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3화 조금 더 분발하라고?
둘의 움직임이 분주해졌다.
서로 다른 음식을 준비하고 있지만, 마치 합을 맞춰 놓은 것처럼 자연스럽게 흘러갔다.
먼저 음식을 끝낸 건 황대길이었다.
황대길은 만든 접시를 가지런히 담아서 테이블로 들고나왔다.
덕분에 신이 난 건 설기였다.
꼬리까지 흔들며 황대길에게 다가갔다.
반짝이는 눈빛에 황대길이 움찔하고 멈춰 섰다.
“…먹고 싶으냐?”
끄덕끄덕.
말을 알아들었는지, 고개를 끄덕이는 설기.
강현이라면 익숙하지만, 황대길에게는 신기한 광경이었다.
“허허.”
헛웃음을 흘리는 황대길.
하지만 쉽사리 나눠 줄 수 없었다. 곤란한 기색으로 주방을 바라보았다.
그때, 마침 요리를 끝낸 강현이 나오고 있었다.
황대길이 걱정하는 게 무엇인지 알아챈 강현이 미소 지었다.
“매운 것도 잘 먹습니다.”
같이 만들진 않았지만, 한 공간에 있었기에 안에 어떤 재료가 들어갔는지 알고 있었다.
강현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황대길이 접시로 손을 뻗었다.
황대길이 만든 건 부리토였다.
멕시코의 대표 요리.
‘동남아에서 이제 멕시코로 넘어가셨구나.’
점점 과감한 시도를 하고 있었다.
부리토를 한입에 넣은 설기의 꼬리가 바쁘게 움직였다.
고개까지 흔드는 설기.
맛이 어땠는지는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피식 웃은 강현이 테이블에 접시를 올렸다.
면을 볶은 것.
흔히 야키소바나 우동을 떠올리겠지만, 황대길은 음식의 정체를 알고 있었다.
“팟씨유인가. 자네도 도전을 좋아하는군.”
태국의 볶음 요리.
강현이 황대길에게 느낀 점을 황대길 역시 강현에게 느꼈다.
강현이 웃으며 입을 열었다.
“예. 센야이가 없어서 쌀국수로 대신해 봤습니다.”
센야이. 태국에서 쓰는 넓은 면을 말했다.
쌀국수로 만들기도 하기에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
달콤한 냄새가 접시 위로 올라왔다. 그러자 부리토를 다 먹은 설기가 고개를 들었다.
“컹! 컹!”
“알고 있어.”
강현은 웃으며 접시 하나를 내려놓았다.
팟씨유가 가득 담긴 접시.
토리가 먹을 것은 주방에 놓았다.
다른 이가 보면 이상하게 볼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테이블 위에 접시가 놓이자 황대길이 고개를 끄덕였다.
“기대되는군. 그럼 먹어 보지.”
고개를 끄덕인 강현이 부리토를 짚었다.
사실 맛은 짐작할 수 있었다.
어떤 속 재료가 들어갔는지 알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게 전부일 리가 없었다.
거기서 무엇을 숨겨 놨는지, 무엇을 놓쳤는지 찾는 게 기대되었다.
그렇게 부리토를 한입 베어 물었다.
토르티야의 담백함이 느껴졌다. 이어서 채소의 싱그러움과 함께 매콤한 고기의 맛이 올라왔다.
‘토르티야는 옥수수로 만든 건가?’
한 입 더 씹자 청양고추 향이 강렬하게 다가왔다.
그리고.
‘콩….’
콩을 넣는 건 강현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식감이 예상과 달랐다.
강현은 곧 그 이유를 알아챌 수 있었다.
강현이 황대길을 돌아보았다.
“알아챘는가?”
“삶은 시간을 다르게 했군요.”
“그렇지.”
황대길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덕분에 맛과 식감이 더 풍성해졌다.
“어떤가?”
“재밌네요.”
강현의 대답에 황대길이 만족스럽게 웃었다.
황대길이 원하는 대답이었다.
“자네는 팟씨유를 한국인의 입맛에 맞췄군. 잡채와 흡사해.”
“예.”
황대길은 강현을 빤히 보더니 미소 지었다.
“놀랍군. 또 바뀌었어.”
“예?”
강현이 눈을 껌뻑였다.
사실 강현의 요리는 황대길이 한 것처럼, 놀랄 만한 요소는 없었다.
그러나 황대길은 고개를 저었다.
“이 요리만을 말하는 게 아니네. 자네의 색채가 또 바뀌었어.”
색채? 강현이 의아해하자 황대길이 웃음을 터트렸다.
“변화는 스스로 깨닫기 힘든 법이지. 중이 제 머리를 못 깍듯이 말이야.”
그리 말한 황대길은 흐뭇한 표정으로 강현을 바라보았다.
“젊음이란 부럽군. 아니, 이번에는 여행 덕분인가? 이번 여행이 자네에게 뜻깊었나 보군.”
황대길의 말에 강현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예, 참으로.”
잊지 못할 추억이 생겼다. 현대에서는 절대로 경험할 수 없는 추억.
강현의 대답에 황대길의 눈이 반짝였다.
“호오, 그 정도인가. 다음에는 나도 따라가고 싶군.”
“저도 그랬으면 좋겠네요.”
강현이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진심이었다.
황대길이 그곳의 음식, 식자재, 재료들을 보고 어떤 영감을 받을지 궁금했다.
하지만 따라오고 싶다고 해도 따라올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이세계에서 다른 이들이 문을 보지 못하듯, 이곳 사람들 역시 마찬가지일 거다.
‘지난번에 삵도 그랬지.’
강현의 말에 황대길이 웃음을 흘렸다.
“이거, 그 때문이라도 빨리 은퇴해야겠어.”
그러나 강현도, 황대길도 쉽지 않다는 걸 잘 알았다.
돈 때문이 아니었다.
황대길은 아직 배우고자 하는 욕구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방송만큼 다양한 요리를 접할 수 있는 기회도 드물지.’
황대길이 방송을 놓지 못하는 이유는 그 때문이었다.
경력이 적은 요리사라고 해도 배울 것이 있으면 배운다.
그런 마음가짐이기에 지금의 자리에 오른 것이었다.
그때, 강현의 시선에 누군가가 들어왔다.
“오셨어요? 말 걸어 주시지.”
“아, 아닙니다.”
당황한 표정으로 고개를 젓는 한정우.
언제부터 왔던 걸까.
한정우의 눈에는 놀란 기색이 가득했다.
“마침 잘 왔군. 자네도 먹어 보게나.”
“아, 감사합니다.”
황대길이 접시를 내밀자 한정우가 황송하다는 듯이 고개를 숙였다.
같이 방송했지만 황대길이 만든 요리를 먹을 기회는 손에 꼽았다.
강현도 팟씨유를 덜어 줬다.
조심스럽게 음식에 손을 가져가는 한정우.
그를 놔두고 강현과 황대길은 다시 이야기를 나눴다.
“자, 어떤가?”
아까와 같은 질문. 그러나 황대길의 눈빛이 달랐다.
강현도 자세를 바로 했다.
“음, 식감이 조금 아쉽네요. 그래서 콩으로 차이를 두려고 했던 것 같은데…. 맞습니까?”
“정확하네.”
“한번 튀겨 보는 건 어떠신가요?”
“타키토 말이지?”
강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타키토는 옥수수 토르티야에 속 재료를 넣고 튀기는 음식이었다.
그러나 황대길이 고개를 저었다.
“안에 기름이 들어가면 맛이 달라지네.”
맞는 말이었다. 강현은 턱을 괴었다.
그렇다고 오븐에 넣으면 채소들이 숨이 죽을 거다.
‘수분이 많아지면 맛도 바뀌겠지.’
안에 속 재료를 추가하는 방식도 있지만, 그러면 크기가 커져서 먹기 힘들어질 거다.
황대길이 그걸 생각하지 않았을 리가 없었다.
그때, 강현의 머릿속에 무언가가 떠올랐다.
“…혹시, 토치를 이용해 보는 건 어떻습니까?”
겉만 익혀서 바삭함을 추가할 수 있었다.
강현의 말에 황대길의 눈이 커졌다.
“거기까진 생각하지 못했군. 가능성이 있겠어.”
고개를 끄덕이는 황대길.
둘의 대화는 그 뒤로도 이어졌다.
황대길의 요리뿐만 아니라 강현의 요리까지.
“조화를 생각해서 이리 만든 것 같은데. 조화도 괜찮지만, 자칫하면 밋밋하게 보일 수 있다네.”
“메인 재료를 좀 더 드러내라는 말씀이시죠?”
“그렇지.”
그렇게 한참을 이야기한 후에 황대길의 시선이 한정우에게 향했다.
“자네는 어떤가?”
“예? 예?”
자신에게 화살이 날아올 줄 몰랐던 한정우가 화들짝 놀랐다.
그는 둘의 대화를 넋을 놓고 듣고 있었을 뿐이었다.
“마, 맛있습니다. 두 분 다 대단하신 실력입니다.”
한정우로서는 둘의 대화를 따라갈 수 없었다.
그러자 황대길이 못마땅한 듯 한정우를 바라보았다.
“이걸 만들 수 있겠냐는 질문이네.”
“예?”
한정우가 눈을 껌뻑였다. 그러자 한숨을 내쉰 황대길이 다시 한번 한정우를 일깨워 줬다.
황대길이 빈 접시들을 가리켰다.
“이것들이 자네가 만들 요리라네.”
“…예?”
뒤늦게 그 의미를 깨달은 한정우의 얼굴이 하얗게 질려 갔다.
그러나 한정우가 사실을 받아들일 시간은 없었다.
“컹! 컹!”
갑작스러운 소리에 일행들의 시선이 설기에게 향했다.
덩그러니 놓인 빈 접시.
설기가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한정우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미 테이블 위에 남은 음식이 없었다.
‘아차, 한 사람이 더 있었구나.’
강현이 볼을 긁적였다.
미처 배려하지 못했다. 당연히 누군가의 몫이 줄어들 수밖에 없었다.
한정우는 설기의 시선에 당혹스러워했다.
‘강아지 눈빛이 무슨….’
사나웠다. 호기심에 찾아갔던 할렘가. 그곳에서 만난 사내들을 떠올렸다.
물론, 그리 좋은 추억은 아니었다.
지갑뿐만 아니라 시계와 신발마저 털리고 도망치듯 나왔기 때문이었다.
잊고 싶지만, 잊을 수 없는 기억 중 하나였다.
“마침 잘 되었군. 자네의 솜씨도 한번 봐야지.”
황대길이 입을 열었다.
그러자 한정우의 시선이 황대길에게 향했다.
“자신 있는 걸로 내오게.”
“지, 지금 말입니까?”
“컹!”
한정우가 머뭇거리자 설기가 짖었다. 화들짝 놀란 한정우가 몸을 일으켰다.
그런 한정우에게 모이는 시선들.
한정우는 어쩔 수 없이 주방으로 걸음을 옮겼다.
‘…여기서 요리하라고?’
방금 둘의 대화를 듣고서?
게다가 한정우는 황대길에 대해서 잘 알고 있었다.
촬영 때도 그의 비평을 몇 번이나 들었다.
주방으로 향하는 한정우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그리고 결과는 예상과 다르지 않았다.
황대길과 강현의 비평이 화살이 되어 한정우를 너덜너덜하게 만들었다.
매장 밖으로 나와서 한숨을 내쉬는 한정우.
그때, 작은 그림자 하나가 다가왔다.
텁.
무릎 위에 올라온 하얀 발.
고개를 돌리자 설기가 있었다.
“컹!”
눈이 마주치자 고개를 한 번 끄덕이고 짖더니 다시 매장으로 들어갔다.
한정우는 신기하게도 그 의미를 이해할 수 있었다.
“…나쁘지 않았으니 조금 더 분발하라고?”
“컹!”
매장 안에서 대답이 돌아왔다.
그렇게 한정우의 시골 생활이 시작되었다.
* * *
한정우가 오고 사흘이 지났다.
하지만 한정우의 적응이 되지 않았다.
본능적으로 주머니를 뒤지던 한정우는 한숨을 내쉬었다.
어제 담배를 버렸기 때문이었다.
미국 CIA로 유학 가면서 끊었던 담배였지만, 최근에 다시 피기 시작했다.
담배도 없이 버티기는 힘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다가 어제 황대길에게 걸려서 호되게 혼났다.
요리사가 담배를 피우다니 제정신이냐고.
덕분에 정신이 들었다.
‘나도 해이해졌어.’
한정우는 힐끗 매장을 보았다.
대낮임에도 매장 문이 닫혀 있었다.
휴일이었다.
강현은 어제 매장을 닫자마자 거대한 배낭과 짐을 챙기더니 어디론가 떠났다.
캠핑.
한정우는 강현에게 그러한 취미가 있는지 처음 알았다.
그런 강현을 떠올린 한정우는 한숨을 내쉬었다.
이강현.
매스컴이 만든 천재 셰프.
선배들이나 동료들은 강현이 운이 좋아서 그 자리에 올랐다고 말했다.
‘다 개소리지.’
그런 말을 떠드는 이들 중에 황대길과 동등한 위치에서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이는 없었다.
황대길이 누구인가?
대쪽 같은 인물이다. 그런 그가 강현에게 조언을 구하고 있었다.
첫날의 충격은 아직도 잊을 수가 없었다.
그것만으로 강현의 실력은 증명이 된 것이었다.
하지만 그와 별개로 한정우가 본 강현은 이상한 이였다.
아니, 강현뿐만이 아니었다. 이 매장 자체가 이상했다.
키우는 강아지를 사람처럼 대하는 건 괜찮다.
요즘은 강아지를 자식처럼 키우는 집도 많기 때문이었다.
강아지가 조금 많이 먹고, 맵거나 뜨거운 것도 거리낌 없이 먹는다? 그럴 수 있다고 본다.
하지만….
‘허공에 이야기하는 건 좀….’
혼잣말이 아니었다. 어딘가를 명확하게 응시하고 있었다.
기이한 건 그뿐만이 아니었다.
가끔 양념이나 그릇들이 제멋대로 움직일 때가 있었다.
그때 얼마나 놀랐던가.
애써 외면하려고 하고 있지만 쉽지 않았다.
더 놀라운 건 강현은 그런 사실을 알고 있다는 것이었다.
오히려 달래듯 말을 건다.
‘그럼 안 돼. 하지 마.’
이렇게.
그럼 신기하게도 움직이던 그릇이 멈춘다.
그 모습을 떠올린 한정우가 몸을 떨었다.