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6화 설기는 설기였다
맙소사.
강현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리고는 짐들이 떨어진 곳으로 걸어갔다.
수풀 때문에 잘 보이지 않았다.
수풀을 뒤지자 짐 하나가 나왔다.
‘보물찾기도 아니고.’
다행이라면 수풀 덕분에 물건이 상하지 않았다.
떨어진 짐을 하나둘 회수하고 있자 설기가 다가왔다.
“끼잉.”
다가와서 눈치를 보는 설기.
대롱대롱 매달린 가죽 보자기가 애처롭게 보였다.
하지만 강현의 시선은 차갑기만 했다.
눈치 보는 와중에도 입에 문 걸 놓지 않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소나보다 크기도 작고 얼굴도 동글동글했다.
매와 부엉이가 섞인 느낌.
잡힌 정령은 살려 달라고 소리 없는 울음을 토하고 있었다.
하늘을 날 때와는 다른 모습.
“…놔줘.”
강현의 말에 얌전히 정령을 내려놓는 설기.
자신도 잘못했다는 걸 알기 때문이었다.
황급히 날아오는 정령.
“끼이잉.”
여전히 눈치를 보는 설기. 그 모습이 귀여워서 실소가 흘러나왔다.
결국, 한숨을 내쉰 강현이 입을 열었다.
“가서 떨어트린 짐이나 찾아와.”
“컹!”
강현의 말에 혼내지 않을 거라는 걸 깨달았는지 힘차게 짖은 설기가 뛰쳐나갔다.
강현은 볼을 긁적였다.
아직 어리기에 본능을 제어할 줄 모르는 것이었다.
고양이가 쥐를 보면 달려드는 것과 같았다.
그래도 설기 코라면 떨어트린 짐을 찾기 어렵지 않을 거다.
그렇게 다른 짐을 찾으러 걸음을 옮기려는 강현.
곧 옆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벌써 찾았나 싶어서 고개를 돌렸을 때, 수풀 사이로 그림자가 튀어나왔다.
“나쁜 인간아! 소피를 풀어 줘!”
“응?”
갑작스러운 소리에 강현이 눈을 껌뻑였다.
고개를 돌리자 중학생 정도 되어 보이는 소녀가 강현을 노려보고 있었다.
강현은 소녀의 귀를 보지 않았음에도 인간이 아님을 알 수 있었다.
아름다운 외모를 제쳐 두더라도 강현이 아는 누군가와 닮았기 때문이었다.
강현은 소녀가 말하는 소피가 누구인지 알아챘다.
“정령이라면 풀어 줬어.”
“으응? 풀어 줬어?”
“그래, 놀라게 했다면 미안해.”
설기가 한 짓이었지만 대신 사과했다.
그러한 강현의 사과에 소녀가 눈을 껌뻑였다.
자신이 생각했던 반응과는 달랐기 때문이었다.
곧 미심쩍은 눈빛으로 강현을 바라보았다.
“거짓말….”
하지만 소녀가 말을 잇기도 전에 하늘에서 새가 내려왔다.
“소피!”
다급하게 새를 껴안은 소녀. 새도 소녀의 품에서 울음을 토했다.
소녀 역시 새를 부여잡고 울먹였다.
그리고 다시 강현을 바라보는 소녀.
소녀의 표정은 복잡했다.
“…분명 인간들은 거짓말쟁이라고 했는데….”
소녀의 말에 강현이 난감한 미소를 지었다.
그때, 주머니에 있던 토리가 빼꼼 고개를 내밀었다.
“정령…?”
놀란 눈으로 토리를 바라보는 소녀.
순간, 뒤에서 바람이 불어왔다.
펄럭이는 거대한 날개. 소녀가 데리고 있던 새와 다르게 위엄을 뽐내고 있었다.
매는 날아와서 강현의 주변을 한 바퀴 돈 후에 하늘로 날아올랐다.
그리고 매의 정체를 알아본 소녀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이어서 들려오는 목소리.
“아우라.”
단검을 찬 에밀리야가 천천히 걸어오고 있었다.
“에밀리야 님.”
소녀가 주눅 든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소녀를 바라보던 에밀리야가 강현을 향해 살짝 고개를 숙였다.
강현도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숙였다.
오랜만에 만나는 것이었지만, 반가움을 표할 상황이 아니었다.
곧이어서 에밀리야가 엄한 눈빛으로 소녀를 바라보았다.
“아우라, 어째서 당신이 이곳에 있는 거죠?”
“그, 그게….”
“당신의 실력은 인정하지만, 아직 전사가 된 건 아닙니다. 이곳은 당신에게 허락된 땅이 아니에요.”
부드럽지만 차가운 목소리.
강현은 에밀리야가 낯설게 다가왔다. 소녀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툭 치면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트릴 것 같은 소녀.
강현은 그런 소녀가 안쓰러웠지만, 강현이 개입할 문제는 아니었다.
“마을로 어서 돌아가세요. 아우라.”
“…예, 죄송합니다.”
고개를 꾸벅 숙인 소녀가 그대로 걸음을 옮겼다.
어깨 위에 있던 정령이 소녀의 뺨을 쓸며 위로했지만, 큰 효과는 없었다.
그렇게 소녀가 사라지자 에밀리야가 이마를 짚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실례했네요.”
“괜찮습니다. 그보다 저 아이는?”
강현의 물음에 에밀리야가 쓴웃음을 지었다.
“같은 일족의 아이예요. 인간식으로 말하자면 가문이 되겠네요. 어릴 때부터 저를 무척이나 따르더니 이런 짓을 할 줄은 몰랐네요.”
골치가 아프다는 듯이 고개를 흔드는 에밀리야.
그리고는 강현을 보며 웃으며 말했다.
“저리 보여도 강현 씨와 나이가 비슷할 겁니다. 아이란 표현은 적합하지 않을걸요?”
놀란 강현이 숨을 삼켰다.
그랬다. 상대는 인간이 아니었다.
“저야말로 실례했네요.”
머리를 긁적인 강현이 사과하자 에밀리야가 웃음을 터트렸다.
“농담이에요. 저희 요정은 육체적 성장만 느린 게 아니에요.”
정신적인 성장 역시 육체와 비슷했다.
“그러니 저 아이도 아직 어린애죠.”
강현이 아이라고 불러도 이상할 게 없다는 뜻이었다.
무거워진 분위기를 풀기 위해 농담을 건넨 것이었다.
그러나 강현은 에밀리야를 따라서 웃을 수 없었다.
‘…결국 나이가 비슷하다는 말이잖아.’
겉모습을 가지고 사람을 판단하면 안 되지만 자꾸 실수했다.
그러나 쉽게 고칠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런 강현의 기색을 알아챘는지 에밀리야가 입을 열었다.
“오래되었다는 건 그것만으로도 존중받기 마땅하지만, 저희 요정들은 인간이나 난쟁이들처럼 나이를 따지지 않아요.”
싱긋 웃는 에밀리야.
“이렇게 저도 강현 씨와 친구이지 않나요?”
“맞죠.”
강현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째서인지 친구란 말을 강조한 것 같지만, 틀린 소린 아니었다.
“그보다, 여행을 다녀오셨다면서요?”
“아, 예.”
에밀리야의 말에 강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도움을 못 드려서 죄송하네요.”
“아닙니다. 그동안 많이 도움받았는데요.”
그걸로 충분했다. 그러나 에밀리야가 서운한 표정으로 말했다.
“다른 분들과는 대련까지 했다고.”
“….”
아쉬운 건 그 부분이었나.
강현이 쓴웃음을 흘렸다.
“저희도….”
입을 열려던 에밀리야가 고개를 돌렸다.
강현은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수풀 사이로 하얀 털 뭉치가 튀어나왔기 때문이었다.
어떻게 했는지 입에 주렁주렁 짐들을 달고 왔다.
강현은 곧 그 방법을 알 수 있었다.
‘…이빨에 꼈구나.’
설기가 가져온 물건들을 보니 한숨이 나왔다.
선명하게 찍힌 이빨 자국.
몇 개는 이제 쓸 수가 없었다. 차라리 같이 가는 게 나았다.
‘화로도 새로 사야겠네.’
볼을 긁적인 강현이 고개를 돌리자 설기가 해맑게 웃고 있었다.
마치, 나 잘했지?
그렇게 묻는 듯이 귀가 쫑긋 솟아올랐다.
피식 웃은 강현은 설기의 머리를 두드렸다.
설기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한 것이었다. 이를 탓할 순 없었다.
“잘했어.”
“컹! 컹!”
강현의 말에 설기의 꼬리가 흔들렸다.
고개를 돌리자 에밀리야가 강현과 설기를 부드러운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강현은 에밀리야가 아까의 이야기를 꺼내기 전에 먼저 입을 열었다.
“장소를 옮길까요? 선물을 가져와서요.”
손에 들고 있는 가방을 들어 올렸다.
묵직한 가방.
그러자 에밀리야의 눈이 커졌다.
* * *
널찍한 공터로 자리를 옮긴 강현은 커피 포트를 꺼냈다.
“이건?”
에밀리야가 호기심 가득한 눈빛으로 커피 포트를 살폈다.
“얘도 커피를 끓이는 도구예요.”
강현의 말에 에밀리야의 눈빛이 반짝였다.
“저번 것과는 다른 방식이군요!”
“예.”
강현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에밀리야의 시선이 남은 상자들로 향했다.
“저것들은 다른 분들 건가요?”
“예.”
강현이 끄덕이자 에밀리야가 하늘을 바라보았다.
“잠시만요.”
청명한 휘파람 소리. 강현은 그녀가 소나를 부르고 있다는 걸 알아챘다.
얼마 뒤 소나가 날아오는 게 보였다.
강현이 의아하게 바라보자 에밀리야가 웃으며 입을 열었다.
“결계 때문에 마을까진 갈 수 없지만, 숲은 상관없어요.”
그녀의 말에 화들짝 놀란 강현이 토리를 바라보았다.
“결계가 있나요?”
토리는 몇 번이나 성을 오갔다. 강현의 시선에 고개를 갸웃하는 토리.
그런 강현을 안심시키듯 에밀리야가 입을 열었다.
“정식으로 들어가는 건 상관없어요. 의외의 침입이라면 마법이 발동할 거예요.”
정식으로.
즉, 성문을 통해서 들어가는 건 상관없다는 소리였다.
“보기와 달리 제법 튼튼하답니다. 난쟁이들이 지은 성이니깐요.”
“아….”
강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난쟁이.
벌써 몇 번이나 들은 이름이었다.
‘만드는 게 특기인가 보네.’
옛날에 보았던 영화에서도 비슷한 종족이 있었다.
거대한 망치를 들고 다니는 이들.
‘이런 것까지 비슷하구나.’
강현은 짧게 감탄했다.
“따로따로 설명하는 것보단 같이 모였을 때 이야기하는 게 편하겠죠. 노아 씨는 모르겠지만, 란돌프 씨랑 로멘 씨는 숲에 있다고 하더군요.”
누가 이야기해 줬는지는 뻔했다.
때마침 에밀리야의 팔에 내려앉는 소나였다.
그러나 의문도 떠올랐다.
‘소나는 다른 분들께 안 보일 텐데?’
기감으로 무언가 있다는 건 알아챌 수 있지만, 의사소통이 힘들었다.
따로 방법이 있는 건가.
마법도 존재하는 세상이니 있어도 이상할 게 없었다.
그러나 곧 강현은 실소를 흘렸다.
그 방법이란 건 너무나도 간단한 것이기 때문이었다.
에밀리야가 나뭇잎을 꺼내서 위에 글을 적기 시작한 것이었다.
그리고 다 적은 나뭇잎을 통에 넣자 소나가 들고 날아올랐다.
‘…그래, 저게 가장 확실하지.’
서신이었다. 멀리 날아가는 소나를 보며 에밀리야가 싱긋 웃었다.
“소나도 제법 영리하답니다.”
그러자 옆에 있던 설기가 짖었다.
“컹! 컹!”
자신도 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었다.
에밀리야가 살포시 웃으며 설기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래, 너도 있구나. 하지만 오늘은 소나에게 양보해 주렴.”
에밀리야의 말에 설기가 잠시 머뭇거리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강현은 휘둥그레진 눈으로 그런 둘을 바라보았다.
그런 강현의 반응에 에밀리야가 오히려 의아해했다.
“왜 그러시죠?”
“…아뇨. 설기가 저 말고 다른 사람의 손을 허락한 걸 처음 봐서.”
심지어 친해진 이장조차 허락하지 않았다.
‘전에 부탁으로 가만히 있던 적은 있었지만.’
이렇게 순수하게 자신의 의지로 맡긴 건 처음이었다.
그러자 에밀리야가 부드럽게 웃었다.
“저희 요정들은 숲과 동물의 친구인걸요.”
그리 말하는 에밀리야는 정말로 동화 속에 나오는 요정처럼 아름다웠다.
그때, 옆에 있던 설기가 휙 고개를 돌렸다.
“컹! 컹!”
앞발로 휘적거리는 설기.
무언가를 열심히 설명하는 것이었다.
고개를 갸웃하는 에밀리야와 달리 강현은 그 의미를 알았다.
“…요정이라서가 아니라, 에밀리야 씨라서 허락한 거라네요.”
“어머.”
그녀가 놀란 눈으로 설기를 돌아보았다.
“그게 더 기쁘네요.”
환하게 웃는 에밀리야.
강현은 그런 에밀리야를 보며 속으로 쓴웃음을 보았다. 강현이 말하지 않은 것도 있었다.
‘…소나한테 미안해서 이번만 허락했다는 것보단 낫지.’
때로는 진실보다 거짓이 더 아름다울 수 있었다.
의기양양하게 턱을 세우는 설기를 본 강현이 한숨을 내쉬었다.
역시 설기는 설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