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0화 뭔가, 한 건가?
시간은 순식간에 지나갔다.
설탕이 온 지 어느새 일주일이 되려고 하고 있었다.
마을 사람들뿐만 아니라 옆 마을에서도 구경하고 갔다.
‘이렇게 인기 있을 줄은 몰랐는데.’
하지만 생각해 보면 설탕은 핑계였다.
그중 대부분이 설탕을 못 보고 갔다. 아쉬워하긴 했지만, 크게 낙담한 이는 없었다.
강현의 시선이 설탕에게 향했다.
갸르릉거리며 털을 고르고 있는 설탕.
틈이 있을 때마다 털을 고르고 있었다.
여자아이라서 그런지 외모에 신경을 쓰고 있었다.
‘이번에는 오려나.’
설탕이 싫은 건 아니었지만, 역시나 설기가 신경 쓰일 수밖에 없었다.
이제 설기는 가족이나 다름이 없었다.
그때, 털을 고르던 설탕이 멍하니 밖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강현은 설탕을 따라서 시선을 돌렸다.
“눈이구나.”
하늘에서 내려오는 새하얀 눈.
‘오늘 눈이 온다고 했었나?’
이제는 익숙해서 새삼스러운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설탕에게는 다르게 느껴졌나 보다.
강현은 설탕을 힐끗거렸다.
눈을 따라 헤엄치는 눈동자.
그리고 귀와 꼬리가 움찔거렸다.
강현은 올라오는 입꼬리를 억지로 참으며 매장 문을 활짝 열었다.
차가운 바람과 함께 눈들이 안으로 들어갔다.
“설탕아, 나가서 봐.”
강현의 말에 돌아보는 설탕. 그러나 금세 두 눈이 눈을 쫓고 있었다.
설탕은 잠시 망설이더니 선반에서 폴짝 뛰어내렸다.
그리고 조심스레 걸음을 옮겼다.
마침 불어온 바람.
바람에 날아온 눈이 설탕의 코에 떨어졌다.
움찔.
금세 녹은 눈.
설탕은 혀로 코를 핥고는 다시 걸어갔다.
그렇게 한 발, 한 발.
어느새 매장 밖으로까지 나온 설탕.
그 사이 눈은 점점 많아지기 시작했다.
제자리에서 뱅뱅 돌기 시작한 설탕.
눈을 쫓고 있는 것이었다.
평소와 달리 움직임이 부자연스러웠다.
뒤뚱뒤뚱 걷는 설탕.
‘설기도 저런 느낌이었지.’
마치 작동 오류가 난 컴퓨터처럼.
강현이 그런 설탕을 구경하고 있자 무언가가 강현의 바짓단을 잡아당겼다.
툭, 툭.
고개를 숙이자 떨고 있는 토리가 보았다.
“앗, 미안해.”
강현은 서둘러서 토리를 안아 올렸다. 그러자 강현의 몸을 파고드는 토리.
찬바람이 들어와서 집 밖으로 나온 것이었다.
강현의 품에서 다시 몸을 웅크리는 토리.
아직도 추운 모양이었다.
“설탕아, 놀고 있어.”
들리지도 않는지 길을 오가는 설탕.
강현은 피식 웃고 매장 안으로 돌아왔다.
문을 닫자 금세 따뜻해지는 매장.
토리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강현이 토리를 내려놓자 후다닥 집으로 향하는 토리.
강현은 그런 토리를 보다가 주방으로 향했다.
“그럼 나도 일을 해 볼까?”
이제 크리스마스가 이 주밖에 남지 않았다.
이곳에서야 큰 의미는 없겠지만, 요식업에서는 큰 행사였다.
요 며칠 설탕 덕분에 손님이 많아서 이제야 여유가 생겼다.
‘정우 쪽 메뉴는 지난주에 보냈으니깐.’
이제 서울 매장에서 쓸 메뉴를 보내 줘야 했다.
정우 쪽 메뉴는 오히려 쉬웠다.
황대길이 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강현 홀로 해야 하는 일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번거롭다고 생각하진 않았다.
메뉴를 만드는 건 늘 설렜다.
식칼을 잡은 강현의 눈이 반짝였다.
* * *
목이 뻐근해진 강현이 기지개를 켰다.
얼마나 집중했는지, 관절이 비명을 질렀다.
고개를 절레절레 저은 강현은 창문 너머를 확인했다.
창문을 보니 온통 새하얗게 변해 있었다.
‘얼마나 지난 거야.’
시간을 확인하니 세 시간이 훌쩍 지나 있었다.
몸이 뻐근할 만했다.
‘좀 쉬어야겠네.’
강현은 식칼을 내려놓고 매장 밖으로 나왔다.
간단한 스트레칭 후에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설탕을 찾으려는 것이었다.
그리고 멀지 않은 곳에서 찾을 수 있었다.
“허.”
언제 온 걸까.
설탕과 놀고 있는 상후와 미영이의 모습이 보였다.
눈싸움하는 셋.
당연히 상후와 미영이가 한 편이었다.
설탕은 요리조리 피하며 둘에게 눈을 뿌리고 있었다.
너무 강하지도, 약하지도 않게 조절하고 있었다.
꺄르르.
상후와 미영이의 웃음소리가 눈 덮인 마을에 울리고 있었다.
잘 있다는 걸 확인한 강현이 들어가려는 찰나.
상후가 강현을 발견했다.
“어? 삼촌!”
움찔.
슬쩍 강현을 보는 설탕.
자신은 논 게 아니다. 아이들과 어울려 줬을 뿐이다. 라고 어필하는 것처럼 도도한 걸음으로 걷기 시작했다.
그러나 강현은 조금 전에 신나게 흔들리는 꼬리를 봤다.
‘…그냥 놀아도 되는데.’
부끄러운 건가?
그러는 사이 상후와 미영이가 강현 쪽으로 달려왔다.
“안녕하세요!”
“아, 안녕하세요!”
꾸벅 고개를 숙이는 둘.
추운 날씨에 눈싸움해서 코가 시뻘겋게 변해 있었다.
훌쩍이는 둘.
감기에 걸리지 않을까 걱정이 되었다.
강현은 웃으며 둘의 인사를 받았다.
“둘 다 어쩐 일이야?”
상후 혼자라면 모를까 미영이까지 함께였다.
우연히 지나가다가 봤을 리는 없었다.
강현의 물음에 상후가 배시시 웃었다.
“방학 숙제 하러 왔어요!”
장소는 당연히 강현의 매장이었다.
그러나 강현은 고개를 갸웃했다.
“방학 숙제?”
상후와 미영이는 빈손이었기 때문이었다.
강현의 시선에 상후와 미영이도 그 사실을 깨달았다.
“아, 내 가방!”
“나, 나도!”
서둘러 왔던 길을 돌아가는 둘.
설탕과 노느라 가방을 내팽개친 것이었다.
강현은 둘이 달려가는 방향을 보았다.
이미 눈으로 뒤덮여서 어디에 있는지 짐작하기 어려웠다.
‘젖지 않아야 하는데.’
그렇게 둘이 가방을 찾으러 간 사이 설탕이 돌아왔다.
몸을 흔들어서 붙은 눈을 털어내는 설탕.
“잘 놀았어?”
강현의 물음에 대꾸하지 않고 매장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아직도 올라가 있는 귀나 좌우로 흔들리는 꼬리를 보면 대답이 되었다.
사뿐, 가볍게 선반 위로 오르는 설탕.
미처 못 털어 낸 눈들이 홀에 떨어졌다.
강현은 털을 고르기 시작하는 설탕을 보며 웃음을 흘렸다.
그리고.
“삼촌!”
가방을 찾아서 뛰어오는 둘.
“미끄러우니깐 뛰지 마!”
“앗, 네!”
“네에.”
걷기 시작하는 둘.
매장 안으로 들어온 둘이 동시에 몸을 떨었다.
“잠시만.”
강현은 주방에서 수건을 가져왔다. 그리고 둘에게 묻은 눈과 물기를 털어 냈다.
“고맙습니다.”
“가, 감사합니다.”
코를 훌쩍이며 인사하는 둘. 강현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우유 데워 줄 테니까 숙제하고 있어.”
“네!”
“네!”
마치 병아리처럼 합창하는 둘을 본 강현은 난방 온도를 높였다.
곧 데워진 우유를 홀짝이며 숙제를 시작하는 둘.
강현도 둘을 보다가 다시 주방으로 향했다.
* * *
일주일 만에 다시 찾은 이세계.
시원하게 불어오는 바람이 따뜻하게 느껴졌다.
그만큼 반대 세상이 춥다는 뜻이었다.
“어때?”
강현의 물음에 설탕이 강현을 힐끗 보았다가 다시 고개를 돌렸다.
담담한 표정.
‘…일주일 동안 제법 친해졌다고 생각했는데. 아직 모르겠네.’
강현은 천천히 주변을 살폈다.
언제나처럼 조용한 숲.
고개를 끄덕인 강현이 설탕을 돌아보았다.
“갈까?”
하지만 설탕은 움직이지 않고 한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설탕아?”
강현은 곧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저 멀리 수풀이 흔들리고 있었다.
‘뭔가 있나?’
바람도 불지 않은데 거세게 흔들리는 수풀.
그리고 흔들림은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설기?’
언뜻 보이는 흰색 털은 설기가 분명했다.
“컹! 컹!”
반가운 울음소리가 들렸다.
그러나 반가움은 잠깐이었다.
우직, 우지직.
나무가 부서지는 소리가 들렸다.
번뜩이는 눈과 격하게 흔들리는 꼬리.
설기가 강현을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도중에 나무나 돌 같은 장해물을 부수면서.
‘너, 너무 빠른데.’
강현을 향해 순식간에 도약하는 설기.
속도는 줄지 않고, 오히려 더 빨라졌다.
순간 강현의 머릿속에 설기와 함께했던 과거가 떠올랐다.
‘이게 주마등이란 건가.’
정신이 아찔해졌다.
그 순간, 옆에 있던 설탕이 움직였다. 날아오는 설기를 향해 몸통 박치기를 한 것이었다.
“깨갱.”
날아오던 것만큼이나 빠르게 튕겨 나가는 설기.
설탕은 거기서 멈추지 않고 설기를 덮쳤다.
“컹!”
두 마리의 새끼 늑대들이 뒤엉켰다.
보기에는 정겨운 광경이었으나, 둘이 움직일 때마다 땅이 파이고 나무가 부서지고 있었다.
강현은 저도 모르게 한 발자국 뒤로 물러났다.
승부는 금방 결정되었다.
“그르릉.”
으르렁거리는 설탕과 엎드려서 눈치를 보는 설기.
설기의 생소한 모습에 강현은 눈을 껌뻑였다.
‘…설탕이 누나였구나.’
둘이 같이 있으니 설탕이 조금 커 보였다.
강현은 설탕을 말리지 않았다.
진심으로 싸우는 게 아니었다.
딱 봐도 동생을 꾸짖는 누나의 모습이었다.
한바탕 훈육의 시간이 끝나고, 기가 죽은 설기가 강현의 곁으로 다가왔다.
“반가워.”
쓴웃음을 흘린 강현이 설기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러자 축, 내려앉았던 꼬리가 다시 일어났다.
하지만 설탕의 눈치를 보고 다시 내려가는 꼬리.
설탕은 그런 강현과 설기를 보더니 몸을 돌렸다.
“가려고?”
강현의 물음에도 대꾸하지 않고 걸음을 옮기는 설탕.
역시나 도도했다.
강현은 그런 설탕을 향해 소리쳤다.
“다음에 또 놀러 와! 맛있는 거 해 줄게!”
그리고 설탕은 수풀 사이로 사라졌다.
수풀을 보던 강현은 웃음을 흘렸다.
마지막에 설탕이 고개를 끄덕이는 걸 봤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조금은 친해진 걸까?’
강현은 설탕에게서 시선을 뗐다.
설탕이 떠나자 다시 표정이 밝아지는 설기.
이리저리 흔들리는 꼬리를 모며 강현은 웃음을 터트렸다.
“그래, 그래. 나도 반가워.”
반가움에 눈을 반짝이는 설기.
강현은 그런 설기의 양쪽 볼을 흔들었다.
복슬복슬한 촉감에 기분이 좋아졌다.
“컹! 컹!”
그러자 설기가 강현을 덮쳤다.
아까와 달리 힘이 빠져 있었다. 그러나 강현을 넘어트리기에는 충분한 힘.
설기가 강현의 얼굴을 핥았다.
좀 성장했을 줄 알았는데 설기는 아직도 아기였다.
설기는 한참이 지난 후에나 진정했다.
강현은 얼굴에 묻은 침을 닦아 내고 설기를 돌아보았다.
“그동안 뭘 한 거야?”
강현의 물음에 설기가 눈을 반짝였다.
그리고 폴짝 뛰더니 강현의 앞에 섰다.
곧 인상을 쓰는 설기.
끙.
‘…꼭 똥 쌀 때 같네.’
자세와 표정이 똑같았다. 그러나 똥을 싸는 건 아니었다.
얼마 뒤.
눈을 반짝이며 강현을 바라보는 설기.
헥, 헥.
지쳤는지 혀를 빼고 있었다.
그리고 흔들리는 꼬리.
‘…뭔가, 한 건가?’
설기는 ‘나 잘했지? 칭찬해 줘’.
그런 눈빛이었다.
강현은 슬쩍 주변을 돌아보았다.
하지만.
‘역시 모르겠어.’
고개를 저은 강현이 웃음을 흘렸다.
그게 뭐가 중요하겠는가.
“그래, 잘했어.”
강현이 설기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뭔지 모르겠지만, 이렇게 자랑할 정도면 고생했다는 뜻이었다.
강현의 손길을 즐기던 설기가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는 강현이 말릴 새도 없이 수풀을 향해 뛰어갔다.
“또 어디를….”
강현은 이미 보이지 않는 설기를 보며 혀를 찼다.
잠시 후 나타난 설기.
설기의 입에는 멧돼지와 닮은 동물이 물려 있었다.
“컹! 컹!”
“…해 달라고?”
위아래로 격렬하게 움직이는 머리.
그 모습을 본 강현이 눈을 가늘게 떴다.
“설기, 너. 내가 반가운 게 아니라 밥이 반가운 거지?”
“끼잉?”
강현의 물음에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이 순진한 표정을 보내는 설기.
강현은 천진난만한 설기의 모습에 실소를 흘렸다.
“그래, 고생했으니 해 줘야지.”
“컹!”
밝은 울음소리.
여전히 설기는 설기였다.
허전했던 것이 채워진 느낌.
강현은 설기를 보며 미소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