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9화 벌써 그런 시기이구나
저절로 고개가 끄덕여졌다.
나쁘지 않았다.
아니, 이렇게 밖에서 먹기에는 호화스러웠다.
강현은 맥주를 입으로 가져갔다.
입안에 남아 있던 해산물의 짭조름함이 날아갔다.
그러던 강현은 문뜩 시선을 느끼고 고개를 들었다.
음식을 먹던 앤이 강현을 빤히 쳐다보고 있기 때문이었다.
강현과 눈이 마주치자 앤이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부모들이 맡길 만해. 좋은 보모가 되겠어.”
뜬금없는 말에 강현이 눈을 껌뻑였다.
모나를 말하는 건가. 아니면 설기를 말하는 건가.
어쩌면 둘 다일 수도 있었다.
강현의 시선이 설기와 모나에게 향했다.
둘 다 음식을 먹느라 볼이 빵빵했다.
아니, 토리까지 셋이었다.
잘 때와 먹을 때만은 셋 다 얌전했다.
‘보모라니.’
칭찬인지 놀리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설령 칭찬이라고 해도 그리 기쁘지는 않았다.
하지만 틀린 말은 아니었다.
아직 셋 다 아기들이었다.
싫은 건 아니었지만, 기쁘게 받아들일 수도 없었다.
그런 강현이 다시 앤을 바라봤을 때, 앤은 깨작깨작 어묵을 찢고 있었다.
다른 이가 봤으면 먹기 싫어서 장난치는 걸로 생각했을 거다.
하지만 강현은 그게 아니란 걸 잘 알았다.
‘…맛을 느끼는 거지.’
제대로 된 식사는 오랜만일 거다.
찢은 어묵을 입게 가져가는 앤.
그러던 강현의 눈에 무언가가 들어왔다.
잘 익은 새우.
그릇 한쪽으로 치워져 있었다.
‘새우를 안 좋아하나?’
아니다. 벌레를 으깨서 먹었던 앤이었다.
그 수프의 맛은 아직도 떠올랐다.
아마 잊긴 힘들 거다.
그러니 입맛에 맞지 않다고 안 먹지 않을 거다.
거기까지 생각한 강현은 그럴듯한 이유를 떠올릴 수 있었다.
‘…새우는 먹어 본 적이 없는 건가?’
조개와 달리 경험이 없는 것이었다.
‘조개를 먹었던 경험이 있다고, 새우를 먹었던 경험까지 있으리란 보장도 없으니.’
작게 고개를 끄덕인 강현은 전골에서 새우를 건졌다.
그리고 능숙하게 껍질을 벗겼다.
역시나 앤의 시선이 느껴졌다.
강현이 벗긴 새우를 먹자 앤도 새우를 벗기기 시작했다.
‘와.’
처음 벗기는 것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깔끔하게 벗겨졌다.
아니, 속도만 조금 느릴 뿐 강현의 움직임과 닮았다.
‘…요리도 잘하겠는데?’
벌레 수프를 만든 이라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하지만 강현은 금세 앤에게서 시선을 뗐다.
일부러 새우를 깠다는 걸 숨기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그런 강현의 생각은 이미 앤에게 읽히고 있었다.
“알고 있으니 봐도 돼.”
“예?”
“이 녀석 말이야.”
앤은 잘게 쪼갠 새우살을 입에 넣고는 눈을 감았다.
“좋군.”
고개를 끄덕인 앤이 다시 강현을 보았다.
“알지 못하는 건 부끄러운 게 아니야. 모르는 걸 안다고 거짓말하는 게 부끄러운 거지.”
앤의 말에 강현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강현도 비슷한 말을 알고 있었다.
앞은 같아도 뒤는 조금 달랐다.
‘알려고 하지 않는 게 부끄러운 일이다.’
학창 시절에 선생님께 들었던 말이었다.
하지만 그렇다면 다른 의문이 생겼다.
모르는 게 부끄럽지 않다면 왜 가르쳐 달라고 하지 않은 걸까.
강현의 의아한 시선에 앤이 입꼬리를 올렸다.
“그렇다고 해서 뭐든 가르쳐 주기만을 원하면 성장하지 않지.”
그건 또 무슨 소리인가.
앤도 강현이 새우를 깔 때까지 기다렸던 것 아닌가?
그러나 앤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지. 예로부터 타인을 보고 배우는 건 지혜로운 일이야.”
“….”
둘 차이가 무엇인지 강현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앤이 담담히 말을 이었다.
“빚을 지는 건 싫거든.”
그제야 강현은 앤의 직업을 떠올렸다.
정보상.
가르침은 정보를 사는 것과 같았다.
하지만 본인이 보고 듣는 건 달랐다.
‘마지막 이유가 진짜구나.’
강현은 이해할 수 없는 사고방식이었다.
다른 이들이 들으면 피곤하다고 생각할 거다. 하지만 그게 그녀가 살아가는 방식이었다.
그녀는 새우 한 조각을 입에 넣은 후 자리에서 일어났다.
“잘 먹었어. 확실히 여기까지 온 보람은 있군.”
“벌써 가시게요?”
강현이 놀란 눈으로 앤을 보았다.
어느새 비어 있는 앤의 그릇.
“식사는 조금 부족한 정도가 적당해. 그게 장수의 비결이지.”
어디선가 들어 본 이야기를 태연스럽게 내뱉는 앤.
만일, 앤이 평범한 인간이었다면 고개를 끄덕일 거다.
하지만 앤은 요정의 핏줄이었다.
소식하지 않아도 장수할 수 있었다.
곧 앤은 옷 안으로 손을 집어넣어서 무언가를 찾았다.
그 모습에 민망해진 강현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원하던 걸 찾은 앤은 강현을 돌아보았다.
“여기.”
앤이 건넨 건 나뭇가지였다.
평범해 보이는 나뭇가지. 그러나 익숙한 느낌이 들었다.
“이건….”
“식대. 정령목의 나뭇가지야. 심으면 나무가 자라날 거야. 정령목 만큼은 아니겠지만, 제법 유용할 거야.”
어디에 유용한지 물을 필요는 없었다.
설기와 토리가 흥미를 보이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묻는다고 해도 순순히 가르쳐 줄 리가 없었다.
동등한 정보나 대가를 받겠지.
이젠 앤의 성격에도 적응이 되었다.
‘음, 애들 정서에 좋은 건가.’
강현은 나뭇가지를 받아들였다.
“원래라면 다른 걸 주려고 했었는데….”
앤이 힐끗, 남은 조개 전골을 바라보았다.
“그것 가지고는 추가 맞지 않을 것 같아서.”
저울의 추.
그만큼 만족스럽단 이야기였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앤의 이야기였다.
‘…조개 전골로는 과해.’
정령목에 대해서 잘 모르는 강현이라도, 이 나뭇가지가 평범하지 않다는 건 잘 알고 있었다.
앤은 볼일이 끝났다는 듯 몸을 돌렸다.
그리고 강현은 그런 앤을 급히 붙잡았다.
“앤 님. 숲에는 언제까지 계실 예정이시죠?”
강현의 말에 떠나려던 앤이 눈살을 찌푸렸다.
그리고 곧 강현의 의도를 깨닫고 실소를 흘렸다.
“부담 가질 필욘 없어. 내가 그만한 가치가 있다고 판단한 것이니.”
“하지만 그 가치는 상대적인 거잖아요.”
강현의 말에 앤이 입을 다물었다.
맞는 말이었다.
앤이 느끼는 가치와 강현이 느끼는 가치가 달랐다.
정보상으로서 강현의 말을 부정할 수 없었다.
“시간 괜찮으시면 다음 주에 또 뵐 수 있을까요?”
결국, 앤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 사이 별일이 없다면.”
앤은 그리 말하고 자리를 떠났다.
애매한 답.
그러나 강현은 그것이 허락이란 걸 알 수 있었다.
강현은 받은 나뭇가지를 배낭 안에 조심스럽게 넣었다.
그리고 눈을 반짝이고 있는 설기에게도 경고했다.
“장난감 아니니깐 물면 안 돼.”
“컹!”
걱정하지 말라는 듯 짖는 설기.
하지만 배낭에서 시선을 떼지 않고 있었다.
강현은 그런 설기의 볼을 살짝 꼬집었다.
“마저 먹고 운동하자.”
이미 밤이 어두워졌지만, 설기가 있으니 걱정 없었다.
게다가 숲의 밤에도 제법 익숙해진 강현이었다.
강현의 말에 설기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까먹고 있던 게 분명했다.
그리고 남은 그릇을 바라보더니 슬쩍 밀었다.
“다 먹었다고?”
“컹!”
말과 달리 시선은 계속 그릇을 힐끗거리고 있었다.
실소를 흘린 강현은 모나를 돌아보았다.
굳이 물어볼 것도 없었다.
빵빵해진 볼.
설기가 남은 음식까지 제 입으로 쑤셔 넣고 있었다.
“천천히 먹어. 안 뺏어 먹을 테니.”
고개를 끄덕이는 모나.
하지만 그 손은 멈추지 않았다.
* * *
크리스마스가 지난 마을은 조용했다.
평소와 같은 마을.
아니, 달라진 건 있었다.
“여긴, 이렇게 하면 돼.”
“우와.”
곽도현의 말에 상후와 응언이 감탄했다.
“형, 똑똑해!”
“똑똑해!”
“아니, 그 정도는….”
곽도현이 당황해서 손을 내저었다. 똑똑하단 말이 낯간지러웠기 때문이었다.
애당초 곽도현의 특기는 운동이었다.
지금도 학교 진도를 따라가기 위해서 필사적이었다.
하지만 그 말이 싫진 않은지 볼이 상기되었다.
학교가 방학에 들어가면서 강현의 매장은 공부방으로 변해 있었다.
‘나쁘지 않지.’
조용한 것보다는 이렇게 떠들썩한 게 좋았다.
한 가지 단점이라면.
강현은 테이블 옆에 놓인 상자를 보았다.
귤부터 과자까지.
아이들이 공부하고 있다는 걸 알자 마을 사람들이 하나둘 와서 가져다 준 것이었다.
‘…여기가 식당이란 걸 잊고 있는 거 아닌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은 강현.
그때, 문밖에서 소리가 들렸다.
“컹! 컹!”
“왔구나.”
강현이 문을 열자 꼬리를 흔드는 설기가 있었다.
해맑은 표정.
아직 통통한 얼굴이었지만, 그래도 예전의 모습을 되찾고 있었다.
그리고 설기의 등 위에는 지친 기색의 토리가 앉아 있었다.
“추운데 고생했어.”
강현은 토리를 들어서 난로 옆에 올려놓았다.
요 며칠 설기와 어울려 주느라 바빴다.
난로의 온기가 닿자 토리의 얼굴이 나른해졌다.
“넌 기다려.”
강현은 슬쩍 매장 안으로 들어가려는 설기를 제지했다.
움찔.
“끼잉.”
설기가 슬그머니 강현의 눈치를 봤다.
설기의 털은 눈과 흙으로 엉망이었다. 강현은 타월로 설기의 몸을 닦아 냈다.
‘운동하는 건 좋은데, 갈 때마다 이 꼴이니.’
아침은 그나마 나았다. 강현도 같이 달리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점심 저녁때는 한 번 나갔다 오기만 하면 엉망이 되었다.
오늘은 눈이 와서 그나마 나은 것이었다.
눈이 녹은 날에는.
강현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덕분에 빨래만 쌓여 갔다.
‘건조기를 사야 하나.’
가뜩이나 추워서 잘 안 말랐다.
한숨을 내쉰 강현이 설기의 엉덩이를 톡톡 두드리자 설기가 후다닥 홀로 향했다.
그리고 공부하고 있는 셋을 빤히 쳐다보는 설기.
그런 설기의 시선을 깨달은 응언이 귤 하나를 까서 건네줬다.
귤뿐만 아니라 과자까지 먹고 난 후에나 제집으로 들어갔다.
만족스러운지 이리저리 흔들리는 꼬리.
살이 조금 빠지자마자 다시 원래대로 돌아온 설기였다.
‘아니, 삼 일이나 버틴 것도 대단한가?’
그러던 강현의 눈에 무언가가 보였다.
난로 위에서 손을 흔드는 토리.
마치 구조 신호라도 보내듯 열심히 흔들고 있었다.
설기를 보느라 뒤늦게 깨달았다.
강현은 그런 토리를 들어서 주방 선반 위에 올렸다.
정확히는 앤에게 받은 나뭇가지 옆.
그러자 나뭇가지를 포옥 껴안은 토리. 정말로 마음에 든 모양이었다.
그 모습에 강현은 미소 지었다.
아직 나뭇가지를 어떻게 할지 정하지 못했다.
이번에 갔을 때, 에밀리야에게 조언을 구하려고 한다.
‘그리고 앤 님도 제대로 대접해야지.’
이번에 보면 또 언제 볼지 몰랐다.
‘성격이 까다롭긴 해도 나쁜 사람은 아니니.’
성격만 나쁠 뿐이다.
거기까지 생각한 강현이 고개를 갸웃했다.
결국, 그게 나쁘다는 말 아닌가?
하지만 곧 고개를 저었다.
아무렴 어떻겠는가.
그때, 방울 소리가 울렸다.
다시 한번 찬바람이 매장 안으로 들어왔다.
“안녕하세요.”
“아, 안녕하세요.”
아이들이 합창하듯 인사를 건넸다.
안으로 들어온 이는 이장이었다. 이장은 아이들을 보며 반갑게 손을 흔들었다.
“아이쿠, 오늘도 열심히구먼. 큰 사람이 되겄어.”
“이장님, 어서 오세요.”
강현이 웃으며 테이블로 안내하려고 하자 이장이 고개를 저었다.
“오늘은 밥 먹으러 온 게 아니여.”
“예?”
의아해하는 강현을 향해 이장이 종이를 건넸다.
“이번에 고생해서 따로 챙긴 거여. 기분 전환 삼아서 다녀와.”
이장이 건넨 건 두 장의 입장권이었다.
입장권을 확인한 강현의 눈에 이채가 떠올랐다.
‘벌써 그런 시기이구나.’
평창 송어 축제.
평창에서 가장 큰 축제 중 하나였다.
까맣게 잊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