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7화 너 지난번에 없었구나?
정리가 끝난 이들은 선수들이 떠난 자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전 경기가 끝나야 다른 경기를 시작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한참이 지나도 숲은 조용하기만 했다.
“…너무 늦게 오는 거 아니야?”
요정 하나가 다른 요정에게 속삭였다.
정리할 동안 시간이 제법 흘렀다.
그러나 누구 하나 나타날 기색을 보이지 않고 있었다.
사람들이 카샨과 장로, 로멘의 얼굴을 힐끗거렸다.
그러자 장로와 로멘의 얼굴에 곤란한 기색이 떠올랐다.
찾기 힘든 곳에 숨기긴 했지만, 경기를 망칠 의도는 없었기 때문이었다.
애써 침착한 표정을 지었지만, 그들의 눈에도 초조함이 올라왔다.
그와 달리 카샨은 무엇이 즐거운지 콧노래까지 부르고 있었다.
이미 그녀의 관심사는 다음 경기에 몰려 있었다.
그리고 얼마나 지났을까.
모래시계 안에 모래가 멈췄다.
“…시간이 다 되었군.”
장로가 작게 중얼거렸다.
승자는 없었다.
고개를 절레절레 저은 란돌프가 호각을 불었다.
그걸 본 강현이 가슴팍에 있는 토리를 토닥였다.
‘부탁해.’
안타까운 건 안타까운 거고, 할 일은 해야 했다.
땅으로 내려놓자 토리가 땅속으로 파고들었다.
그리고 장작을 모아 둔 곳에 빼꼼 고개를 내밀었다.
불을 피우는 토리.
곧 불씨가 살아났고 연기가 조금씩 올라갔다.
로멘은 타기 시작한 모닥불 앞에서 주머니를 꺼냈다.
그리고 안에 든 걸 한 주먹 쥔 후 모닥불 위에 뿌렸다.
파바박.
폭죽이라도 터지듯 불씨가 터져나갔고 곧 불꽃의 색이 바뀌었다.
‘…어? 나, 저거 어디서 본 거 같은데.’
데자뷔인가.
강현이 볼을 긁적였다. 그러나 강현이 마법을 볼 일이 무엇이 있겠는가.
강현은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푸른 불꽃.
그리고 바뀐 건 불꽃색만이 아니었다.
연기의 색도 붉은빛으로 물들었다. 멀리서도 알 수 있을 정도로 화려한 색.
하지만 그것은 잠깐이었다.
불꽃과 연기가 서서히 원래의 색으로 돌아오기 시작했다.
‘일시적인 거구나.’
그러나 그 역할은 제대로 수행했다.
수풀 사이로 그림자가 나타났기 때문이었다.
먼저 도착한 이는 의외로 인간 기사였다.
그는 씁쓸한 표정으로 걸어왔다.
이어서 요정과 수인이 차례대로 돌아왔다.
어두운 표정이었던 그들은 서로를 확인하고 흠칫 놀랐다.
서로 상대가 이기고 있다고 생각한 것이었다.
먼저 왔던 인간 기사는 둘을 모습에 안도하는 기색을 보였다.
승자가 없으면 패자도 없는 것이었다.
“어?”
그때, 누군가가 수풀을 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수풀이 흔들리고 있었다.
삐죽 튀어나온 깃발.
설마 또 다른 이가 있었던 걸까.
곧 깃발을 든 이의 정체가 드러났다.
“컹!”
“….”
강현은 저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었다.
허리에 꽂힌 깃발의 문양은 수인의 것이었다.
카샨이 꽂아 준 것.
하지만 하나가 아니었다.
입에 다른 깃발 두 개가 물려 있었다.
누구의 것인지는 굳이 확인해 보지 않아도 되었다.
위풍당당한 걸음으로 다가오는 설기.
꼬리가 살랑살랑 흔들리고 있었다.
선수들은 물론이고 구경하던 이들까지 멀뚱멀뚱 설기를 바라보고 있었다.
사람들의 시선에 걸어오던 설기가 멈칫했다.
그리고는 슬그머니 강현의 눈치를 봤다.
또 실수한 건가?
그런 눈빛이었다. 올라왔던 꼬리와 귀가 슬그머니 내려앉았다.
그때.
“푸하하하하하하! 승부는 결정 났네.”
카샨이 웃음을 터트렸다.
그리고는 앞으로 걸어갔다.
“승자는 설기다. 괜찮지?”
카샨이 경기를 참가한 선수들을 향해 물었다.
선수들은 서로 눈치를 보더니 실소를 흘렸다.
“맞습니다.”
“인정합니다.”
셋이 고개를 끄덕였다. 불만이 있는 표정이 아니었다.
자신들 나름대로 이해한 모습.
구경하던 이들 역시 동조하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강현으로서는 알 수 없는 무언가가 있는 모양이었다.
뒤늦게 설기를 향해 황호성이 터졌다.
사방에서 울리는 박수 소리.
잠시 어리둥절하던 설기는 곧 의기양양한 눈빛으로 턱을 세웠다.
그리고.
“아우우우우우우!”
긴 하울링.
사람들의 환호가 더욱 커졌다.
사람들의 눈과 입꼬리가 부드럽게 휘었다.
경기에서 이긴 이에 대한 축하라고 하기보다 손주의 자랑을 본 할아버지, 할머니의 시선에 가까웠다.
귀여워하는 느낌.
깃발을 돌려준 설기가 강현의 곁에 다가왔다.
그리고 해맑은 눈빛으로 강현을 올려다보았다.
분주하게 움직이는 꼬리.
잔뜩 기대가 섞인 눈을 본 강현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래, 잘했다. 잘했어.”
강현이 머리를 쓰다듬자 간지러운 듯 설기가 목을 움츠렸다.
“자, 이제 마지막 경기를 시작하지. 전사들은 나와라.”
말이 끝나자마자 셋이 몸을 일으켰다.
란돌프, 노아, 에밀리야.
셋의 등장에 사람들이 숨을 삼켰다.
어수선하던 주변이 단번에 조용해졌다.
“저 셋이 경기라니. 기대되는군요.”
어느새 다가온 마슈가 초롱초롱 눈을 빛냈다.
마슈는 셋을 오늘 처음 봤지만, 셋이 다른 전사들과 다르단 걸 깨달았다.
모를 수가 없었다.
무게감이 달랐다.
셋이 테이블 위에 서자 주변이 꽉 찬 느낌이 들었다.
“대체 뭘 겨루는 거지? 힘? 속도?”
아나였다. 그녀도 평소와 다르게 긴장한 눈빛으로 정면을 바라보고 있었다.
앤 역시 조용히 셋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런 일행들을 본 강현이 쓴웃음을 흘렸다.
강현과 몇몇 이들은 어떤 경기인지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사람들의 기대와 다를 거다.
카샨이 그들 사이로 터벅터벅 걸어갔다.
그리고 다음 경기를 알고 있는 이들에게 눈짓을 보냈다.
강현도 마찬가지였다.
아이스박스에서 무언가를 들고 나왔다.
“어?”
구경하던 이들 중에서도 눈치챈 이가 나왔다.
쿵!
커다란 독이 셋의 옆에 놓였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요정 둘이 과일주가 담긴 바구니를 들고나왔다.
인간 역시 와인을.
그리고 강현은 소주병을 셋 앞에 놓았다.
“마지막 경기는 주량이다.”
카샨이 사람들을 돌아보며 말했다.
“어느 종족이 가장 술을 잘 마시는지 밝혀 보자고.”
카샨이 씩 웃자 사방에서 환호성이 들렸다.
“…설마 저런 경기일 줄이야.”
아나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리고 앤 역시 시선을 돌렸다.
오직 마슈만이 더욱 눈을 반짝였다.
“오오.”
어째서 감탄하는 거지?
강현은 궁금했지만, 굳이 묻지는 않았다.
카샨의 말대로 마지막 경기는 많이 마시기였다.
그때, 카샨이 독을 열었다.
독한 수인족 술.
그리고 거기다가 요정들이 가져온 과일주를 붓기 시작했다.
“어?”
너무 갑작스러운 상황이라 강현이 미처 반응하지 못했다.
그런 가운데 카샨이 태연스럽게 입을 열었다.
“시합은 공평해야지.”
과일주에 이어서 와인까지.
‘맙소사.’
강현이 입을 벌렸다. 원래 시합의 진행 방식은.
서로 다른 네 종류의 술은 번갈아 가면서 마시는 것이었다.
많이 먹기 대회 때 했던 것처럼.
‘그걸 다 섞다니.’
그제야 왜 이런 문제점이 발생했는지 알 수 있었다.
카샨은 어떤 경기를 한다는 것만 들었다.
경기 진행은 지금 나와 있는 셋만 알고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정작 셋은 신경 쓰지 않는 모습이었다.
오히려 서로에 대한 투지를 높여가고 있었다.
“에밀리야 님. 술을 싫어하시는 것 아닙니까? 억지로 나올 필요는 없습니다.”
란돌프가 웃으며 말했다.
그런 란돌프를 향해 에밀리야 역시 웃으며 화답했다.
“싫어하지 못 마시는 건 아닙니다. 란돌프 씨와 노아 씨야말로 며칠 전에도 마셨다고 들었는데. 너무 무리하시는 것 아닌가요?”
“문제없다.”
노아가 코웃음 쳤다.
그런 둘을 본 란돌프가 웃음을 흘렸다.
“둘을 존경하지만, 오늘은 미리 사과를 드려야 할 것 같군요.”
“…좋은 기백이군.”
셋의 눈이 번쩍였다.
마치 번개라도 내리친 듯한 모습.
곧 주조가 끝난 독이 테이블 위로 올라갔다.
그리고 앞에 놓인 바가지.
저게 술잔이었다.
“이제부터 경기를 시작한다. 먼저 이 독을 비운 사람이 승리다. 시간은….”
카샨이 주변을 돌아보았다.
카샨과 눈이 마주친 사람들이 미소 지었다.
“내일 아침. 동이 틀 때까지. 시작!”
카샨의 외침과 동시에 숲에 사람들의 환호성이 울렸다.
거침없이 바가지로 독에 담긴 술을 뜨는 셋.
동시에 들이켰다.
그 모습을 본 강현은 저도 모르게 침음성을 내뱉었다.
술 냄새가 여기까지 올라오는 것 같았다.
‘…난 못 마셔.’
그런 와중에 입맛을 다시는 카샨이 보였다.
설마 저 술이 탐나는 건가.
강현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리고는 옆에 있는 하만과 제니퍼에게 시선을 던졌다.
“우리도 움직일까요?”
“예. 스승님!”
주방으로 돌아가서 팬을 잡았다.
화르륵.
불꽃이 팬을 달궜다.
셋을 위한 게 아니었다.
경기가 끝나기 전까지 물도, 음식도 먹을 수 없었다.
오로지 술.
이건 다른 이들을 위한 것이었다.
어느새 이쪽으로 관심을 돌리는 이들이 있었다.
이 자리에 있는 이들은 모두 전사들이었다.
당연히 일반인보다 많은 양을 먹는다.
점심때 먹은 건 벌써 다 소화된 게 분명했다.
하지만 큰 걱정은 하지 않았다.
강현의 시선이 양옆으로 옮겨갔다.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는 하만과 제니퍼.
이미 아침과 점심을 하면서 합을 맞춰 봤다.
할 수 있었다.
‘좋아.’
치이익.
강현이 달궈진 팬에 기름을 둘렀다.
연회의 시작이었다.
* * *
세 개의 팬에 각기 다른 재료가 들어갔다.
마늘과 페페론치노. 양파와 버섯, 베이컨. 그리고 또 한쪽에는 마늘과 베이컨까지.
재료가 볶아지자 육수를 부었다.
금세 끓어오르는 육수.
소금과 후추로 간을 맞추고 바로 면을 넣었다.
면은 새벽에 미리 삶아 온 것이었다.
이 인분씩.
처음부터 넉넉하게 넣었다.
이어서 각기 다른 소스를 넣었다.
오일, 크림, 토마토.
순식간에 완성된 파스타 세 개가 앞에 놓였다.
“오오오!”
“빨라.”
“움직임에 군더더기가 없군.”
어느새 스토브에는 새로운 팬들이 올라가 있었다.
“스승님! 제가 설거지할게요!”
“부탁드려요.”
“네!”
강현의 말에 싱글벙글 웃는 하만.
그녀는 미리 떠온 물을 붓고 팬을 씻어 냈다.
이 많은 수를 맞추려면 움직임이 끊이지 않아야 했다. 중요한 건 속도였다.
“제니퍼 씨. 오븐 좀 부탁드려도 될까요?”
“아, 예!”
강현의 말에 재료를 다듬던 제니퍼가 후다닥 오븐 쪽으로 달려갔다.
오븐을 열어 보니 피자가 먹기 좋게 잘 익어 있었다.
“잘라서 바질 잎만 올려서 빼 주세요.”
제니퍼는 놀란 눈으로 강현을 돌아보았다.
그러나 강현은 눈은 세 개의 팬을 향해 있었다.
그 모습을 보고 감탄한 건 제니퍼뿐만이 아니었다.
“시야가 넓네요.”
“필시 순찰자님께 배운 게 분명해요.”
“그렇죠. 그 발걸음은 쉽게 나올 수 있는 게 아니에요.”
“저 박력은 역시 전사장님을 똑 닮았군.”
요정들의 말에 수인족 전사 하나가 불쑥 입을 열었다.
요정들의 시선이 향하자 수인족 전사는 어깨를 폈다.
그 전사뿐만 아니라 다른 수인족도 맞는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인간들이 서로 눈이 마주쳤다.
“흔, 흔들리지 않는 부동심은 우리 단장님을….”
“…그만해.”
기사 하나가 입을 열었으나 옆에 있던 기사가 바로 제지했다.
그러는 사이 두 번째 음식들이 나왔다.
“얘는 고기가 안 들어간 거예요.”
강현이 접시 하나를 가리켰다.
아까와 같은 토마토 파스타. 그러나 안에 든 재료가 달랐다.
고기를 선호하지 않는 요정을 위한 것이었다.
“…배려심도 깊네요.”
요정들이 싱긋 웃었다. 그제야 사람들이 음식에 손을 뻗었다.
처음 세 접시만 나왔을 때는 쉽사리 손을 뻗지 못했다.
기다리는 사람이 너무 많기 때문이었다.
“신기하군. 면 요리는 동부 쪽이 많이 먹는다고 들었는데.”
“…모양은 나쁘지 않아.”
“나쁘지 않지. 강현 씨잖아. 아, 너 지난번에 없었구나?”
인간들이었다.
“못 보던 채소들이에요.”
“신기한 향이군요.”
요정들은 호기심과 경계심을 보였다. 아침과 점심때, 먹긴 했지만, 아직 요리에 익숙하지 않은 것이었다.
그리고 이미 강현의 솜씨를 잘 알고 있는 수인들은 거리낌 없이 입으로 가져갔다.
그렇게 인간과 요정도 수인을 따라 음식을 입에 넣자.
주변이 고요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