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7화 식사나 할까요?
눈썰매뿐만 아니라 전통 썰매와 범퍼카.
거기다 스노우래프팅까지.
정신없이 놀다 보니 훌쩍 시간이 지나갔다.
강현은 붉게 볼이 상기된 소녀들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코를 훌쩍이면서도 쉴 새 없이 조잘거리고 있었다.
다행히 이번 여행이 마음에 들었나 보다.
그리고 그 옆에는 설기가 꼬리를 흔들고 있었다.
‘...달려서 눈썰매를 따라잡았을 때는 깜짝 놀랐지.’
안정상의 이유로 위에 놔두고 탔더니 알아서 따라잡았다.
‘눈썰매가 생각보다 느려서 다행이었지.’
주변 사람들도 웃으며 그 광경을 넘겼다.
하지만 지금 생각해도 아찔했다.
강현은 혀를 내놓고 해맑게 웃고 있는 설기를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게 끝나고 보니 가슴 언저리가 허전했다.
토리가 오랜만에 모습을 감춘 것이었다.
이 정도 추위에 오래 노출되다 보니 지친 것이었다.
하지만 그런 토리보다 지친 이가 있었다.
“...괜찮아?”
“...아니.”
입술이 파랗게 질린 윤섭이었다.
“운전할 수 있겠어?”
“...음, 어떻게든 되지 않을, 푸에취!”
평소와 달리 자신 없는 목소리에 강현이 혀를 찼다.
‘이거 안 되겠네.’
이대로 보냈다가는 사고가 날 거다.
강현은 두 소녀를 돌아봤다.
“혹시, 너희 바로 가야 해?”
“아뇨?”
강현의 물음에 두 소녀가 고개를 저었다.
“미안하지만, 내일 올라갈래? 아니면 터미널에 내려줄 수는 있어.”
강현은 말하면서 볼을 긁적였다.
‘터미널까지는 택시를 태우면 되겠지만.’
어린 소녀라지만 유명인이었다. 위험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저 차에 타는 것보다 낫겠지.’
얼굴도 감싸고 있으니 티가 나지 않을 거다.
그러한 강현의 물음에 두 소녀의 얼굴에 화색이 올라왔다.
“그러면 바비큐도 하는 거예요?”
소현이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무슨 소리인가 했는데, 곧 알 수 있었다.
‘세나씨가 말했구나.’
둘이 친하다고 했는데, 크리스마스에 놀러 온 걸 들었나 보다.
강현이 고개를 끄덕이자 둘이 서로 눈을 마주쳤다.
“좋아요!”
“네!”
둘의 반응에 강현이 안도할 수 있었다. 윤섭을 배려해서가 아니라 진짜로 좋아하는 기색이었다.
그러자 옆에 죽어가고 있던 윤섭이 고개를 들었다.
“콜록, 좋아…. 너희 집까지만 가면 되는 거지?”
“무슨 소리야.”
강현은 운전석으로 향하려는 윤섭을 잡았다.
“동반 자살하고 싶지 않으니 얌전히 뒤에 타.”
“...그럼 운전은 누가하고?”
윤섭이 눈을 껌뻑이더니 충격받은 표정으로 강현을 보았다.
“설마, 면허 딴 거야? 어떻게….”
면허 따는 게 저렇게 충격받을 일인가?
강현은 어처구니없어하면서도 고개를 저었다.
“대리 부르면 돼.”
“아.”
그제야 윤섭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평창에서 평창이었다. 외지에 있는 만큼 가격이 좀 붙겠지만, 목숨을 거는 것보단 나았다.
그리고 집에 도착하자마자 윤섭은 쓰러졌다.
‘저 꼴로 뭘 하겠다고.’
한숨을 내쉰 강현은 두 소녀를 데리고 빈집으로 안내했다.
크리스마스 때 깨끗하게 정리된 집.
이후에도 손님용으로 쓸 수 있게, 마을에서 관리하기로 했다.
외부에서 손님이 오는 일이 잦아졌기 때문이었다.
“와. 펜션 같아요!”
다행히 둘이 마음에 들어 하는 것 같았다.
그렇게 다음 날이 되었지만, 윤섭은 일어나지 못했다.
이불 속에서 끙끙 앓고 있는 윤섭을 본 강현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이건, 며칠 가겠네.’
몸살이 온 것이었다.
결국, 윤섭의 회사에서 사람이 와서 소녀들과 윤섭을 데리고 서울로 향했다.
강현은 떠나는 차를 보며 볼을 긁적였다.
“...괜찮겠지?”
“컹!”
설기가 걱정하지 말라는 듯이 짖었다.
고개를 끄덕인 강현이 매장 문을 열었다.
* * *
상쾌한 공기와 함께 시원한 바람이 몸을 간지럽혔다.
그러나 강현은 순순히 그 기쁨을 느낄 수 없었다.
나오자마자 시선들이 쏟아졌기 때문이었다.
숲속을 달릴 생각에 신나게 흔들리던 설기의 꼬리도 멈췄다.
고개를 갸웃하는 설기.
강현도 볼을 긁적였다.
“...많이 기다리셨어요?”
“아니에요. 금방 왔어요.”
“그럼, 딱 맞게 왔지.”
에밀리야와 란돌프에 이어서 노아까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강현은 그들의 말이 거짓임을 알 수 있었다.
‘노아씨나 란돌프씨는 예상했는데, 에밀리야씨까지 이럴 줄은 몰랐는데.’
강현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들이 이러는 이유를 알기 때문이었다.
“...일단 자리부터 옮길까요?”
“짐은 내가 들지.”
“안 그래도 괜찮은 곳을 발견했어요.”
강현이 허락하기도 전에 우르르 몰려와서 강현의 짐을 거둬갔다.
강현은 똥 마려운 강아지처럼 안절부절못하는 설기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으니 짐은 놔두고 놀다 와.”
“컹!”
셋과 함께 있는데 문제가 생길 리가 없었다.
강현의 말에 설기가 고개를 쏙 들이밀었다.
그러자 앞으로 빠지는 보자기.
이제 몇 번 해보더니 익숙해진 것이었다.
노아는 보자기가 떨어지기도 전에 낚아챈 후에 어깨에 걸었다.
“출발하지.”
후다닥 뛰어가는 설기를 보던 강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 * *
빠른 발걸음.
짐을 들었으나 셋의 발걸음은 너무나도 가벼웠다.
강현은 셋과 발걸음을 맞추기 위해 뛰는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에밀리야가 말한 장소에 도착했다.
높게 솟은 나무들 사이로 새들의 지저귐이 들려왔다.
‘이런 곳도 있었구나.’
알록달록하게 올라온 어린 꽃들을 보며 강현이 감탄했다.
그러나 주변을 여유롭게 관찰할 시간은 주어지지 않았다.
셋이 연신 강현을 힐끗거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강현은 텐트를 펴고 짐들을 대충 안에 넣은 뒤 다시 나왔다.
그리고 기대 섞인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셋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어떤 걸 할지 생각해보셨어요?”
셋이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물어볼 필요도 없었다. 그렇지 않다면 이렇게 기다리고 있지도 않을 거다.
강현이 셋에게 부탁한 건 운동회에 넣을 종목이었다.
각각 세 가지씩만 생각해달라고 했다.
“그럼 누가 먼저….”
강현의 시선이 옆으로 향했다.
그러자 란돌프가 헛기침하더니 입을 열었다.
“내가 생각한 건 장작 패기와 달리기, 방패술과….”
“자, 잠깐만요. 방패술이요?”
장작 패기는 그렇다고 해도 방패술은 또 뭔가.
그러자 란돌프가 자신만만하게 입을 열었다.
“사방에서 쏟아지는 공격을 얼마나 잘 막는지 시험하는 거지.”
기사의 기본이지. 말을 덧붙였다.
“공격은 어떻게 하려고요?”
“...옆에서 검이나 활로….”
말하다가 입을 다물었다.
이런. 하고 혼잣말을 작게 내뱉었다.
깨달은 것이었다. 같은 종족이 공격하면 공정성이 사라질지도 몰랐다.
그렇다고 다른 종족이 대신 공격할 수도 없었다.
“방패술은 빼고, 장작 패기는 어떤 거죠?”
누가 장작을 많이 패는지 정하는 건가?
란돌프는 웃으며 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강철 막대기.
“마철. 마력이 담긴 철이지. 여기에 도끼를 휘둘러서 더 깊게 상처를 낸 이가 승리하는 것이다. 단순히 힘만 좋다고 될 수 있는 게 아니라 호흡과 의지를….”
주저리주저리 이야기하는 란돌프를 보며 강현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방패술도 그렇고, 도끼질도 그렇고.
인간에게 유리했다.
활과 단검을 쓰는 요정은 그나마 나았다. 수인은 무기조차 쓰지 않는다.
‘그래도 검술이 없는 게 다행인가.’
란돌프라고 해도 양심상 검술까진 넣지 못한 것이었다.
강현은 한숨을 내쉬었다.
“...일단 알겠어요. 그럼 노아씨는?”
그러자 노아가 기다렸다는 듯이 입을 열었다.
“사냥, 가죽 벗기기, 돌 들기다.”
이쪽은 한술 더 떴다. 세 가지 전부 수인들이 자신 있어 하는 분야였다. 강현은 골치가 아파지는 걸 느꼈다.
강현의 시선이 마지막 한 사람에게 향했다.
“숨바꼭질이랑 약제조, 그리고….”
에밀리야가 말하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차마 입 밖으로 꺼내기 부끄러운 것이었다.
강현은 남은 한 가지가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활쏘기요?”
얼굴을 붉힌 에밀리야가 고개를 끄덕였다.
옆에 있던 노아와 란돌프의 시선도 차가워졌다.
‘란돌프씨는 그나마 양반이었네.’
셋의 싸늘한 시선이 향하자 에밀리야가 황급히 입을 열었다.
“사, 사냥이랑 숨바꼭질은 비슷해요! 그리고 달리기도 괜찮아요. 수, 숲속이라면.”
숨바꼭질은 전에 성인식에 봤던 것이었다.
에밀리야의 말대로 사냥과 큰 차이는 없었다.
차이라면 숨바꼭질은 은신과 추적술이 주를 이루고 사냥은 말 그대로 사냥.
사냥감을 물색하고 잡는 것에 목적이 있다.
강현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숨바꼭질이랑 사냥을 하나로 합치고, 달리기도 지형을 잘 짜면 될 것 같은데.’
일명 장애물 달리기.
솔직히 이 셋에게는 큰 의미가 없겠지만, 다른 이들은 지형의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돌 들기와 장작 패기는 그대로 해도 될 것 같아요.”
강현의 말에 란돌프와 노아의 눈이 반짝였다. 그와 달리 에밀리야의 귀가 축 처졌다.
불쌍해 보였지만, 어쩔 수 없었다.
활쏘기와 약제조는 요정을 이길 수가 없었다.
그러다가 문뜩 궁금증이 떠올랐다.
“...근데, 약제조는 어떤 식으로 시험 보는 건가요?”
강현의 관심에 에밀리야의 눈이 반짝였다.
“독을 먹고 그 독에 맞는 약을 빠르게 배합하는 거예요!”
“...”
“시간이 지나서 증상이 올라오는 것도 있어서 성급히 약을 쓰면 오히려 부작용이 생기기도 해서 지식과 판단력뿐만 아니라 인내력도 필요해요!”
괜찮지 않나요? 에밀리야의 얼굴에 기대감이 차올랐다.
그리고 강현은 그런 에밀리야를 외면했다.
‘...못 들은 걸로 해야겠다.’
요정들은 저런 걸 배운다는 건가.
생각보다 더 험악했다.
‘미리 생각해오길 잘했네.’
이들에게 맡겼으면 엉망이 되었을 거다.
강현은 자신이 생각해온 걸 이야기했다.
강현의 이야기에 셋의 눈이 커졌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것이기 때문이었다.
‘다들 전투적인 것만 생각하니까 나라도 다른 걸 생각해야지.’
물론 약제조는 전투 쪽이 아니었지만, 내용은 너무나도 전투적이었다.
“...나쁘지 않군.”
란돌프의 말에 노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둘과 달리 에밀리야는 아쉬운 기색을 드러냈다. 요정은 숨바꼭질, 하나만 채택되었기 때문이었다.
‘셋 중에 요정이 근력이 가장 낮다고 했었지?’
모든 요정이 에밀리야와 같은 게 아니었다.
하지만 에밀리야도 불평을 꺼내진 않았다.
숲속에서 속도라면 다른 두 종족을 압도한다.
사냥과 달리기에서 얼마든지 이점을 가져갈 수 있었다.
카샨의 부족 역시 숲속에 있긴 하나 수인들은 숲보다 들판에 익숙한 종족이었다.
괜히 숲의 종족이란 말이 나온 게 아니었다.
에밀리야도 그것을 알기에 불평할 수가 없었다.
“그럼 종목은 대충 정해졌으니….”
강현이 기지개를 켰다.
어느새 하늘에는 노을이 내려오고 있었다.
때마침 들려오는 부스럭 소리.
수풀 사이로 설기가 얼굴을 쏙 내밀었다. 그리고 이어서 모나의 모습도 보였다.
이미 숲에서 한바탕 뒹굴었는지 둘의 얼굴이 엉망이었다.
모나는 노아를 발견하고 달려들었다.
혼자 이곳에 온 걸 따지는 듯했다.
투닥이는 둘을 보며 강현이 미소 지었다.
‘정말, 딱 맞춰서 왔네.’
저것도 동물의 본능인가.
이제 모두 모였으니.
“...식사나 할까요?”
“컹!”
“밥!”
일행들 역시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