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5화 물었다!
강현은 볼을 긁적였다.
강현이 곤란한 표정을 짓자 수진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아, 괜찮으면 같이 가실래요? 저희도 다녀온 지 오래되었고….”
수진의 시선을 받은 민호가 재빨리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강현은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둘이 배려하고 있다는 걸 모를 강현이 아니었다.
하은이도 이제 제법 컸지만, 이런 추운 날씨에 데리고 다니기에는 아직 어렸다.
그리고.
“어르신들도 계시니 여쭤볼게요.”
강현의 말에 수진과 민호가 탄성을 뱉었다.
그렇다. 어르신들이 계셨다.
그분들은 강현과 마찬가지로 온 지 얼마 안 되었으니 가 보지 않았을 거다.
그렇게 수진과 민호가 떠나가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어르신들이 찾아왔다.
하지만.
“미안하군. 이번에 달에는 일정이 있어. 지인이 파리에서 전시회를 한다고 해서 들리기로 했네.”
“나도 가족과 여행을 가기로 했지.”
정기훈 작가와 이정환이 차례대로 입을 열었다.
둘의 얼굴에는 미안함이 담겨 있었다.
고개를 저은 강현은 보이지 않는 한 사람에 관해서 물었다.
“황대길 선생님은?”
“그 친구는 일 때문에 서울에 올라갔네. 당분간 바쁠 거라고 말하더군.”
둘과 달리 황대길은 완전히 은퇴한 게 아니었다.
그저 한발 물러나 있을 뿐, 아직 경영에 관여하고 있었다.
매장 관리나 방송까지. 신년에는 할 일이 많을 거다.
식사를 마친 정기훈 작가와 이정환을 떠나보낸 강현은 한숨을 내쉬었다.
“끼잉.”
어느새 다가온 설기가 강현의 발에 몸을 비볐다.
위로라도 해 주려는 것인가.
강현의 눈동자가 부드럽게 휘었다.
그런 강현을 보며 해맑게 웃는 설기.
동시에 꼬르륵.
설기의 배에서 소리가 났다.
“…밥 달라는 거였나.”
“컹!”
설기가 황급히 고개를 저으며 짖었다.
그러나 이미 강현의 표정은 평소처럼 돌아왔다.
짧은 두 발을 흔들어 아니란 걸 어필하는 설기.
강현은 피식 웃고는 설기의 머리를 두드렸다.
“알겠어. 금방 밥해 줄게.”
“끼이잉.”
주방으로 들어가는 강현을 보며 설기의 꼬리가 축 처졌다.
진짜 아닌데.
하지만 이어서 들려오는 꼬르륵 소리에 강현의 움직임은 더욱 분주해졌다.
옆에 있던 토리가 설기와 강현을 번갈아 보더니 길게 하품했다.
평화로운 일상이었다.
* * *
설기의 밥을 챙겨 준 강현은 핸드폰을 들어 올렸다.
‘…결국 이렇게 되네.’
어느 정도 예상은 하고 있었다.
한숨을 내쉰 강현이 전화를 걸었다.
통화음이 몇 번인가 들리더니 상대가 나왔다.
[오, 마이 브라더. 무슨 일이야?]
어째서인지 평소보다 목소리 톤이 높은 윤섭.
강현은 타이밍이 안 좋았나 싶었지만, 용건을 이야기했다.
강현의 이야기를 들은 윤섭이 탄식을 뱉었다.
[정말 이 형님이 없으면 안 되는구나. 본 지 얼마나 되었다고 또 보고 싶은 거야?]
핸드폰 너머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강현의 눈썹이 떨려 왔다.
이래서 가장 마지막에 연락한 것이었다.
윤섭이 좋은 사람인 건 알지만, 그렇다고 얄밉지 않은 건 아니었다.
“…관심 없으면 끊는다.”
[끊어도 같이 가자고 할 사람 없잖아.]
정곡이었다.
윤섭만큼이나 강현을 잘 아는 이는 없었다.
[에휴, 그러길래 서울에 있을 때, 친분 좀 다져 놓지.]
“끊을게.”
[아냐! 혼잣말이야, 혼잣말! 쏘리.]
다급한 목소리에 강현이 한숨을 내쉬었다.
혼잣말이라니. 결국 그리 생각한다는 건 변함이 없었다.
[송어 축제란 말이지? 갈게. 안 그래도 이번에 휴가를 받았거든.]
“…휴가?”
이런 시기에?
얼마 뒤 설날도 있었다.
[정식 휴가는 아니고 연말에 못 쉰 거 붙여 준 거야.]
그제야 강현도 이해가 되었다.
정식 휴가가 아니라 휴무일을 뒤로 미룬 것이었다.
‘그래서였구나.’
평소보다 기분이 좋아 보이는 이유는 그 때문이었다.
그때, 윤섭이 무언가 생각났다는 듯이 탄식이 뱉었다.
[아, 혹시 몇 사람 데려가도 돼?]
“누구?”
[우리 애들. 이제 일정이 끝나서 쉬고 있어. 집에 내려간 애들도 있는데 몇 명은 숙소에서 굴러다니고 있어서.]
윤섭의 말에 강현이 턱을 긁적였다.
그래도 담당이라고 아이들을 챙기는 것이었다.
사실 강현의 매장이라면 큰 상관은 없었다.
마을 잔치 역시 마찬가지.
그러나 송어 축제는 달랐다.
평창에서 열리지만 전국에서 사람들이 모일 정도로 큰 축제였다.
“문제 생기지 않겠어?”
유명한 연예인이었다. 그러자 윤섭이 웃음을 터트렸다.
[그 걱정은 하지 않아도 돼. 화장 안 하고 마스크 끼고 있으면 누군지 못 알아봐.]
게다가 겨울이라 옷도 두꺼웠다. 알아보는 게 오히려 신기한 것이었다.
그쪽 일하는 윤섭이 그런 사실을 모를 리가 없었다.
윤섭의 말을 들은 강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상관없어.”
[아, 안 올 수도 있으니 기대는 하지 마. 귀찮아서 집도 안 내려간 애들이라.]
당연한 말이지만 기대는 하지 않았다.
오든 안 오든 정말로 상관없기 때문이었다.
연예인이라고 놀라기에는 이미 경험이 너무 많았다.
통화를 끝낸 강현이 고개를 돌리자 담요를 물고 머리를 흔드는 설기가 보였다.
춤이라도 추듯 마구 흔들다가 강현과 눈이 마주쳤다.
슬그머니 담요를 내려놓는 설기를 보며 강현은 실소를 흘렸다.
* * *
이틀 뒤.
강현은 매장 문을 열 시간에 누군가를 기다렸다.
‘저기 오네.’
화려한 색상의 차.
올드카를 좋아한다면 멋스럽다고 하겠지만, 강현에게는 이해할 수 없는 취향이었다.
곧 차가 강현의 앞에 멈춰 섰다.
“셰프님!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차 문이 열리자마자 뒷좌석에 타고 있던 아이들이 인사를 건넸다.
한 명은 몇 번이나 만났던 소현이었다.
그리고 다른 한 명 역시 얼굴이 익숙했다.
‘막내라고 했던가.’
차에는 둘밖에 타고 있지 않았다.
“다른 애들은 집에서 쉬겠데.”
선글라스를 쓴 윤섭의 말에 강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송어 낚시는 여자아이들이 좋아할 만한 분야가 아니었다.
“자, 어서 타.”
윤섭의 말에 강현이 조수석에 올랐다.
그리고 설기가 폴짝 뛰어올라서 강현의 무릎에 자리 잡았다.
그런 설기의 모습에 윤섭이 미소를 흘렸다.
“봐도 봐도 신통한 녀석이네.”
윤섭이 손을 뻗으려고 하자 재빨리 머리를 피하는 설기.
“역시 주인을 빼닮았어.”
웃음을 터트린 윤섭이 차를 출발시켰다.
뒤에 앉은 아이들은 설기에게 관심을 보였지만, 설기가 반응조차 하지 않자 곧 설기에 대한 것을 잊고 자기들끼리 떠들기 시작했다.
강현은 앉아있는 설기의 목에 목줄을 걸어 줬다.
새끼긴 해도 사람들이 많으니 해 줘야 했다.
‘사실 의미는 없지만.’
설기가 마음먹고 뛰어다니면 제어할 수가 없었다.
설기는 목줄이 불편한지 꼼지락거렸다.
그러나 생각보다 얌전한 모습에 강현이 고개를 갸웃했다.
그리고 곧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보자기 때문이네.’
짐을 가지고 다니다 보니 목에 뭘 거는 게 익숙한 것이었다.
운전하던 윤섭이 입을 뗐다.
“송어 낚시라. 기대되네. 너 얼음낚시 해 봤어?”
윤섭의 물음에 강현이 고개를 저었다.
“하긴 네가 낚시를 좋아할 성격은 아니지.”
“일반 낚시라면 해 봤어.”
“응?”
그걸 일반 낚시라고 말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낚시는 맞았다.
윤섭이 놀란 눈으로 강현을 돌아보았다.
“네가? 누구랑…. 아, 마을 분들이랑 갔겠네.”
혼자 이해하고 고개를 끄덕이는 윤섭.
마을 사람이 아니라 란돌프였지만, 굳이 정정하진 않았다.
그렇게 오해하는 편이 편했기 때문이었다.
“형은?”
“나야 당연히 없지.”
없다는 게 자랑인가. 의기양양하게 웃는 윤섭을 보며 강현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하지만 곧 걱정되었다.
‘…마을 사람들께 요령이라도 듣고 왔어야 했나?’
애써 갔는데 한 마리도 못 잡으면 큰일이었다.
“지금 못 잡으면 어쩌나 걱정하지?”
“…!”
갑작스럽게 들린 목소리에 강현의 눈이 커졌다.
윤섭이 강현을 힐끗 보고는 입꼬리를 올렸다.
“넌 걱정이 너무 많아. 못 잡으면 어때. 그러면서 배우는 거지. 우린 놀러 가는 거지 진짜로 송어 낚으러 가는 게 아니잖아.”
강현은 윤섭의 말에 쓴웃음을 흘렸다.
“뭐든 완벽하게 할 필요는 없어.”
맞는 말이었다.
못 잡으면 못 잡은 대로 추억이었다.
문뜩 시선이 느껴져서 아래를 보니 설기가 강현을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강현은 설기의 복슬복슬한 털을 쓸어내렸다.
그러자 기분 좋은 듯이 눈을 감는 설기.
주머니에 있던 토리가 자신도 해 달라는 듯이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그렇게 토리까지 손가락을 간지럽힌 후 윤섭을 보았다.
‘그래도 역시 형이긴 형이네.’
가끔…. 아니, 자주 얄밉긴 해도 강현을 잘 알고 챙겨 주는 윤섭이었다.
‘그래, 쉬러 가는 거잖아.’
윤섭의 말대로 편한 마음으로 다녀오면 되었다.
* * *
“젠장. 그래, 누가 이기냐 보자!”
윤섭이 낚싯줄을 다시 얼음 아래로 넣었다.
강현은 어이가 없는 시선으로 윤섭을 바라보았다. 마음 편히 하자고 해 놓고 정작 자신이 가장 열성적이었다.
딱 4인이 앉을 정도의 텐트.
그 안에 있는 구멍에 일행들은 낚싯줄을 넣고 있었다.
마치 연을 날리는 얼레처럼 생긴 낚싯대.
입장권이 두 장이라 텐트 두 개를 빌릴 수 있었지만, 하나만 빌렸다.
아이들만 따로 있으라고 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아이들과 단둘이 있는 것도 어색했다.
훌쩍.
앉아 있던 소현이 훌쩍거렸다.
그러더니 콧물을 먹었다.
아이돌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모습. 그러나 둘은 아이돌이기 이전에 아직 어린 소녀들이었다.
하얀 입김이 올라갔다. 벌써 한 시간 째.
당연한 말이지만 한 마리도 잡지 못하고 있었다.
강현은 가슴팍을 슬쩍 내려다보았다.
토리가 걱정되는 것이었다.
말이 텐트이지, 앞문이 훤히 개방되어 있었다.
옆에서 부는 바람만 막아 주는 용도였다.
‘…1인당 2마리씩이었나.’
그러나 1인은커녕 넷이서 한 마리도 잡지 못하고 있었다.
행사장 안에는 사람이 북적거렸다. 텐트 구역은 그나마 나은 편이었지만, 빙판 위에는 물고기보다 사람이 더 많아 보였다.
그마저도 인원을 제한한 것이라니 송어 축제의 인기를 실감할 수 있었다.
아이들도 기다림이 길어지자 지루한지 하품했다.
강현은 추위에 손을 비비며 주변을 살폈다.
‘물고기가 없는 건가?’
강현 일행들뿐만 아니라 다른 이들도 상황이 비슷했다.
너무 늦게 온 것이었다.
‘어쩔 수 없나.’
강현은 문뜩, 옆이 허전하다는 걸 깨달았다.
고개를 돌리자 덩그러니 놓여 있는 목줄.
대체 언제 푼 걸까. 아니, 어떻게 풀었지?
애당초 목줄이란 게 혼자서 풀 수 있는 건가.
한숨을 내쉰 강현이 주변을 돌아보았다.
“…얜 또 어디를….”
말을 하던 강현이 숨을 삼켰다.
손에 감각이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물었다!’
급히 낚싯줄을 들어 올리는 강현.
그러나 곧 고개를 갸웃했다.
‘왜 이리 힘이 없지?’
원래 이렇게 쉽게 올라오는 것이었나?
전에 뉴스나 방송을 봤을 때는 펄쩍펄쩍 뛰던데?
그렇게 송어를 얼음 밖으로 꺼내자 아이들의 눈이 반짝였다.
“와! 엄청 커요!”
“역시 셰프님…!”
감탄하던 아이들. 그러나 곧 이상한 걸 깨달았다.
“…얘 안 움직이는데 죽은 거 아니에요?”
소현의 말이 끝나자마자 펄떡 뛰어오르는 송어.
“아, 아니구나.”
그러나 강현의 머릿속에 한가지 의심이 떠올랐다.
‘…설마.’
다시 낚싯줄을 집어넣는 강현.
그리고 몇 초가 지나기도 전에 입질이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