다 먹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사실 강현의 식사량은 일반인보다 적은 편이었다.
최근에야 몸이 변하면서 좀 더 많이 먹게 되었을 뿐이었다.
하지만 그조차도 설기와 비교할 순 없었다.
강현은 볼록 튀어나온 설기의 엉덩이를 두드렸다.
팡팡.
손에 감기는 감촉이 기분 좋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눈을 감고 있는 설기.
그러나 코끝이 작게 움찔거렸다.
피식 웃은 강현이 시선을 돌렸다.
* * *
춘천을 나와서 서울로 향했다.
커다란 짐과 목줄이 달린 설기. 어딜 가나 눈에 띌 수밖에 없었다.
분주하게 오가는 사람들을 보니 낯설게 느껴졌다.
‘고작 일 년뿐인데 말이야.’
한적한 생활에 익숙해져 버렸다.
강현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렇게 강현은 사람들의 이목을 끌면서 집에 도착할 수 있었다.
오랜만에 찾은 집.
강현은 문을 열고 안쪽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거실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왔어? 부모님은 잠깐 나갔어.”
담담한 여성의 목소리.
바로 강현의 동생이었다.
“이따 저녁때쯤 돌아온다고 하셨으니 방에서 쉬어. 방은 그대로더라.”
“알겠어.”
얼굴조차 내밀지 않고 있었다.
그러나 강현에게는 익숙했다. 남매. 남들처럼 싸우지도 않지만 그렇다고 친한 사이도 아니었다.
강현이 거실로 향하자 그제야 소파에 앉아 있던 동생이 고개를 돌렸다.
“아니, 그 짐을 메고 온 거야?”
안 볼 수가 없었다. 커다란 배낭은 어딜 가도 눈에 띄었다.
“배낭? 어디 배낭여행이라도 다녀왔어? 그리고 손에 든 건 또…. 어?”
강현이 손에 든 줄을 따라 시선을 옮기던 동생이 입을 닫았다.
눈이 마주치자 귀엽게 고개를 갸웃하는 설기.
“오면서 잠깐 캠핑 좀 다녀왔어. 그럼 방에 있을 테니 부모님 오시면 알려 줘.”
그리 말하고 방으로 향하는 강현.
뒤늦게 동생의 눈이 커졌다.
“캠핑? 언제부터 그런…. 아니,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 강아지 키워?”
하지만 이미 강현은 방으로 향한 뒤였다.
* * *
“…그대로라더니.”
방을 본 강현이 실소를 흘렸다.
잘 수 있는 공간은 그대로였다. 그러나 나머지 절반은 창고나 다름이 없어졌다.
그러나 방을 빼지 않는 것만으로도 다행이었다.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킁킁 냄새를 맡는 설기.
벌써 몇 년이 지났지만, 강현의 냄새가 남아 있기 때문이었다.
토리도 신기한지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씻고 올 테니깐 쉬고 있어.”
“컹!”
끄덕끄덕.
설기와 토리의 머리가 위아래로 움직였다.
그 모습을 본 강현이 피식 웃고는 화장실로 향했다.
그리고 화장실에서 돌아왔을 때 강현의 방에는 누군가가 있었다.
“자.”
“….”
“…채소는 안 먹는 건가. 그럼 이건?”
“컹!”
“오, 먹네.”
설기가 꼬리를 흔들었다. 그러자 동생이 조심스럽게 손을 뻗었다.
잽싸게 피하는 설기.
“…좋아. 아직 친밀도가 부족하다는 거지?”
무언가를 중얼거린 동생은 옆에 있던 각종 채소와 과일, 심지어는 생고기마저 놓여 있었다.
그 모습에 강현이 한숨을 내쉬었다.
보나 마나 냉장고에서 설기가 먹을 수 있는 걸 다 털어 온 것이었다.
“여기서 뭐 해?”
“아, 아니. 저녁까지 시간이 있잖아. 오빠 배고플까 봐.”
언제부터 강현을 그리 챙겼다고.
게다가 강현은 채소면 모를까 생고기 따위 먹지 않는다.
고개를 절레절레 저은 강현은 침대에 걸터앉았다.
사정은 짐작이 됐다.
모를 수가 없었다. 강현과 이야기하면서도 눈은 계속 설기를 뒤쫓고 있었다.
그리고 혼자 멀뚱멀뚱 앉아 있는 토리를 무릎에 올렸다.
썰어진 당근 하나를 곁에 놓자 자연스럽게 토리가 손을 뻗었다.
얌얌얌.
당근을 먹는 토리에게서 시선을 뗀 강현이 설기를 돌아보았다.
넙죽넙죽 잘 받아먹는 설기.
‘아까 그렇게 먹어 놓고.’
벌써 소화가 다 된 건가. 정말로 대단했다.
곧 과일이 다 떨어진 동생이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다.
결국, 마지막까지 설기의 머리를 만지지 못했다.
당연했다. 설기의 입맛은 까다로웠다.
저 중에 실제로 설기가 먹은 것은 손에 꼽았다.
먹을 게 떨어지자 할 일이 끝났다는 듯이 강현의 곁으로 돌아오는 설기.
매정한 그 모습에 강현이 설기의 엉덩이를 두드렸다.
그러나 설기는 천진난만한 눈빛을 던질 뿐이었다.
강현은 분한 표정의 동생을 향해 입을 열었다.
“너 강아지 좋아했어?”
가지고 온 재료들이 전문적이었다.
‘아니면 잠깐 사이에 검색했을 수도 있지.’
강현의 물음에 동생이 당연하다는 듯이 말했다.
“오히려 싫어하는 사람이 거의 없지 않아? 다 큰 개라면 또 모르겠지만.”
강현이 고개를 갸웃했다.
강아지와 개가 다른 건가. 같은 종 아닌가.
그런 강현을 본 동생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난 오빠가 강아지를 키우는 게 이상한데? 관심도 없었잖아. 전에 코코도 그렇고.”
“…코코?”
강현은 귀에 익은 이름에 눈살을 찌푸렸다.
그런 강현을 본 동생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것 봐. 우리 어릴 때 키우던 강아지 이름이야.”
“아.”
그래서 귀에 익었구나. 강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밥이랑 산책은 꼬박꼬박 시켜 주면서, 그 외에는 잘 안 해 줬잖아.”
“그랬나?”
“그래.”
동생이 고개를 끄덕였다.
강현이 볼을 긁적였다. 그러나 그때의 성격을 떠올리면 이해는 되었다.
그래도 밥은 잘 챙겨 준 건가.
이야기를 들으니 조금씩 기억이 떠올랐다.
‘…죽고 동생이 엄청 울었지.’
정작, 살아 있을 때 밥을 챙겨 준 건 강현이었다.
강현과 전혀 다른 성격. 오히려 그 덕분에 잘 싸우지 않았다.
동생의 시선이 다시 설기로 향했다.
“그래서 걘 이름이 뭐야?”
“설기.”
“설기라. 좋은 이름이…. 잠깐만.”
동생의 눈썹이 휘었다.
“설마 백설기는 아니지?”
“….”
역시나 가족은 가족인가.
강현에 대해서 잘 알고 있었다.
강현이 입을 다물자 동생이 샐쭉하게 변했다.
그러고는 한숨을 내쉬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난 나갔다 올게.”
“어디 가게?”
“편의점.”
동생이 강현을 돌아봤다.
“뭐라도 사다 줘? 설기 간식이나.”
동생의 물음에 강현이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 얘, 강아지 간식은 잘 안 먹어.”
강현의 대답에 동생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곧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오빠랑 같이 있으니.”
무슨 의미인 걸까.
그러나 정작 답을 알고 있는 동생은 이미 방을 나간 뒤였다.
그렇게 동생이 떠나가자 강현의 시선이 바닥으로 향했다.
널브러진 재료들.
“…내가 치워야 하는 건가.”
강현의 혼잣말에 설기가 고개를 갸웃했다.
* * *
편의점에서 돌아온 동생은 강현에게 과자 몇 개를 던져 주고 거실로 돌아갔다.
벌써 포기한 건가?
아까의 모습만 보면 더 도전할 것만 같았는데.
강아지 간식을 잘 먹지 않는다는 소리를 듣고 포기했을 수도 있었다.
강현의 시선이 설기의 머리로 향했다.
쫑긋쫑긋 올라온 귀.
과자를 보자 눈을 반짝이고 있었다.
설기에겐 과일보다 이쪽이 나았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일반적인 상식으로는 상상하기 힘들 거다.
강현이 귀를 붙잡자 간지러운 듯이 머리를 흔들었다.
그리고 얼마 뒤 강현의 부모님이 돌아왔다.
“오셨어요?”
“어, 왔어?”
강현의 인사를 대충 받는 둘.
동생의 반응과 다르지 않았다.
“저녁은 번거로우니깐 나가서 먹…. 어머나.”
설기를 보고 탄성을 뱉는 어머니. 아버지 역시 놀란 표정으로 설기를 보고 있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길게 하품하더니 뒷발로 목덜미를 쓸어내리는 설기.
강현을 대신해서 소파에 있는 동생이 입을 열었다.
“오빠가 키우는 강아지래. 이름은 설기.”
“세상에나. 네가 웬일이니.”
놀란 눈으로 설기에게 다가가는 어머니.
동생은 기대 섞인 눈빛으로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어머니의 손을 싹 피하는 설기.
재빠른 움직임에 동생이 웃음을 터트렸다.
그리고 어머니 역시 고개를 저었다.
“네 개가 맞네. 주인을 똑 닮았어.”
무슨 의미일까.
그러나 강현은 차마 물어보지 못했다.
“저녁은 어디로 갈까요? 제가 예약할게요.”
“가긴 어딜 가니. 얘도 있는데.”
어머니의 시선이 설기에게 향했다.
“모처럼 왔는데 집에서 먹어야지. 얘는 뭘 좋아해?”
갑자기 말이 바뀌었다. 식당이라면 설기를 데려갈 수 없기 때문이었다.
강현은 실소를 흘리며 대꾸했다.
“고기 종류를 좋아해요. 생고기 말고요.”
“그런 거 먹어도 돼?”
옆에 있던 동생이 물었다.
사람이 먹는 고기는 강아지에게 안 좋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강현은 이럴 때를 위해서 공부한 게 있었다.
“울프독이라서 괜찮아요.”
“울프독? 그게 뭐니?”
“아, 늑대 혼혈이란 거지? 체코슬로바키안?”
“어? 어어.”
갑자기 나온 이름에 강현이 당황해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거기까지는 몰랐기 때문이었다.
그러자 가족들의 시선이 설기에게 향했다.
해맑은 얼굴로 고개를 갸웃하는 설기.
가족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다른 강아지랑 좀 다르네.”
“난 허스키인 줄 알았어.”
다행히 잘 넘어간 것 같았다.
강현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 * *
저녁에는 집에서 삼겹살을 구워 먹었다.
강현에게는 낯선 경험이었다. 부모님이 집에 냄새 배는 걸 싫어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어구어구. 잘 먹네. 당신, 고기 좀 더 올려 봐요.”
“그래.”
오랜만에 본 강현과 동생은 이미 뒷전이었다.
부모님은 설기를 옆에 놓고 고기를 먹이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강현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렇게 이틀을 보낸 강현은 제사를 올리고 떠날 준비를 했다.
“자주자주 얼굴 좀 비추고 그래.”
“…예.”
강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까지 들어 본 적 없는 말이었다.
서울에 있을 때도 번거로우니 자주 들리지 말라고 했던 부모님이었다.
그 이유는 설기에게 있었다.
이틀 동안 귀여움받았다.
만족스러운 얼굴로 꼬리를 흔드는 설기.
며칠 사이에 볼이 빵빵해졌다.
살이 찐 것이었다.
어머니와 동생. 심지어 아버지까지.
쉴 새 없이 먹을 것을 주니 저렇게 찔 수밖에 없었다.
‘돌아가면 당분간 식단 조절을 해야겠네.’
자신의 미래를 아는지, 모르는지. 설기의 얼굴을 해맑았다.
강현의 가족들이 마음에 든 모양.
“그럼 가 볼게요.”
그렇게 강현은 인사를 하고 집을 나섰다.
아직 이른 아침.
설날이라 길일 막힐 것을 대비해야 하기 때문이었다.
역시나 강현이 평창에 도착했을 때는 저녁이 된 후였다.
“끼잉.”
택시에서 내린 설기가 머리를 흔들었다.
기진맥진한 모습. 토리 역시 지친 기색으로 설기의 머리 위에 누워 있었다.
오랫동안 케이스 안에 있어서 답답한 것이었다.
“이제 집이야.”
강현이 그런 설기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긴 여정이었다.
그리고 눈에 보이는 익숙한 마을의 풍경에 강현이 미소 지었다.
집에 돌아온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