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세계 캠핑으로 힐링 라이프-147화 (147/227)

147화 우리만 남았네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보인 건 수북하게 쌓인 눈이었다.

‘그 뒤로도 엄청 왔나 보네.’

강현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텐트 너머로도 보일 정도면 밖은 더 심할 거다.

어제 술을 마실 때도 이 정도는 아니었다.

하얗게 쌓인 눈.

마치 눈 속에 파묻힌 느낌이 들었다.

‘…아니, 파묻힌 게 맞나?’

타프와 텐트 주변만 눈이 없을 뿐, 다른 곳은 눈으로 뒤덮였다.

뒤를 돌자 다른 이들은 아직 자고 있었다.

곤히 자고 있는 상후와 미영이, 그리고 코를 골고 있는 한정우.

설기는 텐트 구석에서 몸을 웅크리고 자고 있었다.

아이들 사이에서 자는 것보단 텐트 구석이 편한 모양이었다.

‘하긴.’

강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 날씨에도 추위를 타지 않으니 문제 될 게 없었다.

그때, 옆에서 무언가가 꼼지락거리는 게 보였다.

토리였다.

이불을 마다하고 난로 옆에 누워 있었다.

강현은 토리가 꼼지락거린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난로의 불씨가 약해지고 있었다.

‘벌써 다 쓴 건가.’

그걸로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유추할 수 있었다.

강현은 아이들이 깨지 않게 난로에 기름을 넣었다.

꿀렁꿀렁.

난로 옆에 있던 토리가 일어나서 눈을 비볐지만, 곧 강현의 얼굴을 확인하고 다시 드러누웠다.

다시 올라오는 불길.

텐트 안에 온기가 돌았다.

토리의 표정이 편해진 걸 보고 강현은 텐트 밖으로 나왔다.

텐트 밖으로 나오자마자 한기가 강현을 맞이했다.

그러나 추위에 느낄 새도 없었다.

새하얀 바다.

설해. 굽이진 산들이 마치 파도치는 바다처럼 보였다.

텐트 안에서는 보이지 않았던 광경.

감탄하던 강현은 뒤늦게 올라온 한기에 몸을 떨었다.

“이럴 때가 아니네.”

강현은 화목 난로 쪽에 가서 장작을 넣었다.

그리고 불을 붙이자 온기가 올라왔다.

불을 쬐면서 멍하니 불을 바라보고 있자 뒤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고개를 돌리자 한정우가 걸어 나오는 게 보였다.

한정우도 놀란 눈으로 주변을 보더니 곧 몸을 떨었다.

후다닥 화목 난로 앞으로 다가오는 한정우.

강현은 웃으며 맞이했다.

“잘 잤어요?”

강현의 물음에 한정우는 씁쓸한 미소로 대답을 대신했다.

“안이 불편했나요?”

“아뇨. 그런 게 아니라….”

고개를 젓는 한정우. 의아해하는 강현을 보며 말을 이었다.

“어르신들이 밤새 놔주시지 않아서.”

“아.”

강현은 사정을 짐작했다. 어제 술자리가 끝나고 화투를 치기 시작했다.

화투를 칠 줄 몰랐던 강현은 당연히 빠졌지만, 한정우는 아니었다.

“늦게까지 했나 보네요. 그럼 좀 더 주무시지.”

한정우가 고개를 저었다.

“괜찮습니다. 어제 낮에 많이 잤어요.”

어르신들과 강현의 배려 덕분이었다.

그리 말한 한정우가 강현을 보며 입을 뗐다.

“커피라도 드실래요?”

한정우의 물음에 강현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부탁드립니다.”

안 그래도 물을 끓이려고 했다. 하지만 강현, 자신이 끓인 것보다는 한정우가 내린 커피가 맛있었다.

둘은 그렇게 난로를 쬐면서 커피를 홀짝였다.

* * *

점심이 되자 일행들이 하나둘 나왔다.

나오자마자 화목 난로 주변으로 모이는 이들. 강현은 아이들까지 모두 나온 걸 확인하고는 텐트 안에 있던 난로도 꺼냈다.

그렇게 난로 두 개가 모이자 더욱 따뜻해졌다.

“이 상태라면 철수는 힘들겠군.”

정기훈 작가가 주변을 돌아보며 말했다. 눈이 조금씩 녹고 있지만, 다 녹으려면 시간이 걸릴 거다.

“놔뒀다가 나중에 가지러 오면 됩니다.”

강현이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어차피 들고 가더라도 따로 말려야 했다. 그럴 바에는 마를 때까지 기다렸다가 회수해도 되었다.

그리고.

“맞지. 마을 뒷산인데. 누가 뭐라 할 거여.”

이장이 떳떳하게 말했다.

‘근처에서 하니 이게 좋네.’

마을 사람이 아니면 누릴 수 없는 혜택이었다.

그때, 이야기를 듣던 한정우가 슬며시 입을 열었다.

“그럼 슬슬 점심이나 먹을까요?”

한정우의 말에 일행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안 그래도 설기의 시선이 점점 부담스러웠던 것이었다.

이야기를 들은 강현과 황대길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렇군. 점심은 뭘로….”

그러나 그런 둘보다 먼저 입을 연 이가 있었다.

“라면 어떠신가요?”

한정우였다. 강현은 한정우의 입에서 라면이란 말이 나올 줄 몰랐기에 눈을 껌뻑였다.

둘의 시선에 한정우가 멋쩍게 웃었다.

“그래도 모처럼 캠핑까지 하러 왔는데, 라면도 한 번쯤은 먹어야 하지 않을까요?”

틀린 말은 아니었다. 일반적으로 생각하면 캠핑의 꽃은 바비큐와 라면이었다.

“저도 라면 먹고 싶어요!”

“저, 저도요.”

한정우의 말이 끝나자마자 상후와 미영이가 말을 보탰다.

그런 아이들을 보자 황대길이 헛기침하며 다시 자리에 앉았다.

하지만 강현은 곤란한 표정으로 볼을 긁적였다.

“라면은 챙기지 않았는데.”

실망하는 아이들. 그러나 그 이야기를 들은 한정우가 미소 지었다.

“제가 챙겼습니다.”

그리고는 가방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익숙한 라면 봉지.

강현이 놀란 눈으로 한정우를 바라보았다.

그러는 사이 이장이 벌떡 일어났다.

“그려. 이런 곳에서 먹는 라면이 또 색다른 맛이지. 줘 봐. 내가 기가 막히게 끓여 줄게.”

한정우는 웃으며 라면을 건넸다.

그리고 그 결정을 후회할 수밖에 없었다.

* * *

‘음…. 한강 물이네.’

이장이 끓인 라면을 본 강현의 감상이었다. 하지만 다른 이들의 표정도 다르지 않았다.

울상을 짓는 아이들.

강현은 볼을 긁적였다. 방해된다고 쫓겨났을 때, 순순히 따랐으면 안 되었다.

‘…이장님은 고기만 잘 굽는 걸로.’

이번 일로 또 하나의 깨달음을 얻었다.

설기 역시 원망의 눈길로 이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방금까지 흔들리던 꼬리는 이미 멈춰 있었다.

일행들의 표정을 보자 당황한 이장이 입을 열었다.

“짜, 짜게 먹으면 몸에 안 좋아.”

일부러 했다는 건가. 그러나 그 말을 믿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어젯밤에 다 졸은 어묵탕을 원샷한 게 이장이었다.

라면은 실패였다.

이제 싱거운 라면을 먹을 수밖에 없었다.

원래라면 말이다.

하지만 이 자리에는 셋이나 요리사가 있었다.

“어찌 살려 봐야겠군.”

“면이 더 불기 전에 손봐야겠네요.”

황대길, 강현, 한정우가 차례대로 국물을 떠먹었다.

다행이라면 아직 면이 꼬들꼬들했다.

면까지 불었으면 힘들었을 거다.

“면은 일단 건져 내야겠어요.”

더 불기 전에 빼놔야 했다.

고개를 끄덕인 황대길이 강현을 돌아보았다.

“혹시 남은 어묵 있나?”

“예. 가져다 드릴게요.”

황대길의 말에 때마침 면을 다 건진 강현이 짐을 뒤졌다.

“전 그럼 남은 고기랑 청양고추로 양념을 만들겠습니다.”

“그래. 내 가방 보면 고춧가루랑 간장이 있을 걸세.”

한정우가 천막을 향해 뛰어갔다.

그 사이 어묵을 건넨 강현은 재료를 꺼냈다.

‘무는 아니야.’

무의 맛이 우러나려면 시간이 필요했다.

파와 양파를 잘게 썰고 볶기 시작했다. 빠르게 재료의 맛을 내려면 볶는 게 제일이기 때문이었다.

고작 삼 분.

라면은 삼 분만에 새로운 요리가 되었다.

국물을 떠먹은 정기훈 작가의 눈이 커졌다.

“얼큰한 게 제대로군.”

“면이 좀 불긴 했지만, 맛있군. 미리 면을 빼놓은 게 정답이었어.”

정기훈 작가에 이어서 이정환도 감탄했다.

그러자 아이들도 안심한 표정으로 젓가락을 들었다.

그리고.

“우와!”

“맛있어.”

호호 불면서 라면을 먹는 아이들.

둘의 감탄에 강현이 미소 지었다.

사람들의 시선이 요리한 셋에게 향했다.

“그래도 이장님이 잘 끓여 주신 덕분입니다.”

“맞네. 뭐든지 기본이 중요하지.”

강현의 말을 황대길이 받았다. 그러자 시무룩하게 있던 이장이 고개를 들었다.

진짜?

그리 묻는 표정으로 셋을 바라보는 이장.

라면이 나왔음에도 젓가락조차 들지 못하고 있었다.

셋이 고개를 끄덕이자 이장의 표정이 환해졌다.

“그, 그렇지. 내가 잘 끓여서 이런 요리가 나온 거여.”

그리 말하고는 라면 국물을 들이켰다.

“크으, 역시 밖에서 먹는 게 제일이여.”

그런 이장을 보며 일행들이 웃음을 터트렸다.

그리고 눈치가 빠른 상후는 바로 이장을 향해 입을 열었다.

“이장 할아버지 최고!”

“최, 최고.”

수줍게 따라 하는 미영이. 그와 함께 웃음소리가 더욱 커졌다.

그렇게 식사 시간이 끝날 때쯤, 멀리서 경적이 들렸다.

일행들은 경적 소리의 주인이 누군지 알아챘다.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되었군.”

김 씨 아저씨였다.

아니나 다를까. 눈 사이로 걸어오는 김 씨 아저씨가 보였다.

그는 오자마자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눈이 많이 와서 차가 못 오겠는데요?”

“가지고 갈 수 있는 것만 챙기세.”

그렇게 일행들은 간단한 장비들만 챙겨서 마을로 돌아왔다.

그리고 마을에서 일행들을 맞이한 건 박 씨 할머니였다.

“또 마을 물건을 멋대로 가져갔지? 애들 노는 곳은 왜 따라가서. 하여튼 주책이야, 주책. 이 인간을 진짜. 오늘은 가만 안 둬.”

박 씨 할머니는 트럭에서 내린 이장의 귀를 잡아당겼다.

그대로 끌려가는 이장.

“자, 잠깐. 갈 때 가더라도 인사는….”

“인사는 무슨. 내가 향 피워 놓고 매일 인사해 줄 테니 걱정하지 마.”

순식간에 사라지는 둘을 보며 일행들은 미소를 흘렸다.

평소와 같은 마을이었다.

* * *

펼쳐 놨던 텐트는 다음 날이 되어서 회수할 수 있었다.

다음 날에 갔을 때는 눈도 녹고 텐트도 빳빳하게 말라 있었다.

그날 이후로 이장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지만, 그 누구도 이장을 언급하지 않았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주말이 되었다.

그러나 강현은 캠핑을 미룰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막상 떠나려니 아쉽네요.”

이른 아침.

매장 앞에 선 한정우가 멋쩍게 웃었다.

원래라면 다음 주에 떠날 예정이었지만, 서울에서 연락이 왔다.

‘대표님도 이렇게 오래 있을 줄은 몰랐겠지.’

오픈이 다가오는데 메인 셰프를 비워둘 순 없었다.

물론, 황대길과 강현의 기준을 통과한 것도 한몫했다. 만일 한정우가 기준에 도달하지 못했다면, 오픈했다고 하더라도 보내지 않았을 거다.

마을 사람들도 한정우를 배웅하기 위해 나와 있었다.

한 달이란 짧은 시간.

그 사이에 정이 든 것이었다.

한정우가 진지한 눈빛으로 사람들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덕분에 편히 있다 갑니다.”

“그려. 언제든지 또 놀러 오고.”

“조심히 가.”

그렇게 마을 사람들과 인사를 나눈 한정우가 강현에게 다가갔다.

“정말 감사합니다. 덕분에 많은 걸 배웠습니다.”

정중히 고개를 숙이는 한정우.

그런 한정우의 모습에 당황하던 강현은 그의 진심을 읽고 고개를 끄덕였다.

“아닙니다. 저도 덕분에 많이 배웠어요.”

커피를 말하는 게 아니었다. 한정우를 가르치면서 강현 역시 자신을 돌아볼 시간을 얻었다.

강현이 손을 뻗었다. 그런 강현의 손을 잡는 한정우.

“다음에 볼 때는 좀 더 편하게 봅시다.”

“예?”

그럼 지금까지는 불편했다는 말인가?

의아해하는 한정우를 향해 강현이 멋쩍어하며 입을 뗐다.

“그때에는 저도 말을 놓도록 노력해 볼게요. 그러니.”

강현의 말을 이해한 한정우의 표정이 밝아졌다.

“예. 강현 형.”

한정우의 대답에 강현이 미소 지었다.

강현도 다른 이에게 먼저 이런 말을 꺼내는 건 처음이었다.

낯간지러웠지만, 나쁜 기분은 아니었다.

그렇게 한정우가 마을을 떠나갔다.

마을 사람들도 한정우의 차가 보이지 않자 하나둘 집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남게 된 강현이 옆을 돌아보았다.

“이제 다시 우리만 남았네.”

“컹!”

씩씩하게 짖는 설기. 설기 머리 위에 있는 토리도 눈을 반짝였다.

이제 정말로 예전으로 돌아온 것이었다.

“그럼, 우리도 가 볼까?”

강현의 말에 설기와 토리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 점심이 되려면 시간이 남았다.

야영은 힘들더라도 당일치기라면 가능했다.

‘그리고 모나도 있으니.’

강현은 미리 싸 놨던 배낭을 짊어졌다.

이제 다시 이세계로 떠날 시간이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