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9화 저쪽에서 놀아
2주란 시간은 순식간에 지나갔다.
아침 일찍 일어나서 장비와 재료를 챙기고 있으니 매장 앞에 트럭이 멈춰 섰다.
“아, 오셨어요?”
강현이 반갑게 맞이했다. 트럭에서 내리는 이는 바로 민호였다.
오늘을 위해서 특별히 부탁했다.
강현과 설기만으로는 한계가 있기 때문이었다.
민호가 다가오자 설기가 힐끗 트럭 안을 살폈다.
누군가를 찾는 것이었다.
그러나 트럭에서 내린 이는 민호뿐이었다.
“미안해. 하은이는 아직 자고 있어.”
“컹!”
민호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는 설기.
설기를 보며 웃던 민호는 곧 놓인 짐들을 발견하고 눈을 크게 떴다.
“이걸 다 챙겨가는 건가요? 친구분들이 많이 오시나 보네요.”
“예.”
민호의 말에 강현은 어색한 웃음을 흘렸다.
거짓말을 했기 때문이었다.
‘이세계에서 운동회를 연다고 할 수는 없으니.’
어쩔 수 없었다.
윤섭이라며 금세 거짓말을 알아챌 거다.
네게 그럴 친구가 어딨냐며.
하지만 다행히도 윤섭은 이 자리에 없었다.
‘그래도 조금 과한가?’
강현은 힐끗 짐을 보았다.
그러나 곧 고개를 저었다. 또 언제 이렇게 하겠는가.
민호에게 자주 부탁할 수도 없었다. 한 번 할 때 제대로 하는 게 나았다.
“돕겠습니다.”
“아니에요. 제가 할게요.”
짐을 트럭에 옮기려는 민호를 보며 강현이 다급히 말렸지만, 민호는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운동 겸 옮기는 겁니다. 가만히 있으면 좀이 쑤셔서.”
이렇게까지 말하니 강현도 더 이상 말릴 수가 없었다.
그렇게 트럭에 짐을 실은 후 강현은 설기와 함께 트럭에 올랐다.
운전대를 잡은 민호가 입을 열었다.
“설기가 기분이 좋은가 보군요.”
모를 수가 없었다. 설기의 꼬리가 평소보다 흔들리고 있기 때문이었다.
강현은 그런 설기를 보고 웃음을 삼켰다.
설기는 강현보다 더 설레하고 있었다.
‘운동회가 아니라 뒤에 실린 음식 때문이지만.’
어쨌든 기대하는 건 맞았다.
이만한 음식을 준비하는 건 마을 잔치 때도 몇 번 있었다. 하지만 이세계에서는 처음이었다.
강현이 복슬복슬한 목을 만지자 간지러웠는지 뒷발로 긁었다.
그리고는 강현을 돌아보는 설기.
왜 그러냐는 눈빛이었다.
“알았어. 안 간지럽힐게.”
강현은 새하얀 엉덩이를 두드리고는 창문 밖으로 시선을 던졌다.
그렇게 트럭은 강현의 할아버지 댁으로 향했다.
* * *
짐을 내리는 걸 도와준 민호는 바로 트럭에 올랐다.
“그럼 좋은 시간 보내시고 끝나면 연락해 주세요. 데리러 오겠습니다.”
“예. 감사해요.”
강현의 인사에 민호가 손을 내저었다.
이번이 벌써 몇 번째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민호가 아니었다면 더 고생했을 거다.
‘정말 고마운 일이지.’
그렇게 민호를 배웅한 강현이 천천히 뒤를 돌아보았다.
아무렇게나 놓인 짐들.
매장 앞에 놓았을 때도 느꼈지만, 이렇게 마당에 늘어놓으니 더 많아 보였다.
‘이 정도면 세 번은 날라야겠네.’
잘하면 두 번에 나를 수 있겠지만, 굳이 무리할 필요는 없었다.
게다가 운동회가 열리는 장소까지는 제법 거리가 있었다.
민호에게는 친구들이 오면 같이 정리한다고 말했다. 옮기는 것까지 도와 달라고 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혼자가 아니니깐.’
강현이 시선을 돌렸다. 강현의 시선을 받은 설기가 힘차게 짖었다.
“컹!”
자신만 믿으라는 듯 늠름한 모습.
그때, 무언가가 눈에 들어왔다.
설기 옆에 토리가 두 손을 번쩍 들고 있었다.
자기도 돕겠다는 뜻이었다.
“그래, 너도 있네.”
고개를 끄덕인 강현이 짐을 들어 올렸다.
“그럼 옮기자.”
운동회가 열릴 장소까지 가려면 부지런히 움직여야 했다.
강현의 말에 설기와 토리가 몸을 일으켰다.
* * *
그러한 셋의 열정은 미처 피어오르기도 전에 꺼질 수밖에 없었다.
“어? 선생님!”
나가자마자 반가운 얼굴이 강현을 반겼기 때문이었다.
“하만?”
반갑게 손을 흔드는 하만.
그러한 하만을 본 강현이 하늘을 확인했다.
해가 떠오르고 있었으나 아직 새벽이나 다름이 없었다.
“어째서.”
“도움이 필요할 것 같아서, 먼저 와 있었어요!”
하만이 수줍게 입을 열었다. 그녀의 꼬리가 하늘하늘 흔들리고 있었다.
“대체 언제부터.”
“저는 온 지 얼마 안 됐어요.”
고개를 끄덕이려던 강현은 무언가 이상한 걸 깨달았다.
“저는?”
하만은 대답 대신 시선을 돌렸다. 거기에는 커다란 그림자가 서 있었다.
“란돌프 씨!”
강현과 눈이 마주친 란돌프는 입꼬리를 올렸다.
“여긴 어떻게 오셨어요?”
바쁜 게 아니었던가. 그러자 란돌프가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로멘 님이 계시지 않나.”
로멘에게 넘기고 왔단 소리였다. 강현은 쓴웃음을 흘렸다.
“안 그래도 다들 돕겠다는 걸 말리고 둘만 왔네.”
“아….”
그렇구나. 다들 강현을 신경 쓰고 있던 것이었다.
강현은 익숙하지 않은 감각에 코끝이 간지러워졌다.
강현이 코끝을 긁적이자 웃음을 터트린 란돌프가 강현의 어깨를 두드렸다.
“자, 옮기는 건 우리가 할 테니 짐을 꺼내게.”
그리고는 강현의 배낭을 뺏어 들었다.
여기서 거절하는 것도 예의가 아니었다.
“예, 부탁드려요.”
짐을 넘긴 강현은 다시 문 너머로 향했다.
* * *
마지막 짐을 내려놨을 때는 이미 짐 대부분이 사라진 상태이었다.
‘정말 빠르네.’
강현도 수련 덕분에 제법 빨라졌지만, 란돌프나 하만과 비교할 정도는 아니었다.
순식간에 사라진 짐들을 보며 강현이 실소를 흘렸다.
강현은 남은 짐들을 들춰 멨다.
“컹! 컹!”
그러자 설기가 짖더니 빙그르르 돌았다.
강현은 그 뜻을 이해했다.
강현과 달리 설기의 등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짐을 덜어 달라는 뜻이었다.
그런 설기의 배려에 강현은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아니야. 괜찮아.”
설기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이미 무거운 짐들은 하만과 란돌프가 옮겨 줬다.
이 정도는 충분히 들 수 있었다.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운동회가 열리는 곳은 강 옆에 있는 큰 공터였다.
천천히 걷다 보니 짐을 옮기고 돌아온 하만과 란돌프가 보였다.
가벼운 발걸음.
반갑게 손을 흔드는 둘을 보며 강현도 손을 들었다.
* * *
공터가 보이자 강현의 발걸음이 멈췄다.
강 옆의 공터에는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하만과 란돌프는 강현이 멈춰 선 이유를 알고 있었다.
“놀라운 광경이지?”
“예.”
강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로 진귀했다.
인간, 요정, 수인.
인간과 수인들은 나무와 바위를 옮겨서 의자를 만들고 있었고, 요정들은 나무를 키워서 그늘을 만들고 있었다.
대부분 강현이 아는 얼굴들이었다.
“오셨어요?”
에밀리야가 강현을 발견하고 손을 흔들었다.
바위를 옮기던 노아도 짧게 눈인사를 건넸다.
한쪽에서 나무를 키우던 아우라가 강현과 눈이 마주치자 흥, 하고 코웃음 쳤다.
사춘기의 여자아이.
딱 그러했다.
‘나이는 나보다 훨씬 많지만.’
강현은 웃음을 흘리고는 에밀리야를 돌아보았다.
“사람들이 많이 왔네요.”
생각보다 더 많았다. 시합에 참여하는 이들은 각 종족당 다섯 명씩이었다.
하지만 이곳에 모인 이들은 그 세 배는 되었다.
“다들 관심이 많더라고요. 물론, 예전이었다면 이 정도까지 모이진 않았을 거예요.”
옆에 있던 하만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둘의 반응에 강현이 멋쩍게 웃었다.
강현이 연관된 일이기에 관심을 가진 것이었다.
인간, 요정, 수인.
세 종족은 강현에게 호의적이었다. 안 그런 이들도 있지만, 이제 소수에 불과했다.
그때, 로브를 입은 노인이 강현을 향해 다가왔다.
로멘이었다.
“오랜만이군.”
“예. 잘 지내셨나요?”
“나야 덕분에 잘 지냈네.”
란돌프와 달리 로멘은 정말 오랜만이었다.
껄껄 웃은 로멘은 수염을 쓸어내리며 입을 열었다.
“영주님께서 오시지 못해서 많이 아쉬워하더군.”
로멘의 말에 강현은 쓴웃음을 흘렸다.
당연했다. 영주 정도 되면 할 일이 적지 않았다.
로멘과 이야기를 나누던 강현은 뒤에 있는 이에게 시선이 갔다.
사제복을 입고 있는 노인.
‘바하람 주교였나?’
몇 번인가 마주쳤다. 강현과 눈이 마주친 바하람 주교는 못마땅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다.
전과 달리 노골적으로 노려보거나 하진 않았다.
강현의 시선을 알아챘는지 로멘이 웃으며 입을 열었다.
“걱정하지 않아도 되네. 이제 주교도 자네를 함부로 대하지 못할 거야.”
그만큼 강현의 입지가 올라갔다.
그리고 앞으로 더 올라갈 거다. 다른 종족과의 교류가 커지면 커질수록. 그걸 모를 바하람이 아니었다.
그렇기에 예전처럼 대놓고 적의를 드러낼 수 없었다.
그래서 불편한 기색만 드러내고 있을 뿐이었다.
“싫으면 안 오면 될 것을.”
옆에 있던 란돌프가 짧게 혀를 찼다.
그러자 로멘이 고개를 저었다.
“어쩔 수 없는 일이네. 저자도 이 자리가 얼마나 중요한지 알기 때문이지.”
주교의 체면이 걸린 일이었다.
세 종족의 화합.
강현은 가벼운 마음으로 시작했지만, 절대 가벼울 수 없었다.
로멘은 강현의 친구로서 이 자리에 있긴 하지만, 영주 대리이기도 했다.
바하람 주교는 신전의 대표로 이 자리에 선 것이었다.
인간만이 아니었다.
요정 쪽에서도 장로가 둘이나 와 있었다.
그리고.
“이야, 얼굴을 잊어 먹겠어?”
두툼한 팔이 강현의 어깨를 둘렀다.
그와 함께 머리카락이 강현의 코끝을 간지럽혔다.
“오랜만입니다, 카샨 님.”
강현의 말에 카샨이 이를 드러내고 웃었다.
카샨의 머리 위에 있는 모나도 반갑다는 듯이 두 손을 들었다.
“바압!”
그리고는 설기를 향해 뛰어내렸다.
바로 뒤엉키는 둘.
하지만 곧 카샨의 손에 잡혔다.
“방해되니까 저쪽에서 놀아.”
카샨이 설기와 모나를 저 멀리 던졌다.
“꺄울?”
“밥?”
눈을 동그랗게 뜬 채로 날아가는 둘을 보며 강현이 실소를 흘렸다.
이미 오는 걸 알고 있었기에 놀라움은 없었다.
인간이나 요정과 달리 수인은 우두머리가 직접 나온 것이었다.
“이런 재밌는 걸 꾸밀 줄이야. 매번 내 기대를 넘어서네?”
“바쁘신 거 아니었어요?”
“바빠도 이런 일에 빠질 순 없지.”
카샨이 이를 드러냈다.
주변을 돌아보자 요정과 인간들이 이쪽을 힐끗거리는 게 보였다.
그만큼 카샨의 존재감은 압도적이었다.
카샨이 은근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래서 말인데….”
“안 됩니다.”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카샨이 눈살을 찌푸렸다.
뒤를 돌자 노아가 차가운 표정으로 카샨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무 말도 안 했는데?”
“시합에 참가하겠다는 말 아닙니까?”
카샨이 입술을 삐쭉 내밀었다. 노아가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족장님께서 참가하면 시합이 되지 않습니다.”
“너도 참가하잖아!”
“전 괜찮습니다.”
노아는 그리 말하고는 란돌프와 에밀리야를 힐끗거렸다.
둘이 있기에 경쟁이 된다는 뜻이었다.
둘 역시 반짝이는 눈으로 서로를 보고 있었다.
그 뜻을 이해한 카샨이 혀를 찼다.
“강한 게 죄네, 죄야. 서러워서.”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 카샨.
카샨의 존재 자체가 반칙이나 다름이 없었다.
‘그 외에도 문제가 많겠지만.’
카샨은 수인의 우두머리였다.
‘병사들 노는데 대대장이 끼어드는 꼴이지.’
다들 제대로 즐길 수 없을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