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화 멋지지?
컵라면에 물을 붓고 뚜껑을 닫았다.
뚜껑 사이로 하얀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고 있었다.
작은 냄비라 한 번에 두 개분밖에 끓이지 못해서 새롭게 물을 올렸다.
못마땅해하던 설기도 슬슬 냄새가 올라오자 앓는 소리를 내며 컵라면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직이야.”
강현은 설기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진정시켰다.
조금씩 올라오는 꼬리.
강현은 설기를 놔두고 스토브에 작은 팬을 올리고 소시지를 구웠다.
소시지가 노릇노릇하게 구워지자 소시지의 향이 텐트를 가득 채웠다.
침낭 밑에 쉬고 있던 토리도 슬그머니 기어 나와서 강현의 무릎 위로 올라갔다.
핫팩의 효과가 좋았는지 배 밑이 따끈따끈했다.
강현이 토리의 옆구리를 간지럽히자 토리가 자지러졌다.
그러거나 말거나 컵라면만을 노려보는 설기.
피식 웃은 강현은 앞에 놓인 컵라면의 뚜껑을 열었다.
그리고 젓가락으로 휘적거리자 면이 조금씩 퍼졌다.
‘거의 다 익었네.’
힐끗 앞을 바라보자 이쪽을 바라보는 설기가 보였다.
입에 고인 침이 당장이라도 바닥에 떨어질 것 같았다.
좀 더 익으면 좋겠지만.
‘…충분한가?’
면의 익기 정도는 취향의 문제일 수도 있었다.
“좋아. 먹어도 돼.”
강현의 말이 끝나자마자 컵라면을 향해 달려들려는 설기.
강현은 손가락을 들어서 제지했다.
“잠깐. 바닥에 쏟으면 다른 컵라면은 없어.”
움찔.
컵라면에 얼굴을 들이밀려던 설기의 몸이 멈췄다.
제지하지 않았으면 사방에 라면 국물이 튀었을 거다.
익고 있는 컵라면 두 개를 힐끗거린 설기가 조심스럽게 고개를 내밀었다.
그리고 후루룩 마시기 시작한 설기.
고개를 끄덕인 강현이 팬에서 소시지 하나를 집었다.
“이것도 먹으면서.”
“컹!”
강현이 소시지를 라면에 올리자 입 주변이 붉게 물들 설기가 짖었다.
소시지 역시 단번에 삼키는 설기.
이어서 남은 라면까지 깔끔하게 먹었다.
컵라면 용기를 할짝거리던 설기가 고개를 다시 들었다.
역시나 하나로는 부족한 것이었다.
하지만.
“그것들은 아직 안 익었어.”
“컹!”
“…상관없다고?”
설기가 무서운 기세로 고개를 끄덕였다.
한숨을 내쉰 강현이 컵라면 하나를 내밀자 다시 머리를 박았다.
콰드득, 콰드득.
라면 먹는 소리가 아니라 과자 먹는 소리가 텐트 안에 울렸다.
그 모습을 보던 강현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 토리를 보았다.
“토리도 좀 줄까?”
고민하더니 고개를 끄덕이는 토리.
강현은 면 하나를 집어서 물통 뚜껑에 올렸다.
그러자 토리가 야금야금 면을 먹어 갔다.
면 줄기가 점점 짧아졌다.
토리가 먹는 양을 생각하면 면 두셋으로 충분할 거다.
볼이 빵빵해진 토리를 보고 있자니 웃음이 나왔다.
그렇게 둘이 먹기 시작하자 강현도 뒤늦게 식사를 이어 갈 수 있었다.
텐트 안이라고는 하지만 추울 수밖에 없었다.
뜨거운 라면 국물을 마시니 안쪽부터 온기가 올라왔다.
그리고 면을 입으로 가져갔다.
입안 가득 채우는 매콤한 맛에 강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최근에야 종종 먹고 있지만, 강현은 라면을 좋아하지 않는다.
맛이 없기 때문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 반대였다.
‘…폭력적이지.’
화학조미료.
이것이야말로 현대 문명이 낳은 기적이나 다름이 없었다.
요리에 들어가는 시간과 노력을 단번에 줄여 준다.
요리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이라도 맛있는 요리를 만들 수 있었다.
‘반대로 너무 자극적이야.’
사람은 자극에 금세 익숙해진다.
그리고 더 큰 자극을 원하게 되어 있었다.
더 짜고, 맵고, 달게.
그러다 보면 미각 역시 둔해진다.
강현은 머릿속에 떠오른 상념을 날렸다.
지금은 그런 것이 중요하지 않았다.
지금, 이 순간을 즐기면 되었다.
강현이 다시 라면에 젓가락을 옮겼다.
추운 겨울.
빙판 위에서 먹는 라면.
이보다 훌륭한 게 어디 있겠는가.
텐트 너머로 보이는 광경을 보며 강현이 조용히 웃었다.
* * *
식사가 끝나고 강현이 먹은 것을 정리하는 동안 설기가 발라당 뒤집어졌다.
강현은 침낭 속으로 파고들려는 설기를 붙잡아서 입을 닦아 냈다.
고개를 흔드는 것으로 소심하게 반항하는 설기.
그러나 끝끝내 강현의 손을 뿌리칠 수 없었다.
그렇게 입 주변이 깨끗해지자 강현이 손을 놨다.
그제야 침낭 속으로 쏙 파고드는 설기.
곧 침낭 속에 있던 토리와 노는지 침낭이 들썩거렸다.
강현은 그런 둘을 놔두고 등에 불을 붙였다.
이제 주변이 서서히 어두워지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고는 텐트 끝에 걸터앉아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서서히 어두워지는 하늘.
아직 밤이 찾아오지 않았음에도 별들이 하나둘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강현이 있는 동네에서도 별은 잘 보였다.
하지만 신기하게도 매번 질리지 않았다.
그렇게 별을 보고 있으니 어느새 주변이 캄캄해졌다.
그리고 텐트가 하나둘 빛을 내기 시작했다.
달빛 아래 색색의 텐트들이 반짝이고 있었다.
강현이 짧게 감탄하자 어느새 다가온 설기가 몸을 비볐다.
그런 설기의 머리 위에는 토리도 올라와 있었다.
“멋지지?”
“컹.”
끄덕.
강현의 물음에 설기와 토리가 답했다.
둘의 눈이 텐트의 불빛을 쫓고 있었다.
빙판 위에서 은은하게 빛을 내는 텐트들.
그것들이 모여서 또 다른 장관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강현은 토리와 설기의 머리를 한 번씩 쓰다듬고는 텐트들을 바라보았다.
아주 오랫동안.
* * *
차가운 바람에 눈이 떠졌다.
작게 열려있는 텐트.
자기 전에 깜빡 잊었을 리는 없었다.
혹시 몰라서 확인까지 했기 때문이었다.
애당초 밤새 열려 있었다면, 제대로 잠을 자지도 못했을 거다.
강현은 침낭 옆을 보았다.
누군가가 앉아 있었던 흔적만 남아있을 뿐이지, 정작 그 주인은 보이지 않았다.
추위에 덜덜 떨고 있는 토리를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핫팩의 온기가 다 된 것이었다.
새롭게 핫팩을 꺼내서 바꿔 주자 토리의 표정이 편해졌다.
강현은 그런 토리를 토닥이고는 텐트를 열었다.
“얘는 아침 일찍부터 도대체….”
하지만 강현의 말은 이어지지 않았다.
멀리 찾을 필요도 없었다.
바로 눈앞에 설기가 서 있었기 때문이었다.
팔딱팔딱 뛰는 물고기를 물고.
“….”
“….”
강현과 설기의 눈이 마주쳤다.
슬쩍 강현 쪽으로 물고기를 미는 설기.
덕분에 물방울이 강현의 뺨을 때렸다.
어제의 식사가 불만족스러워서 직접 사냥해 온 것이었다.
있는 힘껏 올라간 귀와 꼬리.
잘했지?
그런 표정으로 강현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러나 강현의 표정이 차가워지자 무언가 잘 못 되었다는 걸 깨닫고 슬그머니 꼬리를 내렸다.
한숨을 내쉰 강현이 입을 열었다.
“도로 데려다 놔.”
“…끼잉?”
“지금 장비가 없어.”
식칼조차 들고 오지 않았다. 강현의 말에 설기의 귀가 축 처졌다.
강현은 그런 설기를 보며 쭈그려 앉았다.
“이따 밥은 맛있는 곳에서 먹을 거야. 그러니 걱정하지 않아도 돼.”
강현의 말에 설기의 귀가 다시 올라갔다.
진짜?
설기의 눈빛에 강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 다시 데려다줘. 불쌍하잖아.”
“컹!”
아직 살아 있었지만, 물 위에 오래 있으면 어찌 될지 몰랐다.
강현의 말에 힘차게 짖은 설기가 물고기를 문 채로 달려갔다.
그리고 중간쯤에서 쏙, 하고 사라졌다.
얼마 뒤 다시 고개를 내미는 설기.
올라와서 몸을 흔들었다.
‘춥지도 않은가.’
정말 대단했다. 고개를 절레절레 저은 강현이 설기가 들어갔다 나온 구명을 살폈다.
‘누군가 낚시하려고 뚫었구나.’
작은 구멍.
어떻게 저 사이로 오갔는지 신기할 정도였다.
고개를 돌리자 하나둘 텐트를 정리하는 사람들이 보였다.
“우리도 정리하자.”
미리 봐 둔 식당까지 가려면 부지런히 걸어야 했다.
강현의 말에 설기가 고개를 끄덕였다.
* * *
짐들을 다시 배낭에 넣고 어제 올라왔던 길을 다시 내려갔다.
굽이진 길을 따라서 걸어 내려갔다.
어제와 달리 햇살이 따뜻했다.
곳곳에 눈과 얼음들이 녹아내리면서 물길을 만들어 내고 있었다.
한참이 걸릴 것이란 강현의 예상과 달리 목적지까지는 얼마 걸리지 않았다.
같이 내려온 부부가 강현을 태워 줬기 때문이었다.
아주머니는 강현의 무릎 위에 앉은 설기가 귀여워서 어쩔 줄 몰라 하는 모습이었다.
머리를 쓰다듬으려는 손을 피했음에도 즐거워하는 모습.
강현이 차에서 내릴 때도 크게 아쉬워했다.
그렇게 부부를 떠나보낸 강현이 식당 안으로 들어갔다.
길가에 있는 낡은 식당. 그러나 겉과 달리 내부는 깔끔했다.
“오늘 예약한 강현입니다. 예약보다 일찍 왔는데 괜찮을까요?”
“아, 그 손님?”
주인아저씨는 강현을 알아봤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식당 밖으로 안내했다.
“아직 많이 추울 텐데 정말 괜찮겠어?”
“예.”
주인아저씨의 물음에 강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얘도 같이 먹을 거라.”
설기를 가리키자 주인아저씨가 걱정스러운 기색으로 입을 열었다.
“그렇게 작으면 안에서 먹어도 될 텐데.”
“제가 불편해서요.”
강현이 고개를 저었다. 그러자 주인아저씨도 더 말리지 않았다.
그렇게 주인아저씨가 데려간 곳은 마당에 놓은 야외 테이블이었다.
역시나 날씨 탓인지 밖에 앉은 이들은 없었다.
“닭볶음탕 큰 걸로 하나 주세요.”
“큰 거면 양이 많을 텐데?”
“제가 많이 먹어서요.”
사실 강현이 아니라 설기가 많이 먹는 것이었지만, 하나하나 설명하면 번거로워질 뿐이었다.
고개를 끄덕인 주인아저씨가 안쪽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기다림이 시작되었다.
설기는 이곳이 신기한지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그리고는 킁킁, 냄새를 맡기 시작했다.
매장 안에서 냄새가 흘러나오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한참을 기다리자 주인아저씨가 무언가를 끌고 나왔다.
커다란 바비큐 그릴.
그 위에 솥뚜껑 모양의 그릴들이 올라가 있었다.
그릴 안에는 장작이 타고 있었다.
시간이 오래 걸린 건 이 때문이었다.
그야말로 압도적인 비주얼.
설기와 토리의 눈이 반짝였다.
설기는 그리들 위에 올라간 닭볶음탕을 보고 있었고, 토리는 타고 있는 장작을 보고 있었다.
둘의 반응에 강현이 살포시 미소 지었다.
역시나 예상대로였다.
“한 번 끓여 오긴 했는데. 오 분 정도 더 끓이고 먹으면 돼. 많으면 포장도 가능하니 말하고.”
그렇게 주인아저씨가 들어가자 둘의 시선이 강현을 향했다.
초롱초롱 빛나는 눈.
강현은 토리를 들어서 그릴 옆에 올려놨다.
그러자 안으로 쏙 들어가는 토리.
어제, 오늘 추위에 떠느라 불이 그리웠던 것이었다.
그리고는 남은 한 명을 보았다.
아까보다 더 강렬해진 눈빛.
하지만 이건 어쩔 수 없었다.
“아저씨 말씀 들었지? 오 분 기다려야 해.”
“끼잉.”
설기의 귀와 꼬리가 축 처졌다.
* * *
오 분이 지나자마자 설기가 짖었다.
마치 시간을 보고 있었던 것처럼 정확했다.
실소를 흘린 강현이 그릇에다 닭볶음탕을 덜어 줬다.
양파와 감자, 당근, 그리고 떡까지.
다양한 재료가 들어가 있었다.
그릇을 건네주기 무섭게 달려드는 설기.
“안 뺏어 먹으니깐 천천히 먹어.”
“컹!”
대답과 달리 설기의 입은 분주하게 움직였다.
이리저리 흔들리는 꼬리.
이 모습 때문에 안에 들어갈 수 없는 것이었다.
강현은 피식 웃고는 고개를 돌렸다.
“토리는 안 먹어?”
강현의 물음에 고개를 빼꼼 내민 토리가 머리를 흔들더니 다시 들어갔다.
지금은 먹는 것보다 불이 좋은 것이었다.
강현 역시 웃으며 닭볶음탕을 먹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