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2화 그럴 순 없지
목적지에 도착한 강현은 짐을 내려놨다.
쿵.
묵직한 소리가 울렸다.
강현은 뻐근해진 어깨를 돌렸다.
‘역시 이만한 양이면 힘드네.’
강현은 배낭과 짐들을 보며 실소를 흘렸다.
그러나 당연했다.
짐들의 무게만 해도 상당했다. 일반인이라면 제대로 드는 것조차 힘들 거다.
이제 강현도 스스로가 평범에서 벗어났다는 걸 자각하고 있었다.
그렇게 짐을 내려놓자 설기가 다가왔다.
흔들리는 꼬리.
반짝이는 눈동자를 본 강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놀고 와도 돼. 고생했어.”
“컹!”
여기까지 짐을 들고 오느라 놀지 못했다.
강현의 허락이 떨어지자마자 설기가 숲을 향해 달려갔다.
순식간에 멀어지는 하얀 털 뭉치.
고개를 저은 강현은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토리는 안 가도 돼?”
평소라면 설기를 따라갔을 토리가 우둑하니 있었다.
강현의 물음에 토리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일어나더니 강현이 내려놓은 짐 옆에 걸어가더니 다시 털썩 주저앉았다.
토리가 앞에 놓인 짐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 아는 강현은 웃음을 흘렸다.
“그건 지금 못 해. 조금 기다려야 해.”
강현의 말에 토리가 물끄러미 강현을 올려다보았다.
잠시 후 토리가 고개를 끄덕이더니 땅속으로 들어갔다.
다 들어간 게 아니라 빼꼼 얼굴만 내밀고 있었다.
저렇게 쉬고 있을 생각 같았다.
강현은 그런 토리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는 배낭을 열었다.
가장 먼저 텐트를 설치하고 앞에 테이블과 의자를 설치했다.
앤은 흥미로운 눈빛으로 강현의 행동을 지켜보고 있었다.
‘신기한 물건들이야.’
드워프가 만들었다고 해도 믿을 정도로 섬세했다.
이곳의 귀족들이 봤다면 눈에 불을 켜고 달려들 거다.
하지만 앤은 드워프의 것이 아니란 걸 알아챘다.
장비에 적힌 문양은 앤에게도 생소한 것이었다.
‘언어. 그것도 하나가 아니야.’
그 사이 어느 정도 준비가 된 강현이 짐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그와 함께 땅속에 있던 토리의 눈이 반짝였다.
짐이 무거웠던 이유는 저것 때문이었다.
화목 난로.
굳이 이런 날씨에 난로를 필 필요는 없었다.
강현이 난로를 가지고 온 건 다른 목적 때문이었다.
바로 오븐이었다.
화목난로까지 설치한 강현이 땀을 훔쳤다.
“이제는 장작만 구하면…. 응?”
뒤를 돌아본 강현은 실소를 흘렸다.
어느새 나뭇가지들이 뒤에 쌓여 있었기 때문이었다.
심지어 그중에는 방금 땅에서 뽑은 것처럼 뿌리가 촉촉한 것들도 있었다.
토리가 가지고 온 것이었다.
‘깔끔하게 뽑혔네.’
뿌리가 살아 있었다.
게다가 대부분 어린나무였다.
“고마워, 토리야.”
강현은 토리의 머리를 쓰다듬고는 뿌리가 있는 나무들을 뺐다.
“하지만 얘네는 물이 많아서 못 써. 얘들은 다시 심어 줄 수 있어?”
강현의 말에 토리가 고개를 끄덕였다.
벌떡 일어나더니 두 손으로 나무를 잡고 땅속으로 들어갔다.
쓰러졌던 나무가 벌떡 일어났다.
그것도 잠시.
더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일어난 나무가 이동하고 있던 것이었다.
“…오.”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움직이는 나무.
땅 밑에서 토리가 옮기고 있는 것이었다.
넋을 놓고 감탄하던 강현이 고개를 저었다.
이렇게 감탄하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강현은 주변을 돌아다니며 마른 나뭇가지들을 골랐다.
토리에게 돌려놓으라고 한 이유는 단지 나무가 어리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살아있는 나무는 타기도 힘들뿐더러 연기가 심했다.
이런 장작에는 마른 나뭇가지들이 제격이었다.
그렇게 나뭇가지들이 어느 정도 쌓이자 강현이 토리를 불렀다.
“토리야, 부탁해.”
토리를 난로 안에 올렸다.
강현은 라이터도 토치도 가지고 오지 않았다.
토리가 있기 때문이었다.
고개를 끄덕인 토리가 나뭇가지 틈새로 쏙 들어갔다.
그리고 몸을 웅크리자 털에서 불길이 올라왔다.
조금씩 불이 옮겨 가고 있었다.
그때, 지켜보던 앤이 입을 열었다.
“잠깐만.”
강현이 고개를 돌리자 앤은 숲 너머를 보고 있었다.
“손님이야.”
설기인가 싶었지만, 설기라면 손님이라고 칭하지 않았을 거다.
강현은 곧 하늘 위를 날아오르는 매를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 * *
역시나 손님은 에밀리야였다.
게다가 그녀는 혼자 온 게 아니었다. 에밀리야 뒤로 아우라가 쭈뼛거리며 따라오고 있었다.
에밀리야는 강현을 향해 반가운 눈빛을 보낸 후에 앤을 돌아보았다.
“지난번에는 아우라가 실례했다고 들었습니다.”
에밀리야가 아우라에게 눈짓했다.
그러자 아우라는 잠시 머뭇거리더니 고개를 숙였다.
“…제가 무례했습니다. 죄송합니다.”
강현은 놀란 눈으로 아우라를 보았다.
억지로 하는 사과는 아니었다. 이런 상황이 익숙하지 않을 뿐이지 사과는 진심이었다.
앤도 이걸 알았는지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니, 처음부터 화를 낸 게 아니지.’
당연히 사과를 안 받아 줄 이유도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그냥 넘어간 것도 아니었다.
담배 연기를 내뿜은 앤이 입을 열었다.
“어린애의 치기 어린 행동을 마음에 담을 정도로 어리석진 않습니다.”
졸지에 어린애 취급당한 아우라의 얼굴이 붉어졌다.
‘역시 성격이 나쁘다니까.’
강현은 실소를 흘렸다. 그러다가 문뜩 이상한 점을 알아챘다.
앤이 존댓말을 쓴 것이었다.
싱긋 웃은 에밀리야가 입을 열었다.
“다행이네요. 저희 때문에 불쾌한 여행이 되면 어쩌나 걱정했답니다. 강현 씨의 친구이면 저희의 친구이기도 하니깐요. 그럼, 저흰 이만 가 볼게요.”
정말로 사과만 하러 온 것이었는지 에밀리야가 몸을 돌렸다.
그 모습에 강현이 볼을 긁적였다.
이런 상황에서 식사를 초대하긴 어렵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강현이 망설이고 있는 사이, 앤이 입을 열었다.
“괜찮다면 같이 식사라도 하시는 게 어떻습니까?”
강현은 의외란 눈으로 앤을 보았다.
에밀리야는 잠시 멈칫하더니 앤을 돌아보았다.
“괜찮으신가요?”
에밀리야의 물음에 여러 가지 의미가 담겨 있었다.
자신들이 방해하는 게 아닌가 걱정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앤은 대수롭지 않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이 녀석…. 강현이 준비한 것에는 제 것뿐만 아니라 여러분의 몫도 있을 겁니다. 그렇지?”
강현은 어색하게 웃었다. 하지만 그걸로 대답은 충분했다.
“원래 이곳의 주인은 여러분입니다. 객이 주인을 쫓을 순 없죠.”
앤은 그리 말한 후 입을 닫았다.
맞는 말이었다.
에밀리야는 이 숲의 순찰자였다.
에밀리야는 슬쩍 아우라를 봤다. 아우라는 입을 우물거리고 있었다. 이 자리가 불편한 것이었다.
곧 무언가를 떠올린 에밀리야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실례할게요. 괜찮죠, 강현 씨?”
“물론이죠.”
에밀리야의 물음에 강현이 웃으며 말했다.
아우라의 표정이 어두워졌으나 에밀리야는 개의치 않았다.
의자에 앉는 둘을 본 강현이 앤을 신기한 듯이 보았다.
지금의 앤은 강현의 알던 앤과 다른 사람 같았다.
그런 강현의 시선에 앤이 코웃음 쳤다.
“난 요즘 젊은 녀석들과 달라. 연장자에 대한 예의 정도는 알고 있지. 그녀는 존중받기 충분한 요정이야.”
앤의 말에 강현이 쓴웃음을 흘렸다.
나이에 예민한 만큼 반대도 철저했다.
‘정말 한결같네.’
다른 사람 같다는 생각을 철회했다.
그러다가 문뜩 새로운 사실을 깨달았다.
‘에밀리야 씨를 알고 있는 건가?’
아니면 단순히 나이 때문에 그런 말을 한 건가?
어쨌든 앤의 이야기를 듣고 나니 에밀리야의 나이가 더욱 신경 쓰였다.
슬쩍 에밀리야를 보자 눈이 마주쳤다.
환하게 웃는 에밀리야.
강현은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고개를 갸웃한 에밀리야가 입을 열려다가 시선을 돌렸다.
“돌아오나 보네요.”
“컹! 컹!”
에밀리야의 말이 끝나자마자 설기의 짖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끼햣! 꺄하하하!”
해맑게 웃는 소리도 함께.
강현은 어렵지 않게 목소리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모나랑 만났나 보네.’
아니나 다를까.
수풀이 흔들리더니 하얀 털 뭉치가 튀어나왔다.
높게 뛰어오른 설기.
하늘을 올려다보자 설기의 꼬리를 잡고 있는 모나가 보였다.
모나를 달고 저렇게 달리는 설기가 대단한 것인가.
아니면 저렇게 달리는 와중도 꼬리를 놓치지 않는 모나가 대단한 것인가.
아무튼 쉽게 볼 수 있는 광경은 아니었다.
바닥에 착지한 설기는 몸을 휙 돌렸다.
그러자 매달려 있던 모나의 몸도 돌아가더니.
쿵!
나무에 부딪혔다.
‘아우.’
떨어져 내리는 나뭇잎들을 본 강현은 자신도 모르게 눈살을 찌푸렸다.
보는 것만으로도 아팠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정작 모나는 벌떡 일어나서 부딪힌 자리를 털어 냈다.
그리고 강현에게 다가가서 두 손을 높게 들었다.
“바압!”
“…반갑다는 거지?”
끄덕끄덕.
모나 나름의 인사였다.
그런 모나의 모습에 강현이 실소를 흘렸다.
그러던 강현의 눈에 올라가오는 연기가 보였다.
‘깜빡했네.’
서둘러서 난로를 확인했다.
다행히도 나무가 다 타지 않았다. 만일 다 타 버렸다면 다시 붙여야 했다.
그리고 재가 된 나무 사이에 녹아 버린 햄스터가 한 마리.
피로가 풀리는지 노곤한 표정이었다.
강현은 토리를 놔두고 장작을 새로 더 집어넣었다.
그리고 뒤를 돌아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일행들을 보았다.
“그럼 식사나 할까요?”
“컹!”
“바압!”
고개를 끄덕이는 일행들.
그리고 그런 강현의 말을 가장 반기는 건 설기와 모나였다.
* * *
강현의 준비한 요리는 간단했다.
아니, 익숙했다.
바로 양식.
파스타와 피자, 스테이크.
양식에서 가장 유명한 요리들이었다.
그리고 강현이 매일 같이 만드는 요리였다.
처음에는 다른 요리를 고민했지만, 결국 양식으로 돌아왔다.
가장 익숙하고 자신 있는 요리이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무엇보다.
‘생각 외로 잘 만들지 않았지.’
구이나 찌개, 어묵탕까지.
캠핑와서 다양한 요리를 만들긴 했지만, 정작 양식을 만든 적은 드물었다.
그렇기에 이번에 마음먹고 장비를 가져온 것이었다.
‘설기는 많이 먹어 보긴 했지만.’
아직 질려 하지 않는 것 같으니 문제없었다.
강염 버너에 커다란 냄비를 올리고 물을 끓였다.
면을 삶을 냄비였다.
물을 끓이는 동안 미리 발효시킨 반죽을 꺼냈다.
능숙하게 반죽을 피는 강현.
전에는 반죽을 펴서 소스까지 발라 왔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역시 바로 만들어서 먹는 게 맛있지.’
핀 반죽에 토마토소스를 듬뿍 올린다.
강현이 직접 만든 토마토소스.
이대로 구워도 충분히 맛이 있었다.
‘그럴 순 없지.’
그렇게 할 거면 애써 장비를 챙겨 온 의미가 없었다.
방울토마토를 잘라서 듬성듬성 올려 준다.
그리고 생 모차렐라 치즈를 올린 후 오븐에 넣어 준다.
마르게리타 전통 이탈리아 피자였다.
강현은 거기서 멈추지 않고 도우 하나를 더 꺼냈다.
전처럼 토마토소스를 발랐으나 이번에는 재료가 많았다.
소스 위에 버섯과 베이컨, 올리브, 파프리카까지.
피자가 알록달록하게 변했다.
그 위에 모차렐라 치즈를 넘칠 정도로 듬뿍 올렸다.
생모차렐라가 아니었다. 흔히 피자치즈로 알려진 일반적인 치즈.
미국식 피자.
그렇게 피자를 하나 더 만들고 나니 물이 끓기 시작했다.
‘…좋네.’
매장처럼 정확하진 않았지만, 시간이 얼추 맞아떨어졌다.
끓는 물에 파스타 면을 넣은 강현이 미소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