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6화 고맙게 마셔야겠구먼
순식간에 사라진 어묵.
강현은 물을 더 붓고 새로운 어묵을 가져왔다.
일부로 넉넉하게 준비했다.
다시 끓기 시작한 물을 보며 일행들은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눴다.
조금 쉬었는지 다들 표정이 좋아졌다.
그때, 화목난로에서 무언가가 꼼지락거리는 게 보였다.
토리였다.
‘다 쉰 건가?’
피식 웃은 강현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런 강현을 일행들이 바라보자 태연하게 입을 열었다.
“장작 좀 더 넣고 올게요.”
그러자 다들 의심하지 못했다.
화목난로를 열자 열기와 함께 시꺼메진 물체가 튀어나왔다.
몸을 흔들어 잿가루를 털어 내는 토리.
그걸로 부족했는지 땅에다 몸을 비볐다.
그러자 금세 깨끗해졌다.
강현은 그 모습에 눈을 껌뻑였다.
설기는 땅에 몸을 비비면 더러워지는데, 토리는 반대였다.
‘…정령이라 그런가?’
눈이 녹아서 아직 흙이 젖었을 텐데도 잿가루가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그렇게 흙으로 씻은 토리가 강현을 올려다보았다.
“배고파?”
끄덕끄덕.
안에서 놀다 보니 허기가 진 것이었다.
강현의 입가에 부드러운 미소가 걸렸다.
강현은 토리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조금만 기다려. 이것만 넣고.”
강현은 장작을 난로에 넣었다. 차곡차곡 쌓은 후에 난로 문을 닫자 불씨가 커졌다.
강현은 피자 하나를 더 넣고 토리와 함께 자리로 돌아왔다.
때마침 먹기 좋게 익은 어묵.
다시 일행들의 손이 분주해졌다.
그러길 잠시.
이장의 손이 점점 느려졌다.
아쉬운 듯 입맛을 다시는 이장.
입맛에 맞지 않는 건가? 아니면 벌써 배가 부른 건가?
옆에 있던 한정우가 이장을 바라보았지만, 강현은 그 이유를 알고 있었다.
“소주라도 꺼내 드릴까요?”
강현의 말에 이장의 표정이 환해졌다.
“뭔가 부족하다 싶었는데, 그거구먼!”
“제가 가져올게요.”
“아녀.”
대신 일어나려는 한정우를 이장이 만류했다.
“일해야 하는데 소주를 먹으면 쓰나.”
그러더니 천막이 있는 방향으로 갔다. 바닥에 놓인 상자를 열자 막걸리들이 보였다.
“참에는 이거지.”
일하다가 중간에 먹는 식사. 틀린 말은 아니었다.
‘소주나 막걸리나 그게 그거 아닌가.’
둘 다 술이었다. 그러나 이장 나름의 규칙이 있는 모양이었다.
막걸리와 막걸리잔을 들고 온 이장은 희희낙락하며 막걸리의 뚜껑을 땄다.
다른 어르신들의 눈도 반짝였다.
“그렇지. 이런 음식에 술이 빠져선 안 되지.”
“맞네.”
막걸리잔에 막걸리가 차올랐다.
차례대로 잔을 돌리는 이장.
장기훈 작가부터 한정우까지. 그러나 중간에 한 사람이 빠져 있었다.
“이장님, 저는….”
김 씨 아저씨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이장을 보았다.
그 앞에만 술잔이 없기 때문이었다.
“집에 안 갈 거여?”
“아….”
이장의 말을 듣고 정신을 차린 김 씨 아저씨가 트럭을 힐끗거렸다.
“자고 갈 거면 주고.”
막걸리를 들어 올리는 이장.
김 씨 아저씨는 눈을 질끈 감았다.
“…가야죠.”
그런 김 씨 아저씨를 보며 이장이 히죽 웃었다.
“그려, 그려. 뭐든 가정이 제일 중요한 거여.”
누가 봐도 놀리는 모습.
김 씨 아저씨가 한숨을 내쉬었다.
“대신 이거라도 드세요.”
강현은 음료수를 김 씨 아저씨에게 건넸다.
“고마워.”
음료수를 받아든 김 씨 아저씨가 벌컥벌컥 들이켰다.
그 모습에 웃음을 터트린 이장이 잔을 들어 올렸다.
“자, 우리도 한잔혀.”
잔끼리 부딪혔다. 출렁이는 막걸리.
그와 함께 웃음도 피어났다.
* * *
술자리는 길어지지 않았다.
다들 할 일이 있기 때문이었다.
어차피 술 마실 시간은 많았다. 일찌감치 취해서 날릴 생각은 없었다.
식사를 마치고 한정우가 커피를 내렸다. 은은하게 퍼지는 커피 향.
어른들은 커피를 마시며 고개를 끄덕였다.
“음, 괜찮군.”
역시나 한정우의 커피는 호평이었다. 칭찬에 인색한 황대길조차 고개를 끄덕일 정도였다.
‘…요리보다 커피로 인정받는 건 슬프지만.’
그거라도 어디인가. 한정우는 씁쓸하게 웃었다.
그리고 아이들은 눈을 가지고 놀고 있었다.
눈으로 성을 만드는 아이들.
코와 볼이 빨갛게 물들었지만, 개의치 않는 모습이었다.
그래도 한 번씩 와서 불을 쬐고 가니까 감기는 걸리지 않을 거다.
그때, 커피를 비운 김 씨 아저씨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벌써 가시게요?”
“후딱 정리하고 집에 가야지. 나도 마누라랑 한잔하게. 보고만 있으니 감칠맛 나서 안 되겠어.”
그러한 김 씨 아저씨의 말에 다들 몸을 일으켰다.
아직 할 일이 많기 때문이었다.
“저도 도울게요.”
강현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전 여길 정리할게요.”
강현의 말을 들은 한정우가 재빨리 말을 이었다. 다시 들어가긴 싫은 모양이었다.
“저희도 도울게요!”
놀고 있던 상후도 이야기를 들었는지 손을 번쩍 들었다.
“그래도….”
머뭇거리는 이장.
아까와 달리 강하게 거부하진 않았다. 힘든 일은 다 끝났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아이들의 눈빛을 거절하긴 힘들었다.
“빨리 정리하고 저녁 준비하죠.”
강현이 말을 거들자 이장이 못 이기는 척 고개를 끄덕였다.
* * *
천막에 들어갔다.
고작 바람만 막아 줄 뿐인데 그것만으로 따뜻하게 느껴졌다.
‘그래도 잘 정도는 아니지.’
저녁이 되면 더 추워질 거다.
“미영아. 여기 좀 붙잡아 줄래?”
“네!”
강현의 말에 씩씩하게 대답하는 미영이.
강현은 천으로 된 바닥 위에 은박 발포지를 깔았다.
부피가 큰 만큼 냉기도 차단해 줄 거다.
그리고 담요를 깔고 전기장판을 깔면 끝.
위에 이불을 놓으니 금세 후끈후끈 해졌다.
하지만 강현은 걱정스러운 기색으로 주변을 돌아보았다.
“공기는 찰 텐데 괜찮으시겠어요?”
“괜찮어. 어차피 여서 잠만 잘 거여.”
“맞네. 이 정도면 훌륭한 것이지.”
이장의 말에 이정환이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이들도 불만이 없어 보였다.
지금은 각 분야에 정상에 오른 이들이었지만, 그들도 배고프고 힘든 시기가 있었다.
궂은일도 익숙할 거다.
“따끈따끈해요.”
바닥에 앉은 상후가 이불 속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바닥만 보면 강현의 텐트보다 따뜻했다.
‘그럴 수밖에 없지.’
강현은 파워뱅크를 보았다. 가정용에서 쓰는 용이 아니었다.
발전기로 봐도 무방할 정도로 커다란 물건.
마을에서 사용하려고 산 물건이 분명했다.
전기장판 역시 가정에서 쓰는 것이었다. 강현이 가진 장비와는 사용 전력부터가 달랐다.
“너희도 저기가 추우면 여기서 자도 돼.”
자리는 넓었다. 여섯 명도 능히 잘 수 있는 크기.
그러니 인원이 하나 정도 늘어도 문제가 없었다.
“예, 알겠어요.”
상후가 배시시 웃었다.
“그럼, 한 시간 정도만 쉬다가 저녁 준비할게요.”
“저녁은 고기지? 내가 굽겠네.”
황대길이었다.
“아뇨. 제가 해도….”
“아니야. 아까 보고만 있으니 몸이 근지러워서 그러네.”
“나도 돕지. 내가 요리는 못해도 고기 하나는 기가 막히게 꿔.”
이장이 옆에서 말을 보탰다.
다른 둘도 사양하지 말라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 강현도 사양할 수 없었다.
“그럼 부탁드릴게요.”
그렇게 인사를 하고 천막을 나왔다.
그리고는 자신을 멀뚱멀뚱 보고 있는 한정우에게 말했다.
“저희도 좀 쉴까요?”
“예.”
한정우가 기다렸다는 듯이 말했다.
텐트로 돌아가서 몸을 뉘는 둘.
“에구구.”
한정우의 입에서 저절로 앓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일하느라 많이 피곤한 것이었다.
오기 전에도 강현과 같이 먹을 걸 준비하느라 새벽부터 작업했다.
힘든 게 당연했다.
그러니 이 휴식이 더 달콤했다.
“아이들은 정말 대단하네요.”
뜬금없는 말이었지만, 의미를 알아챈 강현은 미소 지었다.
설기와 함께 밖에서 놀고 있는 아이들을 뜻했다.
지치지도 않는 모양.
한정우는 질린다는 듯이 고개를 저었다.
“한창 놀 나이잖아요. 이제 힘든 일은 없으니 좀 느긋하게 있어도 됩니다.”
강현은 등유 난로에 불을 붙였다.
금세 따뜻해지는 안. 밖에서 먹을 때와 달리 텐트 안이라 그대로 온기가 보존되고 있었다.
캠핑이란 게 설치와 철수가 번거로울 뿐이지, 일단 설치가 끝나면 여유롭게 지낼 수 있었다.
그게 아니라면 쉬러 캠핑오는 의미가 없었다.
“…좋네요.”
한정우가 따뜻한 온기를 느끼며 고개를 끄덕였다.
밖에서 내리는 눈이 그대로 보였다.
그리고 얼마 안 지나서 잠이 드는 한정우.
코를 고는 소리가 들려왔다.
강현은 그런 한정우를 힐끗거리고는 눈을 감았다.
* * *
“컹! 컹!”
설기가 짖는 소리에 눈을 떴다.
눈을 뜨자마자 고소한 향과 달콤한 향이 코를 찔렀다.
‘얼마나 잔 거지?’
핸드폰을 열자 한 시간 반이 훌쩍 지나있었다.
옆을 보니 한정우도 아직 잠이 든 상태였다.
밖에서 들려오는 웃음소리.
텐트 밖으로 나가자 어르신들과 아이들이 보였다.
그리고 신나게 꼬리를 흔드는 설기까지.
강현은 그 이유를 짐작할 수 있었다.
화목난로 위에 올려진 냄비.
‘저건 밥이고.’
그리고 강현이 꺼내 놓은 강염 버너. 그 위에는 커다란 솥이 놓여 있었다.
캠핑에서는 볼 수 없는 솥.
달콤한 냄새는 거기서 흘러나오는 것이었다.
‘…갈비찜?’
한정우가 사 온 재료에는 갈비가 없었다.
황대길이 직접 가져온 재료란 뜻이었다.
그리고 옆에 그리들에는 고기가 올려져 있었다.
그뿐만이 아니라 테이블 위에는 나물과 김치들이 올려져 있었다.
그릇만 캠핑용이지.
식당에서 먹는 것처럼 정갈하게 담긴 음식들.
‘설기가 좋아할 만하네.’
불을 보고 있던 황대길이 강현을 발견하고 미소 지었다.
“일어났는가? 슬슬 깨우려고 했는데, 잘 되었군.”
“혼자 하신 거예요? 미리 깨우시지.”
“이 친구들이 도와줘서 어렵지 않았네.”
황대길의 말에 어르신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얻어먹었으면 보답해야지.”
강현은 볼을 긁적였다. 피자와 어묵탕의 보답이라고 보기에는 너무 과했다.
테이블 위에 올려진 음식들을 본 강현이 실소를 흘렸다.
다시 한번 보아도 대단했다.
“이걸로 하기 힘드셨을 텐데.”
“아니네. 이 녀석이 은근히 화력이 좋더군.”
강염 버너를 가리키며 말하는 황대길을 보며 강현도 고개를 끄덕였다.
큰 냄비 요리나 강한 불일 필요한 요리할 때, 기존의 버너로는 힘들어서 새로 산 것이었다.
비싸고 무게도 무겁지만 효과는 확실했다.
“밥 된 거죠? 제가 풀게요.”
“오, 그래 주겠나?”
황대길의 말에 강현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냄비 옆에서 꼬리를 흔들고 있는 설기를 보며 말했다.
“가서 정우 씨 좀 깨워 줄래?”
“컹!”
씩씩하게 짖는 설기.
곧 텐트를 향해 쏜살같이 달려갔다.
그리고.
“으악!”
비명 소리가 들려왔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설기와 함께 나오는 한정우.
고통 때문인지 얼굴이 잔뜩 일그러져 있었다.
강현은 그 모습을 보며 쓴웃음을 흘렸다.
‘내가 깨울 걸 그랬나.’
눈살을 찌푸린 한정우.
그러나 테이블 위를 보더니 강현과 마찬가지로 눈이 휘둥그레졌다.
나오자마자 강현이 푼 밥을 나르는 한정우.
습관처럼 몸이 먼저 반응하는 것이었다.
“와, 캠핑에서 이런 것도 가능하군요.”
밥을 나르던 한정우가 작게 중얼거렸다.
그 소리를 들은 강현이 쓴웃음을 흘렸다.
안된다. 황대길이라서 가능한 일이었다.
할 수는 있어도 그만큼 정성이 필요했다.
“되었군.”
황대길이 솥을 열자 연기가 올라왔다. 그리고 잘 익은 갈비찜.
‘내가 생각한 거랑 느낌이 좀 다른데.’
흔히 생각하는 캠핑 음식이 아니었다.
강현이 볼을 긁적였다.
고개를 돌리자 떨어지는 눈이 보였다.
낮보다 더 많아졌다. 쌓여 가는 눈 사이로 이 자리만이 반짝거리고 있었다.
‘뭐, 상관없겠지.’
지금이 즐거우면 된 것 아닌가.
곧 무언가를 떠올린 강현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잠시만요.”
강현이 들고나오는 걸 본 이들의 눈이 커졌다.
“그건….”
인삼주.
“미영이네 아버님께서 주신 겁니다.”
“그래?”
일행들의 시선이 미영이에게 향했다. 그러한 사실을 모르고 있었는지 눈을 껌뻑이는 미영이.
곧 이장이 웃으며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고맙게 마셔야겠구먼.”
어른들도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서로 오가는 잔.
밤이 깊어질수록 눈발도 거세졌다.
그리고 웃음소리 역시 커졌다.
그렇게 산에서의 밤이 지나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