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화 저게 뭣이여
파스타 면이 작은 입으로 들었다.
오물오물.
고개를 갸웃한 그녀는 다시 면을 입으로 넣었다.
그렇게 면을 삼키고 탄성을 뱉었다.
“…이런 맛이었군요.”
그녀가 강현을 돌아보며 싱긋 웃었다.
“아이들이 좋아할 만하네요. 이곳에 대한 애정이 잔뜩 묻어나요.”
“…예?”
애정이라니. 지금까지 들어 본 적이 없는 감상이었다.
강현의 되물었으나 이미 그녀는 강현을 보고 있지 않았다.
분주하게 포크를 움직였다.
“음, 으음, 음.”
콧노래마저 흥얼거리며 파스타를 먹고 있었다.
몸이 흔들릴 때마다 긴 머리카락이 물결쳤다.
처음 느꼈던 인상과는 다른 모습이었다.
그러던 그녀의 포크가 멈췄다.
그리고는 숲 너머를 바라보며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좀 더 이야기를 나눠 보고 싶었는데, 다음 기회로 해야겠네요.”
그녀가 다시 강현을 돌아보았다.
부드러운 눈빛.
어릴 적 어머니가 보여 줬던 눈빛과 비슷했다.
“땅의 주인들이 제가 신경 쓰이나 봐요.”
그녀의 시선이 강현에게서 옮겨 갔다.
볼록 튀어나온 배.
설기와 모나가 나란히 누워 있었다. 너무 먹어서 움직이지 못하는 것이었다.
괴로운 듯 인상을 잔뜩 찌푸리고 있었다.
자업자득.
누굴 원망하겠는가. 본인들 탓이었다.
손을 허우적거리는 둘을 본 여인이 웃음을 터트렸다.
“손님으로서 주인을 곤란하게 할 수는 없으니.”
그리 말한 그녀가 공터를 바라보았다.
떠들썩하게 어울리고 있는 사람들.
그 모습을 본 그녀에 푸근한 미소가 걸렸다.
“보기 좋군요. 정말 이런 광경이 얼마 만인지. 종종 이런 기회를 만들어 줬으면 좋겠어요.”
어째서 그걸 자신에게 말하는 걸까.
의아해하는 강현에게 그녀가 말을 이었다.
“다음에는 저도 친구들을 데려올게요.”
“아, 예.”
얼떨결에 강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강현!”
갑작스러운 부름에 뒤를 돌아보니 아나와 앤이 서 있었다.
“혼자 멍하니 뭐 하느냐. 할 게 없으면 이리 어울리거라.”
당연히 앤이 아니라 아나가 한 말이었다.
하만보다 어려 보이는 아나가 저런 말을 하니 실소를 흘렸다.
“잠깐만. 손님이 계셔서….”
“손님?”
의아해하는 아나를 보고는 강현이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는 눈을 껌뻑였다.
“어?”
강현의 앞에 아무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꿈이라도 꾼 건가.
하지만 아니란 걸 잘 알았다.
강현의 앞에는 깨끗하게 비워진 그릇이 놓여 있었다.
‘…귀신, 그런 건가?’
정령도 있으니 그런 존재가 있어도 이상할 게 없었다.
강현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렇게 그릇을 정리하고 있을 때, 환호성이 들려왔다.
“오오오오!”
고개를 들자 놀라운 광경이 보였다.
자기 몸통만 한 독을 들고 붙고 있는 셋.
믿기지 않는 광경이었다.
사람들은 마시던 걸 멈추고 그 광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모두 숨을 죽이고 셋을 바라보고 있었다.
벌컥, 벌컥, 벌컥.
곧 세 독이 내려왔다.
쾅!
돌로 만든 테이블에 금이 가더니 갈라졌다.
그러나 누구도 그걸 신경 쓰지 않았다.
“누, 누가 먼저야?”
“몰라. 동시 같은데?”
“그래도 어느 한쪽이 빨랐을 거 아니야?”
주변이 웅성거렸다.
그러는 사이 술독을 내려놓은 셋은 서로를 돌아보고 있었다.
“에밀리야 님. 아까 한 말을 사과해야겠습니다.”
란돌프였다.
입꼬리를 올린 노아도 고개를 끄덕였다.
“아니에요. 저 역시 두 분을 다시 봤어요.”
싱긋 웃는 에밀리야.
그렇게 서로를 보며 웃던 셋은 그대로 쓰러졌다.
“맙소사! 순찰자님이!”
“다, 단장님!”
“전사자아아앙!”
전쟁 도중에 전사라도 한 건가.
사람들이 황급히 다가갔다. 그리고 숨을 쉬는 셋을 보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강현 역시 뛰어서 그들 곁으로 갔다가 눈살을 찌푸렸다.
술 냄새가 진동했다.
셋이 숨을 내쉴 때마다 향이 더욱 짙어졌다.
대체 얼마나 마시면 이렇게 될까.
하지만 비어 있는 독을 보면 저절로 고개가 끄덕여졌다.
강현이 저걸 다 마셨으면 죽을지도 몰랐다.
“하하하하핫! 이번 경기는 비겼다.”
카샨이었다. 카샨이 휘적휘적 일행을 곁으로 다가왔다.
“경기가 다 끝났으니 상품을 줘야지. 어이, 신관 양반.”
“에, 예.”
카샨의 부름에 바하람이 걸어왔다.
그러나 바하람의 걸음걸이 역시 정상과는 달랐다.
비틀비틀.
이리저리 움직이다가 겨우 카샨 옆에 섰다.
“으응? 아, 시상. 그래. 내가 시상해야지. 우리 신 님이 사제니깐. 신 님, 내가 많이 사랑합니다.”
울기 시작하는 바하람.
그걸 본 카샨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저건, 글렀구나.’
목소리만 들어도 술 냄새가 올라오는 것 같았다.
강현 역시 같은 걸 생각했다.
이제는 울먹이면서 기도문을 외우고 있었다.
그와 달리 장로는 점잖은 표정으로 앉아 있었다.
처음과 같은 모습, 같은 얼굴.
우아한 요정의 표본 같았다.
‘역시 요정인가.’
강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카샨은 쓰러진 바하람을 보며 혀를 차더니 온 곳으로 걸어갔다.
“저 꼴이면 내가 줘야겠네. 요정들아, 저기 너희 장로님 좀 치워 봐.”
카샨의 손짓에 아직 취하지 않은 요정 몇몇이 눈살을 찌푸렸다.
무례한 말투였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곧 이상함을 깨달았다.
“…장로님?”
“….”
“자앙로니이이이임!”
요정들이 장로를 향해 달려갔다.
그 모습을 본 강현은 깨달았다.
‘…멀쩡한 게 아니구나.’
앉은 자세 그대로 기절한 것이었다.
정신을 잃는 순간까지도 흐트러지지 않는 고고함을 칭찬해야 하는 걸까.
강현은 복잡한 표정으로 요정들에게 실려 나가는 장로를 바라보았다.
그렇게 장로가 사라지자 카샨에 장로 뒤에서 무언가를 찾아왔다.
상품 꾸러미.
이번 시합에 수상한 이들에게 주어진 상품.
말 그럴 뿐이지.
다른 이들에게도 나눠줄 수 있을 정도로 넉넉히 가져왔다.
카샨은 보따리를 들고 경기했던 선수들을 하나하나 찾아갔다.
“그쪽. 힘이 제법이더군.”
“가, 감사합니다.”
인간들을 지나쳐서.
“아까웠어. 요령만 있으면 좀 더 나을 거야.”
“…감사합니다.”
요정들까지. 마치 산타할아버지가 아이들에게 선물을 나눠 주는 것 같았다.
그리고는 다시 중앙으로 왔다.
“어디 보자. 이게 적당하겠네.”
쓰러진 셋의 옆에도 선물을 하나씩 놓고 설기와 모나에게도 줬다.
통통.
배 위에 무언가가 떨어지자 둘이 괴로운 심음을 흘렸다.
“여기 꼬맹이들도 고생했으니. 그리고 가장 수고한 건 강현, 너이지.”
꾸러미에서 꺼낸 건 푸르른 깃털이었다.
“파프칸의 깃털이다. 보름달이 뜨는 날에만 볼 수 있어서 월새라 불리지. 가진 이에게 행운을 가져다준다고 하지.”
달의 새.
깃털을 받은 강현이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그러자 카샨이 강현의 어깨를 두드렸다.
“다 돌렸는데도 아직 많이 남았군.”
여기 있는 모든 사람이 하나씩은 받았다.
잠시 고민하던 카샨이 입꼬리를 올렸다.
무언가 좋은 생각이 떠오른 것이었다.
그리고는 금이 간 테이블 위에 올라섰다. 자연스레 사람들의 시선이 카샨에게 향했다.
“자, 나와 대작할 사람이 있나? 술 자리까 끝날 때까지 버틴 이들에겐 이것들을 나눠 주지!”
“오오.”
남아 있던 사람들의 눈이 빛났다.
아직도 멀쩡한 이들은 두 종류였다.
술에 어느 정도 자신이 있는 부류와 술을 안 마시는 부류.
사람들이 카샨의 곁으로 모이고 있었다.
사실 상품은 핑계나 다름이 없었다. 모여서 술을 마시자는 것이었다.
‘즐거우신가 보네.’
강현은 카샨을 보며 웃음을 흘렸다.
그리고는 주머니에 있던 걸 깨달았다.
설기의 이빨.
깜빡 잊고 선물 꾸러미에 넣지 않았다.
지금 상황에서 다시 넣기도 애매했다.
강현의 시선이 옮겨 갔다.
‘이번 경기에서 가장 활약한 건….’
설기의 얼굴이 떠올랐으나 애써 지웠다.
활약은 활약이지만, 좋은 쪽이 아니었다.
강현의 시선이 멈춘 곳에는 아우라가 서 있었다.
하만, 앤과 아나까지.
차를 마시고 있었다.
화기애애한 모습.
웃고 있던 아우라는 강현을 발견하고 표정을 바꿨다.
언제 웃었냐는 듯이 무표정하게 돌아왔다.
피식, 웃은 강현은 그녀에게 다가갔다.
“자, 축하해.”
“…뭘 말이죠?”
“두 개나 우승했잖아.”
강현은 그녀에게 설기의 이빨을 건넸다.
얼떨결에 설기의 어금니를 받은 아우라의 눈이 커졌다.
아우라가 입을 열려는 찰나, 뒤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강현! 빨리 너도 오거라!”
카샨이었다.
역시나 그냥 놔줄 리가 없었다.
“그럼 재밌게 놀다 가세요.”
강현은 일행들에게 인사를 건네고 카샨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그리고 그렇게 밤이 지나갔다.
* * *
다음 날.
인간과 수인, 요정들은 어색한 표정으로 자리를 정리했다.
서로 눈이 마주칠 때마다 어색한 웃음을 흘렸다.
어젯밤 서로 어깨동무하고 노래를 불렀던 이들이라고 상상할 수 없었다.
‘…기억나니깐 더 그러겠지.’
MT가 끝난 뒤, 신입생들의 모습과 같았다.
하지만 전에 없던 유대감이 느껴진다.
처음 만났을 때만 해도 서로 경계심이 가득했다.
‘나쁘지 않아.’
장비를 정리하는 강현이 미소 지었다.
그리고 그런 강현의 옆에는 아직도 쓰러진 설기와 그런 설기의 배 위에서 놀고 있는 토리가 있었다.
* * *
마을에는 또 폭설이 내렸다.
하얗게 뒤덮인 마을.
마을 사람들은 이른 아침부터 나와서 눈을 쓸었다.
“…눈도 지긋지긋혀. 어차피 내일 또 오면 또 쓸어야 할 거 아녀. 에휴.”
빗자루질하던 이장이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 일상이나 다름이 없기 때문이었다.
올해는 유난히 눈이 많이 내렸다.
강현도 쓴웃음을 지었다. 내심 이장의 말에 동의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굳이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다.
누군가를 봤기 때문이었다.
“어이구. 그럼 밥은 왜 먹어? 엉? 어차피 뒤로 다 내보낼 걸 뭣 하러 먹냐고?”
박 씨 할머니였다. 추운 겨울임에도 박 씨 할머니의 목소리는 우렁찼다.
“…누가 안 쓴다고 했나. 불평 좀 할 수 있지. 그걸 가지고 뭔 잔소리가 그리 많어.”
“그짝 때문에 이 짝까지 기운이 빠지니 그렇지!”
박 씨 할머니의 호통에 이장이 입을 다물었다.
눈을 쓸고 있던 사람들은 변함없는 둘의 모습에 미소 지었다.
평소의 둘이었다.
“삼촌. 이제 어디를 쓸까요?”
코를 훌쩍인 상후가 다가왔다. 콧끝이 붉게 물든 상후.
눈만 오면 뛰어놀던 상후는 이제 질렸는지, 빗자루를 들고 돕겠다고 나섰다.
어른들이 만류했지만, 끝끝내 빗자루를 지켜 냈다.
물론, 안 그런 이도 있었다.
강현은 보이지 않는 녀석을 떠올리고 한숨을 내쉬었다.
눈과 닮은 설기.
눈이 오자 아침부터 뛰어나가서 돌아오질 않고 있었다.
‘…뭐, 잘 놀고 있겠지.’
그리 눈이 신기한가.
무심코 자신의 어릴 적을 떠올려 보았지만, 춥다고 집에만 있었다.
“사, 삼촌.”
강현의 옷깃을 당긴 상후가 한쪽을 손가락질했다.
저 멀리 눈덩이 하나가 굴러오는 게 보였다.
비유가 아니었다.
정말 눈덩이였다.
심지어 점점 커지고 있었다. 눈덩이는 놀랍게도 나무 사이를 이리저리 피하고 있었다.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어이구. 저게 뭣이여.”
놀란 사람들이 눈덩이를 보았다. 그리고 눈덩이는 순식간에 마을까지 와서 그대로 집 담벼락에 부딪혔다.
눈 덩어리가 사방으로 튀었다.
애써 쓴 길이 다시 엉망이 되었다.
그리고 눈덩이가 부서진 곳에 하얀 꼬리가 삐쭉 올라왔다.
“하아.”
강현은 해맑게 웃는 설기를 보며 저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