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4화 고생했어
그날 저녁.
강현은 한가득 짐을 내리는 한정우를 질린 기색으로 바라보았다.
“너무 많이 산 거 아니야?”
“사다 보니깐 이렇게 되더군요.”
한정우의 말에 강현은 쓴웃음을 흘렸다.
‘하긴, 내가 뭐라고 할 처지는 아니지.’
며칠 전에 산 장비들을 떠올렸다.
“남으면 다음 날 먹으면 되죠.”
한정우가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강현도 고개를 끄덕였다. 이런 날씨였다. 쉽게 상하지는 않을 거다.
‘설기도 있으니.’
어떻게든 될 거다.
들떠 보이는 한정우의 모습에 얼마나 기대하고 있는지 짐작이 갔다.
‘실망하지 않으면 좋겠는데.’
강현이 볼을 긁적였다. 겉으로 보이는 것과 달리 과정은 그리 녹록하지 않았다.
강현도 마찬가지지만, 캠핑을 좋아하는 이들은 그 과정까지 좋아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강현처럼 이세계로 넘어가는 것도 아니고 고작 마을 뒷산이었다.
그렇게 다음날이 되었다.
한정우의 차에 짐을 싣고 있자 멀리서 상후가 뛰어왔다.
“삼촌!”
반갑게 손을 흔드는 상후. 등에는 커다란 가방을 메고 있었다.
“무슨 가방이야?”
“놀러 간다니깐 할머니가 고구마랑 이것저것 싸 주셨어요!”
그리 말하고는 배시시 웃었다.
상후에게서 가방을 받아서 열자 반찬통이 보였다.
“김치도 있네.”
강현의 말에 한정우의 눈이 반짝였다.
“마침 필요했는데 잘 되었네요.”
이미 음식은 충분했지만, 기쁜 마음으로 받았다. 상후가 걱정되고 고마운 마음에 싸 준 것이니 거절할 순 없었다.
“감사하다고 전해 드려.”
“예!”
상후는 희희낙락하며 강현의 곁에 섰다. 그리고는 누군가를 찾는지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고개를 갸웃하는 설기.
그러나 강현은 무엇을 찾는지 알아챘다.
“미영이는 아직 안 왔어.”
“그래요?”
“응, 아직 시간이 남았잖아.”
약속한 시각보다 20분이나 일찍 왔다.
그때, 옆에 있던 한정우가 입을 열었다.
“저기 오네요.”
마을에 들어오는 차 한 대.
미영이 아버지의 차였다.
차는 굽이진 길을 지나서 매장 앞에 멈춰 섰다.
곧 창문이 열렸다.
“오랜만입니다, 선생님.”
이제는 익숙해진 호칭에 강현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예. 잘 지내셨어요?”
“저야 잘 지내죠.”
“아, 아빠. 나도.”
“알겠어.”
옆에서 들리는 다급한 외침에 미영이 아버지가 차에서 내렸다.
그리고는 옆문을 열더니 발을 동동 구르는 미영이를 땅에 내려 줬다.
트럭은 턱이 높아서 혼자 내려올 수 없기 때문이었다.
바닥에 내려온 미영이가 강현과 한정우를 향해 꾸벅 숙였다.
“아, 안녕하세요.”
수줍게 웃는 미영이.
강현과 한정우의 눈도 부드럽게 휘었다.
그렇게 인사를 건네고 상후 옆으로 가는 미영이. 떠들기 시작한 둘을 보며 어른들도 고개를 돌렸다.
“선생님, 이거.”
미영이 아버지가 차에서 커다란 가방을 꺼냈다.
한눈에 봐도 묵직한 가방.
“고기랑 과일 좀 싸 왔습니다.”
그러자 강현이 황급히 손을 내저었다.
“아뇨. 괜찮아요.”
“받아 주십시오. 늘 우리 애 챙겨 주시는 게 고마워서 그렇습니다.”
이렇게까지 말하니 강현도 더 거절할 수 없었다.
강현이 가방을 받아 들자 미영이 아버지가 다시 차에 올랐다.
“그럼 미영이를 잘 부탁드립니다.”
“예. 걱정하지 마세요.”
“미영아. 잘 놀고 와.”
“네, 아빠.”
미영이 아버지의 말에 미영이가 수줍게 고개를 끄덕였다.
미영이 아버지는 그런 미영이를 보며 웃은 후 차의 시동을 켰다.
금세 왔던 길로 사라지는 미영이 아버지.
그때, 가방 안을 확인하던 한정우가 눈을 크게 떴다.
“강현 씨.”
고개를 돌리자 한정우가 가방 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고기랑 과일만 넣은 게 아니네.”
커다란 유리병에 담긴 것.
바로 인삼주였다.
다급하게 자리를 빠져나간 이유가 저것 때문이었다.
“어쩌죠?”
한정우가 조심스럽게 물어봤다. 한눈에 봐도 귀해 보이는 술.
그러나 강현이 고개를 내저었다.
“주셨는데 맛있게 마셔야죠.”
돌려준다고 해도 받지 않을 거다. 그런 강현의 말에 한정우의 표정도 밝아졌다.
“덕분에 몸보신 좀 하겠네요.”
한정우는 가방을 차에 실었다.
그걸 마지막으로 짐이 꽉 찼다. 트렁크는 물론이고 뒷좌석 한쪽도 짐으로 꽉 차 있었다.
이제 더 싣고 싶어도 실을 수 없었다.
다행히 상후와 미영이의 몸집이 작아서 타는 데 불편하진 않았다.
“그럼 갈까요?”
“컹!”
강현이 한정우를 돌아보며 말했다.
방금까지 맑던 하늘이 점점 어둡게 변하고 있었다.
금방이라도 눈이 쏟아질 것 같았다.
한정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차에 오르는 둘.
차가 출발하려고 할 때 멀리서 소리가 들렸다.
“기다려!”
익숙한 목소리에 둘의 움직임이 멈췄다.
고개를 돌리자 저 멀리서 달려오는 이가 보였다.
녹색 모자가 금방이라도 떨어질 것처럼 출렁거렸다.
“이장님?”
그렇게 일행들 앞에 다가온 이장은 등을 굽히고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하아, 하. 죽겠네. 죽겠어. 뭐가, 헉. 그리 급하다고, 허억. 아침, 아침부터.”
“괜찮으세요?”
걱정스러운 강현의 물음에 이장이 고개를 들었다.
“안 괜찮어!”
“예?”
갑작스러운 외침에 강현이 눈을 껌뻑였다. 불만이 가득한 모습.
강현은 자신이 무엇을 잘 못 했나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떠오르지 않았다.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어, 그려.”
뒷좌석에 있던 아이들이 이장을 향해 인사를 건넸다. 손을 흔들어 인사를 받은 이장이 강현과 한정우를 노려보았다.
“어찌 그럴 수가 있어? 엉?”
“…저희가 무슨 잘못을 했나요?”
“했지! 날 빼놓고 야유회를 간다며.”
이장의 말에 둘이 눈을 껌뻑였다. 그리고 곧 사정을 짐작할 수 있었다.
“야유회가 아니라 캠핑을….”
“그게 그거지! 밖에서 고기 꿔 먹고 술 먹으면 야유회 아녀!”
비슷한 건가?
순간, 강현도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내가 그짝들을 얼마나 챙겨 줬는데 나만 쏙 빼고.”
이장의 말에 강현이 곤란하다는 듯이 볼을 긁적였다.
그런 강현을 구해 준 건 한정우였다.
“갔다 오는 게 아니라 산속에서 하룻밤 머물 예정이라서요.”
“알어. 텐트란 게 필요한 거지?”
그리 말하고는 뒤를 두리번거리는 이장.
“어, 저기 오네. 빨리 와!”
이장이 뒤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그러자 차량 두 대가 다가왔다.
트럭과 승용차.
둘 다 강현에게 익숙했다. 트럭은 윗집 김 씨 아저씨였고, 승용차는….
“모처럼 놀러 가는데, 방해해서 미안하구먼.”
멋쩍게 웃으며 나오는 이정환.
“방해는 무슨. 노인네들이라고 불러 주지도 않는 게 괘씸한 거지.”
운전석에선 정기훈 작가가 장난스럽게 웃으며 나왔다.
그리고 난감한 표정의 황대길까지.
“어르신들.”
강현이 그들에게 반갑게 인사를 건넸다.
그러자 이장이 트럭 뒤를 두드렸다.
“자, 여기 텐트여.”
트럭 안에 실린 물건을 본 강현이 헛웃음을 흘렸다.
안에 실린 건 마을 회식 때나 쓰던 천막이었다.
천막에 다는 바람막이 비닐도 보였다.
그뿐만이 아니라 낡은 난로와 두툼한 이불까지 실려 있었다.
급조한 것 치고는 만만의 준비한 모습.
운전석에서 내린 김 씨 아저씨가 미안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미안해. 말리려고 했는데.”
강현은 고개를 저었다. 사정은 짐작 갔다.
“철수도 내가 와서 하고 갈 테니. 신경 쓰지 말고 놀아.”
김 씨 아저씨의 말에 강현이 눈을 껌뻑였다.
“같이 있는 게 아니세요?”
설치만 하고 가겠다는 뉘앙스였다. 강현의 물음에 김 씨 아저씨가 쓴웃음을 흘렸다.
“큰일 날 소릴. 마누라한테 등짝 맞을 일 있나. 오늘은 이거 설치하는 일꾼으로 따라가는 거야. 일당도 받는 거니깐 편하게 부려 먹어도 돼.”
김 씨 아저씨가 강현의 어깨를 두드렸다.
“덕분에 용돈도 벌고 좋지.”
빈말이 아닌 듯 김 씨 아저씨는 싱글벙글 웃고 있었다.
“자, 이야기 그만하고 어서 가자고.”
이장이 뒤에서 일행들을 재촉했다.
아까 뭐가 그리 급하냐고 물었던 것과는 다른 모습.
그러나 곧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컹! 컹!”
무언가를 본 설기가 짖었다.
설기를 따라서 시선을 돌린 한정우가 작게 중얼거렸다.
“박 씨 할머니?”
“…!”
삿대질까지 하며 오고 있는 박 씨 할머니를 보자 이장의 표정이 다급해졌다.
“뭣들 혀? 어여 타.”
이장은 이미 트럭에 올라가 있었다. 일행들도 어쩔 수 없이 차에 올랐다.
차에 시동을 건 한정우가 걱정스러운 기색으로 강현을 돌아보았다.
“괜찮을까요?”
“…음.”
강현은 대답하지 못하고 볼을 긁적였다.
잘 들리지 않지만, 중간중간에 센 발음이 느껴졌다.
욕설을 내뱉는 것이었다.
“…이장님께서 알아서 하시겠죠.”
그걸 감안하고 왔을 거다. 그리고 둘이 걱정한다고 해서 해결될 문제도 아니었다.
고개를 끄덕인 한정우가 차를 출발시켰다.
그리고 트럭과 승용차 역시 한정우를 따라오기 시작했다.
* * *
마을을 떠나서 뒷산으로 들어왔다.
길이 사라져서 차가 덜컥, 덜컥 흔들렸다.
자연스레 차의 속도도 줄 수밖에 없었다. 한정우가 창문 너머로 산을 살피며 입을 열었다.
“이거, 자리 찾는 것도 일이겠네요.”
주변을 둘러봐도 텐트를 칠만한 곳은 보이지 않았다.
산 안쪽까지 들어갈 수는 없었다. 산 주변에 적당한 장소를 찾아야 했다.
게다가 벌써 눈이 조금씩 내리고 있었다.
적당한 곳에 자리 잡으려고 했던 예정과 달리 인원이 늘어서 자리 찾기가 힘들어졌다.
‘차라리 이장님과 김 씨 아저씨를 선두에 세웠어야 했나.’
걱정스러운 한정우와 달리 강현은 태연했다.
강현도 뒷산에 온 적이 없는 건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이 자리에 뒷산에 대해서 잘 아는 이가 있었다.
이장이나 김 씨 아저씨보다 더.
창문을 연 강현이 설기를 돌아보았다.
“설기야, 부탁해.”
“컹!”
순식간에 창문을 뛰쳐나가는 설기.
“위험….”
놀라서 소리치려던 한정우는 어느새 차 앞에서 꼬리를 흔들고 있는 설기를 보며 눈을 껌뻑였다.
“컹! 컹!”
조금 걸어가더니 한정우를 향해 다시 짖는 설기.
빨리 따라오지 않고 뭐 하냐고 닦달하고 있었다.
어리둥절해하면서도 차를 출발시키는 한정우.
강현은 그런 한정우 몰래 주머니에서 토리를 꺼냈다.
“길 좀 정리해 줄래?”
강현의 물음에 토리가 고개를 끄덕이더니 창문 너머로 쏙 사라졌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한정우가 고개를 갸웃했다.
차의 흔들림이 적어졌기 때문이었다.
덕분에 운전하기 쉬워졌다.
“어? 누가 길을 만들어 놓은 건가?”
어느새 큰 돌부리들이 사라진 걸 깨달은 한정우가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그리고 강현은 모른 척 시선을 돌렸다.
“컹! 컹!”
멈춰 서서 짖는 설기. 목적지에 도착했다는 것이었다.
차들도 자연스레 멈춰 섰다.
차에서 내린 이들이 감탄했다.
“이야, 이 산에 이런 곳도 있었나?”
김 씨 아저씨였다. 나무로 둘러싸인 공터.
마치 누가 정리라도 한 것처럼 바닥도 고르게 퍼져 있었다.
“여기가 이러지 않았을 텐데?”
이장은 와 본 적이 있는지 고개를 갸웃했다.
그러나 이장의 상념은 오래가지 못했다.
눈발이 점점 많아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일단 천막부터 칩시다.”
김 씨 아저씨의 말에 일행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강현은 설기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의기양양하게 턱을 세우는 설기.
다른 이들 눈에는 보이지 않았지만, 설기 머리 위에 축 늘어진 토리까지.
돌을 치우느라 지친 것이었다.
강현은 둘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간지럽다는 듯이 몸을 비트는 둘.
“고생했어. 이따 맛있는 거 해 줄게.”
고개를 끄덕이는 둘을 보며 강현이 미소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